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텔링] ‘사장님, 그게 아니라 이 명분이 없다 아입니까, 명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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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텔링] ‘사장님, 그게 아니라 이 명분이 없다 아입니까, 명분이…’
  • 박근홍 기자
  • 승인 2020.02.10 19:24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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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의명분은 정치권 전유물? 시대 변화에 명분 쌓기 고민하는 재계
한진그룹 남매의 난-조국 사태, 재벌 문제아 복귀-황교안 종로 출마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박근홍 기자]

흔히 정치는 명분에 죽고 명분에 산다고 말합니다. 아무리 반듯한 정치인이라도 대의명분이 부족하면 대중들의 호응을 얻지 못해 선거에서 패배하고, 아무리 못난 정치인이라도 대의명분이 충분하다면 언제든 정계에 복귀해 선거에서 승리하지요. 시대정신과 대중성을 갖춘 명분, 그리고 그 명분을 구체화한 프레임과 슬로건, 공약 등은 특정 정치인의 능력보다 중요한, 권력 확보를 위한 필수조건입니다.

이처럼 명분이 중요하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여기까지만 얘기하는 정치인이 있다면 그 자는 분명 위선자일 겁니다. 현실정치에서 명분은 수단에 불과합니다. 정치권이 정말로 추구하는 건 실리입니다. 국익을 위한 실리든, 국민을 위한 실리든, 조직을 위한 실리든, 자신을 위한 실리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럴듯한 명분을 잘 끼워 맞추고 실리를 적당히 가려 대중으로부터 지지를 얻는 것이 진짜 정치라고 생각됩니다. 사실 우리나라는 위화도회군 때부터 이런 진짜 정치로 재미를 봤지요.

해방 이후 대표적인 예는 YS(故 김영삼 전 대통령)의 40대 기수론, 그리고 3당합당입니다. 박정희 군부정권이 3선 개헌으로 독재정치를 이어가자 1969년 YS는 당시 신민당 내 주류인 노장(老將)세력들을 개혁하고 젊은 사람들이 주축이 돼야 민주정권을 수립할 수 있다며 40대 기수론을 내세웠습니다. '구상유취'(口尙乳臭)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반발이 극심했으나, 경험 많은 노장들은 결국 실리를 택했습니다. 유력 대선후보지만 대중적 인기가 부족했던 유진산은 자신이 나선다면 군정종식이 어렵다는 걸 스스로 깨닫고 YS에게 시대의 역할을 맡겼지요. '삼김시대'가 본격적으로 막을 올리는 순간이었습니다.

3당합당도 마찬가지입니다. 1990년 1월 YS는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자신이 그토록 증오했던 군부세력과 손을 잡고 3당합당을 결행했습니다. 독재세력을 타도하기 위해 강력히 투쟁했던 그의 과거를 감안하면 명분은 절대적으로 부족했지만, YS는 끝내 호랑이굴에 들어간지 약 3년 만에 호랑이굴을 초토화시키고 청와대행 티켓이라는 실리를 챙겼지요. 이후 전두환·노태우 구속, 하나회 청산 등을 실천에 옮겼으니 결과적으로는 명분도 잘 끼워 맞춘 셈입니다.

(왼쪽부터)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 조현민 한진칼 전무 등 한진그룹 재벌 오너일가 3세 ⓒ 한진그룹
(왼쪽부터)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 조현민 한진칼 전무 등 한진그룹 재벌 오너일가 3세 ⓒ 한진그룹

정치권 못지않게 명분에 죽고 명분에 사는 곳이 재계입니다. 아무리 수완 좋은 기업가라도 대의명분이 부족하면 주주들의 호응을 얻지 못해 연임에 실패하기 마련이지요. 뛰어난 실적을 이뤘음에도 여러 논란을 야기하는 바람에 경영일선에서 물러나야 했던 경영인들의 사례는 굳이 예를 들지 않아도 될 정도로 많습니다. 심지어 요즘엔 범정부 차원에서 특정 기업에 명분을 만들어 주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윤리·준법경영을 감시하는 외부 기구를 만들면 면죄부를 주겠다는 식이지요.

그럼에도 정치권과 비교했을 때 재계에서 명분의 중요성은 현저히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에서 기업의 존재 이유 자체가 이윤 추구이기 때문입니다. 다소 명분이 부족해도 실리가 충분하다면 주주들은 지지합니다. 아무리 대의명분이 충분해도 실력 없는 기업가는 절대 경영일선에 복귀할 수 없습니다. 더욱이 대의명분도 없고 경영능력도 없는 경영인이라면 주주들이 지지할리 만무하겠지요.

하지만 이 같은 논리를 깨는 경우가 우리나라에는 종종 생깁니다. 아무리 명분도 없고 역량도 없어도 오너일가는 대부분 임원 자리를 유지합니다. 민주주의는 1인 1표인 반면, 자본주의는 1주 1표제이기 때문에, 그리고 재벌이라는 한국 특유의 기업문화 때문에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굳이 그럴듯한 명분을 잘 끼워 맞출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는 이런 경우에도 명분의 중요성이 높아지는 모양새입니다. 한진그룹 오너일가의 경영권 분쟁,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3남 김동선 전 한화건설 팀장의 경영 복귀설 등에 대한 논란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 조현민 한진칼 전무 등 한진그룹 3세는 각각 뺑소니, 땅콩회항, 물컵 갑질 등으로 큰 물의를 일으키고 국민적 공분을 받았던 인물입니다. 재벌에만 적용되는 잣대가 아닌 사회적 잣대를 들이댔을 때 경영권을 놓고 싸울 명분이 전혀 없는 사람입니다. 회사 차원의 실리도 없지요. 이들 남매들이 경영을 맡은 이후 한진그룹은 최악의 실적 부진을 겪고 있으니까요. 오직 오너일가 개개인의 실리만 있을 뿐입니다. 이들을 향한 국민들의 지탄이 쏟아지는 이유입니다.

김동선 전 팀장의 경영 복귀설도 비슷한 사례로 볼 수 있습니다. 업계에 따르면 그는 최근 독일 말 농장 매각 절차를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김동관 한화솔루션 부사장, 김동원 한화생명 상무 등이 경영 전면에 나선 만큼, 그도 경영 복귀 준비에 들어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습니다. 여론은 부정적입니다. 명분도 마땅찮고, 회사 차원의 실리도 부족합니다. 김 전 팀장은 지난 2014년 한화건설에 입사해 2016년 신성장전략팀장을 역임하며 경영수업에 매진했으나 여러 차례 폭행, 폭언 논란에 휘말리며 구설수에 올라 쫓기듯 독일로 출국했는데요.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떠난 이후 한화건설은 흑자전환(2018년)에 성공했습니다.

아마 예전 같았다면 이들은 과거 재벌가들처럼 사회적 비난은 무시하고, 명분은 괘념치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이제 시대가 바뀌었습니다.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을 사회가 받아들이는 흐름으로 가고 있으며, 기업의 이윤 추구보다 사회적 가치에 대한 기대가 더 높아졌지요. 기업 이미지와 브랜드 가치가 신용도와 대외신인도로 이어지고 있으며, CEO의 일거수일투족이 곧 전체 기업 실적으로 연결되고 있습니다. 이 같은 추세에 맞춰 재벌들은 변화 중입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행복론,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의 SNS 소통 등이 그 예입니다.

유재수 전 부산시 경제부시장에 대한 감찰무마 혐의를 받는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 지난해 12월 서울 송파구 서울동부지방법원에서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받기위해 출석하고 있다. ⓒ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유재수 전 부산시 경제부시장에 대한 감찰무마 혐의를 받는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 지난해 12월 서울 송파구 서울동부지방법원에서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받기 위해 출석하고 있다. ⓒ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때문에 한진그룹 오너일가들은 요즘 명분 만들기에 바쁜 것 같습니다. 실적 부진 책임이 있는 자들이 갑자기 재무구조 개선을 들먹이고, 임직원들에게 갑질을 일삼던 이들이 별안간 전문경영인 체제 도입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실리를 적당히 가림으로써 대중으로부터 지지를 얻을 수 있는 명분을 마련해야 하는데, 간신히 끼워 맞춘 명분이 그 구실을 제대로 하는 것 같지 않네요. 한화그룹과 김동선 전 팀장도 만약 경영 복귀를 정말 검토 중이라면 그럴듯한 명분을 미리 준비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두 경우 모두 조언이 필요한 것 같은데요.

앞서도 말했지만 아무리 재계라도 명분 분야에선 정치권을 따라올 수 없습니다. 정치권의 사례를 타산지석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한진그룹 오너일가들은 조국 사태를 떠올려야 합니다. 당시 문재인 정권이 내세운 명분은 검찰개혁이었습니다. 반칙과 특권 논란의 중심에 선 사람을 검찰개혁의 적임자라면서, 반칙과 특권을 도려내야 할 법무부 장관 자리에 앉혔는데요. 그 결과는 독자 여러분들이 알고 계실 겁니다.

구설수에 올라 잠시 물러났다가 컴백을 모색하는 재벌들에게는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의 종로 출마 사례를 추천합니다.  황 대표는 종로 출마를 선언하면서 '정권심판'을 명분으로 내세웠는데요. 진짜 명분은 '개혁공천'입니다. 당대표부터 솔선수범하는 행보를 보여야 험지 출마를 꺼리는 당내 중진들이 따라올 것이라고 계산한 겁니다. 또 다른 명분도 있습니다. 바로 '신분세탁'입니다. 황 대표는 탄핵 정권의 마지막 총리로, 당시 일련의 사건에 대한 책임 논란이 있는 인물입니다. 애초에 총선 사령관으로 나설 명분이 없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같은 이미지를 희석시키고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여권 거물 이낙연 전 총리와의 대결을 택했다고 풀이됩니다. 

담당업무 : 건설·부동산을 중심으로 산업계 전반을 담당합니다
좌우명 : 隨緣無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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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우하대 2020-02-11 00:04:37
겁나 비꼬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