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은행 비번 도용 사태… ‘뭣이 중헌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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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은행 비번 도용 사태… ‘뭣이 중헌디’
  • 박진영 기자
  • 승인 2020.02.13 17: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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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오늘·시사ON·시사온=박진영 기자]

이미지는 내용과 관련 없음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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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말전도(本末顚倒), 일의 본래 줄기를 잊어버리고 사소한 일에 사로잡힌 경우를 말한다.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우리은행 비밀번호 무단 도용 사태를 지켜보면서, 떠오르는 말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과 사소한 것의 역할이 뒤바뀐 모습이다. 본질적인 사안은 뒤로한 채, 후속 제재 조치와 은행의 자진신고 여부 등에만 집중되는 느낌이다.

물론 사건이 발생한 후 책임 여부와 처벌의 정도를 따지는 사후대책도 중요하다. 하지만 본질적 문제는 '소비자 보호'를 잊은 직원들의 도덕적 해이와 무단도용이 가능한 허술한 시스템 등에 있다.

우리은행 비번 무단 도용은 지난 2018년 1월~8월, 스마트뱅킹 비활성화 고객 계좌의 비밀번호를 영업점 직원들이 실적을 채우기 위해 무단으로 바꿔 활성 계좌로 만든 사건이다.

앞서 금감원은 지난 2018년 10~11월, 이와 관련해 우리은행 경영실태평가를 했고, 당시 이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우리은행 측은 당시 자체검사에서 영업점 200여 곳에서 약 2만 3000명의 고객 비밀번호가 무단 도용된 것을 파악했고, 이를 금감원에 보고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금감원은 1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사건에 대한 제재 조치를 검토하겠다고 나섰다. 늑장대응이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지난 5일 언론보도를 통해 관련 사건이 조명된 이후엔,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고 있다. 13일에는 수사기관에 검사 결과를 통보하기로 했다. 개인정보보호법 위반으로 검찰수사까지 가능한 중대한 사안이다. 하지만 금감원은 불과 며칠전까지만해도 공식적 언급 없이 조사가 진행 중이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이 와중에 우리은행이 자진 신고한 것이 아니라 금감원이 적발했다는 주장이 나오면서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

지난 12일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자유한국당 김종석 의원실이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우리은행은 지난 2018년 7월말 자체검사를 통해 이 사실을 확인했음에도 금감원에 해당사실을 보고하지 않았다. 이후 같은해 10월 금감원이 경영실태평가 때 자료를 요청하자, 그제서야 관련 내용을 제출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은행 측은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며 전면 반박했다. 자체적으로 사전에 적발한 내용을 경영실태평가 과정에서 금감원에 사전보고 했다는 입장이다. 그러면서 해당 고객 정보가 외부로 누설되거나 유출되지 않았고, 금전적 피해가 없었다고 해명했다. 또한 피해고객에 대해 도용 사실을 알리고, 고지 방법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금감원이나 은행이 사태의 본질은 잊은 채 은행의 사전보고 여부와 무단 도용 사례 건수를 두고 다투는 등 눈앞의 상황에 대응하기 바쁜 것이다.

이는 DLF사태와는 사뭇 다르다. DLF 논란 때는 실제 피해자들이 나서서 보상을 요구했으며, 이에 금감원은 즉각 수사에 착수하는 한편, 은행도 사과와 함께 재발 방지 대책을 속속 내놨다. 하지만 이 사건에 대한 은행이나 금감원의 행태는 문제의 본질에서 벗어나 있다.

DLF 사태, 라임자산운용 사태 등으로 지난해부터 금융권에선 '소비자 보호'의 중요성이 크게 대두되고 있다. 우리은행 비번 무단도용 사건도 그것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차이점이라면 금전적 피해 여부다.

그러나 금전적 피해가 없었다하더라도 '무단'으로 개인 정보를 도용할 수 있었던 시스템 자체는 큰 문제다. 특히 본인의 개인 정보가 어떻게 이용됐는지도 모르는 상황은 악용될 소지가 상당히 크다. 아울러 300여명이나 되는 직원들이 실적에 눈이 멀어 모럴 헤저드(도덕적 해이)가 만연했던 점은 깊이있는 반성이 필요하다.

시스템과 도덕성 강화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논하지 않는 작금의 상황이 참으로 아쉽다.

담당업무 : 은행·저축은행·카드사 출입하고 있습니다.
좌우명 :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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