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유신] 유신군주 박정희, 7년간의 유신체제…폭력의 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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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유신] 유신군주 박정희, 7년간의 유신체제…폭력의 말로
  • 한설희 기자
  • 승인 2019.11.08 10:18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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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본 정치史>1972년 그날, 김대중 김영삼 노태우 김종필이 목격한 현장은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한설희 기자]

한국당은 박정희를 칭송하면서도, 문재인 정부를 향해 ‘유신정부’라고 비판한다.현 정부를 비난하기 위해 빗댄 사례가 한국당이 추앙하고 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 평생의 유산인 셈이다.ⓒ시사오늘 그래픽 김유종
한국당은 박정희를 칭송하면서도, 문재인 정부를 향해 ‘유신정부’라고 비판한다.현 정부를 비난하기 위해 빗댄 사례가 한국당이 추앙하고 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 평생의 유산인 셈이다.ⓒ시사오늘 그래픽 김유종

지난달 26일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 40주년을 맞아 그의 생가가 있는 경북 구미와 서울 동작구 국립현충원에서 추도식이 열렸다. 이날 추도식에 참석한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는 “박정희 정신을 배워야 한다”며 “박 대통령은 세계사에서 유례없는 독보적인 성취와 성공의 기적을 일구어 낸 분”이라고 칭송했다.

한국당은 여전히 박정희의 유산에 집착하고 있다. ‘보수당의 집토끼’라 불리는 TK(대구·경북) 지역의 표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을 둘러싸고 발생한 극우 성향의 ‘태극기 집회’ 표를 버릴 수 없어서다. 

동시에 한국당은 현 문재인 정부를 향해 ‘유신정부’라고 비판한다. 나경원 원내대표는 지난달 31일 최고위원회의에서 “법무부가 대한민국을 유신 시대로 돌리려고 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현 정부를 비난하기 위해 빗댄 사례가 한국당이 추앙하고 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 평생의 유산인 셈이다.

<시사오늘>은 매번 역대 대통령들의 입을 빌려 당신에게 일종의 ‘기억재생장치’를 선사해왔다. 이번 열한 번째 ‘대통령 회고사’는 1972년 10월 ‘국가의 폭력’으로 시작돼 1979년 10월 ‘개인의 폭력’으로 끝난 폭력의 말로(末路), 박정희의 유신 체제다.

 

1961.5.16.~1972.05月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집권에 성공한 박정희. 그는 집권 초 국가 개발 계획을 통해 경제적으로 낙후된 조국을 구제한 후 다시 군인의 길로 회귀하겠다고 국민 앞에 약속했으나, 결국 스스로 정치적 탐욕을 자제하지 못했다. 아직 경제 발전 수준이 미비하다는 핑계로 장기집권의 수순에 들어간 것이다. 

박정희는 2년간 군정(軍政)을 통해 집권한 후, 제3공화국 제도였던 ‘중임(重任) 대통령직선제’를 통해 역임한다. 그러나 헌법에 있던 ‘대통령 3선 금지조항’으로 더 이상의 집권이 어려워지자, 여당(민주공화당)을 통해 변칙으로 ‘3선 개헌안’까지 통과시켜 3선에 도전한다. 

이 3선 개헌안은 △헌법에 규정된 대통령의 연임금지 조항 삭제 △3선연임 허용 △대통령 탄핵 발의 정족수 30명에서 50명으로 확대 △탄핵안 의결 정족수 과반수에서 3분의 2로 상향 조정 등을 골자로 한다.

그럼에도 그의 권력욕은 해갈(解渴)되지 못했고, 3선 집권 도중 ‘헌정쿠데타’에 가까운 유신헌법을 제정하는 데 이른다. 친위기관인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대통령 간선제를 통해 장기집권, 즉 독재를 꾀하게 된 것이다.

 

1972.05月 어느 토요일

박정희의 최측근이자 유신 선포 당시 국무총리를 역임하고 있던 김종필은 박정희의 유신헌법 계획을 그해 5월부터 알게 됐다고 전한다. 

김종필의 증언에 따르면, 박정희는 한국에 서구식 민주주의를 도입하는 것은 시기상조이며, 당분간 국가 경제 재건에 국력을 집중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박정희는 김종필과의 만남에서 환난 극복을 위해 국가비상관리 체제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고 넌지시 암시한다.

박 대통령이 내게 유신이 추진하고 있음을 알려준 건 1972년 5월의 어느 토요일이었다. 

(중략) “내가 국가비상관리 체제를 생각하고 있어. 국민 총동원 체제가 필요해. 이대로는 1970년대가 순탄하지 않아. 심한 반대에 부닥칠 수 있겠지만 일단 해놓고 보면 나중에 1970년대를 잘 이겨냈다는 말을 들을 거야. 이 체제는 국가위기를 극복할 때까지 한시적으로만 갈 거야.”

박 대통령은 개헌이란 말을 입에 올리진 않았지만 나는 자연스럽게 그런 뜻으로 받아들였다.

- 김종필 증언록 <JP가 말하는 대한민국 현대사>, 403~404쪽.

다만 김종필은 박정희의 주장을 전부 수용하지 않고, 비교적 객관적으로 박정희의 심중을 판단하고 있다. 김종필은 박정희가 71년 대선에서 야당 후보이던 김대중과의 접전을 펼친 끝에 가까스로 승리하게 된 일을 계기로 권력에 대한 위협을 느꼈으며, 그 결과 이후락의 제안을 수용했다고 보고 있다. 

유신에 대한 오해 가운데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주도했다는 견해가 있다. 유신은 철저하게 박정희 대통령이 구상했고 직접 지휘해 이끌었으며 결국 죽음으로 마지막 책임까지 지고 갔다. 박 대통령의 흉중(胸中)에서 유신의 싹이 튼 건 1971년 4월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에게 95만 표라는 예상외의 적은 표차로 이겨 위기감을 느낀 때였다. 박 대통령의 이런 마음을 잃고 강력한 통치체제 구축이 필요하다고 건의한 게 이후락인 건 맞다. 건의 시점은 1971년 말께로 짐작된다.

- 김종필 증언록 <JP가 말하는 대한민국 현대사>, 403쪽.

김종필의 ‘유신 1971 계획설(設)’은 상당히 일리 있는 주장으로 보인다.

실제 1971년 4월 27일 실시된 제7대 대통령직선에서, 박정희는 신민당 김대중 후보에게 94만여 표차로 근소하게 당선됐다. 게다가 뒤이어 5월 25일 실시된 제8대 총선에서는 여당(민주공화당) 대 야당(신민당)의 의석비율이 113(지역구 86명, 전국구 27명) 대 89(지역구 65명, 전국구24명)로, 신민당이 개헌 저지선을 확보해 내기도 했다.

또한 71년 신민당의 활약 이후 당시 한국 사회에는 사법파동, 광주대단지주민폭동, KAL빌딩 난동, 학생데모 등 잇따른 사회적 문제와 각계의 저항과 소요가 끊이지 않았다. 

따라서 양대 선거 결과와 대중의 반발은 박정희 정권으로서는 커다란 부담이었고, 박정희는 민심이 자신을 떠났다는 불안을 품게 됐을 가능성이 높다. 결국 권력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보다 강력하고 억압적인 권력이 필요하다고 느끼던 차, 71년 말 이후락의 제안을 받아들인 셈이다.

 

1972.10.17. 10·17 비상계엄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는 비상조치를 발표하고 지금까지의 모든 민주주의 제도를 정지시킨다. 이날이 바로 유신체제 구축의 시작점이다. 대통령의 간선제가 시행됐고, 의회의 권한은 제한됐다. 언론 탄압과 시민 언행권 탄압이 이어졌으며 무고한 민간인들이 체포되어 부당한 판결로 인해 목숨을 잃기 시작했다.

박정희는 이날 ‘대통령 특별선언’을 통해 유신을 선포하고 △국회해산 △정당 활동 금지 △국회 권한을 비상국무회의(박정희 친위기관)에 이양 등의 내용을 발표한다. 본인이 수정한 제3공화국 헌법을 어겨가면서까지 자의적으로 긴급조치를 발령한 것인데, 이는 기존의 헌정질서를 파괴하고 정지시킨 일종의 헌정쿠데타에 해당한다.

공교롭게도 신민당의 양대 산맥이었던 김영삼과 김대중은 각자의 사정으로 해외에 체류하던 중이었다. 이에 김영삼은 박정희가 두 사람의 체류 시점을 노렸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소위 ‘10·17특별선언’이 발표되던 날 나와 김대중은 공교롭게도 모두 외국에 체류하고 있었다. 나는 하버드대학 동아시아연구소의 초청으로 미국에 체류 중이었다. 김대중은 신병 치료차 동경(東京)에 있었는데 10월 19일 귀국할 예정이라고 들었다. 박정희는 일부러 두 사람이 해외에 체류하는 시점을 노린 것 같았다.

-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2권, 21쪽.

김영삼은 긴급조치 소식을 듣자마자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바로 귀국하지만, 박정희 정권이 보낸 군인들에 의해 연행당해 가택 연금을 당하게 된다.

나는 당시 하버드대학에서 남북문제를 주제로 연설할 예정이었다. 라이샤워 교수는 하버드대학 관계자들과 함께 그의 집으로 저녁을 초대를 해서는 심각하게 권유했다. 한국에 돌아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아파트와 생활비까지 대주는 하버드대학의 프로그램이 있으니 남아 있으라고도 했다. 언제까지라는 시한도 없었다. 그러나 나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대단히 고맙지만, 나는 명색이 한국의 대통령을 하겠다고 나선 사람입니다. 나 혼자의 안전을 위해서 이곳에 남는다는 것은 내 조국과 국민을 팽개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중략) 김포공항에 도착하니 이미 나를 연행해 갈 기관원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나는 구속이 될 것으로 생각했다. 서울지구 계엄사령관인가 하는 장군이 공항에 나와 있었다. 곧바로 잡혀가는 줄 알았는데, 요란하게 헌병차에 둘러싸여 간 곳은 뜻밖에도 상도동 내 집이었다. 그때부터 가택연금을 당해야 했다. (중략) 김대중은 일본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지금도 사람들은 나의 당시의 귀국을 모험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정의와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두려운 것이 없다. 나는 독재와의 정면투쟁을 피할 의사가 전혀 없었고 협박에 무릎을 꿇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독재자 박정희는 이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기대했다가, 막상 내가 귀국하자 난처했을 것이다.

-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2권, 23~24쪽.

치료 차 일본에 머물러 있던 김대중은 “예상했던 일”이라고 술회했다. 그는 71년 대선에서 야당이 패배할 경우, 박정희 정권이 독재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불법을 자행할 것이라고 생각한 바 있다.

1972년 10월 11일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도쿄에 머물면서 게이오 대학 고토 유이치로 교수로부터 아픈 다리를 치료받았다. 치료를 받고 나니 걷는 게 훨씬 부드러워졌다. 19일에 귀국할 예정이었다. 귀국하기 이틀 전, 숙소인 제국 호텔로 서울에 있는 친구 최서면이 전화를 해왔다. 오후 5시쯤이었다.

“오늘 오후 7시에 박 대통령의 중대 발표가 있다는데 알고 있는가?”
“처음 듣는데, 무슨 내용인지 아는 게 있는가?”
“들은 얘기지만, 상황이 좋지 않네. 아마 국회를 해산하고 계엄령을 선포할 것 같네.”

불길했다. 전화를 끊고 생각에 잠겨 있는데 나와 만나기로 한 일본 기자가 찾아왔다. 그 역시 같은 얘기를 들려주었다. 

(중략) ‘예상대로 올 것이 오고 있구나.’ 나는 선거 후 박 정권이 독재 체재를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부심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새삼 내가 선거 기간 때 강조한 말이 생각났다.

“만약 이번에도 정권 교체에 실패하면 박 정권 하에서 우리 손에 의한, 또 국민의 투표에 의한 정권 교체는 영원히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게 거듭 외쳤지만 막상 그것이 현실로 다가온다니 두려웠다.

- 김대중 자서전 1권, 284~285쪽.

김대중 역시 박정희 정권에 맞서 싸울 생각을 갖고 있었지만, 선택한 길은 김영삼과 달랐다. 그는 해외에 망명해 세계 언론에 호소하는 방향을 선택한다. 

이처럼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국민들인데 지금 이 시각에 어떤 심정으로 이 사태를 받아들이고 있을 것인가. 얼마나 절망하며 얼마나 격분하고 있을 것인가. 가슴에 뜨거운 그 무엇이 올라왔다. 그것은 슬픔이었고, 또 분노였다. 나는 박 정권에 맞서 싸우기로 결심했다. 목숨이 끊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투쟁하는 것이 국민들을 향한 내 의무이며 책임이라 느꼈다.

(중략) 다만 어디에서 어떻게 싸울 것인가가 문제였다. ‘한국에서는 독재의 서슬에 누구도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할 것이다. 그럴 만한 민주 인사들도 별로 없을 것이다. 다행히 나는 나라 밖에서 자유롭게 내 의사를 피력할 수 있다. 미국, 일본 등 세계 언론에 호소하자. 독재 정권의 해악을 세계에 알려 박 정권과의 유착을 차단하자. 그러면 국내에서도 용기를 가지고 유신 반대 투쟁을 벌일 것이다. 민주화를 바라는 국민들을 위해서라도 해외에서 싸우자. (중략)’

이렇게 생각을 정리했다. 내가 한국에 없을 때 박 대통령이 특별 선언을 한 것 또한 무슨 암시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것은 이른바 망명이었다.

- 김대중 자서전 1권, 285~287쪽.

한편, 박정희 군부는 두 사람 뿐 아니라 그들의 측근인 상도동계와 동교동계에도 촉각을 기울였다. 그들 중 다수는 영장도 없이 보안사에 끌려가 비윤리적인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국내사정은 험악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중략) 상도동과 동교동에서 거의 비슷한 숫자의 사람들이 잡혀갔는데, 이는 박정희가 나와 김대중 두 사람의 귀국을 봉쇄하려는 압박 신호이기도 했다. 정치인들은 경찰이 아닌 보안사에 구속되었는데, 심한 고문으로 극심한 고통을 당했다. (중략) 정말로 가슴 아픈 일이다.

-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2권, 22쪽.

나중에 들었지만 같은 시각 한국에서는 군 수사관들이 우리 집과 내 계파 의원들의 집을 일제히 덮쳤다. 김상현, 조윤형, 이종남, 김녹영, 조연하, 김경인, 박종률, 강근호, 이세규, 김한수, 나석호 의원 등이 군부대로 끌려갔다. 권노갑, 한화갑, 엄영달, 김옥두, 방대엽, 이수동, 이윤수 비서 등도 곤욕을 치렀다. 물론 영장 같은 것은 없었다. 군 수사관들은 이들에게 모진 고문을 치렀다. 물론 영장 같은 것은 없었다. 군 수사관들은 이들에게 모진 고문을 하며 나와의 관계를 따졌다. 다짜고짜 그들에게 가한 고문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옷 벗기고 잠 안 재우기, 각목 또는 곤봉으로 때리기, 눕혀 높고 코에 물 붓기, 통닭처럼 거꾸로 매달고 때리기, 송곳으로 발바닥 찌르기 등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

- 김대중 자서전 1권, 288쪽.

박정희는 유신헌법에 따라 통일주체국민회의를 주재해 스스로 제8대 대통령 자리에 앉고 비상대권을 잡는다. 유신헌법 선포에서 대통령 취임까지, 70일도 채 걸리지 않았다. ⓒ박정희대통령 기념도서관
박정희는 유신헌법에 따라 통일주체국민회의를 주재해 스스로 제8대 대통령 자리에 앉고 비상대권을 잡는다. 유신헌법 선포에서 대통령 취임까지, 70일도 채 걸리지 않았다. ⓒ박정희대통령 기념도서관

1972.12月

박정희는 12월 6일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한 후 15일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을 선출한다. 대의원 선출 과정에도 직접 개입한 중앙정보부는, 출마 후보들을 사전 심사해 여권성향이거나 정치적 경험이 없는 기업인 및 전문직 종사자들 위주로 걸러냈다. 선거연설에서도 유신의 과업(課業)에 대한 의견만 발표하도록 강제하는 등, 관권(官權)에 의해 철저히 통제된 반민주적 선거였다.

결국 박정희는 23일 유신헌법에 따라 통일주체국민회의를 주재해 스스로 제8대 대통령 자리에 앉고, 27일 이른바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이하 특별조치법)’을 변칙적으로 통과시켜 비상대권을 잡는다. 유신헌법 선포에서 대통령 취임까지, 70일도 채 걸리지 않은 것이다.

이 특별조치법은 ‘초헌법적 국가긴급권’을 법률화·제도화 하는 것으로 ‘외부의 적’이라는 북한으로부터 나라를 구한다는 표면적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조항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71년 12월 27일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

제1조 이 법은 비상사태하에서 국가의 안전보장과 관련되는 내정, 외교 및 국방상 필요한 조치를 사전에 효율적이며 신속하게 취함으로써 대한민국의 안전을 보장하고 국가보위를 확고히 함을 목적으로 한다.

제2조 국가안전보장(이하 “국가안보”라 한다)에 대한 중대한 위협에 효율적으로 대처하고 사회의 안녕질서를 유지하여 국가를 보위하기 위하여 신속한 사전대비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을 경우 대통령은 국가안전보장회의의 자문과 국무회의의 심의를 거쳐 국가비상사태(이하 “비상사태”라 한다)를 선포할 수 있다.

제3조 ①국가안보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 제거 또는 소멸되었을 때에는 대통령은 지체 없이 비상사태선포를 해제하여야 한다. ②국회는 전항의 해제를 대통령에게 건의할 수 있으며, 대통령은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이를 해제하여야 한다. 

제4조 ①비상사태 하에서 대통령은 재정 및 경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는 국무회의의 심의를 거쳐 일정한 기간을 정하여 물가, 임금, 임대료 등에 대한 통제 기타 제한을 가하는 명령을 발할 수 있다. ②전항의 명령을 발한 때에는 대통령은 지체 없이 국회에 통고하여야 한다. 

제5조 ①비상사태 하에서 국방상의 목적을 위하여 필요한 경우 대통령은 국무회의의 심의를 거쳐 전국에 걸치거나 또는 일정한 지역을 정하여 인적, 물적 자원을 효율적으로 동원하거나 통제운영하기 위하여 국가동원령을 발할 수 있다. ⑤본조의 국가동원령을 발한 때에는 대통령은 지체 없이 국회에 통고하여야 한다.

제10조 ①비상사태 하에서 군사상목적을 위하여 필요한 경우, 대통령은 세출예산의 범위내에서 예산의 변경을 가할 수 있다. ②전항의 예산변경을 가하였을 때에는 대통령은 지체 없이 국회에 통고하여야 한다.

박정희는 특히 대통령이 예산 규모를 마음대로 변경할 수 있으며, 심지어 물가와 임금까지 통제하고 명령할 수 있다고 법률로 규정했다. 이는 시장 질서에 명백하게 반(反)하는, 북한식 ‘사회주의 경제’와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결국 유신 체제는 안보 위기, 즉 ‘외부에 대한 대응’이 아니라, 정권 위기에서 비롯된 ‘내부에 대한 대응’이나 마찬가지였다. 국가안보의 위기는 대통령의 영구집권을 위해 조작된 논거에 불과한 것이다.

이에 일본에 있던 김대중은 일본 언론을 통해 반대 성명을 발표한다.

얼마 후 박 정권은 비상국무회의를 열어 헌법 개정안을 공표했다. 이로써 오로지 박정희 개인을 위한, 독재를 인정한 유신헌법이 등장했다. 나는 곧바로 반대 성명을 발표했다. (중략) 나는 일본 신문, 잡지, 텔레비전 등을 통해서, 또는 일본 내 집회에 참석하여 박 정권의 음모와 야욕을 발가벗겼다. 그러면서 한국 국민들은 결코 자유민주주의를 포기하지 않을 것임을 강조했다.

- 김대중 자서전 1권, 288~289쪽.

특히 김대중은 김영삼과는 다르게 북한과 박정희 정권의 ‘암묵적 공생관계’에 주목한다. 박정희 정권과 북한 정권, 양측 모두 독재를 위해 국민들과 해외의 눈을 속였다는 분석이다.

박정희가 독재 체제를 강화하면서 민주 세력을 체포, 고문, 연금하고 있음에도 북한은 적심자회담과 공동위원회 구성에 합의하였다. 뿐만 아니라 박 정권의 헌법 개정과 보조를 맞춰 북한도 헌법을 고쳤다. 참으로 이상했다. 

(중략) 북한의 이러한 태도는 미국과 일본의 일부 지식인들에게 ‘남과 북이 진정 통일을 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그릇된 인식을 심어 주었다. 미국과 일본 정부는 안정과 안보라는 명분으로 박 정권의 독재 강화를 위한 일련의 조치를 묵인했다. 그러나 남과 북의 전향적 남북 관계 천명은 독재 정권이 통일이란 환상으로 국민들을 속여 서로 권력 기반을 공고히 한 것에 불과했다. (중략) 나와 민주 세력에게는 암흑의 시기였다. 우리는 철저히 고립됐다.

- 김대중 자서전 1권, 292쪽.

 

1973.02.27. 제9대 총선 

유신 체제의 공포 하에서 처음으로 실시된 제9대 총선은 참담했다. 당시 헌법에 따라 선거구당 2명을 선출하는 중선거구제로 치러졌지만, 총 의원정수 219명 중 지역구 의원은 146명에 불과했다. 전국구제도는 강제로 삭제됐고, 정권 감시 하에서 친여(親與) 성향으로 뽑힌 대의원 73명이 전국구 의원을 대체했다. 

그 결과 여당은 모든 지역구에서 1명씩 당선돼 지역구의 50%에 해당하는 73명을 확보했다. 대통령이 선출한 유정회를 합치면 도합 66.7%의 의석을 자치한 셈이다. 신민당은 52명(35.6%), 민주통일당은 2명(1.4%), 무소속은 19명(13.0%)을 기록했다. 

당시 국내에서 개표 상황을 지켜보던 김영삼은 “어처구니없는 제도”라며 분노했지만, 동시에 낙관적인 전망을 내놓았다. 중선거구제에도 불구하고 여당이 지역구 의석에서 절반밖에 획득하지 못한 것은 유신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이 드러난 결과라고 평가한 것이다.

1973년 2월 27일, 유신 이후 첫 국회의원 선거인 제9대 총선이 실시됐다. 박정희의 민주공화당은 38.7%의 득표율로 73석을 얻었다. 신민당은 32.6%의 득표율로 52석, 통일당이 10.1%의 득표율로 2석, 무소속이 18.6%로 19석이었다. 

유신체제의 공포 분위기하에서 치른 부정선거로도 박정희는 의석의 절반밖에 획득하지 못했다. 73석을 얻은 것도 그나마 유신이 도입한 중선거구제 덕분이었다. 유신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과 불신이 명백하게 드러난 선거결과였다.

그러나 3월 7일 열린 소위 ‘통일주체국민회의’는 ‘유신정우회’(유정회) 국회의원을 선출해 박정희에게 또 다른 73석의 국회 의석을 보태 주었다. 유신체제는 국회의원 정수의 3분의 1을 박정희가 일괄 추천하고,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이를 무조건 통과시키는 어처구니없는 제도였다. 

-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2권, 24~25쪽. 

일본 도쿄에 있던 김대중도 김영삼과 마찬가지로 총선 결과를 접한 후 ‘뜻밖의 선전’으로 생각했으며, 민심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1973년 1월 5일 나는 다시 일본으로 돌아왔다. 도쿄 체류 중에 한국 국회의원 선거 결과를 접했다. 유신 체제 하의 첫 선거에서 야당이 선전했다는 소식이었다. 그러나 이는 여당과 야당이 짜고 치른 선거였다. 이미 대통령이 의석의 3분의 1을 추천하고 있었기에 과반 확보는 문제가 없었다. (중략) 하지만 한 가지 의미 있는 것은 지역구 선거에서 여당은 과반수 의석을 얻었지만 득표율은 40퍼센트에도 못 미쳤다는 사실이다. 야당의 예상 밖 선전으로 국민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나마 위안이었다.

- 김대중 자서전 1권, 292~293쪽.

 

1973.08.08. 

박정희 정권의 폭정은 선거에 그치지 않았다. 중앙정보부는 1973년 8월 일본 도쿄의 한 호텔에 머물러 반유신 활동을 전개하던 김대중을 납치해 정계 은퇴를 박한 후, 13일 서울의 자택 부근에 풀어준다. 

김대중 납치사건은 본 대통령 회고사 시리즈에 상세히 기술돼 있다.

(http://www.sisa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96256)

반면 유진산 총재를 비롯한 신민당 의원들은 이 사건을 두고 침묵했다. 정권의 눈치를 보며 국회에 나서서 항의하지 않은 것이다. 이에 김영삼은 국회 연설을 통해 “김대중 납치사건은 국가 존립에 관한 문제”라고 항의한다.

박정희와 중앙정보부가 직접 관련된 사건에 대해 야당의원들은 한결같이 질문에 나서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유신 이후 박정희의 철권통치는 더욱 살벌한 상황을 조성하고 있었다. 국회의 안건으로 의제를 정해 놓고도 유진산 총재를 비롯해서 어느 누구 하나 선뜻 나서는 의원이 없었다. 기가 막힌 일이었다. 나는 질문을 자청했다. 김대중이 비록 대통령후보 경쟁에서 나의 경쟁자이긴 했지만 납치 사건은 개인의 일이 아니었다. 민주주의와 인권탄압에 대한 투쟁은 야당의 의무였고 나의 신념이기도 했다.

“존경하는 의장, 그리고 친애하는 의원선배 동지 여러분! 오늘 이 사람이 김대중씨 사건을 가지고 질문을 하려고 하니, 무언지 모르게 가슴이 답답하고 서글픈 생각을 금치 못합니다. (중략) 동지의 한 사람인 김대중씨에 대한 정치테러 사건에 관한 질문을 하려고 하니, 이 나라의 운명이 왜 이다지도 기구하며 이 나라 국민의 처지가 왜 이다지도 불행한지 탄식하고 싶은 심정뿐입니다.

나는 일찍이 이와 같은 정치테러야말로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나아가 이 나라를 망치는 어리석은 만행이라고 몇 차례나 경고했고 또 충고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러나 아직도 정치테러의 풍조가 이 땅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 나라가 과연 어디로 갈 것인가?

여러분! 나는 이 문제가 한 정권의 문제가 아니요 국가존립에 관한 중대한 문제로서, 우리 국회가 이번 기회에 심각하게 다루지 아니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중략) 이날 내가 무엇보다 강조하고 싶었던 말은 “우리에게는 지금 통치가 있을 뿐 정치가 없다. 정치가 없는 곳에 민주주의는 없다”는 것이었다. 

-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2권, 27~39쪽.

 

1973.12.17.~1974.08月

김영삼은 김대중 납치사건뿐 아니라 모든 사안에 침묵을 유지하는 유진산 총재 체제의 ‘온건야당’ 기조에 대해 강한 반발을 품고 있었다. 그는 부총재로서 외신 기자를 만나 박정희 정권의 유신헌법을 비판하고, 유진산 총재를 만나 ‘선명야당’ 기치를 되찾아야 한다고 설득한다. 

진산체제하의 신민당은 실상 유신체제에 길들여져 가고 있었다. 나는 그 기류를 선회시키고자 무진 애를 썼다. 1973년 12월 17일 부총재로 있던 나는 서울주재 외국특파원과 회견하는 자리에서 박정희 정권에 대해 헌법 개정을 요구했다. 나는 이때 ①현재의 독재 헌법의 개정과 민주체제의 회복 ②중앙정보부의 해체 ③무분별한 외자도입 정책의 중지 ④남북대화의 주관을 중앙정보부로부터 국토통일원으로 이관하고 민간주도형으로 전환할 것 등을 주장하고, “앞으로는 학생·기독교도, 그리고 같은 야당인 민주통일당 등과 연대하여 박 정권과 대결할 것”이라고 결의를 밝혔다.

(중략) 드디어 진산도 결단을 내렸다. 신민당이 개헌에 전력투구할 것임을 결의하자는 것이었다. 나의 강력한 주장을 받아들인 것이다.

-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2권, 39~40쪽.

그러나 신민당이 강경 노선으로 전환하자마자, 박정희는 곧바로 긴급조치를 발동시켜 당을 방해한다. 

신민당이 개혁추진을 당론으로 확정한 바로 이 날 정부는 곧바로 긴급조치 1호와 2호를 발동, 유신헌법 개폐 주장을 일체 금지했을 뿐만 아니라, 유신헌법을 부정·반대·비방하는 일체의 행위에 대해 함구령을 내렸다. 헌법관련 언동에 대해서는 한 줄의 기사도 못 쓰게 보도금지 조항을 두었고, 이상과 같은 금지조항을 위반할 때는 영장 없이 구속할 수 있으며, 1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2권, 39~41쪽.

그러던 중 유진산이 1974년 지병으로 사망하자, 그 해 8월 김영삼은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총재로 선출된다. 그는 보란 듯이 유신 정권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하는 선명 노선을 내세웠으나, 당내 반발에 직면해 크게 효과를 보지 못했다.

이에 김영삼은 자서전을 통해 “나의 개헌투쟁은 당내에서부터 강한 역풍(逆風)에 부딪혔다”며 “내적인 취약점과 유신체제가 가지는 정치적 제약이란 장벽에 끊임없이 부대끼는 동안 국회는 문을 닫아 버려 투쟁의 무대를 찾지 못하게 됐다”고 비판한다.

이제 나는 1955년 민주당 창당 이래 한국 정통 보수야당의 명맥을 이어 온 신민당의 총재라는 중책을 맡게 되었다. (중략) 1974년의 신민당 전당대회는 정통야당의 새로운 출발이고 변혁이었다. 나의 총재 당선은 선명과 강경의 야당성 회복에 대한 국민과 당원의 열망을 담은 것이었다. 동시에 유신 이후 공포정치를 통해 장기 독재체제에 들어간 박정희에 대한 국민적 도전이 본격화되었다는 의미를 가진 대회였다.

(중략) 나는 선명야당을 기치로 신민당의 개헌투쟁을 시작했지만, 당내에서는 나의 투쟁노선을 탐탁지 않게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일부에서는 처음부터 “감정적인 선명보다 이성에 의해 선명해야 한다”며 나의 정면투쟁을 반대하고 나섰고, 농성에 돌입했을 때는 “우리가 누군가에 의해 강제 차압당해 끌려가는 꼴”이라며 노골적으로 공격했다.

(중략) 취임 후 4개월 동안 숨 가쁘게 달려온 나의 개헌투쟁은 당내에서부터 강한 역풍(逆風)에 부딪혔다. 이런 내적인 취약점과 유신체제가 가지는 정치적 제약이란 장벽에 끊임없이 부대끼는 동안 국회는 문을 닫아 버려 투쟁의 무대를 찾지 못하게 했다. 

-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2권, 52~70쪽.

박정희의 무력 탄압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의 반감은 거세졌다. 학계와 종교계, 재야 민주계가 모두 나서 유신 반대 시위를 벌이자, 상황을 지켜보던 김종필은 하나의 묘수(妙手)를 제안하게 된다. 유신 찬반(贊反) 여부와 대통령 재신임을 동시에 걸고 국민투표에 부치자는 것이다. 처음에 제안을 듣던 박정희는 버럭 화를 냈지만, 승산이 있다고 생각해 국민투표를 실시하게 된다.

김대중 납치사건이 터진 1973년 가을부터 대학가에서 유신 반대 데모가, 종교계와 재야에서는 시국선언 등이 이어졌다. 그때 박 대통령은 긴급조치를 잇따라 선포하며 강경 대응했다. 하지만 유신 반대 목소리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나는 박 대통령에게 유신의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를 하자고 제안했다. 박 대통령은 처음엔 “그따위 짓을 왜 해”라고 야단을 쳤다. 얼마 뒤 다시 건의를 했다.

“아무래도 국민투표를 하셔야 될 것 같습니다. 찬성투표가 적게 나오면 관두면 되지 않습니까. 잘 나오면 생각대로 계속하시고….”

박 대통령은 한참을 생각하더니 “그래. 해보자”고 결심했다.

- 김종필 증언록 <JP가 말하는 대한민국 현대사>, 406쪽.

 

1975.02.12 유신헌법 국민투표

결국 현행 체제 및 박정희 대통령의 자리를 건 국민투표가 실시됐다. 이날 치러진 투표에는 약 1341만 3325명의 유권자가 참여, 79.8%의 투표율을 기록했다. 그리고 73.1%라는 압도적인 찬성표를 기록하며, 유신체제와 박정희 정권은 그대로 유지됐다.

이에 국민투표 제안자인 김종필은 “일단 고비는 넘겼다”며 한숨 돌리는 모습이다.

1975년 1월 22일 박 대통령은 “이번 국민투표는 비단 형행 헌법에 대한 찬반 투표일 뿐 아니라 나 대통령에 대한 신임 투표로 간주하고자 한다. 만일 국민 여러분이 현행 헌법의 철폐를 원한다면 나는 그것을 대통령에 대한 불신임으로 간주하고 즉각 대통령직에서 물러날 것이다”고 발표했다. 2월 12일 유신 찬반 투표가 부쳐졌다. 투표율 79.8%에, 찬성률 73.1%였다. 일단 고비는 넘겼다.

- 김종필 증언록 <JP가 말하는 대한민국 현대사>, 406~407쪽.

그러나 당시 국민투표 제도에는 중대한 문제점이 있었다. 투표과정이 비상계엄과 같은 공포 분위기에서 이루어진데다가, 저명한 정치인과 학자들은 언론을 통해 박정희에 대한 지지를 호소했다. 각 신문에는 유신헌법안에 찬성하는 표어가 의무적으로 게재됐고, 여러 행정기관과 국가안보기구(중앙정보부)의 개입도 끊이지 않았다.

이와 관련해 하경철 헌법재판소 재판관은 ‘국가배상법 제2조 제1항 단서 등 위헌소원’에 대한 반대의견을 통해 “비록 국민투표에 의하여 확정되기는 하였으나, 국민투표제도가 이론적인 장점에도 불구하고 집권자에 의한 정치적 이용가능성이라는 폐해가 있다”며 이같은 투표 결과에 대해 ‘위헌적 헌법 개정의 산물’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하 재판관은 “개별조항별로 찬반을 묻는 것이 아니라 개정헌법전체에 대한 일괄적인 찬반 투표이기 때문에 개별조항에 대한 반대방법이 없었다는 점, 계엄 등 공포 분위기와 그 연장선 아래서 국민투표가 시행된 점 등을 고려할 때 이 사건 헌법조항이 진정한 민의를 반영한 헌법개정권력의 결단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조목조목 지적했다.

국민투표를 거쳤다고 하여서 절차적 합법성의 결여가 치유되는 것은 아니다. 만일 국민투표에 의하여 확정되기만 하면 어떠한 내용의 헌법개정도 가능하다고 본다면, 국민투표는 불법적 “힘”의 결단을 곧 “법”으로 만드는 합법화수단 외에 다른 아무 것도 아닐 것이며, 독재 권력에 의하여 언제든지 남용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국민투표를 거쳐서 헌법 개정이 되었다 하여 국민투표를 거치지 않은 헌법개정의 경우보다 더욱 높은 정당성을 부여하거나 우위의 효력을 부여할 수 없는 것이며 또 이를 이유로 하여 위헌심사가능성을 부인할 수도 없다 할 것이다.

- 국가배상법 제2조 제1항 단서 등 위헌소원 (헌법 제29조 제2항) <2000헌바38, 2001. 2. 22.>

국민투표에서 이기고 종신집권을 보장 받은 듯 했던 ‘유신군주’ 박정희는, 나머지 임기를 마치지도 못한 채 1979년 10월 26일 최측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탄에 생을 마감하게 된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국민투표에서 이기고 종신집권을 보장 받은 듯 했던 ‘유신군주’ 박정희는, 나머지 임기를 마치지도 못한 채 1979년 10월 26일 최측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탄에 생을 마감하게 된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박정희 유신 몰락, 자업자득… 유신 없었다면 칭송받았을 것”

국민투표 끝에 유신헌법은 유지됐고, 서슬 퍼런 박정희 정권도 기세를 잃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종신집권을 보장 받은 듯 했던 ‘유신군주’ 박정희는, 나머지 임기를 마치지도 못한 채 1979년 10월 26일 최측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탄에 생을 마감하게 된다. 이날 박정희의 유신체제도 우리에게 종말을 고한다.

유신의 종말 과정은 본지 243호 커버스토리에서 확인할 수 있다.

(http://www.sisa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1792)

이와 관련해 임현백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는 지난 2012년 열린 국가경영전략연구원(NSI) 창립 20주년 기념 심포지엄 발제 자료에서 “(박정희가) 죽음을 회피하기 위한 합리적 선택으로 권력을 나누고, 권력을 후계자에게 넘겨주고, 최종적으로 권력의 소재지 결정을 민주적 경쟁의 결과에 맡기는 민주화 조치를 취했더라면 그는 근대화의 아버지로 칭송을 받으면서 노후를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라며 “결국 박정희의 몰락과 유신체제의 붕괴는 박정희 자신의 선택의 결과”라고 해석했다.

박정희는 1970년대 대한민국을 비쳐주는 거울이다. 그는 오늘날의 ‘한국형 권위주의’ 체제의 근간(根幹)이 되는 유신체제를 수립했고, 국가 주도형 근대화의 역사를 썼다.

그는 자신이 만들어 낸 유신으로 인해 영광과 패배를 동시에 안았다. 7년간의 ‘유신 여정’은 폭력으로 시작해, 폭력으로 끝나고 말았다는 결론이다. 마지막으로 김영삼과 김대중, 김종필과 노태우는 유신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넷의 회고록에서 발췌해 요약한 ‘한줄평’으로 글을 마무리한다.

김영삼, 민심의 한계에 직면한 박정희가 꺼내든 궁여지책. 

유신체제는, 박정희의 온갖 자기 합리화에도 불구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부정선거로도 독재에 대한 민심의 저항을 막는 데 한계에 봉착한 박정희가 장기집권의 궁여지책으로 생각해 낸 정권 연장책에 불과했던 것이다.

-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2권, 25쪽.

김대중, 조국을 위한다면서 정작 국민들의 민주주의 열망을 배반한 조롱거리.

박정희는 대통령 특별 선언을 통해 국회를 해산하고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참으로 가증스러웠다. 조국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 국회를 해산하고 계엄령을 선포한다니, 기가 막혔다. (중략) 이런 조롱거리가 세상 어디에 있을 것인가. 박 정권은 헌법을 바꾸고 이를 ‘유신헌법’이라고 했다.

(중략) 이처럼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국민들인데 지금 이 시각에 어떤 심정으로 이 사태를 받아들이고 있을 것인가. 얼마나 절망하며 얼마나 격분하고 있을 것인가. 가슴에 뜨거운 그 무엇이 올라왔다. 그것은 슬픔이었고, 또 분노였다. 나는 박 정권에 맞서 싸우기로 결심했다. 목숨이 끊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투쟁하는 것이 국민들을 향한 내 의무이며 책임이라 느꼈다.

- 김대중 자서전 1권, 285~286쪽.

노태우, 민주주의에 역행했지만 ‘자주국방’을 이뤄낸 선택.

1972년 10월에 단행된 제3공화국의 유신 바람은 군에도 세차게 불어왔다. (중략) 이후 한국 정치는 상당기간 암흑기에 빠지게 되고, 급기야는 박 대통령 스스로 비운을 맞는 결과를 빚게 된다. 당시 박 대통령이 장기 집권을 꾀하기 위해 이 조치를 취했다는 이야기가 나돌았는데,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무리한 조치였다는 평가에는 나 역시 이견(異見)이 없다.

다만 여기서 내가 언급하고 싶은 것은 당시 군 일선에서는 상부 지휘부는 모르겠지만 유신의 개념을 정치적인 것과는 전혀 별개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이다. 나는 물론이고 다른 정규 육사 출신들도 유신체제를 군과 관련해서는 ‘자주국방’이라는 차원해서 이해했다.

(중략) 우리도 자주성과 자아의식을 찾는 일이 절실한 과제였다. (중략) 유신을 전후해, 각개전투를 비롯한 모든 교범을 우리의 지형, 우리의 환경에 맞도록 새롭게 만드는 일이 시작되었다. 육본에서는 전투발전부가 발족해 자주화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중략) 유신을 군에서는 사회와는 다른 시각으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사가(史家)들은 감안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 노태우 회고록 <국가, 민주화 나의 운명> 上, 176~178쪽.

김종필, 오늘날의 국부와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도와준 '비상수단'.

어떤 사람들은 나에 대해 3선 개헌보다 더 비민주적인 유신 개헌을 어떻게 찬성할 수 있었는지 의아하다는 얘기를 한다. 하지만 1970년대 들어와 국내외 정세는 첩첩이 어려움이 밀려와 비상수단을 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중략) 박 대통령과 나는 국가적 시련을 겪으면서 “1960년대가 농업과 경공업을 일으킨 증산의 시대라면 1970년대는 우리 땅을 우리 손으로 지키는 방위산업과 중화학공업의 시대여야 한다. 이를 바탕으로 1980년대는 복지 선진 국가로 도약할 것이다”는 비전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통령이 국가 총동원 체제를 준비하고 그것도 한시적으로 하겠다는 데 반대할 일이 아니었다.

유신은 많은 비판과 저항을 불렀다. 유신헌법 자체가 국가의 생존을 위해 국민을 누를 수밖에 없다는 인식에서 태어났다. 국가와 국민을 다 만족시킬 수 없는 시대도 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국부와 자유를 누리는 것은 유신 때 희생을 감수한 국민들 덕분이다. 그분들에게 송구하고 고마울 뿐이다. 그 덕에 김일성의 서울 환갑잔치를 못 하게 만들었고 나라를 지켰다.

- 김종필 증언록 <JP가 말하는 대한민국 현대사>, 404~40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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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경 2019-11-08 15:28:11
민주주의시대에 살고 있는 지금 사람들 은 이해할까요?

최진우 2019-11-08 14:45:12
한쪽만 바라보는 편협한 기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