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신문 보기] 박홍 두고 이념전쟁… “용기 있는 지식인” vs “무지와 편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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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신문 보기] 박홍 두고 이념전쟁… “용기 있는 지식인” vs “무지와 편견”
  • 한설희 기자
  • 승인 2019.12.31 02: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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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적 배경…김일성 사망, 남북회담 결렬로 ‘대북관 주목’
조선 1면 “좌경학생 단호조치” vs 한겨레 4면에 “우익 한 일 없다 개탄”
사설서 조선 “용기 있는 지식인” vs 한겨레 “지식인의 무모함”
옛날신문, 반공주의 보수와 반매카시즘 진보로 이념전쟁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한설희 기자]

〈시사오늘〉은 과거의 인물, 그리고 과거의 사건에 대한 당대 신문들의 평가를 재조명하며, 보수와 진보 언론 양극단의 평가를 비교해보기로 했다. 첫 번째는 故 박홍 서강대 총장의 1994년 “주사파(主思派) 배후에 김정일이 있다”는 발언의 파장이다. ⓒ시사오늘 김유종
〈시사오늘〉은 과거의 인물, 그리고 과거의 사건에 대한 당대 신문들의 평가를 재조명하며, 보수와 진보 언론 양극단의 평가를 비교해보기로 했다. 첫 번째는 故 박홍 서강대 총장의 1994년 “주사파(主思派) 배후에 김정일이 있다”는 발언이다. ⓒ시사오늘 김유종

언론은 이념과 정파성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사상을 가진 인간이 글을 작성하는 한, 또 그 인간이 모여 집단을 이루는 한 아마 ‘이념으로부터의 완벽한 독립’은 불가능할 것이다. 

이념은 무색무취며, 아무 죄도 없다. 언론사나 기자가 신념과 소신을 가지고 사회의 다양한 목소리를 대변할 때, 정파성은 시민들의 선택권을 보장하고 다원화된 사회를 반영한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 있다. 그러나 언론이 이념에 치우쳐 ‘권력의 감시견’이자 ‘민주주의의 파수꾼’ 직무를 유기한다면, 그때 정파성은 권력의 칼날이 돼 시민의 알 권리를 해치게 된다.

실제 한국 언론의 정파성에 대한 시민들의 평가는 대체로 부정적이다. 영국 옥스퍼드대학교 부설 로이터저널리즘연구소가 지난 6월 발표한 ‘디지털뉴스리포트 2019’에 따르면, 세계 주요 38개국 중 한국 언론의 신뢰도는 지난 2016부터 4년 연속 최하위를 기록했다. 한국 언론이 이념을 넘어 특정 정당에 편향적인 보도를 하고 있다는 인식 때문이다.

‘조·중·동(조선일보·중앙일보·동아일보)은 보수’, ‘한·경·오(한겨레·경향신문·오마이뉴스) 진보’ 라는 프레임이 증명하듯, 한국 언론은 이념에 따라 정치권력과 묵시적 연대를 하고 있다는 시민들의 불신 및 비판에 직면하고 있다.

이에 〈시사오늘〉은 과거의 인물, 그리고 과거의 사건에 대한 당대 신문들의 평가를 재조명하며, 보수와 진보 언론 양극단의 평가를 비교해보기로 했다. 여기서 ‘어떤 평가가 옳은가’에 대한 가치 판단은 전면 배제한다. 판단은 ‘사상의 자유’를 만끽하면서도, 동시에 ‘과잉 이념’의 시대에 지쳤을 독자들에게 맡길 예정이다.

첫 번째 주자는 지난 11월 9일 별세한 박홍 신부(전 서강대학교 총장)다. 박 총장의 1994년 “주사파(主思派) 배후에 김정일이 있다”는 발언은 ‘김일성 사망’이라는 시대적 배경과 맞물려 큰 파문을 일으켰고, 여론에 의해 여과 없이 보도되면서 한국 사회는 ‘색깔론’이라는 이념 논쟁에 빠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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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적 배경…김일성 사망, 남북회담 결렬로 대북관 ‘주목’

1994년 7월 18일, 김영삼 대통령은 일부 대학 총장들과 함께 오찬간담회를 열었다. 이때 박홍 서강대 총장은 언론과 정부 관계자 앞에서 당시 운동권 학생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학생 운동을 북한의 주체 사상을 신봉하는 주사파 학생들이 장악하고 있다. 이들은 남한의 사노맹(사회주의 노동자 동맹)과 북한의 사노청(사회주의 노동자 청년동맹)과 연계돼 있으며, 나아가 김정일의 지시를 받고 있다.”

대학 내 학생 운동권이 북한과 직접 연계됐으며, 그들이 북한 김정일의 지령 하에 움직이고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박 총장의 파격 선언 며칠 전 김일성이 과로로 열차에서 사망했다는 내용이 보도되면서, 간담회 전날(17일)엔 예정됐던 남북 정상 회담이 결렬되는 등 사회적 논쟁이 발발했다. 게다가 일부 대학교에서 김일성 분향소를 설치하는 문제로 설전이 오가면서, 시민들의 ‘대북관’에 대해 정치권의 관심이 쏠리던 상황이었다.

7월 19일자 조선일보 1면. ⓒ데이터베이스 조선
7월 19일자 조선일보 1면. ⓒ데이터베이스 조선

19일자 기사
조선 1면 “좌경학생 단호조치”
동아 1면 “주사파 북 지시받고 있다”
한겨레 4면 “학생들 북한 지시받아…우익 한 일 없다 개탄”
경향 1면 “일부 운동권은 김정일 장악아래 있다. 北서 팩스로 지시”

한국 내 최고(最古) 보수 논조 신문으로 손꼽히는 언론사 〈조선일보〉는 19일자 1면 헤드라인으로 ‘좌경학생 단호조치’라는 제목의 기사를 싣는다. 이들은 김영삼 대통령이 18일 박홍 총장의 발언에 대한 답으로 “폭력 좌경 학생들을 국가기강 차원에서 단호히 조치할 것”이라고 말한 것을 집중 조명했다. 

〈동아일보〉도 이날 1면에 “주사파 북 지시받고 있다”는 기사를 올렸으며, 〈조선일보〉처럼 대학 총장들의 발언 적시와 김 대통령의 호응에 주목했다.

7월 19일 경향신문 1면.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7월 19일 경향신문 1면. 박 총장의 발언을 사실 그대로 적시하는 내용의 기사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반면 국내 최대 진보 성향 일간지 〈한겨레〉는 해당 내용의 기사를 4면에 실었다. ‘학생운동 어떻게 보나…대통령·총장등 간담회’라는 소제목 아래 “학생들 북한 지시받아…증거 있다”라는 박홍 총장의 발언과, “우익 한 일 없다 개탄·강력대응 강조”라는 홍일식 고려대 총장 등의 발언을 같은 비중으로 다루기도 했다.

이들은 특히 큰 글씨로 “우익들이 (주체성과 관련해) 한 일이 없는 것이 문제”라던 홍일식 총장의 발언을 강조하며 ‘우익과 주사파 둘 다 문제’라는 양비론적인 태도를 암시했다.

비슷한 논조의 〈경향신문〉은 1면 메인 기사에 사실을 그대로 적시했다. 또한 1면에 전국 100여 개 대학에서 김일성 죽음에 대한 조의 표한 것과 ‘김일성 분향소 설치’에 대한 논란도 함께 보도했다. 

7월 20일자 한겨레 1면.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7월 20일자 한겨레 1면. 박 총장의 발언으로 '대북 강경론'이 불거지는 것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를 담고 있다.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사설 비교
조선 “용기 있는 지식인” vs 한겨레 “지식인의 무모함” 

박홍 발언에 대한 언론의 평가는 주로 사설 면에서 이뤄졌다. 〈조선일보〉는 박 총장의 발언 내용 자체를 사실로 믿고 “용기 있는 행위”, “바람직한 지식인의 행위”라고 묘사하는 반면, 〈한겨레〉는 “편견과 무지”, “무책임한 행위”로 규정한 것이다.

〈조선일보〉는 사설을 통해 “북한의 사주를 받은 운동권들이 박홍 같은 용기 있는 지식인을 압박하고 있다”며 “민주당 역시 주사파 논쟁과 관련해 양비론적 입장을 나타내며 어정쩡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고 운동권 학생들과 진보 성향의 정치인들을 동시에 비판한다. 

“솔직하게 말해서 우리 사회의 지각 있는 사람들은 비록 발설을 하지 않고 있을 뿐이지 운동권학생들의 그간의 과격시위와 선동 선전행태만 보고도 그것이 결코 대한민국을 위하려는 순수한 젊은이의 정열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다 알고 있었다. 

(중략) 그 점에서 생각하면 박홍총장은 용기 있는 지성인 역할을 했다. 반독재 민주화 운동이 대학사회를 휩쓸었을 시절에 양식 있는 행동을 했던 그는 이제 민주화 실천기의 우리 사회를 파괴하려고 광분하는 주사파 운동권의 정체를 과감히 폭로하는데도 앞장서고 있다. 그렇지만 그의 용기는 지금 시련에 직면하고 있다. (중략) 자기들에게 불리한 발언을 하거나 정당한 비판을 하는 사람들을 집중매도의 표적으로 돌리고 그런 사람들이 다시는 입을 열지 못하게 괴롭히는 것이다.”

-<조선일보>, 21일자 3면 ‘용기있는 지식인의 할 일’

“민주당이 최근의 주사파 논쟁과 관련해 양비론적 입장을 나타내며 어정쩡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은 떳떳한 공당의 자세가 아니다. 그런 모습으로는 국민들로부터 제1야당으로서의 수권능력을 인정받기가 어려울 것이다. 도대체 분명한 친북세력에 대한 당연한 대책마저 공안정국 운운하면서 양쪽 눈치를 다 봐가며 임기응변식으로 대응하면서 어떻게 국민적 신뢰를 쌓을 수 있다고 보는지 궁금하다.”

- <조선일보>, 25일자 3면 ‘민주당의 신 공안론’

이와 다르게 〈한겨레〉는 박홍의 발언에 대해 공개적으로 유감을 표명하고, 그의 발언이 불러올 사회적 영향에 주목한다. 박홍 총장의 주장에 근거가 부족하다는 점을 지적함과 동시에, 정부와 검찰의 ‘운동권 탄압’이 매카시즘(반공주의 성향이 강한 집단에서 정치적 반대자나 집단을 공산주의자로 매도하려는 태도), 즉 마녀사냥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한 것이다.

“대학 캠퍼스에는 우파도, 좌파도, 그리고 과격한 이상주의자도, 적극적인 행동주의자도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우리는, 정부가 일부 학생들의 어떤 사상적 편향을 용납할 수 없다고 판단하면 그들을 공개적인 ‘사상의 자유시장’에 끌어내 비판하고, 구체적인 행동을 통해 명백하게 실정법을 위반한 경우에는 사법적으로 다룰 수 있을 것이라는 견해를 밝힌 바 있다. 

(중략) 박홍 총장의 발언은, 그것이 몰고 올지도 모를 파문을 생각하면 섬뜩한 느낌마저 준다. (중략) ‘증거’가 뭐냐는 기자 질문에 대한 답변에서도 ‘공산주의 이론을 조금이라도 공부한 사람이면 다 아는’, ‘북한 방문 학생운동권 핵심으로부터 전해들은’ 하는 정도여서 그의 발언이 불충분한 근거로 지나치게 단정적인 표현을 썼다는 비판을 면키 어렵다고 생각된다. 

(중략) 더욱 우리를 당혹케 하는 것은 그러한 문제를 제기한 시점의 미묘함이다. 남북 정상회담 합의-김일성 주석의 죽음-조문시비-매카시 선풍으로 이어지던 내부갈등이 조금은 정리되어가는 상황에서, (중략) 그의 문제제기가 최근 우리 사회 일각에 조성되고 있는 ‘반통일’적 분위기를 부추기려는 새로운 ‘매카시’의 전초일지 모른다는 ‘오해’마저 갖게 한다.”

-<한겨레>, 20일자 3면 ‘박홍 총장의 발언과 책임’

7월 21일자 동아일보 1면.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7월 21일자 동아일보 헤드라인은 “6.25남침 김일성이 주동”이다. 김일성이 처음부터 무력침공을 준비하고, 한국전쟁은 스탈린과 모택동의 사전승인을 받아 이뤄진 남침임을 강조하는 내용의 반공성향이 담긴 기사다.ⓒ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반공주의 보수 vs 반매카시즘 진보… 판단은 독자의 몫

박홍 총장의 발언과 관련해 이념적 성향에 따라 달라진 언론들의 보도 행태는 당시 언론학자들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

백선기 당시 경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1995년 발간된 그의 학술지 논문(박홍 총장 주사파 발언 분석-신문 보도에 대한 기호학적 분석을 중심으로)에서 “박홍 총장 발언 사안에 대해서는 언론이 항상 주장하던 객관 보도, 공정 보도, 중립 보도, 불편부당 보도 등과 같은 일반 보도 원칙을 무시했다. 자신의 이념 편향에 따라 자신들의 취급 경향을 드러낸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 바 있다.

백 교수는 보수 성향의 언론은 ‘철저한 반공주의적 입장’에서 박홍 총장을 지지하는 보도를 한 반면, 진보 신문은 ‘공안 정국에 대한 우려감’으로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다고 분석한다.

“조선, 중앙, 동아 등의 신문은 다소 차이가 있지만 박홍 발언으로 야기된 사상 논쟁, 즉 우리 사회에선 금기시되는 영역인 공산주의 사상과의 연계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반공산주의적 입장 취하고, 주사파에 대해 철저하게 반대했다. 

(중략) 그러나 한겨레신문은 다소 완화된 시각에서 주사파 및 그것이 지닌 이념적 경향에 대해 다뤘다. 주사파 탄압으로 야기되는 신공안 정국의 등장에 우려를 표하며, 사회 내의 비판 세력의 약화와 그에 따른 보수 우익의 발호에 대해 경계한 것이다.”

1994년, 이처럼 한 인물에 대한 언론의 평가는 두 개로 나뉘었다. 보수언론과 진보언론의 뿌리 깊은 이념성 및 정파성 때문이다. 둘 중 한 쪽은 과장했으며, 다른 한 쪽은 간과했다. 또한 한 쪽은 그를 맹신한 반면, 다른 한 쪽은 그를 경계한 것으로 보인다.

김일성 사망과 남북회담 결렬로 북한에 대한 가닥이 잡히지 않던 혼란스러운 시기, 박홍 총장의 발언은 우리를 거대한 색깔론 대결 속에 집어넣었다. 이 '주사파와 종북'이라는 이념 논쟁은 지금까지도 견재해, 매년 정치권 대결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이때 언론은 어떠한 방향으로 취재하고 보도했는가. 또한 이들의 보도는 무엇을 함축하고 있나. 판단은 오로지 독자들의 몫이다.

담당업무 : 통신 및 전기전자 담당합니다.
좌우명 : 사랑에 의해 고무되고 지식에 의해 인도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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