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로 보는 정치] 송의 문치주의와 미래통합당의 자중지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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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로 보는 정치] 송의 문치주의와 미래통합당의 자중지란
  • 윤명철 기자
  • 승인 2020.05.03 20: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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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도 없고, 통합도 없는 집단이라는 세간의 평을 결코 외면해서는 아니 될 것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윤명철 기자]

미래도 없고, 통합도 없는 집단이라는 세간의 평을 결코 외면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사진제공=뉴시스
미래도 없고, 통합도 없는 집단이라는 세간의 평을 결코 외면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사진제공=뉴시스

중국 송나라는 문치주의를 국시로 삼아 국방력 강화를 등한시 해 끊임없는 북방민족의 외침에 시달렸고, 거란-여진-몽골족, 북방민족 3종 세트에 의해 골고루 치욕을 당한 유일무이한 치욕의 역사를 갖고 있다. 중국인들은 송나라를 역사 속에서 지우고 싶다고 한다. 

송 태조 조광윤은 당나라가 멸망한 후 5대 10국의 대혼란기에 등장한 후주의 절도사 출신이었다. 정변으로 송을 건국한 조광윤은 자신과 같은 절도사가 득세하면 황제권이 약화돼 자신의 왕국이 혼란에 빠질 것이라고 판단했다, 결론은 절도사의 발호를 막기 위한 황제권 강화였다.

송 태조의 선택은 문치주의밖에 없었다. 그는 병권을 황제의 직속권한으로 집중하고, 지방의 주요 관리를 모두 문인으로 교체했다. 결국 송은 황제를 정점으로 한 군주 독재 체제를 완성했다. 반면 국방력은 날개 없이 추락하는 잡새가 됐다.

송 태조의 의도와 달리 절도사는 사라졌지만 새로운 권력층이 탄생했다. 송 태조의 독재 체제를 위해 양성된 문신 관료층이 지배층의 다수를 차지했다. 이른바 사대부(士大夫)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사대부가 정권의 중심에 서자 붕당의 패단이 발생했다. 사대부의 수가 증가하자 정책 현안에 끼리끼리 의견을 같이하는 이들에 의한 패거리 정치문화가 형성됐다. 이들은 이론에 매몰돼 이상주의 정치를 추구하며 현실을 외면하기 시작했다. 왕안석의 신법당과 구법당의 대립은 송의 멸망을 촉진시켰다.

북방 민족들은 중원의 패자 송이 문치주의로 빠져 국방력이 약화되는 모습을 잘 지켜보고 있었다. 거란이 먼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침략을 감행했고, 송과 전연의 맹약을 맺었다. 송은 거란에게 연운 16주를 내주고 막대한 세폐를 갖다 바쳤다.

여진의 금도 송을 기만하며 중원의 새로운 강자로 부상했다. 금은 송을 괴롭히는 거란을 물리쳐주겠다며 연합군을 형성해 거란을 몰아냈지만 곧바로 본색을 드러내 송을 공격해 송의 수도를 함락했다, 당시 송의 황제 휘종·흠종 이하 왕실의 3,000여 명이 포로로 잡히는 치욕을 당했다. 역사는 이 사건을 정강의 변이라고 기억하고 있다.

이에 북송은 멸망하고 강남으로 도망쳐 남송으로 겨우 명맥을 유지하다가 결국 몽골족에게 나라를 빼앗겼다. 송의 문치주의가 낳은 망국의 역사다.

미래통합당이 4·15 총선 참패에도 불구하고 대혼란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사상 초유의 전국 단위 선거 4연속 대참패를 당했는데도 아직까지 비대위원장 자리를 놓고 진흙탕 싸움에 빠져있다. 

미래통합당은 1948년 건국 이후 70여 년 동안 대한민국 엘리트의 총본산이었다. 두 차례의 군부 정권이 끝나자 법조계 인사들이 주류가 된 문민화가 진행됐다. 하지만 범 보수권의 전투력은 상당히 약화됐고, 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과 두 명의 전직 대통령이 수감되는 치욕을 당했다.

현재 미래통합당의 미래는 암흑 그 자체라고 해도 지나침이 없다고 볼 수 있다. 4연속 참패의 원인을 분석하고 대책을 마련하기보다는 비대위원장 인선을 놓고 분열의 역사를 재창조하고 있는 이들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없다는 여론이 퍼져나가고 있다. 

전투력을 상실한 사대부가 득실거리며 감투 다툼에 빠져 있는 미래통합당은 중국 흑역사의 대명사인 송나라와 데자뷔된다. 미래도 없고, 통합도 없는 집단이라는 세간의 평을 외면해서는 살아남기 힘들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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