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항쟁] 우리는 한때 ‘박종철‧이한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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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항쟁] 우리는 한때 ‘박종철‧이한열’이었다
  • 조서영 기자
  • 승인 2020.06.04 19: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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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본 정치史>1987년 그날,
김대중 김영삼 노태우 전두환 등이 말하는 진실은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조서영 기자]

이번 스무 번째 ‘대통령 회고사’는 올해로 33주기를 맞은, 6‧10 민주 항쟁이다.ⓒ시사오늘 김승종
이번 스무 번째 ‘대통령 회고사’는 올해로 33주기를 맞은, 6‧10 민주 항쟁이다.ⓒ시사오늘 김유종

<시사오늘>은 매번 역대 대통령들의 입을 빌려 당신에게 일종의 ‘기억재생장치’를 선사해왔다. 이번 스무 번째 ‘대통령 회고사’는 올해로 33주기를 맞은, 6‧10 민주 항쟁이다.

 

1987.01.13.~1987.03.03.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박종철 열사가 고문을 받고 사망했던 서울 용산구 남영동 대공분실(현 경찰청 인권센터) 509호실에 박 열사를 추모하는 조화가 놓여있다.ⓒ뉴시스
박종철 열사가 고문을 받고 사망했던 서울 용산구 남영동 대공분실(현 경찰청 인권센터) 509호실에 박 열사를 추모하는 조화가 놓여있다.ⓒ뉴시스

1월 13일 자정 경, 서울 신림동 하숙집에서 한 청년이 붙잡혔다. 수사관 6명에게 연행된 곳은 남영동 대공분실, 이곳에서 학교 선배이자 민주화추진위원회 지도위원으로 수배 중인 박종운의 소재(所在)를 댈 것을 추궁 받았다. 청년이 끝까지 입을 열지 않자, 수사관들은 그의 머리를 물이 넘쳐흐르는 욕조에다 넣었다 빼기를 반복했다. 끔찍한 물‘고문’은 10여 시간 동안 지속됐다. 14일 오전, 그렇게 한 청년의 빛이 꺼져갔다. 당시 그의 나이는 고작 스물 하나, 대학교 3학년생이었다.

스러져가던 청년의 빛을 되살린 건 15일 <중앙일보>의 한 기자에 의해서였다. 오전 일찍부터 검찰청을 돌아다니며 취재하던 도중, 기자는 공안4과장실에 들렀다.

“경찰들 큰일이야.”

불쑥 내뱉은 한 직원의 말에, 기자는 이미 다 알고 왔다는 듯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 말입니다.”

그러자 직원은 한 마디 덧붙였다.

“그 친구, 대학생이라지. 서울대생이라던가.”
“어디서 죽었대요?”
“남영동.”

짧은 대화 속 실마리와 발 빠른 취재 끝에 진실의 조각이 맞춰졌다. 신문을 인쇄 중이던 윤전기를 세워 사회면에 짧은 2단 기사가 담겼다. 제목은 ‘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사’, 기사 속에 적힌 청년의 이름은 박종철이었다. 이 신문은 당일 오후 3시 경 가판대에 배부됐다.

여론이 들끓자, 경찰은 자체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경찰은 박종철이 하숙집에서 연행된 뒤, 제공한 콩나물국과 밥으로 아침 식사를 했는데 ‘어제 밤, 술을 많이 마셔 밥맛이 없다’며 냉수를 요구해 마셨다고 했다. 그러고는,

“책상을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

라는 희대의 망언을 내뱉는다.

당시 박종철 열사의 아버지는 “이놈의 세상은 똑똑하면 못된 거지요”라며 울부짖었다.ⓒ뉴시스
당시 박종철 열사의 아버지는 “이놈의 세상은 똑똑하면 못된 거지요”라며 울부짖었다.ⓒ뉴시스

부산에서 올라온 가족들은 15일 오후 분향실 안을 찾았다. 아래는 당시 현장을 담아낸 <동아일보> 기사의 일부다.

이때 아버지 박정기 씨(57)가 실성한 모습으로 분향실 안으로 들어왔다.

“뭐요, 뭘 알고 싶소. 우리 자식이 못돼서 죽었소.”

박 씨는 내뱉듯 외쳤다.

기자가 “아드님을 왜 못됐다고 하십니까”고 묻자, 박 씨는 “이놈의 세상은 똑똑하면 못된 거지요”라고 고함지르듯 말하고 고개를 떨군 뒤 박 양을 데리고 나갔다. 

- 1987.01.17. <동아일보> 기사 일부

16일 화장 된 박종철은, 아버지의 “철아, 잘 가그래이. 이 아부지는 아무 할 말이 없다이”라는 말을 끝으로 강물 위로 뿌려졌다. 이후 2월 7일 주요 도시에서 범국민추도식 및 시위가 열렸으며, 3월 3일에는 박종철 군 49재와 고문추방 국민대행진 시위가 열렸다.

정국은 극도로 혼미했다. 그해 초 서울대생 박종철 군이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고문으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나는 분노와 슬픔을 금할 길이 없었다. 박 군의 아버지는 불과 20만 원의 월수입으로 자식을 가르쳤다고 한다. 부모의 심정은 어떨 것인가. 언제까지 악의 정권이 계속될 것인가. 악한 정부는 호랑이보다 무섭다지만 그 악한 정권 아래 살고 있는 백성들의 재앙은 호환(虎患)보다 컸다. 나는 전력을 다해 싸우기로 결심했다.

- 김대중 자서전 1권, 513~514쪽.   

 

1987.04.13. 4‧13 호헌조치


‘이민우 구상’에 반발한 YS와 DJ는 신민당을 박차고 나가 통합민주당을 창당했다.ⓒ시사오늘DB
‘이민우 구상’에 반발한 YS와 DJ는 신민당을 박차고 나가 통일민주당을 창당했다.ⓒ시사오늘DB

사건이 고문 경찰 두 명을 처벌하는 것으로 일단락되는 듯 보이던 무렵이었다. 이때 전두환이 꺼내든 카드는 4‧13 호헌조치였다.

당시 정치권의 화두(話頭)는 개헌이었다. 여당 민주정의당은 내각책임제를, 야당 신한민주당(後 통일민주당)은 직선제를 주장해 평행선을 달렸다. 1986년 12월 이민우 구상부터 1987년 통일민주당 창당에 이르는 야당의 역사는 아래 회고사에 담겨 있다.

(관련기사: http://www.sisa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0610)

전두환은 ‘평화적 정권 이양’과 ‘88 서울 올림픽 개최’를 우선시했다. 그는 성공적인 올림픽 개최 이후 개헌을 논의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나는 이제껏 대통령 선출 방식을 직선제로 바꾸는 문제를 포함해서 헌법 개정이 요구되는 사항은, 내가 1988년 임기를 마치고 퇴임함으로써 우리 헌정사상 한 번도 실현해보지 못한 평화적 정권 이양의 선례를 만들고 88 서울올림픽이라는 역사적 행사를 치른 뒤 논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이러한 생각을 나는 1986년 1월 국정연설을 통해 청명한 바 있다. 

- 전두환 회고록 2편, 590~591쪽.  

그가 발표한 4‧13 호헌조치는 개헌 논의를 유보하고, 현행 헌법에 의거해 정부를 이양한다는 의미였다. 전두환은 이를 “부득이했다”며 회고록을 통해 그 배경을 설명했다.

헌법 개정 문제가 정치 현안으로 제기되어 여야 간에 협상이 1년 가까이 진행되었으나 아무런 진전도 이루지 못하고 시간만 허송한 꼴이 되었다. 그 사이 국론의 분열과 국력의 낭비만 초래한 것이다. 나의 퇴임으로 평화적 정권 이양의 선례를 만들어야 하는 시점이 10개월밖에 남지 않았고, 서울올림픽도 1년 남짓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합의 개헌을 이루기에는 이미 적기를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생산적인 개헌 논의를 계속하다가는 국가적 대사에 차질을 빚게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커졌다. 정치일정의 원만한 진행을 위해서도 부득이 호헌으로 갈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 전두환 회고록 2편, 609~610쪽.

특별담화 발표 이후 야당을 비롯한 재야세력의 반발이 시작됐다. 천주교 신부들의 단식기도, 지식인들과 재야인사들의 시국선언이 이어졌으며, 중산층이 철회 요구 서명에 동참했다.

한편 양 김은 이를 두고 “애당초 무리수”(김영삼), “마지막 선을 넘어 버린 것”(김대중)이라 평가했다. 

전두환의 4‧13조치는 애당초 무리였다. 전두환 정권은 4‧13조치 이후 국내 여론과 해외 여론에 의해 포위‧고립되고 말았다.

- 김영삼 회고록 2권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361쪽.

전 정권의 4‧13 호헌 조치는 대세를 읽지 못한 무리수였다. 민심이 이를 용서하지 않았다. 마지막 선을 넘어 버렸다. 각 대학 교수들이 4‧13 조치를 철회하라는 시국 성명을 발표하고, 신부와 목사들이 단식 기도에 돌입했다. 문인들도 호헌 조치에 항의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농성에 들어갔다.

- 김대중 자서전 1권, 512~513쪽.

노태우 역시 이를 “설득력이 약했다”고 인정하며, 당시 내세운 논리를 회고록에 담아냈다.

물론 당시의 ‘호헌’ 방침은 민주화라는 시대적 대세에 비춰 설득력이 약했다. 그래서 이런 논리를 개발했다.

<민주주의 전(前) 단계로서 국가가 절대 안정되어야 하고 경제를 발전시켜야 한다. 따라서 능률과 효율, 국력(國力)의 집중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북한과 대결하고 있는 상황에서 인권의 부분적 제약이 불가피하다. 분단된 국토, 북한의 위협 등은 우리의 엄연한 현실이다. 88 서울올림픽과 평화적 정부 이양이란 국가적 대사를 앞두고 국론이 분열되어 국력이 약화되어선 안 된다.>

- 노태우 회고록 <국가, 민주화 나의 운명> 上편, 315쪽.

 

1987.05.18.~27. 고문 조작 발표 및 국본 결성


그 무렵 영등포 교도소에는 세 남자가 구속돼있었다. 한 남자는 찬송가를 계속 불렀고, 다른 남자는 계속 울기만 했다. 이를 이상하게 본 마지막 남자가 교도관들에게 무슨 일이냐 물었다. 

“박종철 일로 들어온 사람들인데, 자기들만 구속돼 억울해서 그래요.”

민주화 운동으로 수감 중이던 이부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축소‧조작됐다는 사실을 알렸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민주화 운동으로 수감 중이던 이부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축소‧조작됐다는 사실을 알렸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두 남자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당시 고문 경찰관이었다. 같은 교도소에 민주화 운동으로 수감 중이던 동아일보 해직 기자, 이부영은 이 사건이 축소‧조작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부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은 지난 5월 <시사오늘>과의 인터뷰를 통해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 친구들 사이엔 신의 오묘한 손이 움직였다고들 합니다. 거기서 박종철 군 고문한 친구들이 내가 있는 감옥에 온 거예요. (중략) 이게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된 거죠.”

이부영은 교도소 화장지에 볼펜으로 전말을 꾹꾹 눌러 담아, 비둘기(비밀 서신)를 통해 전달했다. 서신 세 통은 전직 교도관 전병용을 통해 김정남에게 전해졌다. 당시 전병용은 전달 후 이틀 뒤 체포됐다. 서신 내용은 김정남이 정리해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함세웅 신부에게 전달됐다.

어두운 밤, 명동성당에서 5‧18 광주 민주화 운동 7주기 미사가 열렸다. 이날 김수환 추기경은 “민족의 가슴에 칼을 질러 깊은 상처를 내고 피를 흐르게 한 그 어처구나 없는 사람들은 스스로 민족 앞에 나서서 죄를 고백하고 속죄해야 한다”는 강론을 펼쳤다.

미사가 끝난 후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다’는 제목의 성명서가 발표됐다.

“이 사건 범인 조작의 진실이 박종철 군의 고문 살인 진상과 함께 명쾌하게 밝혀질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과연 우리나라에서 공권력의 도덕성이 회복되느냐 되지 않느냐 하는 결말이 날 것이다. 또한 우리 사회가 진실과 양심, 그리고 인간화와 민주화의 길을 걸을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중대한 관건이 이 사건에 달려 있다.”

떨리는 목소리로 사제단이 읽어 내려간 성명서는 사흘 후부터 후폭풍이 시작됐다. 검찰은 이틀 후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반박했으나, 사흘 후에는 서울지검 검사장이 기자회견을 통해 세 명의 경찰관이 더 있었음을 인정했다. 이후 축소‧조작에 가담한 치안감이 구속됐으며, 26일에는 전두환이 전면 개각을 단행했다.

이는 전두환 정권에 치명타를 안겨 주었을 뿐만 아니라 ‘6월 민주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중략) 시대의 흐름은 이제 민주화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박종철 군 사건의 수사가 조작됐다는 폭로가 범인 가운데 한 사람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컸다. 나는 독재 말기의 누수현상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고 판단했다.

-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3권, 21~22쪽.

한편 전두환과 노태우의 회고록에는 이 시기의 개괄만을 담아내거나, 아예 언급하지 않았다.

이후 27일에는 6월 항쟁을 이끌었던 야당과 재야세력의 연대투쟁 기구,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이하 국본)이 결성됐다. 국본에는 △김영삼 △김대중 △문익환 △함석헌 등이 고문으로 추대됐다. 이날 국본 결성대회를 통해 4‧13 조치의 철회와 직선제 개헌을 위한 공동투쟁이 선언됐다.

민주당은 ‘국본’의 창립단계에서부터 개입했고, 집행부에 대표를 파견, 운영에도 참여토록 했다. ‘국본’은 특히 재야와 선명야당의 연계조직이란 점에서 우리 사회 민주화 운동의 구심점 노릇을 했다. (중략) 국민들의 개헌 열망을 응집시킬 강력한 구심력의 등장은 야당의 운신의 폭을 넓히고, 독재 권력의 숨통을 조여들어 갈 것이었다. ‘국본’의 등장은 시국의 흐름이 확실하게 정의와 민주의 편으로 기울어지게 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3권, 23쪽.

 

1987.06.09.~10. 이한열 사망, 6‧10대회와 민정당 전당대회 


ⓒ뉴시스
6월 9일, 또 한 명의 청년이 거리에서 스러져갔다. 그의 이름은 이한열이었다.ⓒ뉴시스

6월 9일, 또 한 명의 청년이 거리에서 스러져갔다. 청년은 연세대학교 교문 앞 시위 도중 최루탄 파편에 머리를 맞아 중태 상태에 빠졌다. 당시 이 청년의 나이는 스물 하나, 대학교 2학년생이었다.
 
하루 뒤 국본은 발족 후 첫 운동으로 6‧10 대회를 개최했다. 대회는 덕수궁 옆 대한성공회 대성당에서 ‘박종철 군 고문‧살인 은폐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의 이름으로 열렸다. 오전 10시 규탄대회가 시작되고, 구호를 외치며 옥외로 방송을 내보냈다. 많은 인파들과 경찰들의 대치가 계속되자, 경찰은 최루탄을 쏘기 시작했다.

우리 일행이 탄 차량 행렬이 광교 네거리에서 우회전을 해서 동아투자금융빌딩 앞에 이르렀을 때 경찰은 다시 최루탄을 쏘았다. 최루탄 세 개가 내 차에 맞아 터졌고, 차 안에서 나는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막았다. 내 차에 동승했던 최형우 의원은 견디지 못하고 내리고 말았다. 참으로 지독했다. 그래서 ‘지랄탄’이라고 한 모양이다.

-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3권, 30~31쪽.

여야 영수회담의 호헌철폐가 결렬된 후 민추협, 통일민주당 등 정치인들과 시민들이 모여 시청앞에서 6·26 평화대행진을 거행했다.ⓒ김영삼자서전
여야 영수회담에서 호헌철폐가 결렬된 후 민추협, 통일민주당 등 정치인들과 시민들이 모여 시청앞에서 6·26 평화대행진을 거행했다. 이후 노태우의 6·29 선언을 불러온 직접적 계기가 됐다.ⓒ김영삼자서전

오후 6시, 애국가가 흘러나오며 분단 42주년을 상징하는 42번의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자동차의 경적소리를 시작으로 6‧10 대회의 시작을 알렸다. 김영삼은 당시 일대를 지나던 승용차와 시내버스, 택시 등에서 일제히 경적을 울려댔다고 회고했다.

한편 같은 날, 올림픽공원 내 실내체육관에서는 민정당 전당대회가 성대하게 열렸다. 이 자리에서 노태우는 정식으로 대통령 후보로 지명됐다. 그는 “정부 이양과 올림픽 양 대사가 성공한 뒤 합의 개헌을 반드시 성취할 것”이라 강조했다.

이날 저녁에는 힐튼 호텔에서 노태우의 축하 리셉션이 준비돼있었다. 남대문을 거쳐 호텔에 들어가는 동안 노태우는 거리 시위를 보게 됐다. 그는 회고록을 통해 “착잡한 심정”이었다며 “한숨도 자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날 국민운동본부가 주도한 ‘박종철 군 고문치사 조작‧은폐 규탄 및 호헌 철폐 국민대회’(이른바 6‧10사태)는 전국을 휩쓸다시피 했다. 연세대생 이한열 군이 전날 시위 도중 최루탄 파편에 맞아 중태에 빠졌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시위는 불에 기름을 부은 듯 규모가 커지면서 격렬하게 전개됐다.

이 때문에 시내가 온통 최루탄 냄새로 가득 찬 것 같았다. 콧물과 눈물이 그치지 않을 정도였다. 우리 내외가 호텔에 들어서자 안에서까지 가스 냄새가 나고 있었다. 참으로 착잡한 심정이었다. (중략) 집에 돌아와서 나는 깊은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날 밤 거의 한숨도 자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 노태우 회고록 <국가, 민주화 나의 운명> 上편, 330~331쪽.

 

1987.06.29.~1987.07.01. 6‧29선언


6.29선언 발표문이다.ⓒ뉴시스
노태우 전 대통령이 발표한 6.29선언문이다. 이를 둘러싼 노태우, 전두환 전 대통령의 기억이 엇갈렸다.ⓒ뉴시스

오전 9시, 6월 29일은 월요일이었다. 아침 일찍 노태우는 중앙집행위원회 회의실에 올라가 선언문을 읽어 내려갔다. 이른바 6‧29선언이었다.

“여야 합의하에 조속히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하고, 새 헌법에 의한 대통령 선거를 통해 1988년 2월 평화적 정부이양을 실현해야겠습니다. (중략) 따라서 오늘의 이 시점에서 저는 사회적 혼란을 극복하고 국민적 화해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대통령 직선제를 택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국민은 나라의 주인이며, 국민의 뜻은 모든 것에 우선하는 것입니다.”

그로부터 이틀 뒤 7월 1일 전두환은 ‘시급수습에 관한 특별담화문’을 통해 6‧29 민주 개혁안을 수용한다고 천명했다.

6‧10대회부터 6‧29선언까지 20일의 시간에 대한 노태우와 전두환의 기억은 사뭇 달랐다. 두 사람 모두 6‧29선언의 아이디어가 자신에게서 나왔다고 주장했다.

먼저, 노태우는 6‧10대회 다음 날 당 기획팀을 소집해 방안을 모색했다고 명시했다.

‘현행 헌법으로는 대통령 선거를 치를 수 없다’고 결론 내린 나는 다음 날인 6월11일 아침 당사에 나가자마자 기획팀을 소집해 전날 밤의 심중을 털어놓았다. 그리고 “이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국민들이 진실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정리해서 보고하고, 헌법을 포함해 나라를 불행으로부터 구해 낼 수 있는 방안을 만들라”고 지시했다.

- 노태우 회고록 <국가, 민주화 나의 운명> 上편, 336쪽. 

반면 전두환은 6월 16일 밤 직선제를 받아들이겠다고 결심했다.

나의 소신을 접고 직선제를 받아들임으로써 평화적 정권 이양이라는 40년 헌정사의 숙제를 풀고 올림픽 개최라는 역사적 행사를 성공시킬 수 있다면 나는 잃는 것이 아니라 보다 큰 것을 얻게 된다. 지는 것이 아니라 이기는 것이 된 것이다. ‘직선제 개헌 요구의 완전 수용’과 ‘가능한 모든 민주화조치의 단행’이라는 큰 결심을 굳히자 그간 잠 못 이루며 고심했던 일이 한낱 꿈이었던 것처럼 느껴지며 마음이 한없이 평화스러워지는 기분이었다. 1987년 6월 16일 밤의 일이었다.

- 전두환 회고록 2권, 629쪽. 

하지만 17일에 대한 노태우와 전두환의 기억이 엇갈린다. 두 사람 모두 본인의 결심을 상대가 몰랐을 것이라고 표현했다.

노태우 회고록에 따르면, 17일 박철언 특보를 불러 “이제는 달리 방법이 없다”며 직선제와 김대중 사면‧복권이란 두 가지 지침을 통해 초안을 만들라고 지시했다고 밝혔다.

나는 이날 밤 박철언 특보를 집으로 불렀다. 그리고 그에게 “이제는 달리 방법이 없다. 결심을 했다. 직선제로 할 수밖에 없겠다. 그에 관한 모든 준비를 해달라”며 초안을 만들라고 했다. 그때 준 지침은 두 가지였다. 직선제를 한다는 것과 김대중 씨를 사면복권한다는 것이었다.

(중략) 나는 전 대통령이 직선제와 김대중 씨 사면‧복권 문제를 꺼내지 않는다면 이 문제에 대한 나의 결단을 전 대통령에게 밝혀 그의 동의를 얻어야겠다고 결심을 굳힌 상태였다. 전 대통령은 나의 이런 배경을 모르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 노태우 회고록 <국가, 민주화 나의 운명> 上편, 338~344쪽.

반면 전두환은 청와대 집무실로 노태우를 불러 직선제 수용을 전제로 한 대책 마련을 지시했으나, 노태우가 거부감을 보였다고 표현했다. 전두환은 노태우가 “전 대통령 자신은 간접선거를 통해 쉽게 대통령이 되었으면서 나더러는 떨어질지도 모르는 직선제를 하라는 거냐”는 생각에서 반발심을 드러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직선제 개헌 요구를 수용하기로 마음을 굳힌 내가 가장 먼저 시급히 해야 할 일은 여당 대통령 후보로서 정국을 돌파해나가야 할 노태우 민정당 대표를 만나 내 생각을 밝히면서 설득을 하고 자신감을 심어주는 일이었다. 나는 바로 다음날인 6월 17일 노태우 대표를 불렀다. 오전 10시 청와대 집무실에서 나는 마주 앉은 노태우 대표에게 먼저 긴 설명 없이 국민의 뜻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면서 직선제 수용을 전제로 한 대책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중략) 그동안 노 대표는 내가 직선제를 받아들이자고 할지도 모른다는 낌새조차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직선제 문제에 관한 한 내 소신은 한결같았고, 내가 태도를 바꿀 수 있다는 그 어떤 작은 암시도 노 대표에게 준 적이 없었다. 더욱이 내가 노 대표를 갑자기 불러서 직선제를 수용해야 할 이유와 직선제를 통해서도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근거를 먼저 충분히 설명하지도 않은 채 대뜸 직선제로 가자고 결론적인 지시를 내렸으니까 노 대표가 당황해하면서 내 지시에 거부감을 보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 전두환 회고록 2권, 629~630쪽.

두 사람은 24일 직선제에 대한 최종 합의에 이르렀다. 노태우는 6‧29선언의 아이디어가 본인에게서 나왔으며, 문안을 본인이 작성했음을 강조했다.

여기서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1987년에 들어서서 나는 여러 사람들로부터 건의를 받으면서 대통령 직선제를 포함한 갖가지 방안들을 고려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6월10일 이후부터는 ‘직선제’와 ‘김대중 씨 사면‧복권’을 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확고하게 자리를 잡아 가고 있었다.

(중략) 일부 보도에서는 내가 발표 문안을 들고 청와대에 들어가서 협의를 했다고 하는데, 그런 일은 없었다. 6월24일 이후 6‧29선언 때까지 나는 청와대에 올라간 일이 없었다.

- 노태우 회고록 <국가, 민주화 나의 운명> 上편, 344~345쪽.

반면 전두환은 본인이 6‧29선언을 제안했다고 강조하면서 노태우와의 24일 저녁 일화를 상세히 기술했다.

야당 대표들을 만난 뒤 이날 저녁에 노 대표를 다시 불렀다. (중략) 노 대표는 확실하게 “말씀대로 직선제를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나는 노 대표에게 “나더러 반대해달라고 건의했던 것은 없었던 일로 하자. 그것은 국민들을 속이는 것이고 위선적인 처사다. 세상에는 비밀이 없는데 나중에 진실이 알려지면 훗날 나와 노 대표를 국민이 어떻게 볼 것인지 생각해야 한다”고 타이르듯 말했다. 그리고 노 대표가 발표할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전권을 위임할테니 노 대표가 책임을 지고 알아서 준비하라고 말했다. 6.29선언의 성공을 위해 노 후보가 구상하고 주도하는 정치적 제안이라면 그것이 아무리 파격적인 조치라 하더라도 모두 받아주겠다고 약속했다. 나는 이미 모든 가능한 민주화 조치를 실행할 결의가 되어 있었다. 그 엄청난 선언이 누구의 이름으로 실행되어야 하느냐 하는 계산 같은 것은 나의 고려에는 없었다.

(중략) 그런데 노 대표는 참으로 집요했다. 발표를 하루 앞둔 이날 또다시 안현태 경호실장에게 전화해서 “나의 선언을 각하께서 수락을 거부하도록 건의해 달라”고 요청했다는 것이다.

- 전두환 회고록 2권, 639~643쪽. 

 

우리는 한때 ‘박종철‧이한열’이었다


당시 20대 초‧중반의 청년들은 어느덧 50대 중‧후반의 중년이 됐다.ⓒ시사오늘 김승종
당시 20대 초‧중반의 청년들은 어느덧 50대 중‧후반의 중년이 됐다.ⓒ시사오늘 김유종

당시 20대 초‧중반의 청년들은, 어느덧 50대 중‧후반의 중년이 됐다. 대한민국은 이들의 젊음 위에서 민주주의를 꽃 피워냈으며, 이들과 함께 국가는 33년간 성숙해갔다. 이는 비범한 두 명의 영웅이 아닌, 평범한 모두가 박종철이자 이한열이었기에 가능했던 대서사시였다.

그러나 586(50대‧80년대 학번‧60년대 생) 민주화 세대를 향한 시대의 질문은 여전히 끊이지 않고 있다. 특히 2019년 조국 사태와 2020년 4‧15 총선을 거쳐 물음표의 크기는 커져만 갔다. 이는 기득권이 된 586 세대에 대한 비판과, 어떻게 세대교체 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었다.

진중권 전 교수는 본인의 SNS를 통해 3일 “누차 지적하지만 민주당은 이미 자유주의 정당이 아니다”라며 “기득권을 수호하는 타락한 586들의 운동권 조직일 뿐”이라고 꼬집었다.

또한 더불어민주당 금태섭 전 의원은 3일 본인의 페이스북을 통해 “조국‧윤미향 사태 등에 대해 당 지도부는 함구령을 내리고, 국회의원들은 국민들이 가장 관심 있는 문제에 대해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며 “이게 과연 정상인가”라고 지적했다. 

홍콩 사태에 대해 ‘한때’ 박종철이자 이한열이었던 586 민주화 세대는 묵묵부답이다.ⓒ뉴시스
홍콩 사태에 대해 ‘한때’ 박종철이자 이한열이었던 586 민주화 세대는 묵묵부답이다.ⓒ뉴시스

한편 586 세대에 대한 질문은 국내에 그치지 않았다. 홍콩 민주화 운동에 앞장선 조슈아 웡은 지난달 28일 중국 인민대표대회에서 홍콩 국가보안법 초안이 통과된 후 “한국 정부에 실망했다”고 우려를 표했다. 그는 31일 <채널A>와의 인터뷰를 통해 “한국 정부, 특히 한국 대통령은 이익을 좇아 인권을 짓밟아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홍콩은 지금의 상황을 한국의 민주화 운동에 빗대 연대를 촉구하고 있다. 이를 증명하듯 시위 현장에서 6월 항쟁을 담은 영화 <1987>과 <택시 운전사>, <변호인> 등이 상영되거나, 한국 민주화 과정에서 불렸던 ‘임을 위한 행진곡’을 광둥어로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한때’ 박종철이자 이한열이었던 586 민주화 세대는 묵묵부답이다. 지난해 11월 민주당의 한 대학생 위원은 당시 129명 국회의원 전원에게 홍콩 시위지지 성명서를 보냈으나, 전원 거부 및 무응답으로 일관했다고 전한 바 있다. 

그는 당시 기자에게 “정부와 당이 친(親)중 드라이브를 걸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던 분들이 주류가 됐지만, 이 문제에 무관심한 것은 정치 귀족화의 반증”이라며 “지금 586 세대는 자유의 가치를 지키지 않고 오히려 방해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담당업무 : 정치부 기자입니다
좌우명 : 행복하게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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