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대학교] 4·19 혁명 시발점 된 그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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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4·19 혁명 시발점 된 그 곳
  • 정진호 기자
  • 승인 2019.09.05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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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8일 시위 후 정치 깡패에 습격…4·19 혁명 촉발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정진호 기자]

4·18을 통해 4·19 혁명을 촉발한 고려대학교는 매년 4·18 구국대장정이라는 행사를 통해 이날을 기리고 있다. ⓒ시사오늘
4·18 시위를 통해 4·19 혁명을 촉발한 고려대학교는 매년 4·18 구국대장정이라는 행사를 통해 이날을 기리고 있다. ⓒ시사오늘

1956년 5월 15일, 대한민국 제3대 대통령 선거. ‘사사오입 개헌’을 하면서까지 3선에 대한 의지를 드러냈던 자유당 이승만 후보는 70.0%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다시 한 번 대통령 자리를 지켜낸다.

그러나 승패와는 별개로, 이 선거 결과는 이승만에게 큰 충격을 안겼다. 유력 후보였던 민주당 신익희 후보가 유세 기간 중 사망하는 사건이 있었음에도, 무소속으로 나선 조봉암 후보에게 30.0%의 득표율을 허용하며 민심의 이반(離叛)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무효표 비율이 전체 투표수의 20%를 넘겼을 정도로, 국민의 마음은 이승만을 떠나 있다는 사실이 여실히 드러났다.

이러자 자유당 정권은 선거가 끝나자마자 4년 후 있을 제4대 대선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여기서 말하는 ‘준비’란, 부정(不正)한 방법을 포함한 모든 방안을 총동원해 이승만을 4선 대통령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당시 내무부장관이던 최인규는 직접 서울·인천·대전·춘천·대구·광주·부산 등지를 순회하면서 공무원들에게 자유당 후보 당선을 위해 노력할 것을 지시하기도 했다.

“어떠한 비합법적인 비상수단을 사용하여서라도 이승만 박사와 이기붕 선생이 꼭 당선되도록 하라. 세계역사상 대통령선거에 소송이 제기된 일이 있느냐? 법은 나중이니 우선 당선시켜 놓고 보아야 한다. 콩밥을 먹어도 내가 먹고 징역을 가도 내가 간다. 국가대업 수행을 위하여 지시하는 것이니 군수 서장들은 시키는 대로만 하라.”

그 결과, 1960년 3월 15일 열린 제4대 대선은 대한민국 역사상 최악의 부정선거로 역사에 기록된다. 3·15 선거에서 자유당 정권은 투표장에서 3명 또는 5명씩 짝을 지어 기표하고 자유당원에게 ‘검사’를 받게 했으며, 자유당 후보에게 기표한 표를 미리 투표함에 넣어두는 등의 방법까지 동원했다. 민주당 후보를 지지하는 사람을 위협하는 자유당 ‘완장부대’까지 존재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3·15 정·부통령 선거 당일, 부정행위가 목격되자 마산시민들은 시위를 시작했다 ⓒ 4·19혁명 기념도서관
3·15 정·부통령 선거 당일, 부정행위가 목격되자 마산시민들은 시위를 시작했다 ⓒ4·19혁명 기념도서관

무자비한 폭력이 난무하는 가운데, 제4대 대통령과 제5대 부통령을 뽑는 3·15 정·부통령 선거의 날은 밝아 이날 아침 7시를 기해 전국 각 투표구에서는 일제히 국민들의 권리가 행사되었다. 전례 없이 온갖 살상 행위 속에서 선량한 국민들을 위압하고 공포 속으로 몰아넣는 등 선거사상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공포 선거’의 분위기가 조성되었던 이번 선거는 끝내 우리나라 민주선거사상 그 오점이 점철될 선거의 역사를 남기게 되었다.
국민들의 자유로운 권리를 억압하고 빼앗는 등 무서운 폭력 속에서 시작된 이날의 선거가 전국 각 투표구에서 투표가 일제히 시작되자 야당 입후보자의 투표소 참관인이 괴한들에 의해 축출당하고 또 테러를 당하고, 투표하러 간 유권자가 테러를 당하는 등 예기했던 대로의 무서운 유혈참극이 그대로 속출하고 있으며, 심지어 일부 지방에서는 민주당 측의 투표소 참관인이 축출당하고 테러를 당하는 사실로 인해 선거 포기를 선언하는 등 비참한 사실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유권자에게 번호표를 주지 않아 투표권의 행사를 방해하고, 신성한 주권이 행사되는 날 무수한 무장경찰관을 동원하여 마치 계엄령 하를 방불케 하는 등 ‘공포선거’가 이루어진 이번 선거는 그야말로 엉망진창이다.
1960년 3월 16일 <동아일보> ‘엉망진창 된 주권행사’

이뿐만 아니라, 마산에서는 투표가 시작되기도 전에 투표함 속에서 자유당 후보인 이승만·이기붕이 찍힌 투표용지가 발견되는 일이 벌어졌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민주당원들은 물론 마산시민들이 시청 앞에 모여들었다. 그리고 시위대가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나는 모습을 본 경찰들은, 시민들을 향해 총알을 발사했다.

54명의 사상자를 낸 3·15 마산 소요사건은 사건이 발생한 당일 자정 안으로 완전 진압되어 16일 아침부터 다시 원상회복되었다. 그러나 마산의 거리는 아직도 싸늘한 찬바람이 가시지 않고 있다. 이날 아침부터 아들과 딸을 찾는 사람들이 거리를 헤매고 있었으며, 병원에 입원 중인 환자 가족들은 상오 7시 현재까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중성동 차외과에 안치된 시체는 이날 밤 경찰에서 인수해갔다고 하는데, 총 사망자 수는 입원 후 절명한 1명을 포함하여 현재까지 7명에 달하고 있으나, 3개 병원에 분산 중인 중태 환자 23명 중 흉부와 복부 심장을 관통 당한 5~6명이 위독 상태에 있는 사실을 병원 측에서 밝히고 있어 사망자 수는 증가될 것이 확실시 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대부분 학생들이며 당초 그들이 데모에 가담하기 직전부터 명찰과 신분증을 뜯어버린 관계로 그 신분은 이날 현재까지 밝혀지지 않고 있어 가족들이 나타나야만 그 신원이 판명될 것이다.
1960년 3월 17일 <동아일보> ‘아직도 찬바람 감도는 마산’

그로부터 한 달여가 지난 4월 11일.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 시신 한 구가 떠올랐다. 눈에 최루탄이 박힌, 참혹한 모습을 한 중학생 김주열 군의 시신이었다. 3월 15일 시위 당시 행방불명됐던 김주열 군이 싸늘한 주검으로 되돌아오자, 시민들은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거리로 뛰쳐나왔다. 학생들이 앞장서 시가행진을 벌였고, 시민들도 하나둘 합류했다. 4·19혁명의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11일 밤 6시 반부터 마산시엔 미증유의 중대사태가 발생하였다. 이날 상오 제1차 데모 당시 행방불명이 된 소년 시체가 발견됨으로써 흥분된 3000여 시민이 하오 2시경 마산도립병원에 집결, 시체를 인도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거절되자 하오 6시 15분부터 일대 데모를 개시, “시체를 내노라”, “살인선거 물리치자”는 구호를 외치는 수만의 군중은 마침내 도처에서 관공서를 파괴하기 시작하였다.
1960년 4월 12일 <동아일보> ‘마산서 11일 밤 또 소요’

4월 18일부터는 잠잠하던 대학생들이 들고 일어나기 시작했다. 사진은 국회의사당 앞에 모인 고려대학교 학생들과 시민들의 모습. ⓒ4·19혁명 기념도서관
4월 18일부터는 잠잠하던 대학생들이 들고 일어나기 시작했다. 사진은 국회의사당 앞에 모인 고려대학교 학생들과 시민들의 모습. ⓒ4·19혁명 기념도서관

한편 이 소식은 서울에도 전해졌다. 특히 김주열 군 사건은 대학생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대학생 시위의 선두에 선 것은 고려대학교였다. 고려대 학생 3000여 명은 4월 18일 ‘인촌 동상 앞으로!’라는 신호에 맞춰 ‘민주역적 몰아내자’라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국회의사당(現 서울시의회 공관) 앞까지 행진하며 재선거 실시를 요구했다.

행진을 끝낸 고려대 학생들은 국회의사당 앞에서 당시 고려대 총장이던 유진오 박사, 민주당 소속이던 이철승 의원 등과 면담한 후 일단 학교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사태를 증폭시키는 일이 발생한다. 학생들이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학교로 복귀하던 도중, 정치 깡패들에게 습격을 당해 수십 명의 학생들이 부상을 당한 것이다.

‘마산학생 즉시석방’과 ‘삼일(3·1)정신으로 민주정치 이룩하자’고 외치면서 행정부 책임자가 나올 때까지 농성투쟁을 결의한 1000여 고대 학생과 3000여 명의 다른 대학 및 중고등학생들은 하오 6시 35분경 누차에 걸친 유 총장의 훈시에 이어 고대 선배이며 민주당 의원인 이철승 씨가 “내일의 투쟁을 기약하고 이제는 학교로 돌아가자”고 부탁, 학생들은 박수와 환호 속에 애국가와 교가를 부른 다음에 학교를 향했는데 약 3만 명의 시민들이 시청 앞에서부터 합류하며 뒤따라갔다. 그러나 내무부 앞과 을지로4가를 통과, 종로4가에 이를 무렵 어둠 속의 양편 길가에서 돌연 100여 깡패들이 손에 벽돌과 부삽, 몽둥이, 쇠뭉치, 깔꿀이 등을 들고 뛰어나와 선두학생들을 마구 후려갈겨 머리에서 피가 솟아나는 10여 명의 학생들은 현장에서 쓰러지고 일부 기자마저 폭행당하여 수라장을 이룩, 질서와 평화적이던 데모는 드디어 유혈의 참극을 빚어내며 “깡패여 나오라!”고 고함치는 학생들은 차츰 폭력적 반격태세를 갖추기도 했다. 그러나 수십 명의 부상자에도 불구하고 데모대는 동대문, 신설동, 안암동을 거쳐 고대 교정에 집결, 밤 8시40분경 애국가와 교가 합창을 끝으로 일단 해산하였다.
1960년 4월 19일 <동아일보> ‘고대 데모대 깡패단 습격으로 유혈소동’

이 사건의 정확한 내막은 밝혀진 것이 없다. 이정재의 행동대장이었던 김태련은 후일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고려대 학생들과의 충돌은 깡패들이 경찰 지시로 3·15 선거 지지 시위를 하던 도중 벌어진 우발적 사건”이라고 회고(回顧)했지만, 현장에서 사건을 지켜본 사람들은 ‘계획적’이라고 주장하는 등 진술이 엇갈린다.

최근 고려대는 조국 법무부장관 후보자 딸의 입학과 관련한 진실을 밝히라며 촛불시위를 펼치고 있다. ⓒ시사오늘
최근 고려대는 조국 법무부장관 후보자 딸의 입학과 관련한 진실을 밝히라며 촛불시위를 펼치고 있다. ⓒ시사오늘

하지만 이 일이 낳은 파장은 확실했다. 당시만 해도 ‘사회적 엘리트’로 대접받았던 대학생들이 깡패들에게 폭행당해 나뒹구는 사진은 시민들을 격분(激憤)하게 했다. 그리고 다음 날, 시민들은 너나할 것 없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고려대 학생들의 시위가 4·19혁명이 전국적으로 퍼져나가는 원동력을 제공한 셈이다. 지금도 고려대 서울캠퍼스에는 4·18 기념비와 4·18 기념관이 존재하며, 매년 4·18 구국대장정이라는 행사를 통해 이날을 기리고 있다.

한편, 최근 고려대는 다시 한 번 정부에 대한 ‘저항’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조국 법무부장관 후보자 딸 조모 씨의 입시특혜 의혹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촛불집회가 열리면서다. 고려대는 8월 23일과 30일 이미 두 차례 집회를 개최했으며, 9월 6일에도 3차 촛불집회를 열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담당업무 : 국회 및 국민의힘 출입합니다.
좌우명 : 인생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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