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필담] 누가 험지를 만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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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필담] 누가 험지를 만드나?
  • 한설희 기자
  • 승인 2019.12.09 11: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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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촌야도에서 지역주의, 이제 경제논리로… 신 험지는 없다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한설희 기자]

지역주의는 1971년 7대 대선에서 박정희의 공화당 세력이 선거 전략으로 적극 이용하면서 정치권의 변수로 떠올랐다는 것이 일반적 해석이다. ⓒ박정희대통령 기념관
지역주의는 1971년 7대 대선에서 박정희의 공화당 세력이 선거 전략으로 적극 이용하면서 정치권의 변수로 떠올랐다는 것이 일반적 해석이다. ⓒ박정희대통령 기념관

선거철만 되면 정치권에 등장하는 단골 소재가 있다. 바로 험난한 땅, ‘험지(險地)’다. 전쟁영화나 무협지 이야기가 아니다. 장수(將帥)가 직접 선봉에 서는 군사처럼, 정치인들은 선거가 다가올 때마다 중량감 있는 인사들이 험지에 출마할 것을 직·간접적으로 요구하곤 한다.

험지란 무엇인가. 문자(地) 그대로만 따져 보자면 진보 정당에게는 TK와 PK, 보수 정당에게는 호남 지역을 의미할 것이다. 한국의 선거를 설명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상수, 바로 지역주의 때문이다. 

지역주의는 1971년 7대 대선에서 박정희의 공화당 세력이 선거 전략으로 적극 이용하면서 정치권의 상수로 떠올랐다는 것이 일반적 해석이다. 71년 당시 야권의 새로운 대선 후보로서 돌풍을 일으키던 김대중을 폄하하기 위해 공화당이 들고 나온 것이 바로 지역감정 조장이었다.

특히 이효상 국회의장은 “경상도 대통령을 뽑지 않으면 우리 경상도는 개밥의 도토리가 될 것이다”, “박정희는 신라 임금의 자랑스러운 후손이니 그를 대통령으로 뽑아 이 고장의 임금으로 모시자” 등의 지역색 짙은 발언으로 선거 유세를 지원하기도 했다.

이처럼 김대중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와 호남에 대한 반감이 영·호남 지역 간의 라이벌 의식과 결합해, 영남(TK와 PK) 대 호남이라는 지역 정체성이 확립됐던 것이다. 

공화당 이효상, 대구에서 패배… 20대 총선 민주당·국민의당 약진

그러나 험지는 굴곡진 땅일 뿐,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불모지가 아니다.

지역주의가 기승을 부리던 박정희 정권 시절, ‘박정희의 은사(恩師)’로 불리며 지역주의의 덕을 톡톡히 보던 이효상 의장은 71년 대선 직후 치러진 8대 총선에서 패배했다. 무려 대구 지역에서,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신민당의 신진 정치인이던 신진욱 후보에게 진 것이다. 당시 신진욱 후보는 6대 총선에선 민정당 후보로, 7대 총선에선 신민당 후보로 대구에 연속 출마했지만 번번이 이효상에게 밀려 낙선한 ‘승률 0%’의 인물에 불과했다.

이 ‘지역주의 무용론’의 사례는 과거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2002년 대선에선 부산 출신의 노무현 후보가 호남을 지지 기반으로 하는 민주당의 후보로서 대통령에 선출됐으며, 지난 20대 총선에선 신생 정당이자 제3당인 국민의당이 호남 지역과 수도권에서 약진했다. 

특히 20대 총선에선 진보 정당 계열의 후보자 9명이 PK 지역에서 당선돼 진보정당의 세를 넓혔고, TK 지역에서도 김부겸 의원이 민주당 깃발을 들고 당선돼 화제가 됐다. 보수 우세 지역이라는 송파구와 강남구에서도 민주당이 3명의 당선자를 배출하면서 ‘강남 3구는 보수 3구’라는 신화도 무너졌다. 

결국 ‘여촌야도’를 ‘지역주의’가 대체하고, ‘경제논리’가 ‘지역주의’를 다시 잡아먹으면서 험지는 계속 변화해왔다. ⓒ시사오늘
결국 ‘여촌야도’를 ‘지역주의’가 대체하고, ‘경제논리’가 ‘지역주의’를 다시 잡아먹으면서 험지는 계속 변화해왔다. ⓒ시사오늘

‘지역주의’ 이전엔 ‘여촌야도’ 험지론… 험지는 살아 움직인다

그렇다면 지역주의 이전에 험지라는 개념은 없었을까.

해방 후 이승만 정부부터 민주화 시기 전까지 한국의 선거정치를 장악한 것은 권위주의 정부를 지지하는 지방과 민주주의 야당을 지지하는 도시의 대립, 일명 ‘여촌야도(與村野都, 시골은 여당 도시는 야당)였다. 

수도권에 가까울수록 야당이, 시골에 가까울수록 여당이 우세하다는 여촌야도(與村野都) 현상은 1958년 제4대 총선부터 양김 시대까지 ‘선거판’을 지배하는 룰이었다. 4대 총선에서 여당인 자유당은 126석, 야당인 민주당은 80석을 얻어 지금의 양당제 구도가 만들어졌는데, 이때 여당은 안정을 꾀하는 시골에서, 야당은 변화를 추구하는 도시에서 대거 지지를 받는 이 ‘여촌야도’ 현상이 본격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권위주의 시기, 특히 군사 정권 하에서 야당은 지식인, 대학생, 중산층, 화이트칼라 등을 주요한 지지기반으로 삼은 반면, 정부여당은 농촌사회를 지지기반으로 설정해 지리적 배열이 만들어졌다. 한국은 1970년대 전까지 농민이 투표자들의 대다수를 차지하던 농촌사회였기 때문에 여촌야도에 기반한 정부가 별 탈 없이 정권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박정희 정권이 70년대 지역주의를 적극 조장한 것도 이 여촌야도 현상 때문이다. 수도권에서의 패배를 예감한 박 정권은 ‘호남보다 인구수가 많은 영남을 안고 간다’는 정치공학으로, 영호남 배타적 지역감정을 선거 전략으로 사용했다. 박 전 대통령의 예감대로, 야당인 신민당은 8대 총선에서 서울 19개의 지역구 중 18개의 지역에서 승리하며 ‘신민당 돌풍’을 일으켰다. 

그런 여촌야도 현상도 이젠 옛말이 된 시점이다. 

진보 정당 후보는 ‘강남 3구’를 비롯해 수도권 중심 화이트칼라 지역에 출마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민주당이 야당이던 19대 총선에서도 강남 3구의 7개 지역구를 모두 새누리당이 차지했으며, ‘그나마 진보가 우세하다’는 평을 듣던 강남갑 지역마저 새누리당 심윤조 후보가 민주통합당의 김성욱 후보를 두 배 이상 앞섰다. 

결국 ‘여촌야도’를 ‘지역주의’가 대체하고, ‘경제논리’가 ‘지역주의’를 다시 잡아먹은 것이다. 

누가 험지를 만드나… 여촌야도, 지역주의 모두 사람에 의해 무너져

정치가 생물인 것처럼, 험지 역시 생물(生物)과도 같다. 농촌 대 도시, 또는 영남 대 호남이라는 대결 감정은 역사적으로 형성된 정서를 바탕으로 정치인들이 선거철마다 재확산시켰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선거 때문에 만들어진 ‘험지’는, 도리어 ‘선거’를 통해 확산되고 발전된 것이다. 

누가 험지를 만드나. 여촌야도인가, 지역주의인가? 혹은 4년마다 각종 대결구도를 선거에 적극 동원하는 기득권 정치인인가. 어쩌면 답을 알면서도 관성처럼 기득권에 휩쓸리는 선택을 하게 되는 우리 유권자들일 수도 있다.

노력하는 사람에 의해 험한 땅이 개간됐듯, 지역주의는 한편으로 매우 견고해 보이지만 누군가에 의해 결국 깨어질 수 있었다. 험지는 두드리는 사람과 기존의 대결논리를 대체할 만한 신(新)현상만 있다면 결코 험지가 아니다. 신(新)험지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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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명 : 사랑에 의해 고무되고 지식에 의해 인도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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