[民山되짚기(8)] 김진억 전 민주산악회 사무처장˝300만 민산, 전세계에서 가장 큰 산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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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民山되짚기(8)] 김진억 전 민주산악회 사무처장˝300만 민산, 전세계에서 가장 큰 산악회˝
  • 윤종희 기자
  • 승인 2011.08.26 15: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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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간 민산 살림 꾸린 산증인 ˝YS는 뒷얘기 안해˝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윤종희 기자]

1981년 6월 9일 발족한 민주산악회(민산)는 1984년 출범한 민추협과 공동투쟁체제를 갖추고 5공 정권에 대항해 나갔다. 민산 초창기에는 산행대장과 총무가 조직을 이끌었다. 특히 총무는 조직의 실무를 관장하는 중요한 자리로 초대 총무는 김병환이, 2대 총무는 박정태가, 3대 총무는 김진억이 맡았다.

3대 총무 김진억은 2대 총무인 박정태가 당 선전국장에 임명됨에 따라 1986년 3대 총무로 발탁됐다. 이후 그는 1992년 대선 직전까지 만 7년간 민산 살림을 꾸렸다.

이 기간 동안 민산 체제는 2차례 확대개편 됐고 '총무' 명칭은 '사무국장', '사무처장'으로 바뀌었다. 따라서 김진억의 마지막 민산 직함은 '민주산악회 본부 사무처장'이었다.

민산의 산증인인 김진억 전 사무처장으로부터  얘기를 들어봤다. 그는 "민산은 300만 회원을 가진 전세계에서 가장 큰 산악회였다"며 자부심을 드러냈다. 인터뷰는 2011년 8월 25일 서울 마포구 성산동 <시사오늘> 사무실에서 진행됐다.
 

▲ 김진억 전 민주산악회 사무처장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김영삼(YS) 전 대통령을 처음 만나게 된 계기는 무엇입니까.

"1971년 7대 대선이 끝난 뒤에 신민당에 입당했습니다. 저는 충북 제천·단양 지구당 위원장을 맡았습니다. 처음부터 YS계보에서 활동했습니다. 친구들과 주변에 계신분들의 권유도 있고 해서 신민당에 들어간 거지요. 그 때 YS는 젊었고 잘 생겼습니다. 신문이나 잡지에서도 유명했습니다."

김진억 전 사무처장은 강원도 영월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실제로 성장한 지역은 충북이었다. 그래서 신민당  충북 제천·단양 지구당 위원장을 맡게 된 것이다.

-신민당에 입당할 당시 상황은 어떠했습니까.

"앞서 김대중(DJ) 전 대통령이 신민당 대선후보가 됐지만 대선(7대)에서 박정희에게 졌어요. 또 '유진산 파동'을 비롯해 신민당이 둘로 쪼개지는 상황에 처하는 등 야당이 단합이 안되고 약해졌어요. 민주화 투쟁이 제대로 될 수 없었던 것이죠. 그래서 박정희 정권이 야당 세력을 우습게 봤는지 '유신'이 나오고 그랬어요. 그러다 74년 YS가 당 총재 선거에 출마해 당선됐고 그러면서 단일 지도체제가 만들어져 강력한 총재 힘을 발휘, 유신정권에 도전하게 됩니다. 민주화 투쟁이 세력화 되는 시점입니다."

"YS 제명은 차지철 등 공화당 강경파가 박정희 부추긴 듯"

-YS가 국회의원직에서 제명된 사건에 대해 설명해 주십시요.

"YS가 1979년 10월에 박정희 정권에 의해 국회의원에서 제명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어 10·26 사건이 터집니다. 그런데 그 때 공화당에서 차지철 등 강경파가 득세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들 강경파가 박정희에게 YS 제명을 부추긴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박정희가 정치적 부담에도 불구하고 의원직 제명이라는 강수를 둔 것 같습니다."

-초산 테러사건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십시요.

"초산 사건은 (박정희 정권의) 김형욱 정보부장 때 일어난 것입니다. 그 때 YS 차를 운전했던 사람이 김영수 입니다. 지금 76세입니다. 방금도 저와 통화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그 내용을 잘 알죠. YS가 차를 타고 상도동 집 방향으로 코너를 돌 때 앞에 사람들 셋이서 장난을 치고 있더라는 겁니다. 작은 사람이 큰 사람을 때리고 있더랍니다. YS의 호기심을 발동 시켜 차에서 내리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YS는 내리지 않았습니다. 또 YS와 김영수는 항상 차 문을 잠그고 다녔다고 합니다. 그래서 테러범들이 차문을 확 잡아 당겼지만 열리지 않았고 차 뒤에서 초산통을 던졌는데 유리가 깨지지 않았습니다. 그 때 초산이 묻은 부분에 구멍이 날 정도였다고 합니다."

-YH 여공들의 신민당사 농성 때 경찰들의 폭력이 난무했다면서요.

"YS가 신민당 총재를 할 때입니다. 마포 당사에서 YH 여공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 때 경찰 특공대가 테러를 해서 저희들이 많이 다쳤습니다. 저희들이 YS를 모시고 있는데 경찰특공대가 들어와서 폭행을 가했고 YS만 폭행을 안 당했습니다. 그러나 경찰들은 YS를 강제로 끌어냈습니다."

-1987년 6월 민주화운동 당시 YS가 직접 시위에 참가했지요.

"YS는 데모할 때 앞장을 잘 섰습니다. 저희들은 마스크를 하고 했는데 YS는 마스크도 안하고 했습니다. 그런데 경찰들이 YS를 닭장차에 밀어 넣어서 다른 곳에 내려놓기도 했습니다."

"YS, 민산 조직에 특별한 지시 안 내려"

 

▲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민산 총무직을 수행하는 동안 조직이 엄청난 규모로 확대됐습니다. 특별한 비법이 있었나요.

 

 

"김덕룡 비서실장 등과 민산 조직에 대해 자주 상의했습니다. 모임체를 확장하는 차원에서 총무 체제를 사무국장 체제로, 나중에는 사무처장 체제로 바꾸었습니다. 또 지방에 있는 동지들에게 좋은 사람을 추천해달라고 요청했고 그러면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훌륭한 정치지망생들도 많이 조직에 들어왔습니다. 무엇보다 그 당시 민주화에 대한 열의가 강해서 전국적으로 사람들이 많이 모였습니다."

-민주산악회 노래도 있었다면서요.

"이우태가 민주산악회 노래를 작사했고 이우태 딸이 작곡을 했습니다. 민주화를 위해 희생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내용으로 경건하면서도 힘이 있었습니다. 이우태는 나중에 민주산악회 헌장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김 전 사무처장은 "초대 산행대장은 정채권 목사인데 이 분이 목회자이어서 개척교회를 하러 떠났다. 2대 산행대장은 홍사일 이었고 3대 산행대장은 이우태였다"라고 덧붙였다.

-YS가 민산 조직과 관련해 지시를 내리기도 했나요.

"YS는 민산 조직과 관련해 특별한 지시 같은 것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조직이라는게 인간 관계에 따라 형성되는 것인 만큼 그런 점을 잘 해야 한다'고 말하는 정도였습니다."

-초대 총무 김병환이 '선경'의 이사로 간 것과 관련해 5공 정권의 공작 의혹이 제기되기도 합니다.

"초대 총무였던 김병환이 선경으로 간 것은 취직이 돼서 간 것으로 그렇게 생각합니다. 일부에서는 김병환이 혹시나 배반을 한 게 아니냐고 의심하는데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1983년 YS의 단식 후 범야권 결집 움직임이 일었고 5공 정권의 와해공작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이 무렵 김병환이 민산을 떠났기 때문에 여러 소문이 있었다.

-혹시 YS가 김병환에 대해 안좋은 말을 한 적이 있나요.

"김병환이 상도동 비서도 했는데…, YS가 그런 얘기를 하지도 안했고 할 분도 아닙니다. YS는 개인에 대한 욕같은 것은 잘 안합니다. 대범하고 작은 일에 소소한 얘기를 하지 않는게 장점입니다. 제가 한번은 YS를 만나 '누가 이렇더라' 하고 얘기하니 YS가 '난 그런 건 모른다'면서 바로 말을 끊어버렸습니다. 그런 분입니다."

"YS, 다른 사람에 대한 뒷얘기 절대 안해"

-민산 활동과 관련해 지금 바로 생각나는 게 있습니까.

"외신에 우리나라 정치와 관련된 내용이 나오면 그걸 번역해서 밤새도록 인쇄물로 만들어 총무인 제가 '어디어디에 모여라' 하고 연락을 해 유인물을 나눠줍니다. 그러면 열성적인 회원들은 그 걸 다시 복사해서 가슴과 등에 숨기고 다니면서 관악산이나 시장바닥, 버스 등에서 배포했습니다. 그러다가 경찰서에서 구류 생활을 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민주산악회 20~30개 조에 인쇄물을 나눠줬고 지방에도 보내줬습니다."

-그 때 외신을 번역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외신을 번역한 사람으로는 박종웅 전 의원과 최기선 전 인천시장 등이 지금 기억됩니다. 다른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1992년 대선 때 민산이 어떻게 YS를 지원했습니까.

"우리는 정당이라는 제도권에서 벗어나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오랫동안 쌓인 투쟁정신과 함께 물불을 가리지 않는 열의가 있었습니다. 정신무장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결집된 힘이 거대한 벽을 무너뜨릴 수 있었습니다.  YS가 선거유세를 하면 민주산악회 지부 간부들이 모두 모여서 박수치고 연호를 했습니다. 그렇게 바람을 일으켰습니다."

"민산 해체, 총체적으로 옳았다고 봐"
 
-YS가 집권 후에 민산을 해체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민산 시작은 동지들끼리의 규합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조직적으로 커졌는데 저희는 폭력을 쓰지 않고 무저항주의로 했고, 정치적 목적이 있었던 게 아닙니다. 그런데 집권자 옆에 사조직이 있으면 그 것이 국정운영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아 해체한 것 같습니다. 그 전에 전두환 정권 때 하나회 등의 폐단이 있었습니다. YS가 스스로 민산을 해체했는데 회원들 개인적으로는 불만들이 있겠지만 총체적으로 봤을 때 사조직 없이 하는게 정당하다고 봅니다. 고생한 사람들은 아쉽겠지만 크게 보면 해체하는게 옳다고 봅니다. 결과적으로 YS 집권 기간 동안 아무 탈이 없었지 않습니까."

-민산 해체에 아쉬움을 품고 재건하려고 했다는 얘기도 들리던데요.

"나중에 민산을 재건하자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정치운동이 아닌 사회운동이나 농촌운동, 복지운동으로 하자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YS정권 때 환경운동으로 승화시키자며 박정태 등과 환경연합회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뜻은 서로 간에 맞았지만 전국적인 조직화가 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확실한 리더십을 발휘할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YS의 3당 합당에 대한 비판이 있습니다.

"저는 YS의 3당 합당을 지지한 사람입니다. YS와 DJ가 무한 경쟁을 했다면 두 사람 모두 대통령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YS가 판단해서 3당 합당을 했는데, 결과적으로 대통령이 됐습니다. 그리고 DJ도 대통령이 됐습니다. 두 사람이 대통령이 됐으니 좋은일 아닙니까."

"3당 합당 안했으면 YS·DJ 모두 대통령 못 됐을 것"

-3당 합당 이후에 YS는 어떻게 민산 활동에 참여했나요.

 

▲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3당 합당 이후에는 YS가 별도로 측근들 10여명과 등산을 했습니다. 3당 합당 이후 매우 바빴기 때문입니다. 저도 이 산행에 동행했는데 YS가 재미있는 얘기를 많이 했습니다. 러시아 고르바초프 얘기와 학창시절 씨름 얘기 등 웃기는 얘기를 잘했습니다."

 

-YS가 집권 후 전두환·노태우 대통령을 감옥에 보낸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솔직히 우리는 군사정권 시절 마음대로 행동한 사람들이 한번쯤은 혼이 나야 한다는 마음은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독한 마음은 없었습니다."

-YS 집권시절 IMF가 터졌습니다.

"IMF, 그 당시에 외환을 너무 많이 풀어준 것 같습니다. 또 단자회사를 너무 많이 만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여행과 관련해 외화 소지 등을 너무 풀었습니다. 사람들의 씀씀이가 커졌습니다. 이런게 모여서 IMF가 터졌다고 봅니다. 그런데 그 양반(YS)은 돈을 헤프게 쓰는 사람이 절대 아닙니다."

-YS는 정권재창출을 못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 점을 아쉬워합니다.

"1997년 대선 당시 이회창은 이인제를 포용했어야 합니다. 특히, YS와의 관계를 유지했어야 합니다. 그 때 YS가 임기말이었지만 여전히 절대적 지지세력이 있었습니다. 이회창은 그 것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YS의 업적은 무엇입니까.

"첫 민간정부로 출발해 특별한 과오 없이 임기를 마쳤습니다. 과거 군사정부 폐단을 없애고 금융실명제를 실시하는 등 민주사회에서 공명정대하고 열린 정치에 앞장섰습니다."

-차기 대선과 관련해 YS가 발언을 해야한다고 보십니까.

"YS는 보수·우파 스타일입니다. YS가 포괄적인 부분에 대해서 얘기를 해야 한다고 봅니다. 가령 지금 이념적 대립이 첨예한 데 그런 부분에 대해서 한 말씀 하는 게 좋다고 봅니다. 그러나 중언부언 하거나 자주 말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또 YS가 지금 이 시점에서 차기 대선과 관련해 '누구가 좋다, 나쁘다'라는 얘기는 절대 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년 대선 때도 하지 않을 것으로 봅니다. 잔재주를 부리거나 잔소리를 하는 스타일이 아닙니다. 심중에 갖고 계시지 함부로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정치적 분석이나 판단을 아주 잘합니다. 감을 아주 잘 잡습니다. 정치 9단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국가가 어떻게 흘러갈 것인가를 알지만 특별히 염려가 되지 않는다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YS가 흐름을 이끌 수 있는 힘을 아직까지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함부로 얘기하지 않는 분입니다."

"YS, 차기대선에서 특정인 지명할 가능성 적어"

-민산이 향후 정치권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요.

"이제 우리가 70~80세인데 무슨 힘이 있습니까. 지금 장래를 기약할 만한 이슈도 없고 우리 뿌리 중에 특별한 리더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동지적 입장에서 몇번씩 모이는 것입니다."

-민산은 무엇인지 정의를 내려주십시요.

"정확히는 제가 만 7년을 민주산악회 총무를 맡았습니다. 우리는 전두환 정권 시절에 모여서 산행을 하며 건강도 챙기고 단결하며 조직을 확대했습니다. 군사독재에 항거할 수 있는 기구가 돼서 투쟁한 것입니다. 민주화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노력을 했습니다. 우리가 돈 받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결과적으로 민주항쟁으로 헌법을 개정하고 민주화 토착화에 압장섰습니다. 전세계에서 스스로 만들어진 산악회 가운데 민주산악회가 가장 큰 산악회입니다. 300만 회원을 가졌으니까요. 민주화에 공헌한 것은 맞습니다."

-DJ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DJ와 민추협을 같이 했고 세배도 드리고 했습니다. 제가 정치적으로 '나쁘다 좋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좀 그렇습니다. 다만 DJ보다는 YS가 모든 면에서 좋아서 저는 YS계가 된 것입니다.  지금 제가 민주화추진협의회 부회장을 맡고 있는데 동교동계는 사람들 앞에서 YS를 욕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상도동계도 DJ를 욕하지 않습니다. 그게 불문률입니다."

-서청원이 민산 회보로 필화를 겪었다면서요.
"서청원은 민한당 출신인데 국회의원 하다가 나중에 선거에서 떨어져서 민주산악회에 와서 '자유의 종' 편집위원장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일과 관련해서 남대문 경찰서에서 5일간 구류 생활을 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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