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추협 되짚기②] 故김상현…‘후농 없이는 DJ와 동교동계의 영광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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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추협 되짚기②] 故김상현…‘후농 없이는 DJ와 동교동계의 영광도 없었다’
  • 정세운 기자,윤진석 기자
  • 승인 2020.07.02 12: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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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농(後農) 김상현 전 민주당 의원 생전 인터뷰 재구성
YS상도동계와 DJ동교동계 합작품인 민추협 탄생시킨 주역
“DJ 반대했지만 민주화 앞당기려면 이 길밖에 없다고 생각”
판을 읽어내는 탁월한 정치 감각으로 신민당 창당에도 기여
'40대 기수론' 부터 DJ 동참시키며, 정치지도자 만든 주인공
민추협 後 DJ 눈밖에 나 멀어졌다는 얘기도, 웃음으로 승화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정세운 기자,윤진석 기자]

후농 김상현 전 의원은 YS 상도동계와 DJ 동교동계의 합작품인 민추협이 만들어기까지 오작교 역할을 한 민추협 태동의 주역이다. © 시사오늘 권희정
후농 김상현 전 의원은 YS 상도동계와 DJ 동교동계의 합작품인 민추협이 만들어기까지 오작교 역할을 한 민추협 태동의 주역이다. ©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2040년이면 홀로그램 세상이 일상화된다고 한다.

UN보고서에 따르면 말하고 웃고 움직이는 모습이 눈앞에서…. 돌아가신 부모님이 있다면 3D입체 영상의 홀로그램을 통해 생생히 되살릴 날이 머지않았다.

‘민추협 되짚기’ 두번째 주인공은 지난 2018년 작고한 동교동계 본류의 핵심인 ‘후농(後農:아호) 김상현’이다.

지금으로부터 11년 전인 2009년 11월 2일 여의도 후농청소년문화재단.

<시사오늘>은 살아생전의 후농과 인터뷰를 한 바 있다.

이번 편에서는 홀로그램을 통해 과거를 재생하듯 예전 인터뷰와의 콜라보를 통해 민추협 여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후농의 시각에 서서 당시를 재구성해봤다.

오늘날로 후농을 소환하고 그의 공(功)을 재조명하는데 초점을 뒀다.

입체감을 위해 사전 배경에 필요한 보충 자료 등은 <김영삼 회고록> <권노갑 회고록> 사단법인 민추협 자료 등을 참조했다.

 

1. 민추협과 후농
어떻게 동참하게 됐을까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에서 가장 감동적인 인물을 꼽으라면 김상현 전 민주당 의원이 아닐까 싶다. 바다로 모이면 모두 바다이듯 민주세력을 아우른 김 전 의원 그 자체가 ‘민추협의 정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거산(巨山) YS(김영삼)는 익히 잘 알려진 민추협 요람의 주역이다. 반면에 김 전 의원은 상도동계와 동교동계의 합작품인 민추협이 태동하기까지 오작교와 같은 역할을 한 주인공이지만 그 공을 온전히 조명받지 못한 경우다. DJ를 대신해 YS와 머리를 맞대며 민주화를 앞당기기 위해 대의를 택해온 그가 없었다면 DJ(김대중)도, 동교동계의 민추협 참여도, 훗날의 영광도 없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다.

YS 단식을 계기로 상도동계와 동교동계 민주 세력은 유신 이후 처음 손을 잡게 된다.© 뉴시스
YS 단식을 계기로 상도동계와 동교동계 민주 세력은 유신 이후 처음 손을 잡게 된다.© 뉴시스

‘후농 김상현’과 마주 앉기 전, 어떤 과정을 통해 민추협 결성에 동참하게 됐는지부터 살펴봤다.

YS 단식 15일째가 되던 83년 6월 1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장소는 서울 코리아나 호텔.

전직 의원 50여 명이 속속 모여들었다.

DJ 최측근인 후농 김상현도 거기에 있었다.

당시 그는 YS, DJ 등 다른 유력 야당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모두 박탈당한 상황이었다. 3선의 국회의원을 지냈지만 72년 10월 유신(박정희 3선 개헌)과 전두환 정권이 벌인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등에 휘말리면서 20여 년 가까이나 정치 규제 대상이 된 것이다. 훗날 그의 선거권이 되살아난 것은 YS, DJ를 비롯해 예춘호‧양순직과 함께 88년 마지막 사면복권 대상자로 이름이 오르면서다. 이후 그는 16대 국회까지 도합 6선을 지냈다.

이날(83년 6월 1일/ YS 단식 15일차) 코리아나호텔에서는 김상현 외에도 이민우‧김덕룡‧조윤형‧최영우‧박영록‧이기택 등이 함께했다.

모두 반정부 민주화 투쟁을 위한 ‘범국민적 연합전선’을 구축하자는 결의문을 채택하기 위해 온 거였다.

YS 상도동계와 DJ 동교동계가 유신 이래 처음으로 손을 잡았다는데 의미가 큰 날이었다. YS 단식을 계기로 이뤄진 규합이었다. 광주 민주화운동 3주년을 맞은 83년 5월 18일 YS는 단식을 선언했다. 5‧18 참상을 알리고 직선제 개헌 촉구 등 민주화 요구를 하기 위해서였다. 죽을 각오로 단식에 뛰어든 YS의 결기는 움츠려있던 많은 정치인들을 깨우는 힘이 돼줬다. 시작은 미약하나 전두환 정권에 공동 저항하고자 양대 민주화 세력이 첫발을 내디딘 순간이었다.

연합전선이 가시화된 것은 83년 7월이 되면서다.

김상현은 YS(이 무렵 YS는 6월 9일 단식을 중단한 뒤 전두환 정권의 정치규제에 저항하며 민주화 활동을 할 때였다)로부터 상도동계와 동교동계가 함께하는 범야권 연합의 민주화 투쟁 기구를 구성하자는 제의를 받게 된다.

“저와 김영삼 전 대통령이 만나 정치단체를 만들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2. YS와 후농 뜻 모아
“정치단체 만들어야 한다”


당시 DJ는 전두환 군사정권의 탄압을 피해 미국 워싱턴 등에 망명해 있었다.

- 미국에 있던 DJ는 민추협 결성에 소극적이었다던데 맞는지요. DJ 서거 당시 언론에서 민추협을 DJ가 만든 것처럼 보도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DJ는 반대했고 김 전 의원께서 주도적으로 만든 것 아닌가요.

“김 전 대통령은 민추협 구성에 반대했습니다. 저는 김영삼 전 대통령이 앞장서야 민주세력이 활성화된다고 여겼지만 미국에 있던 김 전 대통령은 ‘YS 하고 손잡지 마라’며 저를 말렸습니다.”

DJ는 왜 민추협 결성을 탐탁지 않아했을까. <동아일보>에 연재된 <권노갑 회고록>에 따르면 미국에 있던 상황이라 정권 차원의 방해로 통신이 자유롭지 못해 한국 내부에 대해서는 감이 멀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달리 보면 정세 판단의 오류에서 비롯된 DJ의 패착이 아니었다 싶다.

“동교동계만의 독자노선을 만들라.”

DJ는 연합 전선보다는 독자노선 쪽이었다.

김상현의 생각은 달랐다. 민주화를 촉진시키기 위해서는 공동연합을 구축해야 한다고 봤다.

동교동계 내부에서도 뜨거운 논쟁이 몇 개월에 걸쳐 벌어졌다. 반대한 쪽은 선장(DJ)도 없이 동교동계가 참여할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 결과 권노갑‧한화갑‧김옥두 같은 동교동계 가신그룹은 민추협에 참여하지 않았다. 박영록‧김종완‧박종태 등도 반대하는 쪽이었다. 반면 김상현을 비롯해 조연하‧김녹영‧박종렬‧예춘호 등은 찬성하는 입장이었다. 이들은 YS와 함께 연대조직 구성에 뛰어들었다.

DJ를 따라 반대 기류가 컸던 동교동계 다수의 정서를 고려하면 김상현으로서는 고뇌되고 갈등되는 것이 자명했을 터다. 그럼에도 참여한 데에는 민주화를 위한 신념 때문이라 보는 것이 통설이다. 민주세력이 결집해야 민주화 운동이 촉진되고, 또 그것이 시대의 대세라고 판단해 대의를 따랐다는 견해다.

여기에는 중도층까지 고려해 계획을 세워 나가려는 등 현실감각이 뛰어난 점도 한몫했던 것으로 보인다. 소소하지만 민추협 명칭이 탄생되기까지의 일화에서도 이 점은 읽히고 있다.

처음 명칭으로 YS가 제안한 ‘민주구국투쟁 동지회’였다. 강력한 투쟁 의사를 표출하기 위해서는 ‘구국’과 ‘투쟁’이라는 두 단어가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는 게  YS 주장이었다.

김상현은 반대했다.  “명칭에서부터 너무 강경하면 아무것도 안 된다. 행동은 확실하게 하되 대외적인 것은 온건해야 한다”고 봤기 때문이다. 이에 ‘민주화추진간담회’가 어떻겠느냐 제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YS 최측근인 고(故)김동영 경우는 “목숨 걸고 투쟁하는데 무슨 간담회냐”며 반대했다고 전해진다. 갑론을박 끝에 최종적으로는 ‘민주화추진협의회’로 결정됐다. 방법론을 고민함에 있어 보다 많은 참여를 이끌어낼 수 있는 온건 대중 노선을 내세운 점이 인상적이다. 

 

3. 민추협 태동의 본격화
 YS 단식 일 년 만에 출범하기까지


민추협은 YS상도동계와 DJ동교동계가 함께 전두환 정권에 맞서 힘을 규합했다는 데 의미가 컸다. 그러기까지 YS와 함께 머리를 맞댄 후농 김상현 전 의원의 역할이 크다는 평가다. 사진은 YS와 DJ가 민추협 소식지 표지를 장식하고 있다. © 시사오늘 권희정
민추협은 YS상도동계와 DJ동교동계가 함께 전두환 정권에 맞서 힘을 규합했다는 데 의미가 컸다. 그러기까지 YS와 함께 머리를 맞댄 후농 김상현 전 의원의 역할이 크다는 평가다. 사진은 YS와 DJ가 민추협 소식지 표지를 장식하고 있다. ©뉴시스

 

민추협이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기까지는 여러 과정이 있었다. 83년 12월 27일 남산 외교구락부에서 500여 명이 모여 결의를 표명한데 이어 84년으로 넘어오면서 출범 준비가 급물살을 타기에 이른다. 민주화투쟁 기구 발족을 위해 양측 각각 4명씩 동수로 참여하는 8인 위원회가 구성됐다. 김상현을 비롯해 동교동계에서는 조연하‧김녹영‧예춘호가 참여했다. 상도동계에서는 YS를 비롯해 이민우‧김명윤‧최형우가 나섰다.

적잖은 곤욕도 있었다. <YS 회고록>에 따르면 민추협 동참 서명을 받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서명한 사람은 어딘가로 불려갔고, 서명 한 뒤에도 지레 겁먹고 취소해 달라 하거나 서명을 약속하고도 해외로 도피한 경우 등이 잇따랐다. 민추협 발기인 서명용지가 너덜너덜해질 만큼 먹으로 썼다 지운 명단이 상당했다고 전해진다.

어려움을 딛고 마침내 84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운동 4주년이 되던 날을 기점으로 민추협이 탄생됐다. 83년 5월 18일 YS 단식이 있고 나서 1년 만에 돛을 올리게 된 것이다.

출범을 알리는 일성은 서울 외교구락부에서 민주화 투쟁 선언을 발표하면서 이뤄진다. 어떤 외침들이었는지 개략한 선언문을 옮기면 이렇다.

“우리는 이 땅에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것이 우리 국민 모두에게 주어진 절대적 사명임과 동시에 민주주의는 오직 국민의 투쟁에 의해서만 이룩될 수 있는 것임을 선언한다. 우리는 유신독재에 대한 전 민중적 항의와 열망의 표현으로 나타난 10‧26 사태를 민주주의로 수렴‧승화시키지 못한 것이 12‧12사태, 5‧17비상계엄 조치와 광주 사태, 그리고 그 후에 전개된 현 정권의 폭력과 기만에 의한 것으로서, 그 정당성과 정통성을 상실한 민족사의 치욕임을 확인했다.

현 정권은 소수의 부패한 특권층만을 위해서 절대 다수 국민들을 핍박하고 수탈해 오고 있다. 우리는 우리 국민의 긍지와 자존심을 회복시키고, 국가의 존엄을 해치는 군부독재를 청산해서, 국민이 자신의 정부를 선택할 수 있고, 시민의 참여가 보장되는 민주정부의 수립을 위하여, 민주화는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는 판단 아래, 이를 위한 민주화추진협의회를 발족한다.”
- <YS 회고록> 중-

돌아보면 길고도 여러 터널을 지나왔다.

79년 12‧12쿠데타 -> 80년 신군부의 5‧17 계엄 및 DJ 내란음모 혐의로 체포 -> 80년 5‧18 학살 -> 80년 5월 20일 YS 등 가택연금 -> 81년 5월 1일 YS 가택연금 해제 -> 81년 6월 9일 YS 민주산악회-> 82년 12월 미국 정치권 등 세계적 구명운동으로 DJ 형 집행정지 및 이후 미국 망명 -> 83년 5월 18일 YS 단식 투쟁 -> 83년 6월 1일 YS계+ DJ계 범국민적 연합전선 구축 성명서 발표->  83년 7월 YS와 김상현 (가)민추협 필요성 논의-> 84년 5월 18일 외교구락부에서 YS계 중심+DJ계 참여의 민추협 출범 등.

민주산악회와 YS 단식을 지나, 동교동계 일부가 참여한 것이 밑거름이 돼 민추협이 태동할 수 있었다는 분석이다.

무엇보다 민주세력을 아우르며 가교 역할을 한 김상현이 아니었다면 동교동계 결합은 어려웠을 거라는 판단이다. 여기에 김상현은 성심성의 노력 끝에 84년 6월 14일 결성대회를 앞두고는 DJ의 이름도 민추협에 올릴 수 있었다. 다만 미국에 있기에 현실 참여가 어려웠던 터라 고문으로 이름을 올리되 귀국 후에는 공동의장을 맡기로 했다. 이런 이유로 민추협 지도부 64명의 인선을 발표 한 날(6월 4일)에는 상도동계를 대표해서는 YS가, 동교동계를 대표해서는 DJ공동의장 대리로 김상현이 공동의장을 맡았다. 

 

4. 신민당 창당, ‘어떻게’
“선명야당 만들어야 한다고 YS에 제안”


후농 김상현 전 의원은 재치 있는 연설로 유명했다고 전해진다.사진은 후농의 아들 김영호 의원 블로그에 게시된 사진은 김상현 전 의원 추모 1주기 영상 화면 중 연설하는 후농의 모습 ⓒ시사오늘(사진= 후농 김상현 추모 1주기 영상 화면 캡처)
후농 김상현 전 의원은 재치 있는 연설로 유명했다고 전해진다.사진은 후농의 아들 김영호 의원 블로그에 게시된 사진은 김상현 전 의원 추모 1주기 영상 화면 중 연설하는 후농의 모습 ⓒ시사오늘(사진= 후농 김상현 추모 1주기 영상 화면 캡처)

 

올림픽을 준비하던 전두환 정권은 세계의 이목을 의식해 내부 소요를 잠재울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81년부터 84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정치풍토 쇄신을 위한 특별조치법’에 묶여 있던 정치인들을 대상으로 해금 조치를 단행했다. 규제에서 풀려난 이들은 모두 민추협 소속 정치인들이었다. YS를 비롯해 재야 각계의 성명 촉구 등이 관철된 결과이기도 했다. 3차 해금은 84년 11월 30일 이뤄졌다. 85년 2월 12일 12대 총선이 있기까지 70여 일을 남기고 있을 무렵이었다.

자연스레 신당 창당 논의에 불이 지펴졌다. 처음 불씨를 댕긴 주인인은 김상현이었다.

- 신민당 창당 논의는 어쩌다 얘기가 나온 건지요?

“제가 ‘선명야당’을 만들어야 한다고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창당을 제안했습니다. 당시 민한당이라는 야당이 있었지만 ‘민정당 2중대’라 불리던 관제야당으로 야당다운 야당은 없던 상황이었습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나의 창당 제안을 듣고 ‘돈도 없고 사람도 없다’며 우려를 표시했습니다.

또한 재야의 협력 없이 신당을 만들 수 없는 상황에서 장기표, 김근태 같은 이들은 ‘총선을 보이콧 하자’는 말까지 할 정도였습니다. 제가 ‘재야인사들의 총선 보이콧은 군사 정권을 인정해 주는 것’이라 설득했고 문익환 목사가 ‘그렇게 하자’며 저의 창당 제안에 뜻을 같이 했습니다.”

신당 창당 논의는 민추협 내에서도 의견이 엇갈렸다.

- 미국에 체류 중이던 DJ는 이때도 반대한 것으로 압니다. DJ는 신당 창당에 어떤 식으로 반대했습니까.

“이협과 최기선(전 인천시장)이 저의 집에 와 신당 창당 발기문을 검토했고 김영삼-김상현 공동의장 명의로 발표했습니다. 그 당시 김 전 대통령은 미국에서 인권문제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 연구소에 몸담고 있던 심기석 동지를 밀사로 한국에 보냈습니다. 심기석 동지와 평창동에 있는 어느 한 호텔에서 만났습니다. 김홍일도 같이 왔더군요. 그 때 김홍일은 의원이 아니었습니다. ‘DJ가 신당에 반대한다’며 ‘신당에 참여하면 절교를 선언하겠다’고 하더군요.

그러나 저는 민주화를 앞당기기 위해서는 이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김상현은 대의를 선택했다. 공동의장 대행의 이름으로 YS와 함께 12월 11일 선거 혁명을 예고한 ‘선명 통합신당 창당 원칙’을 발표했다. 84년 12월 20일 서울 동숭동 흥사단 대강당에서 ‘신한민주당’(약칭 신민당)을 당명으로 창당발기인대회를 가졌다. 김상현은 창당위원으로 참여했다.
 

DJ는 85년 12대 총선 나흘 전 귀국해 YS를 만나 신민당 지지를 선언했다. 신민당은 총선에서 돌풍을 일으키며 민한당을 제치고 제1야당이 되는데 성공했다.© 뉴시스
DJ는 85년 12대 총선 나흘 전 귀국해 YS를 만나 신민당 지지를 선언했다. 신민당은 총선에서 돌풍을 일으키며 민한당을 제치고 제1야당이 되는데 성공했다.© 뉴시스

 

- 반대하던 DJ도 12대 총선이 있기 나흘 전 귀국해 신민당에 입당했습니다. 만났을 당시 DJ는 뭐라고 말하던가요.

“김 전 대통령은 1985년 2월 8일 국내에 돌아와 연금 상태에 있다가 3월 1일 연금에서 해제됐고 김 전 대통령을 동교동 자택에서 만났습니다. 신민당이 총선에서 돌풍을 일으킨 직후입니다. 저는 ‘(김 전 대통령이 총선 전에 한국에 돌아와) 형님의 승리’라고 말했고 김 전 대통령은 ‘자네한테 사과하네’라고 말했습니다.”

DJ로서는 그럴 만도 했다. 총선 전 DJ는 신민당 대신 관제야당 논란의 민한당을 지지했다. 하지만 총선 결과 신민당은 정국을 장악할 만큼 서울 전역 및 대도시에서 압승을 거뒀다. 당시 상황에 대해서는 DJ의 권유로 민한당 소속으로 출마했다 낙선한 정대철 전 민주당 대표가 들려준 얘기를 통해서도 잘 드러나 있다.

“(12대 총선 전) DJ가 불렀어요. 민한당으로 나가라는 거예요. ‘봐라, 민한당이 1당이 된다.’ ‘조윤형(민한당 3대 총재)과 내가 민한당을 접수해라.’ 그걸 근거로 대권주자가 되겠다는 게 DJ 심산이었지요. 그런데 민한당은 관제야당이었거든요. 우리로서는 들어가기가 영 껄적 지근한 거라. 그런데 우리 보러 들어가라 해놓고 정작 본인(DJ)은 신민당에 들어가더라고요. 깜짝 놀랐지. 그랬더니 DJ가 ‘YS와 이민우(신민당 총재)가 바람을 일으키더라. 잘못 판단했다고 해요.’ 우리만 희생된 거예요.(웃음)”
- 정대철, 5월 4일자 <시사오늘> 풀인터뷰 중-

 

5.  87 대선 後 후농
DJ가 평민당 만들자, “야권분열”이라며 불참선언


대화는 민추협과 신민당을 거쳐 김상현 개인의 정치행보로 좁혀졌다.

-1985년 총선 당시 김(상현) 전 의원을 둘러싸고 여러 루머가 돌았는데 사실입니까.

“제가 청와대에서 돈을 받았다거나 정보를 넘겨 동교동을 팔고 다닌다는 등의 헛소문이 돌았습니다. 역사는 진실에 있는 것입니다.”

- 1987년 대선을 앞두고 김 전 대통령이 평화민주당(평민당)을 창당해서 나갈 때 따라가지 않았습니다. 어떤 이유에서였습니까.

“1987년 대선을 앞두고 저는 양김의 후보 단일화를 촉구하는 100만인 서명운동을 펼쳐 98만 명의 서명을 받았습니다. 양김이 모두 출마하는 것은 노태우를 당선시키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평민당 창당에 반대했던 겁니다. 제 정치 생명이 가장 위험하던 때였을 겁니다. 저는 김 전 대통령에게 눈물로 호소하며 평민당 창당을 막아보려 했지만 거절당했습니다. 정치는 후세가 평가할 겁니다. 국회의원이라도 한 번 더 하려면 평민당에 참여해야 했지만 지역주의에 편승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저는 대의를 좇아 통일민주당에 남았습니다.”

민추협과 신민당 돌풍, 6월 항쟁의 승리로 직선제가 쟁취됐지만 정작 87 체제에 치러진 첫 대선은 민주세력의 완패로 끝났다. DJ가 4자필승론으로 YS와의 후보 단일화 약속을 깨고 독자 출마하면서 양김이 분열에 이른 탓이었다. DJ에게 명분이 없다고 본 김상현은 통일민주당에 잔류해 YS를 돕는 길을 택한다.

90년 당시 YS가 ‘호랑이 굴에 들어가 호랑이를 잡겠다’며 3당 합당을 할 때도 후농 김상현은 이를 비판하며 합류하지 않는다. 노무현‧이부영‧이기택‧홍사덕‧김정길 등 잔류파들과 함께 통일민주당(꼬마민주당, 작은민주당이라고 불림)에 남은 것이다. 모두 실리보다는 원칙과 대의명분에 충실한 선택이었다.

후농 김상현이 DJ와 다시 함께한 것은 92년 14대 대선을 앞두면 서다. 힘이 필요했던 DJ는 평민당과 잔류파들로 이뤄진 꼬마민주당의 합당을 도모했고, 새 당명인 민주당 간판으로 세 번째 대권 도전에 나선 것이다. 하지만 YS에 밀려 다시 낙선하면서 정계은퇴 선언과 함께 영국으로 떠나고 만다. 이후 97년 15대 대선을 앞두고 정계 복귀한 DJ는 DJP연대(김대중+김종필)를 통해 당선, 마침내 대선에서 승리했다.

 

6. 국민의 정부와 후농
DJ 최측근임에도, 요직 맡지 못한 이유 ‘왜’


김상현 전 의원은 선명 야당을 만들어야 한다고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제안했다고 시사오늘 인터뷰에서 밝혔다.©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김상현 전 의원은 선명 야당을 만들어야 한다고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제안했다고 시사오늘 인터뷰에서 밝혔다.©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그 무렵 후농 김상현은 14,15대 국회까지 5선에 이른 다선의 유력 중진 의원이자 동교동계 본류로 통했지만 정작 국민의정부가 탄생되면서 요직에 오르지 못했다.

이는 한국 정치사에 있어 DJ의 영원한 라이벌인 ‘YS의 인사’ 행보와 비교되는 일이었다.

YS와 DJ, 이들의 정치 역사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정치인이 ‘최형우’와 ‘김상현’을 놓고 볼 때 그랬다. 최형우는 YS와 정치를 하는 동안 많은 갈등을 빚었다. 12년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YS가 유진산을 지지하자, 최형우는 YS 앞에서 술상을 발로 걷어차며 “그딴 식으로 하다가는 대통령은커녕 소통령도 못 한다”며 소리를 질렀다. 90년 3당 합당 때는 “죽으러 들어가는 굴에 혼자나 가서 죽지, 왜 나를 끌어 들이냐”며 YS에게 대놓고 항의하기도 했다. 하지만 YS 정부가 들어서자, 최형우는 내무부 장관 등 요직을 거치며 정권 2인자로 부상했다.

이와 달리 김상현은 무엇 때문인지 DJ 정권하에서 변변한 직책을 받지 못했다. 오랜 정치를 하면서 당 대표를 맡은 적도 없고 원내총무나 사무총장을 한 적도 없는 것이다.

DJ와 후농의 정치 입문 때부터 돌아보면 더욱 이해가 안 가는 일이었다. 후광(後廣) DJ와 후농 김상현은 열한 살 나이차가 있었지만 파란만장한 한국 정치사를 온몸으로 부딪치며 역경을 헤쳐 나온 정치적 동지 같은 관계였다.

1935년 전남 장성군에서 태어난 김상현은 6‧25 전쟁 통에 부모를 잃고 어렵게 자랐다. 구두닦이 등 일찌감치 생활 전선에 나가야 했고 고등학교 졸업도 힘들게 했다. 그런 김상현이 정치를 하게 된 것은 50년대 후반 DJ가 운영하던 동양웅변전문학원을 다니면서다. 이 인연을 계기로 김상현은 61년 DJ가 강원도 인제 보궐 선거에 뛰어들며 처음 금배지를 달게 될 때부터 선거운동을 도왔고 정치 인생을 함께 시작하게 된다. 이후 오랜 정치 경력을 통해 누구보다 DJ를 위해 헌신해왔던 김상현이었다. <YS 회고록>에서도 “김상현은 72년 박정희가 유신을 선포했을 때나 80년 전두환의 쿠데타 이후에도 군부독재 정권으로부터 갖은 악형과 고문을 당했다. 김대중을 대신해 고통을 당한 것”으로 술회되고 있다.

 

7. DJ 40대 기수론의 주역
후농, DJ 동참시키며 정치지도자 만들어


특히 김상현은 DJ가 대선주자 반열에 오르며 정치 지도자로 부상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이다.

- DJ가 70년 당시 YS가 주창한 ‘40대 기수론’에 참여하기를 망설였는데 김상현 전 의원께서 적극적으로 설득해 DJ가 뛰어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당시 사정을 설명해 주십시오.

“김영삼과 이철승이 40대 기수론의 기치를 내걸고 나왔지만 김 전 대통령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번 40대 기수론에 동참하지 않으면 앞으로 지도자 대열에서 영원히 탈락할 수 있으니 선언에 동참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김 전 대통령은 ‘아무런 준비도 안됐는데 어떻게 할 수 있느냐. 할 수가 없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저는 ‘선언이 곧 준비’라고 설득했습니다. 제가 서울의 ‘뉴 서울호텔’에서 차 한 잔 하자고 만난 자리에서였습니다.

저는 김 전 대통령에게 40대 기수론에 참여해야 정치적 꿈을 이룰 수 있다고 말했지요. 그랬더니 김 전 대통령이 ‘하루만 생각하고 내일 점심을 같이 하자’고 하더군요. 그래서 다음 날 ‘풍림’이라는 한정식 식당에서 만났습니다. (40대 기수론에) 동참의 뜻을 밝혔습니다.

나 아니었으면 김 전 대통령이 40대 기수론에 참여하지 않았을 겁니다.”

70년 신민당 대선후보 경선을 앞두고 당시 신민당 3선이었던 YS는 외교구락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대선출마를 선언했다. ‘40대기수론’을 내세운 것. 이에 당내 지분을 가장 많이 확보하고 있던 유진산은 “YS의 대선출마는 그야말로 구상유치(口尙乳臭)”라며 평가 절하했다. 하지만 이후 DJ와 이철승이 대선후보경선에 뛰어들자 ‘40대 기수론’은 신민당의 대세로 자리 잡았다.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유진산은 ‘불출마’를 선언하는 대신 YS, DJ 이철승 중 한 사람을 지명할 수 있는 권한을 자신에게 달라고 요구했다. YS와 이철승은 찬성했고, 자신을 지지해줄리 없다고 판단한 DJ는 이를 거부했다. YS와 이철승은 유진산을 만나, ‘유진산이 추천하는 후보를 밀겠다’고 서약했다.

70년 9월 29일 신민당 전당대회를 하루 앞둔 28일 오후, 유진산은 “나는 당수로서 YS를 대통령후보로 여러분 앞에 추천한다”고 발표했다. 이로써 YS는 신민당 대통령 후보가 눈앞에 와 있었다. 하지만 결선투표를 앞두고 이철승의 배신으로 DJ가 신민당의 제7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다.

DJ는 신민당 대선후보가 됨으로써 정치지도자로 발돋움하는 기폭제가 됐고, 그 공을 놓고 볼 때 DJ의 대권 도전을 강하게 밀어붙인 김상현을 빼고는 설명할 수 없다는 전언이다.

 

8. DJ와 멀어진 이유…“괘씸죄 때문”
정대철 대권-김상현 당권과 민추협 관계있나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상현 전 의원은 정치적 동지의 관계였다.©시사오늘(사진 : 김영호 의원 블로그에 게시된 후농 김상현 추모 1주기 영상 속 화면 캡처)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상현 전 의원은 정치적 동지의 관계였다.©시사오늘(사진 : 김영호 의원 블로그에 게시된 후농 김상현 추모 1주기 영상 속 화면 캡처)

 

이 때문에 더욱 궁금한 마음에,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 DJ가 집권한 후 김 전 의원이 국민의 정부에서 아무 직책도 맡지 못한 것은 97년 15대 대선을 앞두고 국민회의 대선 후보 경선에서 ‘정대철 대권-김상현 당권’을 내세웠기 때문으로 봐도 될까요.

“1997년 대선을 앞두고 김 전 대통령을 만나 (총재에서 물러나시고) 당 총재는 경선을 하자고 제안했지만 거절했습니다. 그래서 정대철 전 의원이 대선 후보 경선에 나섰고 저는 당권에 도전했던 겁니다.”

<권노갑 회고록>에서는 당시를 ‘정대철의 반기’라고 설명하고 있다. 정 전 대표에 대해 욕심이 없고 정직한 정치인이라고 말한 권 전 고문은 “정대철 의원은 15대 대선을 앞둔 96년 김상현 의원의 지원을 받아 새정치국민회의 대선 후보 경선에 나섰다”며 “그의 논리는 김대중 총재 단독으로 출마하는 것보다는 자기가 경선에 나가는 것이 흥행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었지만 그러나 실제로는 김대중 총재의 영향력에 손상을 줬다”고 지적했다. 또한 “반기를 든 배경엔 다른 것도 있겠지만 그 중심에는 늘 ‘김대중 총재는 대통령이 되기 어렵다’는 생각이 있었다”고 덧붙였다.

정 전 대표도 이 점에 솔직함을 드러냈다. 그는 최근 <시사오늘>과의 통화에서 “흥행을 꾀한 이유도 있었지만 당시 상황은 지금과 많이 다르다. DJ 필패론이 팽배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결과적으로 DJ가 이겨서 다행이었지만 분석하자면 대세론을 형성하던 이회창이 첫째 JP 도움을 거절하지 않았다면, 둘째 이인제가 독자출마하지 않았다면, 셋째 이회창 아들의 병역 기피 논란이 없었다면 이기기 어려운 선거였다”고 진단했다. 때문에 당시 경선에 나간 것은 정권교체의 대의를 위한 선택이었다는 상황 설명이었다.

후농 김상현은 그러면 정 전 대표와 같은 생각이었던 것일까. 그래서 ‘정대철 대권-김상현 당권’을 내세운 것일까. 이에 대해 후농을 잘 아는 한 인사는 비슷한 시기 통화에서 “후농의 목적은 DJ 승리였다. 이를 위해 경선 바람을 일으키려 한 것이었다. 또한 대권에 나가면 당권은 안 맡는다는, 이른바 ‘대권-당권 분리’ 원칙을 지키기 위한 소신과 결단에 의해 그 같은 선택을 한 것”이라고 전했다.

하지만 진심과 달리 이는 괘씸죄로 돌아와 그가 요직을 맡지 못한 원인이 됐다는 게 정 전 대표의 시각이다.

다만, 한발 더 들어가 보면 DJ와의 골은 민추협 참여를 놓고 의견이 엇갈렸을 때부터가 아니냐는 시각이다. 즉 둘 사이에 거리감이 생겼고, 이후 김상현은 DJ 눈 밖에 나면서 동교동계 내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외부를 전전했다는 추측이 더 설득력을 얻고 있다.

결국 88년 사면복권된 DJ가 국립묘지를 참배할 때 김상현을 배제하고 비호남 인사들과 함께한 것도, DJ가 14대 대선에서 진 뒤 영국으로 떠날 때 민주당 대표직을 자신에게 맡겨달라고 청한 김상현 대신 이기택에 맡긴 것도 내세운 명분은 따로 있었지만, 속내는 다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겠느냐는 해석인 것이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민추협과 신민당 성공을 통해  DJ의 위상은 크게 높아졌고, 지금까지 그 빛을 누리는 것을 생각하면, 판을 읽는 뛰어난 지략으로 그 길을 연 김상현의 공은 지대한 것임이 틀림없음에도 오히려 그 일로 견제와 미움까지 받았다고 생각하니 허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9. 후농의 인간애
“상생을 추구하는 포용력이 중요”


김상현 전 의원은 DJ 40대 기수론을 여는 등 대권주자 반열에 오르게 하는 주역으로 꼽히는 등 최측근이지만 국민의 정부에서는 요직에 앉지 못해 궁금증을 낳은 바 있다.©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김상현 전 의원은 DJ 40대 기수론을 여는 등 대권주자 반열에 오르게 하는 주역으로 꼽히는 등 최측근이지만 국민의 정부에서는 요직에 앉지 못해 궁금증을 낳은 바 있다.©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화제를 돌렸다.

-에피소드라고 할 수 있는데요. 1965년 서울 서대문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첫 출마해 당선될 때 경력으로 ‘아이젠하워 대통령 내한 환영 국민위원장’이란 특이 사항이 있었습니다. 국민위원장으로 어떤 활동을 했나요.

“‘3ㆍ1청년 동지회’ 300여 명이 서울 수성초등학교에 모여 환영대회를 열었던 기억이 납니다.”

- 1965년 선거가 첫 출마였는데 김 전 대통령의 도움을 받았습니까.

“그때는 김 전 대통령이 강원도 인제에서 국회의원으로 첫 당선되자마자 5‧16으로 의원직을 잃었을 때입니다. 그래서 세력이 없었을 때지요. 특별히 도움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권노갑 회고록>에서는 후농이 DJ의 도움으로 29살이라는 이른 나이에 국회의원이 됐다고 나왔지만 후농의 얘기는 이와 달랐다.

- 요즘은 주로 어떻게 지내는지 근황을 들려주십시오. 정치 재개 의사도 들려주십시오.

“특별한 일 없이 사람이나 만나고 후진들을 도우며 삽니다. 정치를 다시 할 생각은 없습니다.”

- 신진 정치인들 중에 눈여겨보는 사람이 있습니까.

“송영길, 박주선, 이낙연, 김부겸 의원 등입니다. 앞으로 지도자로 부상할 사람들입니다. 대중적 이미지도 좋고 건실해 보입니다.”

인터뷰 당시에는 저마다 신진 의원들이었지만, 지금은 다선의 유력 중진들이 됐다. 대세론을 형성 중인 이낙연 전 총리 등 후농의 전망대로 지도자로 부상해 있는 점이 새삼 눈길을 끈다.

-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상대방 입장을 먼저 고려하는 자세입니다. 내 입장을 고집해서는 안 되지요. 서구의 전술에서는 도망가는 적에게 황금의 다리를 놓아주고 퇴로를 열어주라고 했습니다. 우리 정치는 그 반대입니다. 상생을 추구하는 포용력이 중요합니다.”

후농의 너그러움과 자애로움은 작은 몸집 그 어디에 담아있는지 모르게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에 대해 권노갑 전 고문은 회고록에서 본인이 아는 인물 중 가장 포용력 있고 통 큰 정치인이라고 호평하기도 했다.

그의 사람 좋고 평판 좋은 따스한 면모는 여러 일화를 통해서도 전해진다. 가장 유명한 것이 고문관을 만난 일화다. 하루는 신호등을 건너다 오래전 자신을 고문한 경찰을 만났는데, 보통사람 같으면 얼굴이 굳어지고 상종하고 싶지도 않았겠지만 후농 김상현은 그동안 잘 지냈느냐며 진심으로 반갑게 인사해 상대를 놀라게 했다고 한다.

가슴으로 용서하지 않으면 그러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인간미 넘치는 후농의 모습은 그가 왜 한국의 대표 마당발로 불리는지, 상생과 포용의 정치인으로 회자되는지, DJ에 대해 때때로 서운함을 표했을지라도 왜 웃음으로 승화했는지, 동교동계 핵심이면서 찬밥 신세를 당한 와중에도 왜 아우르는데 열중했는지를 방증해주며 여운을 남기고 있다. 네 편, 내 편 가르지 않고 포용한다 해서 시인 신경림의 경우는 그의 호를 무경(김상현은 후농 외에 무경이란 호도 있었다)이라 했다는데 딱 그처럼 실천해오며 살아온 것이 아닌가 싶다.

다시 인터뷰로 돌아와,

- ‘후농(後農)’이라는 호는 고은 시인이 지어준 것으로 압니다. 어떤 뜻이 담겨 있습니까.

“고은 시인이 처음에는 고생하더라도 나중에 수확을 후하게 거두라는 의미로 지어줬습니다.”

80년 감옥에서 만난 고은 시인이 “인생 전반기에는 고생이 많으니 후반엔 수확을 많이 하라”며 ‘後農’이란 호를 지었다.

하지만 그의 호가 무색하게 정치 말년이 쓸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농 자신으로 볼 때는 여전히 대의명분과 정의를 위해 희생만 하고 열매의 혜택은 받지 못한 듯해 서글픈 일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이에 대해 후농의 아들이자 정치인인 더불어민주당 김영호 의원(자신의 지역구에서 3전 4기 끝에 당선돼 재선에 이른 김 의원도 후농처럼 자수성가형 정치인으로 평되고 있다)은 다른 생각을 전해줬다.

“아버지는 마땅히 제 할 일을 했다고 생각하셨다. YS와도 각별했지만 DJ에 대해서는 평생을 존경했다. 가장 좋아하는 정치적 동지이자 가장 존경했던 지도자였다. 민주주의를 위한 대의와 명분, 정의를 지키며 혼신을 다한 삶에 있어 그저 족했던 아버지의 마음이 서운함으로 물들어지거나 퇴색되지 않기를 바란다.”

담당업무 : 정치, 사회 전 분야를 다룹니다.
좌우명 : YS정신을 계승하자.
담당업무 : 정치부 기자입니다.
좌우명 : 꿈은 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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