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안정언 “디자이너, 인간과 자연의 공존 추구해야”
스크롤 이동 상태바
[인터뷰] 안정언 “디자이너, 인간과 자연의 공존 추구해야”
  • 정진호 기자
  • 승인 2020.06.26 14:4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기러기의 교훈…사랑·존중하며 살라는 것”
“기회는 저절로 오지 않아…내가 만드는 것”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정진호 기자]

안정언 숙명여대 명예교수는 제일은행·체신부·예술의전당·인천국제공항 등의 CI를 만든 전설적 디자이너다.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안정언 숙명여대 명예교수는 제일은행·체신부·예술의전당·인천국제공항 등의 CI를 만든 전설적 디자이너다.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거실로 들어가는 복도 벽에는 액자가 가득했다. 액자 속 그림에는 하나같이 입을 맞댄 기러기가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엄지손가락을 치켜든 모양을 형상화해 은행업계에 일대 혁신을 몰고 왔던 제일은행 CI(Corporate Identity),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제비 모양 우체국 로고 등을 만든 ‘전설적 디자이너’ 안정언 숙명여대 명예교수는 기러기 한 쌍에 어떤 의미를 담고 싶었던 것일까. <시사오늘>은 6월 22일 경기도 용인시에 위치한 안 명예교수의 자택에서 디자인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기러기의 교훈…사랑·존중하며 살라는 것”


안 명예교수는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100여 개의 작품을 업로드해뒀다. 거기에도 기러기 한 쌍은 빠지지 않는다. 그리고 작품 하나하나에는 그동안 체득한 삶의 지혜를 댓글 형태로 남겼다. 디자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 전에, 왜 기러기가 들어간 작품을 인스타그램에 올리기 시작했는지부터 물었다.

-최근 작품에는 꼭 기러기 한 쌍이 들어간다. 왜 기러기를 모든 작품에 담았는지 궁금하다.

“우리나라 전통 혼례를 보면 신랑은 나무기러기를 만들어서 신부 집에 가지고 간다. ‘우리는 평생 기러기처럼 행복하게 서로 믿고 열심히 살겠습니다’ 하는 의미다. 기러기는 한 번 짝을 맺으면 한쪽이 요절하더라도 다른 한쪽은 수절을 한다고 한다. 또 계급의식이 없고 공동체의식이 뚜렷하다. 기러기는 역V자를 그리면서 날아가는데, 앞에 가는 기러기는 날갯짓을 할 때 기류를 형성해서 뒤에 가는 기러기들이 편하게 따라올 수 있도록 한다. 앞에 가면 10배의 힘을 발휘해서 희생해야 하는 거다. 그렇다고 어느 한 마리에게만 힘든 걸 맡기지도 않는다. 앞에 가던 기러기가 지치면 순번제로 돌아가면서 힘든 역할을 맡는다고 한다. 이뿐만 아니라 어쩌다가 한 마리가 부상을 입거나 낙오되면, 두 마리 정도가 같이 아래로 내려와서 치료를 돕고 만약 치료가 안 되면 생을 다하는 모습까지 지켜본 다음 다시 대열에 합류한다. 이런 기러기의 속성에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지향해야 할 모습이 다 담겨 있다. 서로 사랑하고 존중하면서 살아가라는 교훈이다. 기러기를 작품에 넣게 된 이유다.”

-인스타그램에 작품을 업로드하면서 짤막한 글귀도 써넣고 있는데 이유가 뭔가.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에 작품을 올리는 건 내가 나무기러기를 대신하고 싶어서다. 하하. 기러기는 행동으로 보여주지만, 나는 작품과 짤막한 글을 통해서 ‘이렇게 살았으면 좋겠다’ 하는 마음을 전하는 거다. 또 한편으로는 자식들에게 남기는 말이기도 하다. 나중에 부모가 세상을 떠나고 나면 자식들이 생각날 때마다 이걸 읽어볼 수 있게 하고 싶다. 힘든 일이 있을 때 이걸 한 번 들춰보면서 ‘아, 우리 부모님은 이렇게 사셨구나’ 생각하면 조금이나마 힘이 되지 않을까.”

안 명예교수는 자연과의 공존을 향후 디자이너가 추구해야 할 방향성으로 제시했다.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안 명예교수는 자연과의 공존을 향후 디자이너가 추구해야 할 방향성으로 제시했다.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기회는 저절로 오지 않아…내가 만드는 것”


안 명예교수는 제일은행과 체신부뿐만 아니라 인천국제공항, 예술의전당, 세종문화회관, 명동성당 등 우리나라 굴지의 기업·기관 CI를 만들어낸 인물이다. 2015년에는 ‘한국 디자이너 명예의 전당’에 헌정되기도 했다. ‘제1세대 디자이너’가 생각하는 디자이너의 정의가 궁금했다.

-디자이너란 무엇인가.

“디자이너는 대중이 가진 잠재적인 니즈(needs)를 끄집어내 그들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디자이너는 정신적인 측면에서 대중의 생각과 정서, 문화,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면 결코 좋은 결과를 낳을 수 없다. 예를 들어 옷을 디자인한다고 생각해 보자. 사계절이 있는 나라가 있고, 여름이나 겨울만 있는 나라가 있다. 디자이너가 남쪽의 더운 지방에 가서 동복 디자인을 내놓으면 그걸 좋은 디자이너라고 할 수 있겠나. 이걸 이해하지 못하면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없다. 이게 디자인의 핵심적인 과제다.”

-향후 디자인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보나.

“모든 것을 사랑해야 한다. 그동안 우리는 사람이 더 잘 살자고, 더 편리하고 편안하게 살자고 산업을 발전시켜 왔다. 디자인도 그에 맞춰서 발전했고. 하지만 이제는 인간과 자연이 공존해야 한다는 의식을 가져야 한다. 작은 벌레 한 마리도 이유가 있어서 존재한다. 먹이사슬이라는 게 있지 않나. 서로 먹고 먹히면서 살아가는 게 지구였는데, 인간의 욕심 때문에 순환 고리가 끊어진 게 너무 많다. 이 상태로 가다가는 인간이 그 짐을 다 짊어지고 망하게 될 거다. 지구가 인간을 잡아먹을 시기가 왔다. 이제는 모든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공존이라는 개념을 기억해야 한다. 나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모든 것을 사랑하고, 모든 것을 지켜나가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디자이너도 이런 흐름에 맞춰야 한다. 자연의 값어치를 이해하고, 자연을 보전하면서 공존의 의미를 생각할 줄 아는 자연주의 디자인, 민주적인 디자인, 모두를 위한 디자인을 추구하는 게 지구가 살 길이고 사람이 살 길이다.”

-마지막으로 후배들에게 조언을 한다면.

“프리츠커 상이라고, 건축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상이 있다. 미국에서 8명, 일본에서 7명을 배출했고 유럽 쪽에서도 2~3명씩을 배출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한 명도 안 나왔다. 우리나라 건축가는 배가 너무 고프기 때문이다. 일을 주는 것만 해도 감사하니까 일을 맡기는 사람이 해달라는 대로 해준다. 그래야 골치 아픈 일이 없이 잘 넘어가니까. 그런데 이러면 좋은 작품을 할 기회가 없다. 만약 내가 그렇게 했으면 이 자리에 올 수 없었을 거다. 기회는 남이 주는 게 아니라 내가 만드는 거다. 춥고 배가 고프더라도 허리띠를 졸라매고 싸워서 극복해야 한다. 그래야 내가 바로 설 수 있다. 내가 바로 서야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볼 수 있고, 그래야 내가 팔린다. 하루하루 사는 데 급급해서 끌려가다 보면 3류, 4류가 되고 조용히 사라질 수밖에 없다.

BTS를 탄생시킨 방시혁 씨도 집안의 반대를 뚫고 음악을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성공할까 실패할까 하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단다. 그냥 하고 싶으니까 하고, 자연스럽게 거기 빠졌다고 한다. BTS도 그렇게 탄생한 거다. 과거에 한 사진작가가 내게 해준 말이 아직까지도 또렷이 기억난다. ‘사진에 미쳐서 암실에 들어가서 세월 가는 것도 모르고 계절 바뀌는 것도 모르다가, 어느 날 커튼을 열고나오니까 내가 유명해져 있더라.’ 한 번쯤 생각해 볼 말이 아닌가 싶다.”

담당업무 : 국회 및 국민의힘 출입합니다.
좌우명 : 인생 짧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