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그림자①] ‘빛이 있으라’하니 ‘그림자’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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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그림자①] ‘빛이 있으라’하니 ‘그림자’가 생겼다 
  • 박근홍 기자
  • 승인 2019.10.11 10: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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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박근홍 기자]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비종교인이라도 한 번쯤 들어봤을 성경의 한 구절이다. 태초에 신은 혼돈과 공허, 그리고 깊은 어둠의 세상을 밝히고자 빛을 창조했다. 하지만 신이 우리에게 선물한 건 빛뿐만이 아니었다. 빛을 마주한 세상의 모든 피조물 뒤에는 그림자가 드리웠다. 신은 빛을 창조함과 동시에 빛과 어둠을 나눴다.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림자가 생겼다.

2017년 3월 10일, 한국 헌정 역사상 처음으로 대통령이 탄핵된 날이다. 작은 촛불 하나하나가 모여 거대한 빛이 됐고, 그 빛은 짙은 어둠을 환하게 비췄다. 광장에 모여 빛나는 역사를 일군 시민들은 모두 새로운 시대를 염원했다.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라는 훌륭한 대통령 취임사는 그 염원이 곧 실현될 것이라 기대하기 충분했다.

우리 생활 속에도 새로운 빛이 찾아왔다. 2016년 1월 다보스포럼의 화두는 4차 산업혁명이었다. 클라우스 슈밥 다포스포럼 회장은 "우리의 생활 방식과 업무 방식, 그리고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 방식까지 완전히 뒤바꿀 기술혁명이 눈앞에 왔다"고 선포했다. 인공지능(AI), 사물인터넷(IoT), 빅데이터 등을 기반으로 한 기술혁명은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이었다. 국내 정재계는 너 나 할 것 없이 마치 자신이 4차 산업혁명 선구자인 것처럼 목소리를 냈고, 시민들의 꿈은 부풀었다.

시사오늘 제244호 커버스토리 '시대의 그림자' ⓒ 시사오늘
시사오늘 제244호 커버스토리 '시대의 그림자' ⓒ 시사오늘

하지만 빛이 있는 곳엔 항상 어둠이 있는 법, 새로운 시대를 밝히는 빛과 마주한 우리 등 뒤에는 어느새 짙은 그림자가 깔렸다. 우리나라가 탄핵 정국이라는 격변기를 겪은 건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다. 당시 거대한 변화의 흐름은 세계적인 추세였다. 2016년 6월 영국은 '브렉시트'(유럽연합 탈퇴)를 결정하며 세계 경제를 혼란에 빠뜨렸고, 같은 해 11월에는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전 세계를 경악하게 했다. 그리고 이듬해 우리나라에서 대통령 탄핵이 이뤄졌다.

브렉시트, 트럼프의 등장과 우리나라의 탄핵은 시기적으로도 비슷하지만 그 방식도 유사하다. 영국 보수파는 국민투표에서 브렉시트를 이끌어 내기 위해 난민들을 이용했다. 영국 경제가 위기에 빠지고 빈부격차가 심화된 건 난민들이 일자리를 빼앗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트럼프도 대선 승리를 위해 비슷한 전략을 썼다. 국내로는 이민자들이 미국인들의 일자리를 잃게 하고, 국외로는 한국, 일본 등 미국의 수혜를 입는 국가들이 합당한 대가를 내지 않아 경제가 어려움에 빠졌다는 논리를 펼쳤다. 두 사례 모두 '공공의 적'을 앞세워 목표를 달성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대통령 탄핵의 경우 아래에서 위로의 변혁이라는 측면에서 사뭇 다르지만 공공의 적을 타깃으로 삼았다는 부분만큼은 두 사례와 별 차이가 없다. 집권여당은 이후에도 이 같은 자세를 지속적으로 유지했다. 적폐 청산, 가짜 뉴스 심판 등 구호가 대표적인 예다. '우리는 빛이고, 너희는 어둠'이라는 흑백논리는 촛불이라는 거대한 빛 앞에 있었기에 집권 3년차까지 먹혀 들었다. 등 뒤에 '국론분열'이라는 거대한 그림자가 생기고 있다는 걸 모른 채 말이다. 최근 미국이 트럼프 탄핵 정국에 돌입한 점, 영국과 유럽연합(EU)의 브렉시트 합의가 파국으로 치닫고 있는 점 등과 비슷한 양상이다. 특히 서초동-광화문 구도로 나뉜 조국 정국 속에서 국론분열이 날로 악화되고 있는 상황 가운데 대혼란을 수습할 국가 원로의 부재는 분명 시대의 그림자다. 

또 다른 시대의 빛 4차 산업혁명도 거대한 그림자를 낳았다. 기술 진보, 기술 혁신이라는 휘황찬란한 깃발을 많은 사람들이 따랐지만 그 깃발 아래 그림자를 밟은 사람들은 자신의 생계가 위협받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서는 로봇, 인공지능, 자동화 등으로 인간이 설 자리가 필연적으로 위축된다. 칼 베네딕트 프레이 옥스포드대 교수는 2013년 연구에서 미국 전체 고용 인구 중 절반 가량이 향후 20년 내 일자리를 잃을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봤다.

아무런 준비 없이 그저 4차 산업혁명의 좋은 점만을 부각하며 빛 아래로 들어간 우리나라 역시 각종 부작용 때문에 몸살을 앓고 있다. 건설현장 크레인 노동자 파업, 고속도로 톨게이트 수납원 논란, 디스플레이업계 인력 구조조정, 완성차업계 인력 구조조정 검토, 금융권 노사 갈등 등이 대표적인 예다. 반면, 정부는 주 52시간 근무제 도입 등 4차 산업혁명에 따른 부작용이 심화될 여지가 상당한 정책을 펼쳐 혼란을 가중시켰다. 이 과정에서 사회안전망 확충 등 부작용를 희석시킬 수 있는 정책에 대한 깊은 고민은 수반되지 않았다.

이 가운데 산업계에는 또 하나의 시대적 그림자가 드리웠다. 바로 보호무역주의의 대두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반이민 정책과 중국경제에 대한 공격을 통해 신자유주의가 저물고 보호무역주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만방에 알렸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그 신호탄을 빨리 파악하지 못했고, 거센 변화의 흐름 속에서 표류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 결과가 바로 한일 무역분쟁이다. 한일 무역분쟁의 표면적인 원인은 일제강점기 징용자 배상 문제로 인한 일본의 경제보복이나, 그 배경에는 보호무역주의가 깔려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통상의 무역분쟁은 대부분 무역적자국의 선전포고로 시작된다. 그런데 한일 무역분쟁은 무역흑자국인 일본이 먼저 촉발한 특수 사례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서 핵심 소재 기술을 다량 보유한 일본이 기술 우위를 바탕으로 경쟁국인 우리나라의 신성장동력(특히 반도체) 가치사슬을 보호무역주의 차원에서 선제 공격하는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하지만 우리 정부는 이 같은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반일 감정을 자극해 국민들로 하여금 불매운동에 나서게 하고, 극일 구호를 외치며 경제 자립만을 강조하는 눈치다. 수출 의존도가 높은 한국경제가 보호무역주의 시대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지 생존전략을 강구해야 할 때다.

이처럼 거역할 수 없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우리나라는 여러 문제에 직면했다. 촛불-탄핵-조국정국으로 지속되는 국론분열, 4차 산업혁명에 따른 노사갈등, 보호무역주의와 반일정서가 혼재한 한일 무역분쟁, 신성장동력을 둘러싼 사회적 논란 등 시대의 그림자에 사로잡혔다. 그 그림자는 흐름에 제대로 순응하지 못하면서 생긴 부작용일까, 아니면 우리는 불가피한 과도기를 겪고 있는 걸까. 어쩌면 변화가 두렵기에 스스로 시대의 그늘을 찾아 들어간 건 아닐까. 〈시사오늘〉은 커버스토리 '시대의 그림자'를 통해 우리의 현재를 짚어보고, 미래를 가늠해 본다.

담당업무 : 건설·부동산을 중심으로 산업계 전반을 담당합니다
좌우명 : 隨緣無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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