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세계 음악의 독보적인 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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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세계 음악의 독보적인 곡
  • 박지순 기자
  • 승인 2009.11.03 16: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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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순의 음악 실타래]-Anak
'아낙(Anak)’은 우리나라에 소개된 무수한 외국의 대중 음악 중 가장 독특한 곡이다. 프레디 아귈라(Freddie Aguilar)라는 필리핀 남자가 불렀다.
 
보통 제3세계 가수들이 세계 시장 진출을 목표로 영어로 음반을 취입하는 경우가 많은데 ‘아낙’은 필리핀 고유어인 타갈로그어로 녹음돼 전 세계적인 히트를 기록한 유례가 드문 곡이다.

필자가 ‘아낙’을 처음 들은 것은 중학교 1학년 때로 ‘카페 음악’이란 카셋트 테잎을 통해서다. 영국 가수 도너반(Donovan)의 ‘I like you’도 함께 들어있었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아낙’은 특히 강한 인상을 줬다.
 
▲ 국내에 라이센스로 발매된 프레디 아귈라의 'Anak' 수록 LP.     © 시사오늘 박지순


프레디 아귈라의 음반에는 ‘아낙’의 영어 버전도 수록돼 있지만 원곡에 비해 감동이 약하다.  영어 발음이 정확하지 않은 면도 있지만 필리핀 사람의 고유한 감정은 그 나라 고유어로 불러야 온전히 전달되기 때문인 것 같다.

‘아낙’과 프레디 아귈라에 대해서 돌고 있는 소문이나 정보 중에는 부정확한 것들이 많다. 음악적 교류가 거의 전무한 필리핀 출신 가수가 부른 노래다 보니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경로가 희소해서 그럴 것이다.

‘아낙’이 발표된 연도도 막연히 1970년대라고 알려져 있지만 1978년 3월 3일에 열린 제1회 메트로 마닐라 가요제에서 공식적인 첫 무대에 올랐다. ‘아낙’이 불리어지는 동안 청중들은 간간히 속삭이는 찬사만을 던졌을 뿐 거대한 감동의 침묵 속에 빠져 있었다.
 
노래가 끝나자 귀청이 떨어질 듯한 박수 갈채가 쏟아 졌고 프레디는 더 이상 마닐라 북부의 작은 도시 올롱가포(Olongapo)의 무명 가수가 아니었다.

그러나 대상 수상자로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기 전까지도 프레디는 ‘아낙’이 대상을 타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고 단지 1,000곡이 넘는 예선 참가곡 중에서 결선 14곡에 끼인 것만으로 성공이라고 알았다.

프레디 자신의 자작곡인 ‘아낙’은 가요제 수상 직후 싱글 레코드(음반 한 장에 한 곡만 들어 있는 음반, 영국과 미국에서 흔히 발매됨)로 나왔고 2주 만에 필리핀에서만 10만 장이 팔리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싱글이 성공하자 한 달 뒤인 4월 25일 그의 자작곡 10곡이 담긴 첫 정규 음반이 발매됐고 6월까지 싱글은 40만 장의 판매고를 기록했다. 필린핀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낙’은 프레디의 자전적 노래이기도 해 그 감동이 더 클지도 모른다. 이 노래의 가사는 ‘네가 태어났을 때 엄마, 아빠는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른다’로 시작해 아들이 집을 나가는 과정을 그린 후 ‘필연코 지금쯤은 너도 후회하리라’고 끝을 맺는다.

프레디는 1953년 생으로 그의 아버지 살루드(Salud) 아귈라는 시골의 경찰서장이었다. 아버지는 프레디의 음악적 열망에 반대하며 법률가로 자라주기를 바랐지만 프레디는 전자공학을 택했고 공부하는 시간을 줄여 밤무대를 떠돌며 무명가수 생활을 전전했다. 이 때 부모님을 그리워하며 만든 노래가 ‘아낙’이라고 전한다.

필리핀에서의 성공과 동시에 ‘아낙’은 한국과 일본 등 아시아는 물론 전 세계 20여 개국 언어로 번안돼 집계가 확실치는 않지만 천 만 장 이상의 음반이 팔려나갔다. 우리나라에서는 황은미, 정윤선 등이 가사가 서로 조금 다른 곡으로 번안해 불렀는데 유명하지는 않다.

‘아낙’이 발표된 1978년은 우리나라에 번안가요 열풍이 불던 무렵이다. 대대적인 대마초 단속이 몰아치면서 한국 가수들은 설 자리를 잃어 갔고 엄격한 심의까지 가해져 창작곡보다 안심하고 부를 수 있는 번안곡을 선호할 수밖에 없었다.
 
박인희의 ‘방랑자’처럼 원곡보다 우리말 번안곡이 더 유명해진 사례도 다수 있었지만 ‘아낙’은 원곡이 워낙 출중하다 보니 번안곡이 그다지 빛을 못 봤다.

프레디가 필리핀 가수이면서도 독보적인 존재가 된 이유는 아시아 가수 최초로 ‘세계적인’성공을 거뒀기 때문이다. ‘아낙’ 이후에도 ‘Magdalena’, ‘Bayan Ko’ 등의 주옥같은 곡을 발표하며 빌보드 싱글 차트에도 이름을 올렸다.
 
일본의 나가부치 츠요시와 우리나라의 조용필은 자국을 넘어 ‘아시아적’ 스타가 됐지만 아시아 무대를 벗어나지는 못한 것과 비교된다.

프레디는 50대 후반인 지금도 현역으로 활동하며 가수라기보다 ‘운동가’로 필리핀 국민의 존경을 받고 있다. 그가 인기가수에서 국민가수로 부상한 계기는 1986년 마르코스 독재를 피해 망명 중이던 니노이 아키노가 필리핀으로 돌아오다 공항에서 암살된 사건이다.
 
▲ 밀짚모자와 얼룩무늬 옷 차림으로 노래를 부르던 프레디 아귈라는 정시, 사회, 교육 문제에 깊이 관여하는 운동가로 변신했다.     © 시사오늘 박지순

 
이 사건으로 민중은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프레디는 민중들 편에 서서 노래를 불렀다. 이 때 부른 ‘Bayan Ko(나의 조국)’는 필리핀에서는 제2의 국가처럼 불리고 있다.

프레디는 이후 정치, 사회 참여적인 노래를 많이 불렀고 현재는 마닐라의 가장 가난한 동네에 살면서 ‘아낙 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자신이 노래를 불러 얻은 수익으로 빈민가의 아이들에게 연필과 공책을 사주며 유일한 배움의 기회를 주는 것이다.

프레디는 자신이 부모의 마음을 상하게 한 속죄의 의미로 ‘아낙’을 만들 때의 심정을 빈민가의 아이들에게 돌려주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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