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텔링] ‘우리 총수가 달라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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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텔링] ‘우리 총수가 달라졌어요’
  • 박근홍 기자
  • 승인 2019.09.23 17: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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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이재용, 해외출장·현장경영 지속
SK 최태원, 사회적가치 이어 위기론 강조
LG 구광모, 조직문화 쇄신·공격수 변신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박근홍 기자]

SBS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는 종영된 지 4년이 지났음에도 많은 시청자들에게 여전히 회자되는 프로그램입니다. 잘못된 생활습관과 버릇을 가진 아이들의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해당 가정에 평안과 행복을 주고, 비슷한 문제로 고민에 빠진 시청자들에게는 육아 해법을 제시해 많은 사랑을 받았는데요. 요즘 국내 재계가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마치 이 프로그램의 한 에피소드를 보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일명 '우리 총수가 달라졌어요'입니다.

그간 우리나라 재벌 대기업 오너일가들은 국민들의 수많은 지탄을 받아 왔습니다. 일본제국주의, 군사독재정권에 빌붙어 쌓아 올린 자산을 활용해 오늘날까지 부를 독식하고 정경유착으로 자본권력을 창출, 전 세계에서 희귀한 재벌이라는 체제를 구축해 이를 대물림까지 하는 끝없는 탐욕을 부렸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에서 폭행·폭언, 갑질, 마약, 성매매 등 사회적 이슈의 중심에 서면서 국민적 공분을 사기도 했습니다. 급진적 경제발전을 위한 대기업 육성정책이었으나 부작용이 너무 컸습니다. 한국사회의 '문제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주요 대기업 총수들을 중심으로 조금씩 변화가 엿보입니다. 세대교체 이후 물려받은 부와 권력, 사회적 지위를 악용해 철부지처럼 조직과 사회에 혼란을 야기했던 총수들이 조직의 수장으로, 사회의 어른으로 거듭나는 모양새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 등입니다.

'침묵의 리더십'은 재벌 3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오명 중 하나입니다. 사업 현장은 물론, 주주총회나 중요 회의에도 얼굴을 비추지 않고 그림자 뒤에서 조용히 회사를 경영한다고 해서 붙은 별명인데요. 올해 들어 이 부회장은 이 같은 별명이 무색하게 강도 높은 현장경영을 펼치고 있습니다. 지난 1월 경기 수원공장 가동식, 경기 용인 기흥사업장 회의, 지난 2월 중국 시안 반도체 공장, 지난 6월 경기 화성사업장, 수원공장, 기흥사업장, 지난달 충남 아산사업장 등 일일이 나열하기도 버거울 정도입니다. 특히 지난 15일에는 삼성물산이 시공을 맡은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 지하철 현장을 방문해 눈길을 끌었는데요. 이 부회장이 해외 건설현장을 찾은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또한 한일 무역분쟁 국면에서는 국내 재계를 대표하는 기업인으로서 존재감을 과시했습니다. 이 부회장은 일본 정부의 화이트리스트 배제 문제가 터지자 즉각 5박 6일 간 일본 출장길에 올랐고, 귀국해서는 반도체 생산 공정에서 일본산 소재를 제외하는 탈일본 생산 원칙을 수립해 일선현장에 지시했습니다. 또한 지난 20일에는 일본 재계 측 초청을 받아 도쿄스타디움 귀빈석에서 일본 정재계 핵심 인사들과 함께 럭비월드컵을 관람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 부회장이 강수를 던지자 일본 정재계가 먼저 손을 내민 것이라는 분석이 나옵니다. 문재인 정부의 대일 정책에 대한 비판여론이 형성되고 있는 가운데 이 부회장의 이 같은 행보는 많은 국민들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업계에서는 이 부회장의 현장경영 확대가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건 관련 재판에서 유리한 고지를 확보하기 위한 여론전이라는 해석이 주를 이룹니다. 실제로 대법원은 비록 이 부회장에게 유리하게 적용된 2심을 파기환송했지만 법정형이 가장 높은 재산국외도피죄를 무죄로 확정해 집행유예 여지를 줬으며, 이후 여론도 조국 정국에 따른 문재인 정부에 대한 국민 불신이 심화되면서 이 부회장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분위기인데요. 논란이 됐던 경영권 승계 문제까지 희석되는 눈치입니다. 아울러, 이 부회장이 파기환송심에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자신의 부재 시 경영전략을 현장경영을 통해 각 일선현장에 제시하는 것이라는 분석도 나옵니다. 이유야 어쨌든 이 부회장이 과거와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재벌 2세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얼마 전 방미길에서 위기론을 제시해 눈길을 끌었습니다. 최 회장은 지난 19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SK사무소에서 열린 'SK 나이트' 행사에서 취재진들을 만나 "회장으로 일한 지난 20년 간 요즘처럼 이렇게까지 지정학적 위험이 사업을 흔드는 걸 본 적이 없다"며 "(지정학적 위험이) 앞으로 30년은 더 갈 것이다. 이게 새로운 세상으로 가는 것이라면 단순하게 끝날 것 같지 않다. 여기에 적응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중동 드론 테러, 미중 무역분쟁, 한일 무역분쟁 등 지정학적 위험으로 경영활동 불확실성이 가중되고 있으며, 이에 대한 해법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사회적가치, 행복론 설파에 이어 위기론을 강조한 건데요. 최 회장이 위기론을 꺼낸 건 이번뿐만이 아닙니다. 그는 지난해 말 반도체 위기론이 대두되자 오히려 SK하이닉스에 20조 원 규모 투자를 단행하며 "우리의 땀과 노력을 쏟아 새로운 성장 신화를 써 달라"고 임직원들을 독려했고, 지난 5월에는 인공지능 전략토론 자리에서 "기존 성공 방식을 고수하면 성공을 보장하기 힘들다. 위기의식을 갖고 차별화를 이뤄야 한다"고 언급하며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뒤처지지 않도록 변화에 순응할 것을 주문한 바 있습니다. 또한 지난 7월 일본 경제보복 위기 속에서는 문재인 정부가 극일을 앞세우자 "국산 불화수소는 순도 면에서 품질이 떨어진다"며 맞서기도 했습니다.

이를 살펴보면 최 회장은 국내 재계가 어려움을 겪을 때, 경영환경이 악화일로일 때 경제인들을 대변하듯 위기론을 제시했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요. 세대교체로 자신보다 어린 재벌 3·4세 총수들이 전면에 선 요즘, 재벌 2세로서 맏형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고 풀이되는 대목입니다. 맏형으로서 기업들에게 시급한 현안을 제시하고, 나아가 국가경제에 기여하기 위한 담론을 이끌어 내는 겁니다. 1998년 4대그룹 오너 중 최연소로 총수 자리에 오른 후 분식회계, 횡령·배임으로 두 차례 옥살이를 했던 과거를 청산하고 새롭게 태어난 모양새입니다. 최 회장의 긍정적인 변화의 배경에는 그가 스스로 말했듯, 동거인 김희영 티앤씨(T&C)재단 이사장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요. 도덕성 여부는 별론으로 하고 사랑이 사람을 만든 셈입니다.

재벌 4세 구광모 LG그룹 회장은 앞서 두 총수들이 한일 무역분쟁 등 여러 국면에서 존재감을 과시했던 것과는 달리, 지난해 회장 취임 이후 상대적으로 조용한 행보를 보였습니다. 불혹을 갓 넘긴 구 회장은 국내 재계에서 가장 어린 총수로, 故 구본무 회장의 갑작스런 별세로 거대한 재벌 대기업을 이끌게 된 그를 바라보는 안팎 시선은 그리 탐탁지 않았습니다. 그가 내세운 탈권위와 실용주의라는 경영철학도 실리는 챙기지 못하는 허울만 좋은 구호라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습니다. 지난 6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한국 기업인들과의 간담회에서 구 회장이 불참한 게 대표적인 사례로 거론됐습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180도 달라진 모습입니다. 구 회장은 그룹에서 원로원 역할을 하는 6인의 부회장단 중 5명을 취임 첫 해 인사에서 모두 유임시켰으나, 올해에는 연말 인사철을 불과 3달 가량 앞둔 시점에서 한상범 LG디스플레이 부회장을 전격 교체했습니다. 대대적인 세대교체와 강도 높은 인사를 단행하기에 앞서 사전 경고 조치를 한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LG디스플레이는 정호영 사장이 사령탑에 앉은 이후 고강도 구조조정 작업에 착수한 상황입니다. 취임 후 1년 간은 가급적 기존 체계를 유지하고 관망했으나, 주요 계열사 대부분이 실적악화로 고전하는 등 만족할 만한 성과를 내지 못하면서 구 회장이 본격적으로 조직문화 쇄신과 체질 개선에 나선 것이라는 평가가 나옵니다.

지난 1년 간 숨겨왔던 잔뜩 날 선 발톱은 회사 바깥에도 드리웠습니다. LG화학이 SK이노베이션을 상대로 전기차 배터리 기술유출 관련 영업비밀 침해로 제소한 데 이어, LG전자가 삼성전자의 8K TV 제품은 가짜라며 거센 공세를 펼친 겁니다. 인화의 LG가 공격수로 변모했다는 말까지 들리는데요. 업계에서는 그룹 고위층의 의지가 계열사의 이 같은 행보에 반영됐을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 주를 이룹니다. 급변하는 경영환경 가운데 미래 경쟁력을 확보하지 않으면 도태될 것이라는 위기의식을 젊은 총수 구 회장이 절감했다는 겁니다. 구 회장은 오는 24일 회장 취임 후 처음으로 사장단 워크숍을 주재할 예정입니다. 이 자리에서 그는 구광모만의 생존 전략을 사장단에게 피력할 것으로 보입니다.

P.S. - 비판을 받았던 총수들이 달라진 원인은 뭘까요. 각기 다른 이유와 배경들이 있겠지만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국민들이 달라졌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라는 프로그램은 방영 당시 '우리 부모가 달라졌어요'라는 제목으로 불렸습니다. 부모들의 잘못된 양육법과 그릇된 양육 태도로 인해 아이들이 문제점을 드러낸 사례가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재벌 대기업은 국민의 노력과 피와 땀을 바탕으로 한 국가주도 압축성장 아래 탄생했습니다. 재벌 대기업의 부모는 국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우리나라는 반기업정서가 팽배한 국가, 부모가 자식을 손가락질하는 나라가 됐습니다. 자본권력을 독식하고 대물림하며 법 위에 선 재벌, 기득권을 쥐고 흔들며 사회를 조롱한 오너일가들이 스스로 자초한 일이지만, 부모가 제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 영향도 크다고 판단됩니다.

먹고사는 어려움, 팍팍해지는 살림살이 등을 핑계로 자식들의 어긋난 행동을 목격하고도 이를 바로잡으려 노력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욕과 잔소리를 해대고, 애써 무시하기에만 급급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밥은 꼬박꼬박 잘 챙겨 먹인 것 같네요. 이 같은 방관 속에서 자란 자식들은 어느새 부모의 키를 훌쩍 넘을 정도로 커버렸고, 산만한 덩치로 부모에게 위협을 가하며 돈과 먹을 걸 달라는 진짜 문제아가 돼 버렸습니다. 조기에 적절한 조치가 있었다면 부모에게 주먹을 들이대거나 땅콩을 뜯어달라고 떼를 쓰진 않았을 텐데 말이지요. 그러나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건, 땅콩회항 사건 등을 계기로 늦게나마 부모들은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고, 재벌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점차 높아지고 있습니다. 자식들의 문제행동이 우리사회에 전반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이지요.

재벌은 분명 문제가 많은 존재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제성장과 경제구조에 있어 암적인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단순히 재벌이라는 이유로 적폐로 규정하고, 척결·타도하는 단계는 이미 지났다는 생각입니다. 어쩌면 필요악을 넘어 필수 불가결한 상태가 돼 버렸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렇다고 재벌개혁의 필요성이 없어졌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문제는 무관심입니다. 아무리 먹고살기 바빠도 때로는 사랑의 회초리를 들고, 때로는 애정을 듬뿍 담은 칭찬을 하는 등 지속적으로 관심을 보인다면 재벌개혁이라는 어려운 과제도 점진적으로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 총수가 달라졌어요'의 후속편 '우리 재벌이 달라졌어요'가 방송되길 기대해 봅니다. 그전에 '우리 국민이 달라졌어요'가 먼저 편성돼야 겠지요.

담당업무 : 건설·부동산을 중심으로 산업계 전반을 담당합니다
좌우명 : 隨緣無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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