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민주당 관악지구당] ‘용팔이 사건’ 벌어졌던 그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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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민주당 관악지구당] ‘용팔이 사건’ 벌어졌던 그 곳
  • 정진호 기자
  • 승인 2019.10.18 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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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우 구상’에 YS·DJ 신민당 탈당…통일민주당 창당하자 전두환 정권 정치공작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정진호 기자]

‘이민우 구상’에 반발한 YS와 DJ는 신민당을 박차고 나가 통합민주당을 창당했다. ⓒ시사오늘
‘이민우 구상’에 반발한 YS와 DJ는 신민당을 박차고 나가 통합민주당을 창당했다. ⓒ시사오늘

1985년 2월 12일 열린 제12대 총선은 대한민국 현대정치사의 물줄기를 바꾼 사건이었다. ‘선명 야당’을 내세운 신민당(신한민주당)이 관제(官製) 야당이었던 민한당(민주한국당)을 제치고 제1야당으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민심이 자신들에게 있음을 확인한 신민당은 본격적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고 나섰고, 국회 밖에서는 YS(김영삼 전 대통령)와 DJ가 ‘민주제 개헌 1000만 명 서명 운동’을 전개하며 전두환 정권을 압박해나갔다.

그러던 와중인 1986년 12월 24일, 신민당이 요동치는 사건이 발생한다. 여야 영수회담을 하고 나온 이민우 신민당 총재가 갑작스럽게 “민주화 요구를 수용하는 대신 정부 형태는 의원내각제로 하자”는 전두환의 제의를 받아들일 용의가 있다고 발표한 것이다.

당시 전두환 정권은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이 커 권력 유지를 장담하기 어렵다고 보고, 내각제로의 개헌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민우가 내각제를 수용하겠다는 이른바 ‘이민우 구상’을 발표했으니, 신민당이 내홍에 휩싸이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이민우 구상이 발표되자 YS와 DJ는 내각제 개헌은 전두환 정권의 영구집권 음모에 동조하는 것이라면서 강하게 반발했다. 결국 YS와 DJ는 1987년 5월, 상도동계 의원 35명과 동교동계 의원 32명을 이끌고 신민당을 탈당해 통일민주당을 창당하기에 이른다.

‘용팔이 사건’이 벌어졌던 신림동 건물에는 각종 상가가 입점해 있다. ⓒ시사오늘
‘용팔이 사건’이 벌어졌던 신림동 건물에는 각종 상가가 입점해 있다. ⓒ시사오늘

그러나 전두환 정권이 이를 두고만 보고 있을 리 없었다. 1987년 4월 24일, 서울시 관악구 신림동에 위치한 통일민주당 관악지구당 사무실. 관악지구당 창당대회가 예정돼 있던 이곳에 조직폭력배 100여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각목과 쇠파이프로 무장한 이들은 당원들을 구타하고 기물을 파괴하는 등 난동을 부렸다.

이날뿐만 아니라, 100여 명의 조직폭력배들은 1987년 4월 20일부터 24일까지 통일민주당의 20여 개 지구당에 난입해 창당대회를 방해했다. 이로 인해 통일민주당은 인근 식당이나 길거리에서 약식으로 창당대회를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아래는 당시 신문 기사 내용이다.

24일 하오 1시20분쯤 서울 관악구 신림5동 1422의22 통일민주당(가칭) 관악지구당(조직책 김수한 의원) 사무실을 점거한 청년 1백여 명이 사무실 앞 대로에서 창당대회를 가지려던 통일민주당 대의원과 당원 등 60여 명에게 각목, 쇠파이프 등으로 뭇매를 때리는 등 20여 분간 난동을 벌였다.
통일민주당원들은 이날 상오 7시45분쯤 지구당 사무실을 점거당해 사무실 앞 대로에서 지구당 창당대회를 열고 “현 정권은 정당한 창당대회를 보장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애국가를 제창하자 얼굴을 수건으로 가린 청년 30여 명이 각목과 쇠파이프를 들고 나와 “다 죽여버리겠다”며 당원들과 주민, 취재기자들을 향해 각목 등을 마구 휘둘렀다.
이들은 또 달아나는 통일민주당원과 취재진을 따라가며 계속 각목 등을 휘둘러 인근 교통이 1시간 동안 마비되기도 했다.
또 검은 복면을 한 청년 20여 명은 이날 하오 2시20분쯤 지구당 사무실에서 1백여 미터 떨어진 남서울우체국 앞에 모여 있던 김수한, 박실 의원 등 통민당 의원 6명과 대의원들을 쫓아 2백여 미터 밖으로 내몰았다. (후략)
1987년 4월 24일자 <경향신문> ‘각목청년 통민당 관악구서 난동’

사건 주동자 김용남의 별명 ‘용팔이’에서 이름을 따 ‘용팔이 사건’으로 명명(命名)된 이 일은, 전두환 정권이 통일민주당 창당을 방해하기 위해 벌인 명백한 정치공작이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이 사건에 대한 수사는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전두환 정권이 물러나고 노태우 정권이 들어선 뒤 김용남과 이선준 당시 신민당 청년부장 등이 검거됐지만, 이조차도 ‘꼬리 자르기’에 불과했다.

결국 YS가 대통령으로 취임한 1993년 이 사건은 재조사됐고, 강력한 야당 출현을 막기 위해 장세동 당시 안기부장이 이택희·이택돈 신민당 의원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해 사주한 일임이 밝혀졌다. 전두환 정권에 맞서 ‘신민당 돌풍’을 이끌었던 YS·DJ를 막기 위해 전두환 정권의 사주를 받은 신민당 의원들이 조직폭력배를 동원한, 정치공작의 결정판과도 같은 사건이었던 셈이다.

통일민주당 창당방해사건에 개입한 혐의로 당시 안기부장인 장세동 씨(57)가 9일 구속됨에 따라 5년10개월 만에 역사의 진실이 밝혀지면서 국내정치사에 얼룩진 공작정치에 철퇴를 가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됐다.
이 사건은 발생 당시부터 △경찰의 폭력난동 방관의혹 △사건 주범들의 권력기관 비호의혹 △정치폭력배들의 대담한 범행 등으로 인해 당시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했던 안기부의 개입설이 끊임없이 제기됐었다. (중략)
검찰조사 결과 장 씨와 이택희·이택돈 전 의원은 사건 발생 5개월 전인 86년 12월부터 궁정동 안기부 안가 등에서 만나 당시 정치현안에 대해 논의했으며, 이 과정에서 사회 안정을 바라는 장 씨와 김대중·김영삼 씨가 이끄는 강성 야당이 창당될 경우 소외될 수밖에 없는 두 이 전 의원의 이해가 맞아떨어져 자연스럽게 거사를 모의한 것으로 밝혀졌다.
장 씨는 또 이 사건 발생 1년 전부터 평소 안면이 있던 이택희 전 의원을 수시로 만나왔으며, 그때마다 시국 안정에 필요한 조언을 해준 대가로 수백만 원에서 수천만 원에 이르는 정치자금을 대준 사실도 확인됐다.
이 같은 사실은 당시 정계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던 ‘낮에는 야당, 밤에는 여당’이라는 소문을 사실로 확인시켜준 것이다. (후략)
1993년 3월 10일자 <동아일보> ‘숨겨진 공작정치, 뒤늦은 사실 확인’

한편 ‘용팔이 사건’의 주 무대였던 통일민주당 관악지구당 건물은 지금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 건물을 찾아가려면 서울 지하철 2호선 신림역 8번출구로 나와 100미터가량 직진하면 된다. 다만 이 장소에는 현재 각종 상점이 들어서 있어 과거의 모습을 짐작하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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