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民山되짚기(13)] 김종순 한나라당 부산광역시당 상임고문 ˝YS도 거산산악회가 민산 시초인 것은 잘 알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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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民山되짚기(13)] 김종순 한나라당 부산광역시당 상임고문 ˝YS도 거산산악회가 민산 시초인 것은 잘 알 것˝
  • 윤종희 기자
  • 승인 2011.12.20 11: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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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월한 연설실력에 DJ도 영입 시도…하지만 오직 YS 바라보며 한길 걸어˝금배지보다 의리 선택한 YS의 영원한 부산 직무대리인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윤종희 기자]

민주산악회(민산) 시초를 놓고 의견이 분분하다. 보통은 1981년 고(故) 김동영을 비롯해 김덕룡, 복진풍 등이 산에 오른 것을 시발로 본다. 하지만 이에 앞서 성남 산적동 복진풍의 모내기와 대구·경북 유성환의 경민산악회, 부산 김종순의 '거산산악회'가 시초였다는 주장도 있다. 민산 되짚기 13번째 인터뷰 주인공은 거산산악회를 만들었다는 김종순 한나라당 부산시당 상임고문이다. 김 고문은 아마도 부산에서는 YS와 가장 가까운 측근일 것이다. 그의 YS에 대한 일편단심은 민산 회원들 사이에 유명하다. 그는 YS 선거를 돕다가 한쪽 눈을 잃기도 했다. 아직까지도 지역언론에서는 그를 'YS 직무대리인'으로 부른다. 이런 김 고문이 민산 시초와 관련해 "산악회는 YS 고향에서부터 출발한 것"이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 인터뷰는 2011년 12월 7일 김 고문의 부산 자택에서 진행됐다.

 

▲ 김종순 한나라당 부산광역시당 상임고문 ⓒ시사오늘


-민산의 시초가 거산산악회입니까.

 

"그렇다고 봅니다. YS가 정치적으로 묶여서 활동을 못할 때 입니다. 어느 날 YS가 최형우, 김동영, 김덕룡과 함께 거제에 왔다가 다시 서울로 올라가려고 할 때 저보고 비행장에 나오라고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저는 이미 거산산악회를 만든 상태였습니다. 그날 제가 거산산악회 활동을 하다가 YS로부터 연락을 받았습니다. 저는 급한 나머지 옷을 갈아입지 않고 '거산산악회'라고 새겨진 등산조끼를 입은 채로 비행장으로 갔습니다.

제가 비행장에 도착하니 YS가 '종순아, 니 등에 그게 뭐꼬'라고 물어요. 자기 호를 딴 산악회 조끼를 봤으니까 당연히 궁금할 게 아닙니까. 그래서 제가 설명을 했습니다. 그 당시 법률에는 모든 조직체는 등록을 하게 돼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등록이 안 된 산악회가 이 동네 저 동네에 많았습니다. 그래서 '지금 등록 안 하고 할 수 있는 게 산악회밖에 더 있습니까. 이왕 하는 김에 거산산악회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라고 설명을 했습니다.

김덕룡과 최형우가 이 얘기를 다 들었어요. 그러다 보름도 안 돼서 민주산악회가 발족을 했다는 기사가 나왔습니다. YS도 살아있고 김덕룡과 최형우가 살아 있으니 (민산 시초가 거산산악회라는 것을) 잘 알 겁니다."

YS, 거산산악회 조끼 본 뒤 보름만에 민산 결성

-하지만 복진풍이나 유성환은 다른 주장을 하는데요.

"각자가 자신들의 산악회로부터 배웠다고 말하지만 YS 지역이 부산이니까 부산에서 시작됐다고 보는 게 맞을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YS가 거산산악회 유니폼을 본 지 보름 후에 민산이 출범했습니다. 출발을 거산산악회로 보는 게 옳다고 봅니다."

-민산 활동은 어떻게 했습니까.

"제가 민산 초대 (부산) 지부장을 했는데 우리가 산에 오를 때면 40센티미터 되는 빨간 리본에 '민주회복'이라고 써서 나무 가지에 매달았습니다. 한 번에 2천여 개를 달았습니다. 그러면 경찰이 쫓아다니면서 그 걸 풀었습니다. 무전기를 등에 짊어진 경찰들이 저희를 뒤따르면서 상부에 보고하고는 했습니다. 우리는 금정산, 천마산, 구덕산 등을 올랐습니다. 또 풍선 3백여 개에다가 민주회복 리본을 달아서 하늘에 띄우곤 했습니다. 하늘로 풍선이 올라가는 모습이 참 멋있었습니다."

김 고문은 풍선 얘기를 하면서 한 동안 회상에 젖었다. 민주화를 위해 한 평생을 바쳤던 그가 과거 곳곳에서 남다른 감회를 느끼는 것 같았다. 김 고문이 이끈 민산 부산지부의 활동은 '활발' 그 자체였다. 부산이 YS의 정치적 고향이었던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부산이 정치 1번지로 민주화에 대한 시민들의 호응이 상당했기 때문이다.

"산에서 내려오면 시민들이 막 박수를 쳐줍니다. 그 때 보람을 많이 느꼈습니다. 참으로 고마웠습니다."

수천 개 빨간색 리본에 '민주회복' 적어 나무에 매달아

이처럼 시민들의 열렬한 응원에 힘입어 민산 부산지부에서만 두 사람의 국회의원이 배출됐다. 민산 부산지부 부회장을 맡았던 허재홍과 간사였던 박재규이다. 박재규는 YS 정권 당시 총무처 장관을 지낸 고(故)서석재의 생질이다.

-YS와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됐나요.

"제가 정치를 시작하게 된 것은 야당 국회의원이던 월파 서민호 선생이 잠옷 바람에 포승줄에 묶여 끌려가는 모습을 보면서입니다. 그 때 야당 정치인이 되겠다고 다짐하고 정당에 가입했습니다. 그런데 YS가 이 때 야당 후보로 부산 서구에 출마했습니다. YS가 투쟁하는 모습이 상당히 보기 좋았고 경남고 선배인데다가 제 부친 고향이 거제도이고 해서 함께 하게 됐습니다."

당시 김 고문은 부산대 정외과에 다니고 있었다. 그는 대학에 다니면서 부산여상 체육강사로 일을 하며 등록금을 버는 등 전도유망한 청년이었다. 이런 그에게 사사오입 개헌에 반대, 자유당을 탈당해 자신의 지역구인 거제도를 뒤로하고 부산 서구에 출마한  YS는 매력적으로 다가왔음에 틀림없다. 김 고문의 YS 사랑은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하지만 당시 선거에서 YS는 낙선한다. 이후 1960년 7월 29일 YS가 제5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면서 김 고문은 YS와 함께 고난의 민주화 투쟁 길을 걸었다. 그는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YS의 부산 직무대리인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그는 YS에 의해 신민당 중앙당 당기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을 뿐만 아니라 재야 정치권 집합체인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부산본부공동의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는 1984년 5월에 출범한 민추협 발기인이기도 했다.

김 고문의 뛰어난 활약상은 YS의 영원한 경쟁자인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눈에도 들어왔다.

 

▲ 젊은날의 김종순 고문. 김 고문의 뛰어난 연설실력은 DJ의 마음까지 사로잡았다고 한다. 자료=김종순 제공

"YS, DJ, 이철승 등이 40대 기수로 경합하다가 결국은 DJ가 신민당 후보가 됐는데 그 때 DJ가 자신의 특보인 엄창록을 새벽 4시에 우리 집에 보냈습니다. 제게 금정구에 출마할 것을 권유하려고 한 것입니다. DJ가 부산에 자기 사람을 한 명 꽂으려고 한 것이지요. 제가 금정구에 있는 부산대학교를 나왔고 민주화 운동도 앞장서서 했을 뿐만 아니라 정치 기획 같은 것을 잘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DJ가 YS의 노른자위를 빼앗겠다는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죠. 하지만 저는 일언지하에 거절했습니다."

 

신민당 대통령 후보 DJ, 새벽에 사람 보내 금정구 출마 제안…일언지하 거절

김 고문이 DJ의 제안을 거절 한 뒤 DJ가 한 행사장에서 그를 만나 '국제바보'라는 별명을 지어준 것은 유명한 일화다. 이 때부터 김종순은 의리 정치인의 대명사가 됐다. DJ가 김 고문을 눈여겨 본 것은 그의 탁월한 연설 실력도 한 몫 했다는 게 정설이다. 김 고문 주변 얘기를 들어보면 민주화운동 시절 함석헌, 장준하, YS, DJ, 이철승 등이 수십만을 상대로 공동 연설회를 할 때면 김 고문이 주로 사회를 맡아 정치적 연설을 했다고 한다. 김 고문도 "DJ가 제 연설 실력을 예사롭게 보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이런 그에게 YS와 DJ의 연설 실력에 대해 물어봤다. 예상과 달리 그의 답변은 너무 간단했다.

"DJ는 연설을 중고등학교 웅변식으로 합니다. 그래서 대중들의 박수를 많이 받습니다. 반면, YS는 그냥 있는 그대로 하지요. 그래서 DJ 만큼 박수를 많이 받지는 않지만 나름 마음을 끄는 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DJ는 야당 투쟁을 할 때 강성이었습니다. YS는 강성이면서도 마음이 온건했습니다."

-YS의 선거운동을 하다가 한 쪽 눈을 실명한 일이 있지요.

"그 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맞습니다. 그러니까 사하구가 서구와 같은 선거구였을 때입니다. 사하구에 있는 장림에서 연설 준비를 해놓고 그 다음 다대포로 마이크차를 타고 가다가 충돌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얼핏 봐서는 김 고문의 양 쪽 눈은 정상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의 한 쪽 눈은 의안이다.  

"김영삼에게 미쳐 있었습니다. 1989년 한 모임에 가서는 '성은 김이요~ 이름은 YS~'라는 식으로 노래를 불러서 좌중들로부터 폭소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이 'YS가 부산에 해준 게 뭐가 있냐'고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YS의 지역구가 부산이냐. YS 지역구는 부산이 아니라 대한민국 전체인데 그렇게 생각하면 되느냐'고 제가 말하고는 합니다."

군사정권, YS·김종순 접촉 노골적으로 방해

이처럼 김 고문이 YS와 밀접한 사이였기에 군사정권은 두 사람의 만남을 노골적으로 막으려고 했다.

"YS가 특이한 사건이 있어 부산에 내려올 때면 경찰들이 저를 지프차에 태워서 거창까지 갔다가 그 곳에서 빙빙 돌았습니다. 그러다가 무선으로 연락해서 일이 끝났다면 다시 태워서 부산에 내려놓고는 했습니다. 또 현직 대통령이 내려올 때도 제가 무슨 일을 할까 걱정했는지 똑같은 방법으로 저를 다른 곳으로 실어가고는 했습니다."

 

▲ YS 직직계, YS 부산 직무대리인으로 불린 김종순 고문이 YS의 대통령 당선에 너무나 기쁜 나머지 모스터에 입맞춤하고 있다. 자료=김종순 제공


-그렇게 YS를 도왔는데 국회의원을 못 한 이유가 있나요.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뒤 전국구를 한 번 받았는데 코앞에서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1990년 통일민주당이 3당 합당하면서 YS가 전국구로 가게 됐습니다. 그 바람에 부산 서구 자리가 비워졌고 제가 할 차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YS가 어느 날 저를 불러 '종순아, 3당 합당을 했기 때문에 내 지역구를 민정당에게 줘야 하지 않겠냐'면서 양해를 구했습니다. 3당 합당으로 만들어진 민자당에서 대통령 후보가 되기 위해서는 민정계에게 양보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당연히 받아들였습니다."

김 고문이 YS로부터 물려받지 못한 서구는 민정계 곽정출에게 돌아갔다. 당시 김 고문이 서구에서 공천을 받지 못하자 이에 흥분한 부산시당 부위원장이 김 고문도 모르게 간부들을 모아 YS 집에 항의하러 갔다. 이 일로 YS가 김 고문을 잠시 오해했다는 얘기도 들린다. 하지만 김 고문이 이 일과 관련해 자신의 무관함을 해명했다.

YS, 3당 합당 후 자신의 지역구까지 민정계에 양보

김 고문은 YS맨들 가운데 고(故) 김동영 의원 다음으로 형님이다. 최형우 전 의원도 김 고문보다 상도동 사단에 늦게 합류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각종 선거 때마다 부산시 선대본부장을 맡아 진두지휘했다. 또 부산시당 사무처장으로서 맹활약하기도 했다. 그의 현재 직함인 '한나라당 부산광역시당 상임고문'은 다선의 전직 의원들에게나 주는 자리다. 이런 자리를 한 번도 금배지를 달아본 적이 없는 김 고문에게 줬다는 것 자체가 부산정가가 그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여실 없이 보여준다. 김 고문의 부산 동지들은 이처럼 한 결 같이 부산에서 활동한 그에게 '한길'이라는 호를 지어주기도 했다.

이날 김 고문은 자신이 국회의원이 못 된 것에 대해 "운이 없는 사람은 때가 와도 안 되고…"라며 웃어 보였다. 정말 그에겐 운이 따르지 않았을까. 김 고문에게는 정치정화법에 묶여 서구에 출마 못한 아픔도 있다. 자기보다 한 참 아래인 서석재 전 의원은 1차에, 문정수 전 의원은 2차에 해금됐지만 김 고문은 3차에서나 풀려났다. 그는 이 대목에서 "서석재가 죽고 없지만 그 사람 머리가 '조조'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최형우 전 의원 얘기를 했다.

최형우, 중앙정보부로부터 가장 많이 당한 사람

"YS 한테 삐딱하기도 했지만 바른말 잘 하는 사람이 최형우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지구당 개편 대회하면서 부산 국회의원들이 다 앉아있는데 최형우가 부산시당 사무처장부터 먼저 인사말을 하게 했습니다. 정당에서는 고생한 사람을 알아줘야 한다면서요. 최형우가 (뇌일혈로)안 쓰러졌으면 대통령 후보도 가능했습니다. 최형우를 지지하는 대의원 수가 가장 많았거든요. 그리고 중앙정보부로부터 가장 많이 당한 사람이 최형우입니다. 정말 고생 많이 했습니다."

김 고문은 민주화 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김동영·최형우 전 의원과 친분이 두터웠다. 그는 "여름 방학 때 김동영이나 최형우가 집사람과 함께 애들하고 부산에 내려오면 제가 회를 사서 같이 먹었다"고도 전했다. 또 "(YS계에서) 실제 '넘버 투'는 김동영이었다"고도 말했다.

-앞에서 말한 부산시당 사무처장을 맡는 과정에 일화가 있었다면서요.

"홍인길이 YS 비서로 있을 때 제가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그 때 전국 시·도지부당 사무처장을 발표했는데 사무처장은 각 시·도지부당 위원장의 추천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시당 위원장이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의 이름을 올렸다고 해요. 하지만 홍인길이 '내가 직권으로 발표한다'면서 제 이름을 발표했어요. 나중에 부산일보를 보니 '시·도지부 위원장이 추천한 사람이 안 되고 YS 직직계가 됐다'고 나왔더라구요. 직계도 아닌 직직계라는 표현을 썼던 것입니다. 그 표현을 보고 제가 한참 웃었습니다."

당시 시·도지부 사무처장에게는 재정권과 인사권이 일임되는 등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 1988년 부산 지역 국회의원 합동연설회장의 한 장면. 당시 YS는 연설장 앞 병원 옥상에 흰 가운을 입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물었고 김종순 고문은 YS를 지지하는 의과대생이라고 설명했다. 자료=김종순 제공

 

부산언론, 김종순을 'YS직직계'로 불러

-YS의 3당 합당에 대해선 어떻게 평가하나요.

"3당 합당 한다고 했을 때는 마음으로 반대했습니다. 하지만 YS가 대통령이 되고 나니 3당 합당을 안 했으면 대통령이 되기 힘들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더라구요. YS와 DJ가 항상 경합을 했었으니까요."

-YS가 대통령이 된 직후 민산을 해체한 것에 대한 회원들의 반응은 어떠했나요.

"부산에서는 뒷말이 없었습니다. 부산에서는 YS를 좋아했으니까요."

평생 옆에서 지켜본 YS, 돈 받는 스타일 아니야

-최근 노태우 전 대통령이 회고록에서 YS에게 정치자금을 줬다고 했는데 어떻게 생각하나요.

"민주산악회는 돈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시·지부에서도 돈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YS를 옆에서 평생 본 바로는 돈 받고 하는 스타일이 아닙니다. 거제도 최대 어장 주인의 외동아들이었지 않습니까. YS가 거짓말 할 사람은 아닙니다. 있는 사실에 더 보태고 하는 건 없는 사람입니다."

김 고문은 이 자리에서 "YS가 지방자치를 실시했다. 대단한 일이다"고도 말했다. 아마도 중앙의 권력을 선뜻 지방에 나눠줄 수 있는 결단을 높이 평가한 것 같다.

-YS가 내년 대선이나 총선에 관여해야 한다고 보나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모든 것에 음과 양이 있지 않습니까. 햇볕 받은 사람은 좋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욕할 게 아닙니까."

-YS가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해 '독재자'라고 하는 것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요.

"YS가 초산 테러도 당하고 국회의원에서 제명되기도 하지 않았습니까. 독재자 보고 독재자라고 하는 게 무슨 문제입니까. 박정희가 독재자였던 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저는 박정희 보다 미운 사람이 전두환입니다. 전 재산이 29만원이라는 소리를 듣고는 놀래 자빠졌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 독재자 아닌 역대 대통령은 세 사람뿐입니다."

-YS, DJ, 노무현 전 대통령인가요.

"그렇죠."

-YS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허허, 별 게 있나요. 저는 YS와 손명순 여사가 건강하고 오래 사셨으면 좋겠다는 바람뿐입니다. 2년 전에 서울에서 모임이 있었는데 YS가 '오늘 이 시간이 있기 까지 고생한 부산의 김종순, 서울의 복진풍'이라고 말했어요."

사실 이날 김 고문은 몸이 다소 불편한 상태였다. 평소 만성 협착증으로 고생하던 그는 며칠 전 넘어져서 머리 부분이 찢겨지는 부상을 입었다. 그럼에도 혹여 YS에 대한 자신의 얘기가 부정적으로 전달될까봐 신경을 곤두세우며 흐트러짐 없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는 대장암 수술을 받기도 했다. YS 선거운동을 돕다가 이미 한 쪽 눈을 잃은 YS계 왕고참의 몸이 점점 쇠약해지고 있는 듯해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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