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 격발史] ‘유신의 심장’ 누가 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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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 격발史] ‘유신의 심장’ 누가 쐈나?
  • 한설희 기자
  • 승인 2019.09.28 15:37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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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에서 비롯된 장전·시민 격발… 김재규 재평가 시점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한설희 기자]

부마항쟁이 당긴 ‘유신의 종말’ 방아쇠는, 그 이전의 장전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유신의 심장을 저격할 수 있었다. 정계 관계자들은 1979년 30일, 신민당 전당대회에서의 'YS 역전승(逆轉勝)'이 유신 정권의 몰락을 부추기는 ‘장전’의 역할을 했다고 분석한다. ⓒ시사오늘 그래픽=김유종
부마항쟁이 당긴 ‘유신의 종말’ 방아쇠는, 그 이전의 장전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유신의 심장을 저격할 수 있었다. 정계 관계자들은 1979년 30일, 신민당 전당대회에서의 'YS 역전승(逆轉勝)'이 유신 정권의 몰락을 부추기는 ‘장전’의 역할을 했다고 분석한다. ⓒ시사오늘 그래픽=김유종

1979년 10월의 어느 날… 그때 그 사람들

과거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을 결성하는 등 ‘6월 항쟁의 주역’으로 꼽히는 더불어민주당 유기홍 전 의원. 유 의원은 지난 8월 기자와 만나 ‘10월의 어느 날’ 기억을 더듬었다.

“예, 그날 저녁이었지요. 친구들과 북한산인가, 도봉산인가로 놀러 갔어요. 이상했어요. 그날따라 왜 그렇게 기분이 좋았는지, 술을 엄청 많이 마셨습니다. 근처 후배네 집에서 자고, 다음날 아침에 지하철을 탔죠. 숙취 때문에 선로에다 구토하고, 꼴이 말이 아니었어요. 앞의 누군가 신문을 읽고 있었는데, 신문 바탕 위에 큼지막하고 시커먼 글자로 ‘박정희 대통령 유고’라고 쓰여 있는 거예요. 순간, 유고? 유고가 뭐지……?”

시계태엽을 조금만 더 앞으로 감아보자.

1979년 10월 16일 무렵. 박정희 정권에서 상공부 차관보로 일하던 김동규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섬뜩한 경험을 하나 하게 된다.

종친회 중에서도 유독 유대관계가 끈끈하다는 금녕 김씨(金寧金氏) 종친회. 이 종친회 부회장을 맡았던 김동규는 그날 저녁 한 일식당에서 그의 종친이자 정권의 핵(核), 중앙정보부장 직함을 단 남자를 만났다. 단 둘이 식사를 하던 도중 남자가 입을 열었다.

“두고 보세요. 제가 역사 앞에 큰일을 할 생각입니다. 이대로 두면 나라가 어찌될지 모릅니다.”

마주친 그의 눈빛은 형형했다. 순간 김동규의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이 사람, 곧 무슨 일을 저질러도 저지르겠구나.’

이는 세월이 흘러 2009년 김동규가 세상을 떠나기 전, 〈시사오늘〉 관계자에게 남긴 전언(傳言)이다.

남자의 이름은 김재규, ‘10·26 사태’의 주모자였다. 그로부터 10일여가 지난 10월 26일 밤 7시 40분 경,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가(安家)에선 몇 발의 총소리가 울렸다. 역사적 그날,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유신체제도 막을 내렸다.

10·26은 계획됐다

고(故) 김동규 전 의원이 본지에게 들려준 이야기의 요지는, 김재규가 단순 우발적 감정으로 박정희를 살인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김 전 의원은 “10·26 사태는 계획됐다”고 확언했으며, 나아가 김재규는 체제 전환을 꿈꿨던 양심범(良心犯)이라고 보고 있었다.

이에 대해 ‘김재규의 국선 변호인’으로 잘 알려진 안동일 변호사는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10·26 사건의 역사적 재판을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하면서, 2005년 〈10·26은 아직도 살아있다〉, 2017년 〈나는 김재규의 변호인이었다〉를 펴낸 안 변호사는 지난 9월 23일 기자와 만나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맞는 얘기에요. 거사(巨事)에 대한 생각은 있었던 것 같아요. 더군다나 김재규와 장준하 선생과의 친밀 관계를 보면 더 믿음이 가는 얘기지요.”

군사 정권 아래 ‘재야의 대통령’으로 남았던 반(反)독재 운동가 장준하 선생. 그는 유신체제 반대운동을 기획하던 중 1975년 8월 17일, 56세의 나이로 의문사를 당했다. 경찰 당국이 ‘유일한 목격자’라는 김용환의 증언을 토대로 밝혀낸 사인(死因)은 단순 실족사(失足死). 산악회 회원 40여 명과 포천 약사봉에 올라갔다가 일행과 떨어져 하산하던 중 높이 12m 정도의 벼랑 아래에서 떨어져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의문점만 남긴 채 종결된 수사로 인해, 장준하 기념사업회를 필두로 김영삼(YS) 전 대통령과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여사가 상임고문을 맡은 ‘암살의혹규명 국민대책위’가 발족하는 등, ‘장준하 사망사건’은 후세에 논란의 여지를 남겼다.

장준하의 장남 장호권 씨는 지난 2012년 9월 본지와의 인터뷰를 통해 “박정희와 장준하는 당대 천적 관계였다”며 그의 죽음 배후에 박정희 정권의 실력(實力) 행사가 있었음을 시사한 바 있다.

“박정희 시절 정보부장을 지낸 김형욱이 ‘박정희와 장준하는 정적이 아닌 천적 관계’라고 했답니다. (중략) 장준하 선생이 ‘대한민국에서 누구나 대통령이 될 수 있지만 한 놈은 안 되는데 그게 바로 박정희다. 내 민족적 자존심이 허락 안 한다’라고 말하기도 했어요.”

안 변호사는 ‘박정희의 천적’인 장준하와 가깝게 지낸 김재규의 언행(言行)을 통해, 평소 그의 유신정권에 대한 비판적 사고를 엿볼 수 있었다고 말한다.

“김재규가 6사단장을 할 적에 장준하를 여러 모로 도와준 적도 있었고, 장준하가 직접 그의 장남 장호권에게 ‘앞으로 큰일할 사람은 김재규 장군이다’라고 얘기할 정도로 (둘은) 가까웠다고 합니다. 김재규 처형 날짜(1980년 5월 24일)를 기념해 추도식이 열리는데, 이때도 장호권이 와서 추모사를 할 정도니까요. 그런 얘길 들으면 (10·26 사태에) 김재규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깔려있었고, 그가 민주화에 도움을 주려고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지요.” -안동일 변호사, 23일 본지와의 대담

한편 박정희의 측근이었던 김종필 전 총리(JP)는 10·26 사태와 김재규에 대해 “발작증 살인자가 법정에서 민주화 투사로 둔갑됐을 뿐”이라며 반대 의견을 제기하고 있다. JP는 그의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그 즈음 박 대통령은 김재규를 경질하려 했다. 김영삼과 신민당에 대한 정보부의 정치공작이 계속 실패했기 때문이다. 김재규도 그런 공기를 눈치챘다. 부마사태를 잘 처리해 공기를 한 번 바꿔보려 했는데, 차지철이 사사건건 방해하고 있다는 피해의식에 젖어 있었다. (중략) 김재규는 살인 망동 한 달여 뒤 자기가 무슨 한국의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처음부터 계획적인 혁명을 일으켰다고 주장했는데, 주변 사람들이 부추기는 바람에 스스로 속아 꾸민 얘기일 뿐이다.

-김종필, 〈김종필 증언록:JP가 말하는 대한민국 현대사〉, 30~32쪽

김재규가 차지철과의 다툼 끝에 이날 만찬에서 술을 마시고 우발적으로 박정희를 살인했다는 주장이다.

이에 대해 안 변호사는 “김재규의 증언이기는 하지만 많은 정황증거가 나온 바 있다”며 조목조목 반박했다.

“1972년, 유신 선포 당시 3군단장이었던 김재규는 ‘아무리 한국적 민주주의라지만 이건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다’라고 이미 생각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김재규는 대통령의 부대방문 시에 담판을 지으려고 했어요. 통상 바깥쪽을 향하는 철조망을, 안으로 향하게 미리 설치해서 박정희를 나가지 못하게 하고 읍소하려고 했다는 말입니다. 그 외에도 건설부장관 시절, 게양된 태극기가 늘어뜨려진 곳에 권총을 숨기는 등 박정희를 저격하려고 마음먹었던 시도가 이미 수차례 있었다고 했습니다. 또한 그의 휘호(揮毫)들을 보면, 유독 1979년 봄부터 ‘자유민주주의’, ‘민주민권 자유평등’ 등의 문장을 쓰기 시작합니다. 이를 통해 변호인들이 10·26이 김재규가 가진 민주주의 신념에 의한 행동이었다고 판단한 것이지요. 또한 결정적으로 김재규가 사선변호인단을 처음 만났을 때의 녹음테이프를 들어보면, 거기서부터 이미 김재규는 혁명이라고 강조하고 있어요.”

1979년 10월 16일부터 20일까지 부산 및 마산 지역을 중심으로 벌어진 시위, 즉 ‘부마항쟁’의 시민 혁명적 분위기와, 그에 대한 박정희 및 유신정국 권력자들의 폭력적 대응은 김재규의 격발을 불러왔다. ⓒ시사오늘
1979년 10월 16일부터 20일까지 부산 및 마산 지역을 중심으로 벌어진 시위, 즉 ‘부마항쟁’의 시민 혁명적 분위기와, 그에 대한 박정희 및 유신정국 권력자들의 폭력적 대응은 김재규의 격발을 불러왔다. ⓒ시사오늘

무엇이 김재규의 방아쇠를 당겼나

그렇다면 김재규는 왜 박정희를 시해할 계획을 세웠을까?

다음은 1979년 12월 8일 있었던 제2차 공판 당시 김재규에 대한 재판부 신문(訊問)을 발췌한 내용이다. 변호인단의 반대신문권 포기로 질문은 법무사가 직접 했으며, 답변은 김재규가 진술했다.

“범행 동기를 장황하게 설명했는데, 간단히 말하면 체제에 대한 반대인가요?”

“자유민주주의 회복입니다. 회복을 하지 않고는 건국이념에 이바지할 수 없습니다.”

“자유민주주의 회복을 위해서는 대통령 각하를 살해하지 않고서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나요?”

“예. 대통령 각하와 자유민주주의 회복이라는 문제는 숙명적 관계가 돼 있었습니다. 자유민주주의가 회복되려면 대통령 각하가 희생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중략) 그동안 저는 중정의 국제문제연구소에서 내놓은 외국의 한국에 대한 체제 비판, 인권 문제에 대한 비방 기사는 하나도 빼지 않고 번역해 각하께 보고하는 봉투에 넣어드렸습니다. 각하께서 생각을 좀 고치시도록 하기 위해 그 일을 계획적으로 계속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효과를 못 얻었습니다.

금년 10월 18일 부산에 계엄이 선포되고 나서, 저는 현지에 내려갔습니다. 제가 내려가기 전까지는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이나 학생들이 주축이 된 데모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현지에 가보니까 그게 아니었습니다. 160명을 연행했는데 16명이 학생이고 나머지는 다 일반 시민이었습니다. 그리고 데모 양상을 보니까, 데모하는 사람들에게 주먹밥을 주고 사이다 콜라를 갖다 주고 경찰에 밀리면 자기 집에 숨겨주고 하는 것이 데모하는 사람들과 시민들이 완전히 의기투합한 상태였습니다. 그 사람들의 구호는 주로 체제에 대한 반대, 조세에 대한 저항, 물가고에 대한 저항, 정부에 대한 불신에 관한 것이었고, 이런 것이 작용해서 경찰서 11개를 불 지르고 경찰차량 10대를 파괴해 소각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각하께 보고 드렸습니다.

(중략) 각하께서는 ‘이제부터 사태가 더 악화되면 내가 직접 쏘라고 발포 명령을 내리겠다. 자유당 말기에는 최인규와 곽영주가 발포 명령을 했으니까 총살됐지, 대통령인 내가 발포 명령을 하는데 누가 날 총살하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이런 데다가 차지철 경호실장은 ‘캄보디아에서는 300만 명이나 희생시켰는데, 우리가 100만, 200만 명 희생시키는 것쯤이야 뭐가 문제냐’고 했습니다. 누구나 들으면 소름 끼칠 내용들입니다.”

-안동일, 〈나는 김재규의 변호인이었다〉, 106~109쪽

요컨대 그해 10월 16일부터 20일까지 부산 및 마산 지역을 중심으로 벌어진 시위, 즉 ‘부마항쟁’의 시민 혁명적 분위기와, 그에 대한 박정희 및 유신정국 권력자들의 폭력적 대응이 김재규에게 큰 충격을 줬다는 소리다.

“확실히 부마사태가 결정적이었죠. 부마항쟁이 격렬해지니까 김재규가 수행비서인 육군 포병대령 박흥주만 데리고 부산에 내려갑니다. 거기 가서 시위 현장을 몸으로 겪어요. 군중들한테 떠밀려서 신발을 잊어버릴 정도의 격렬한 현장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서울에 와서 대통령께 이렇게 보고를 해요.

‘부마사태가 대구로 가서 서울까지 올라오면 4·19 못지않은 시위가 전개될 겁니다. 대책을 마련해야 합니다. (군중을 달래기 위해) 긴급조치를 풀고, 민주화를 이뤄야 합니다.’

아마 여러 가지 (민주화) 방법에 관한 건의를 했을 거예요. 그런데 그 자리에서 ‘캄보디아 이런 데선 2~300만 명 죽여도 상관없는데, 까짓것 우리가 탱크로 깔아뭉개자’라는, 폭동을 진압한다는 식의 얘기가 나왔으니 김재규 입장에선 ‘이러면 큰일 나겠다’ 싶었던 겁니다.” -23일, 안동일 변호사

김재규의 눈과 귀로 접한 부마항쟁의 현장은 어땠을까.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는 “부산과 마산의 학생 및 시민들에 의해서 4·19혁명 이후 최대 규모의 반독재 민주항쟁이 일어났다”고 평가하고 있다.

당시 부산시가 집계한 자료에 따르면, 부상자는 16일 하루 동안에만 학생 5명, 일반시민 10명, 경찰 95명 등 도합 110명으로서 그 가운데 중상자는 18명이었다. 그러나 시민들로선 자진신고를 기피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 상황을 감안할 때, 실제 피해는 그보다 훨씬 컸을 것으로 추정된다. 나흘간 부산에서 1058명, 마산에서 505명 등 총 1563명이 연행됐으며, 그중 651명은 즉결심판에 회부됐다. 군법회의에 회부된 87명 중 20명은 실형을 선고받았다.

1979년 5월, YS 지원유세에 DJ의 ‘깜짝 등장’이 가능했던 배후에는, 정부 세력의 ‘봐주기’가 있었다는 해석도 나온다. 공화당을 비롯한 정부여당 인사들 사이에서 이미 ‘반(反)유신체제’에 대한 열망이 움트고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엔 10·26의 주동자 김재규도 포함돼 있다.ⓒ김영삼민주센터
1979년 5월, YS 지원유세에 DJ의 ‘깜짝 등장’이 가능했던 배후에는, 정부 세력의 ‘봐주기’가 있었다는 해석도 나온다. 공화당을 비롯한 정부여당 인사들 사이에서 이미 ‘반(反)유신체제’에 대한 열망이 움트고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엔 10·26의 주동자 김재규도 포함돼 있다.ⓒ김영삼민주센터

부마항쟁 격발, 5·30 신민당 전당대회로 장전

방아쇠를 당긴다고 해서 총알이 바로 발사되는 것은 아니다. 대개 총포에 탄약을 재어 넣는 장전(裝塡) 단계를 거쳐야만, 총은 온전하게 격발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부마항쟁이 당긴 ‘유신의 종말’ 방아쇠는, 그 이전의 장전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유신의 심장을 저격할 수 있었다.

정계 관계자들은 그해 5월 30일,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YS의 역전승(逆轉勝)이 유신 정권의 몰락을 부추기는 ‘장전’의 역할을 했다고 분석한다.

80년대 국회에서 활동했던 한 정계 원로를 만나, 5월 30일 전당대회 결과를 지켜본 심정을 물었다. 그는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 YS가 아니라 이철승이 당권을 잡을 줄 알았을 것”이라며 당시 불었던 ‘YS 바람’에 놀라움을 표했다.

1979년 5월 신민당 전당대회는 이철승과 YS의 싸움이었다. 다만 이철승 쪽의 세력이 명확하게 더 컸다. 당시 YS는 1975년 박정희와의 ‘일대일 영수회담’ 이후 ‘사이비 야당’이라는 비판을 받고 그의 최측근이었던 조윤형이 떨어져 나가는 등의 불리한 상황이었다.

반면 이철승은 차지철이 김태촌 등을 동원해 ‘YS 낙선 공작’을 벌인 1976년 전당대회에서 대표최고위원으로 당선되면서 세(勢)를 넓힌 모양새였다. 게다가 전당대회를 이틀 앞둔 28일 고흥문·이충환·유치송 등 유력 정치인들이 이철승 지지를 선언하면서, 그의 당선은 유력한 듯 보였다.

전당대회 날짜가 하루하루 다가오자, 내심 불안했던 박정희는 YS가 총재가 되지 못하도록 차지철의 대통령경호실과 김재규의 중앙정보부를 적극 동원했다. YS의 측근으로 신민당에 몸담았던 김봉조 민주동지회장도 지난 2017년 2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박정희가 김영삼 견제를 위해 이철승 세력을 키웠다”고 지적했다.

“YS가 박정희에 대해 사사건건 반대를 하니까, 박정희가 차라리 중앙정보부를 동원해 이철승을 뒤에서 지원하게 된 거죠. 이철승은 ‘선명야당’이 아닌 ‘중도야당’, 즉 중도통합론을 제창하기 시작했어요. 여야관계도 두리뭉실 넘어가겠다는 주장인데, 그가 당권을 잡았던 1976년엔 대여협상이 일방적으로 여당 하자는 대로 일사천리로 진행됐습니다. 정책대결도 없고, 야당은 있으나 마나인겁니다. 이철승은 여당이 하자는 대로 반대 없이 가는 것이 통합이라는 생각을 한 것 같아요.”

이 같은 분위기 속에 전당대회를 하루 앞둔 29일, 이철승은 한일관에서 ‘이 대표 추대 대연합의 밤’ 행사를, YS는 아서원에서 ‘민권의 밤’ 행사를 열었다. 그런데 이때, 아서원에서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당시 ‘명동 3·1 민주 구국선언’을 주도했다는 혐의로,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가택연금 중이었던 김대중(DJ)이 깜짝 등장해 YS 지지를 표명한 것이다. 여기에 원외 지구당 세력과 가깝던 이기택까지 YS를 지지하게 되면서, YS쪽에 힘이 실리게 됐다.

이날 DJ의 ‘깜짝 등장’이 가능했던 배후에 정부 세력의 ‘봐주기’가 있었다는 해석도 나온다. 공화당을 비롯한 정부여당 인사들 사이에서 이미 ‘반(反)유신체제’에 대한 열망이 움트고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엔 10·26의 주동자 김재규도 포함돼 있다.

앞선 김봉조 민주동지회장은 “종친회에서 본 김재규는 ‘박정희의 사냥개’ 모습과는 달랐다”고 털어놓았다.

“어느 날 금녕김씨 종친회에 갔더니 회장인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나를 보고 ‘김 비서관, 수고가 많소. 내 방에 한번 오시오’라고 했어요. 당시 김재규는 보안사령관 출신이고, 박정희 정권의 사냥개나 다름없었습니다만 안 갈 수도 없고 해서 갔더니, 별 말 없이 차를 마시며 ‘고생이 많소. 김 총무(YS)가 우리나라에 큰일을 할 거요. 내가 당신 들으라고 하는 소리도 아니고. 내 느낌이 있습니다. 자신 있게 잘 모시고. 김 총무 정치하는데 뒷받침 많이 하소’라고 했습니다. (중략) 박정희의 혹정(酷政)이라 할까. 그게 사회 전반에 피로를 안긴 상황이었습니다. 근로자들을 비롯해 수많은 국민들에게 퍼져있어서,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상당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2017년 2월 본지 인터뷰

우여곡절 끝에, YS는 이철승을 꺾고 신민당 총재가 됐다. 신민당 당수가 된 김영삼은 약속대로 강경한 대여(對與) 투쟁에 나섰다. 신민당 당사를 찾아온 YH 여공들을 보호하며 경찰 병력과 맞섰고, 경찰 연행 과정에서 YH 여공 김경숙이 사망하자 원내 철야농성을 진두지휘하며 “이 암흑적인 정치, 살인정치를 감행하는 이 정권은 필연코 머지않아서 반드시 쓰러질 것이다. 쓰러지는 방법도 무참히 쓰러질 것이다 하는 것을 예언한다”고 박정희 정권에 비난을 퍼붓기도 했다.

YS를 참을 수 없었던 박정희는 끝내 YS의 정계 축출을 시도했다. YS와 경쟁했던 이철승계의 인물들을 모아 ‘전당대회 결과 무효 소송’을 제소했고, 법원은 YS 총재직을 강제로 박탈하기에 이르렀다.

정권은 더 나아가 YS가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은 박정희에 대한 지지를 끊어야 한다”는 발언을 한 것을 ‘사대주의’라고 문제 삼아, 10월 4일 그의 국회의원직까지 박탈했다.

이에 억눌려왔던 국민의 불만이 폭발했다. 불꽃처럼 터진 YS의 정치 기반이었던 영남, 즉 부산과 마산·창원 등지에서 벌어진 유신 반대 시위. 이는 후에 유신체제의 종말을 초래한 ‘부마항쟁’으로 명명된다. 결국 ‘김영삼 제명 사건’은 부마항쟁을 촉발시켰고, 이것이 유신 정권 종식의 계기가 된 셈이다.

김재규의 격발은 시민들의 부마항쟁과 신민당의 대여투쟁으로 이뤄낸 합작품이다. YS의 총재직 당선과 부마항쟁으로 비롯된 10·26 사태, 박정희의 죽음은 1979년 유신 체제의 종말을 가져왔다. ⓒ시사오늘 그래픽=김유종
김재규의 격발은 시민들의 부마항쟁과 신민당의 대여투쟁으로 이뤄낸 합작품이다. YS의 총재직 당선과 부마항쟁으로 비롯된 10·26 사태, 박정희의 죽음은 1979년 유신 체제의 종말을 가져왔다. ⓒ시사오늘 그래픽=김유종

정치권의 장전, 시민들의 방아쇠… '혁명의 의미' 시사점 남겨

김재규의 격발은 시민들의 부마항쟁과 신민당의 대여투쟁으로 이뤄낸 합작품이다. YS의 총재직 당선과 부마항쟁으로 비롯된 10·26 사태, 박정희의 죽음은 1979년 유신 체제의 종말을 가져왔다.

흔히들 혁명의 성공 여부를 패러다임의 변화, 즉 ‘체제의 변혁’에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유신 체제를 종식시킨 부마항쟁은 ‘성공한 혁명’일까. 혹은 전두환 신군부라는 혹한기를 불러왔으니 ‘실패한 혁명’일까.

이와 관련해 안동일 변호사는 “일부 민주 진영에선 부마항쟁이 대구, 서울까지 진출해 민중에 의해 정권 타도가 됐어야 ‘진정한 혁명’이라고 말한다. 김재규로 인해 ‘미완의 혁명’으로 끝났다는 점을 비판하기도 한다”고 일각의 비판적 시선을 전하기도 했다.

한편, 부마항쟁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할 것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대표 발의한 더불어민주당 전재수 의원은 이 같은 논란에 대해 지난 26일 “부마항쟁은 유신시대 최초의 국민 저항 운동이자, 5·18 광주항쟁을 촉발시킨 항쟁으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라며 운을 뗐다.

“엄혹한 유신시대에, 박정희 독재 정권에 맞서서 분노를 일으켰던 엄청난 민주항쟁이라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실패한 항쟁이 아니고 역사의 새날을 여는, 그야말로 미래를 여는 민주항쟁이겠지요. 또 부마항쟁을 통해 이후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라든지 87년 6월 항쟁처럼 연대할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된 것 아니겠습니까. 실패한 항쟁이 아니라, 한국 현대사의 군부 독재정권 종식과 국민 주권시대를 여는 성공한 항쟁이라고 봅니다.”

부마민주항쟁은 지난 17일 국가기념일로 정식 지정됐다. 올해부터 정부주관으로 행사도 치러진다. 다만 〈껍데기는 가라〉 등의 책에서 “김재규는 열사”라고 주장하며 김재규 명예회복추진을 위해 애쓰고 있는 함세웅 신부는 지난 27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부마항쟁 뿐 아니라 김재규도 함께 주목해야 할 때”라고 거듭 강조했다.

“김재규가 재평가되지 않으면 모든 역사적 논의는 껍데기입니다. 부마항쟁과 광주항쟁의 중간에 김재규가 있어요. 김재규가 없었다면 부마가 광주처럼 됐을 겁니다. 부마도 광주도, 나아가 우리 모두 김재규에게 빚을 졌습니다. 진정한 혁명에 대한 역사적 의식을 환기할 때입니다.” 

담당업무 : 통신 및 전기전자 담당합니다.
좌우명 : 사랑에 의해 고무되고 지식에 의해 인도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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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ng 2019-09-28 20:31:06
역사 책 저자 이신가요? 우연한기회에 접하게 되면서 이젠 기다려지고 있어요 정치에 관심없지만 새로운 역사이야기를 알게 해주는거 같네요 잘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