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S 서거 5주기] 숨 가빴던 1989…그는 왜 3당 합당의 길로 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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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 서거 5주기] 숨 가빴던 1989…그는 왜 3당 합당의 길로 갔나
  • 정진호 기자
  • 승인 2020.11.14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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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 DJ와의 야권 통합 우선시한 흔적 많아
단일화 실패·중간평가 유보로 DJ에 배신감
DJ와 통합 불가능해지자 3당 합당으로 선회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정진호 기자]

민주화 투사였던 YS는 왜 3당 합당을 택할 수밖에 없었을까. ⓒ시사오늘
민주화 투사였던 YS는 왜 3당 합당을 택할 수밖에 없었을까. ⓒ시사오늘

1990년 1월 22일 오전 10시. 노태우 당시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었다. 노태우 옆에는 YS(김영삼 전 대통령)와 JP(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서 있었다. 이 자리에서 노태우는 “민주정의당과 통일민주당 그리고 신민주공화당은 민주 발전과 국민 대화합, 민족 통합이라는 시대적 과제 앞에 새로운 정당으로 합당한다”고 발표했다. 이른바 ‘3당 합당’이었다.

국민은 충격에 빠졌다. 노태우와 JP의 결합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당은 달랐지만, 양자에게는 군부독재정권의 후예(後裔)라는 공통분모가 있었다. 그러나 이들 옆에 YS가 서 있는 모습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YS가 누구인가. 박정희·전두환 정권에 맞서 목숨을 건 투쟁을 벌이며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이끈 인물 아니던가.

인간의 행동을 설명하는 가장 간편한 방법은 그 책임을 개인에게 귀속시키는 것이다. YS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선택도 다르지 않았다. 이때부터 YS는 ‘대통령병 환자’라는 한마디로 규정됐다. 일반적인 시각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웠던 YS의 결정을, 사람들은 ‘대통령병’이라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를 동원해 설명하려 했다.

하지만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극(劇)의 개연성을 떨어뜨리듯, 대통령병 환자라는 규정도 YS의 행보를 온전히 설명하지는 못했다. 3당 합당을 대통령이 되고 싶은 욕망의 결과로 치부하기에는, YS가 내부 반발을 감수하면서까지 DJ와의 ‘야권 통합’을 우선순위에 뒀던 증거가 너무 많았다. 이에 <시사오늘>은 YS 서거 5주기를 맞아, 그가 왜 3당 합당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는지를 추적해 봤다.

 

제13대 대선
4자필승론 심취한 DJ, YS 양보에도 독자 출마로


YS와 DJ는 대한민국 민주화운동의 쌍두마차였다. ⓒ김영삼 대통령 기록전시관
YS와 DJ는 대한민국 민주화운동의 쌍두마차였다. ⓒ김영삼 대통령 기록전시관

YS는 ‘행동으로 말하는’ 스타일의 지도자였다. 어떤 일의 전후 사정을 구구절절 설명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2009년 본지와 한 인터뷰에서도 그는 1990년의 선택에 대해 “3당 합당은 군정을 종식시키기 위한 차선이었다”며 “호랑이를 잡기 위해 호랑이굴로 들어간다는 심정이었다”고만 했다.

그러나 이 짧은 발언에는 YS의 결정을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단서가 숨어 있다. 그는 3당 합당이 ‘차선(次善)’이라고 말했다. 최선(最善)이 따로 존재했으며, YS도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3당 합당의 비밀은 ‘왜 YS가 차선을 택할 수밖에 없었나’라는 질문의 답과 맞닿아 있다. 이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시계를 1987년으로 되돌려야 한다. 1987년. 대한민국에 민주화가 찾아온 바로 그 해다.

1987년 6월 29일 오전 9시. 노태우는 중앙집행위원회 회의실에서 “여야 합의하에 조속히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하고, 새 헌법에 의한 대통령 선거를 통해 1988년 2월 평화적 정부이양을 실현하겠다”고 선언했다.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헌신이 모이고 모여, 민주화라는 결실을 맺은 것이다.

한반도에 ‘진정한 봄’이 찾아오자, 국민의 시선은 두 ‘민주화의 거두(巨頭)’에게로 쏠렸다. YS와 DJ(김대중 전 대통령)였다. 두 사람은 오랜 시간 힘을 합쳐 군부독재정권과 싸워왔으나, 성향과 지지 기반은 완전히 달랐다. 때문에 YS와 DJ가 결합하면 엄청난 폭발력을 낼 수 있었지만, 단일화에 실패한다면 국민이 보수와 진보, PK(부산·경남)와 호남 등으로 갈가리 찢길 가능성이 높았다. 물론 이 경우 승자는 노태우가 될 터였다.

4자필승론에 심취했던 DJ는 결국 단일화 대신 독자 출마를 선언한다. ⓒe영상역사관
4자필승론에 심취했던 DJ는 결국 단일화 대신 독자 출마를 선언한다. ⓒe영상역사관

YS도 DJ도, 그 외 모든 사람들도 두 사람이 힘을 모아 대선에 나서는 것이 ‘최선’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시작부터 엇박자가 났다. DJ는 YS가 서독 방문 때 “김대중 씨가 사면·복권되면 후보로 지지할 것”이라는 발언을 내세워 양보를 요구했다. 반면 YS는 DJ가 1986년 11월 발표한 “직선제가 수용되면 불출마할 것”이라는 약속을 상기시켰다.

민추협 공동의장이던 DJ는 1986년 11월 5일 민추협에서 성명을 통해 “현 정권이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수락한다면 비록 사면·복권이 되더라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조건부 불출마 의사를 밝혔다. 독일을 방문 중이던 YS도 다음 날인 6일 DJ 불출마 선언과 관련해 내외신 기자회견을 갖고 “김대중 씨가 사면·복권이 되면 대통령 후보로 지지할 생각을 갖고 있다고 얘기해왔으며 그가 불출마 결심을 밝혔지만 사면·복권되면 출마토록 권유하겠다”며 “민주화가 될 때까지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도 DJ와 협력하겠다”고 화답했다.

이 발언을 놓고 양자가 신경전을 벌이자, 노태우가 어부지리(漁父之利)로 당선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결국 두 사람은 9월 14일을 시작으로 같은 달 29일까지 여러 차례 회동을 열어 단일화 논의를 진행했다. 그러나 보름 동안 지속된 단일화 회동은 서로간의 입장차를 확인하는 데 그칠 뿐이었다.

무엇보다도 통일민주당 내 지분구조가 문제였다. 당시 민주당의 전국 92개 지구당 가운데 창당지구당은 56곳이었는데, 그 중 30곳이 YS 쪽, 26곳이 DJ 쪽이었다. 이에 동교동 측 이용희는 상도동계가 창당지구당을 많이 갖고 있으니 미창당지구당 36곳 중 23곳을 동교동계가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고, 상도동 측 김동영은 18곳씩 50 대 50으로 임명해야 한다고 맞섰다. YS나 DJ나 상대 요구를 수용하는 것은 곧 경선에서 ‘절대 열세’에 몰린다는 것을 뜻했으니, 쉽게 물러서기 힘든 입장이었다.

그런데 마지막 회동 이후 약 한 달 만인 10월 22일, 외교구락부에서 DJ와 마주 앉은 YS는 동교동 측 제안을 수용하겠다고 선언한다. 그러면서 경선으로 후보 단일화를 하자고 제안했다. 상도동계 내부에서는 ‘YS가 결국 후보 자리를 양보했다’는 탄식이 흘러나왔지만, YS는 동교동계의 요구를 수용하고 경선을 치르는 것만이 후보 단일화를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상황에 대해 심의석은 <시사오늘>과의 인터뷰에서 “YS와 DJ가 외교구락부에서 만나고 있을 때 민주산악회 경기도 광명 지부 창립대회가 있었다. 그 자리에 김동영, 최형우, 노병구, 김덕룡 등 YS를 제외한 상도동 핵심이 다 있었는데, YS가 DJ에게 한 제안이 알려지자 ‘김영삼은 석두(石頭)’라는 탄식과 함께 소란이 일 정도였다. 그만큼 YS에게 불리했던 것”이라고 회고했다.

YS와 DJ가 단일화에 실패하면서, 노태우는 어부지리로 대통령에 당선된다. ⓒe영상역사관
YS와 DJ가 단일화에 실패하면서, 노태우는 어부지리로 대통령에 당선된다. ⓒe영상역사관

하지만 DJ의 반응은 뜨뜻미지근했다. “이제 때가 늦은 감이 있다. 양측이 경선할 때는 지금 같은 정보공작 정치 하에서 위험과 불미스런 사태가 우려된다”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지만, 당시 DJ는 ‘4자 필승론’에 마음을 빼앗겼던 것으로 전해진다. 4자 필승론이란 노태우(대구·경북), 김영삼(부산·경남), 김종필(충청), 김대중(호남)이 모두 출마해 각자 자기 지역을 가져가면 수도권에서 가장 지지율이 높은 후보인 DJ 본인이 당선될 수 있다는 이론이었다. 결국 DJ는 10월 28일, 대선 출마와 평화민주당 창당을 선언하며 민주당을 탈당한다.

YS는 분노했다. 후에 YS는 자신의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에 “나는 깜짝 놀랐다. 나에게는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해 놓고는 참모를 보내 일방적으로 탈당을 통고하다니! 아무리 출마를 하고 싶어도 민주화의 대의와 국민 앞에 했던 약속을 이처럼 저버릴 수 있는지 놀라울 뿐이었다”고 썼다.

그러면서 “분당하는 사태가 오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던 나로서는 김대중의 통고는 청천벽력과 같은 것이었다. 뒤통수를 호되게 맞은 느낌이었다”며 “더구나 이중재가 나를 찾아왔을 때는 이미 방송을 통해 김대중의 탈당 소식이 보도되고 있었다”고 덧붙였다. 제13대 대선을 앞두고 벌어진 이 사건은, DJ에 대한 YS의 신뢰가 무너지는 하나의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제13대 총선
YS 소선거구제 수용에도 무산된 야권 통합


제13대 총선을 앞두고, YS는 내부 반발을 무릅쓰면서까지 소선거구제 도입을 수용했다. ⓒ시사오늘
제13대 총선을 앞두고, YS는 내부 반발을 무릅쓰면서까지 소선거구제 도입을 수용했다. ⓒ시사오늘

그러나 이것만으로 YS가 야권 통합이라는 ‘최선의 길’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제13대 대선에서 노태우가 당선된 후, YS는 “야권후보 단일화를 이룩하지 못한 부덕의 소치에 대해 국민 여러분께 죄송한 마음을 금할 길 없으며, 깊이 자성하고 사과드린다”는 내용의 사과성명을 발표했다. 그리고 곧바로 4개월 후에 있을 제13대 총선을 위한 야권 단일화 작업에 돌입한다.

1988년 2월 8일. YS는 기자회견을 통해 야권 통합을 위한 총재직 사퇴를 선언했다. 자신이 물러나야 ‘조건 없는 야권 통합’이 가능할 것이라는 이유였다. 실제로 YS의 사퇴는 야권 통합 논의에 불을 붙였다. YS가 총재 자리를 내놓은 지 사흘 만에, 통일민주당과 평화민주당은 남산 외교구락부에서 야권 통합기구 합동회의를 갖고 총선 전 양당을 통합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또 하나의 이견이 드러난다. 민주당이 ‘무조건 통합’을 주장한 반면, 평민당은 ‘소선거구제 합의 후 통합’을 들고 나온 것이다. ‘전국구 정당’이었던 민주당은 중선거구제를 포기할 이유가 없었고, 호남에서 압도적 지지를 받고 있던 평민당은 소선거구제 도입을 정치적 돌파구로 생각하고 있었기에 선거제도 변경 문제는 야권 통합의 뇌관(雷管)으로 부상했다.

나의 백의종군 선언은 지지부진하던 야권 통합 논의에 불을 지폈다. 통합 논의의 쟁점은 김대중의 평민당 총재직 사퇴와 소선거구제 도입 여부로 좁혀졌다. 민주당에서는 “김영삼 총재가 대국적인 차원에서 백의종군을 선언했으니, 김대중 총재도 당연히 총재직을 내놔야한다”는 주장을 했고, 평민당은 이에 맞서 통합을 전제로 민주당이 중·대선거구제 당론을 소선거구제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3권 141~142쪽

나는 본래부터 소선거구제를 지지했다. 민주주의가 정착된 선진국들은 거의가 소선거구제를 채택했다. 양당제를 정착시키는 데도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고, 당시 여론 조사를 하면 국민들이 압도적으로 소선거구제를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나는 민주당에 중선거구제를 철회하라고 촉구했다. 그러나 김영삼 씨가 조종하는 민주당은 이를 거부했다. 민주당은 나를 겨냥해서 퇴진만을 요구했다. 언론, 특히 신문은 나의 퇴진을 부추겼다. 내가 퇴진하면 모든 문제가 풀릴 것처럼 보도했다.

김대중 자서전 1권 538~542쪽

제13대 대선에서 쓴맛을 본 YS와 DJ는 제13대 총선을 앞두고 다시 한 번 손을 맞잡았다. ⓒ시사오늘
제13대 대선에서 쓴맛을 본 YS와 DJ는 제13대 총선을 앞두고 다시 한 번 손을 맞잡았다. ⓒ시사오늘

 

양당의 팽팽한 줄다리기에, 야권 통합은 무산 위기에 놓였다. 이러자 YS가 다시 한 번 나섰다. 총재직에서 물러난 뒤 설악산, 속리산 등을 오르며 잠행하던 YS는 급히 상경해 DJ를 만났다. 그리고 소선거구제를 수용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YS의 복심(腹心)이었던 김덕룡이 속리산까지 쫓아가 “소선거구제를 받으면 우리가 제2야당으로 추락할 수 있다”며 재고를 요청하고, 차남 김현철도 ‘소선거구제로 총선을 치를 경우 민주당이 평민당에 뒤처져 원내 3당으로 추락할 것’이라는 데이터를 전달했지만 YS의 의지을 꺾지는 못했다. “군정을 종식하려면 야권 통합이 필요하고, 야권 통합을 하려면 소선거구제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 YS의 생각이었다.

김현철은 11월 5일 <시사오늘>과의 통화에서 “당시 여론조사를 하면 민주당은 중선거구제를 유지하는 게 유리했고 평민당은 소선거구제로 바꾸는 게 유리했다. 그런데 DJ가 소선거구제로 바꾸지 않으면 선거를 보이콧하겠다고까지 하니까 YS가 양보를 했던 것”이라며 “YS가 불리한 걸 알면서도 양보를 했던 이유는 야권 통합을 하기 위해서였다. 민주당 내에서도 소선거구제 도입에 대해 반대가 많았지만 더 이상 야권이 분열하면 안 된다는 대의를 생각했던 것”이라고 회상했다.

김영삼 전 민주당 총재는 23일 상오 상도동 자책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민주당은 야권 단일화를 달성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소선거구제를 적극 수용할 것을 당부드린다”며 현재의 중선거구제 당론을 철회하고 소선거구제로 당론을 변경할 것을 촉구했다. 지난 8일 총재직을 사퇴한 후 일체의 정치적 활동을 중단했던 김 전 총재는 이날 야권 통합의 최대 장애 요인이었던 선거구 문제가 해소될 것으로 보고 통합 논의를 위해 김대중 평민당 총재와의 회담을 제의했다.

김대중 평민당 총재는 이 제의를 즉각 수락, 두 김 씨는 이날 하오 서울 가든호텔에서 분당 이후 첫 회동을 갖고 민주당의 중선거구제 당론 포기에 따른 야권 통합 원칙 문제를 논의했다.

이날 회담에서 김 전 민주당 총재는 민주당 측에서 야권 통합을 위해 소선거구제로의 선 당론 변경을 수용한 만큼 김 평민당 총재도 야권 통합 후 제2선 후퇴라는 약속을 지켜줄 것을 촉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야권의 통합과 여야의 선거법 협상도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됐다.

1988년 2월 23일자 <경향신문> ‘두 김 씨 전격 회동’

이로써 야권 통합은 급물살을 탔다. 3월 8일에는 소선거구제 도입을 골자로 하는 선거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고, 민주당과 평민당, 한겨레민주당이 참여하는 3자 통합 테이블이 마련됐다. 협상 과정에서 DJ의 거취를 둘러싼 갈등이 있었지만, 대표최고위원제로 지도부를 꾸리고 총선 공천을 주관하는 조직위원장에 한겨레민주당 장을병을 선임하기로 합의하는 등 야권 통합은 무리 없이 결실을 맺는 듯했다.

YS가 소선거구제를 수용했음에도 야권 통합은 이뤄지지 않았고, 통일민주당은 제3당으로 떨어진다. ⓒ국회보
YS가 소선거구제를 수용했음에도 야권 통합은 이뤄지지 않았고, 통일민주당은 제3당으로 떨어진다. ⓒ국회보

하지만 통합 협상 최종안에 도장을 찍기로 한 3월 19일,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진다. 회동 장소였던 서울 마포구 서교호텔에 평민당 지지자들이 몰려들어 소란을 피운 것이다. 당시 언론 보도에 따르면, 상도동계 최형우가 회담장에 도착하자 이미 1시간 전부터 농성을 벌이던 전대협 소속 학생 150여 명과 평민당 지지자 100여 명이 ‘무조건 통합’, ‘독재 타도’, ‘최형우 사쿠라’라는 등의 욕설을 퍼부으며 손찌검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사건에 대해 YS와 DJ는 회고록에서 서로 다른 기억을 떠올렸다.

민주당은 3월 들어 재야세력이 만든 한겨레민주당과 2차 통합을 추진하게 된다. 민주당과 한겨레민주당의 통합 논의는 급진전돼 3월 16일 당명을 ‘우리민주당’으로 정하는 등 통합 선언이 초읽기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날 오전 김대중이 돌연 총재직 사퇴를 선언함에 따라 통합 논의는 또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김대중은 민주당과 한겨레민주당 통합을 막기 위해 총재직을 내던졌다.

이에 민주당·평민당·한겨레민주당 협상대표들은 다시 머리를 맞대고 막판 3자 통합을 시도했다. 그러나 3월 19일, 예상외의 폭력 사태로 통합은 완전히 무산됐다. 통합 협상에 최종적으로 도장을 찍기로 한 시각, 서교호텔 주변에는 대낮부터 괴청년들이 북적거렸다. 게다가 최종안을 들고 김대중에게 결재를 받으러 간 평민당 협상대표는 시간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기다리다 못해 장소를 옮기려던 민주당 협상대표들에게 괴청년들이 달려들어 난장판이 벌어졌다. 

나의 총재직 사퇴로 불을 댕긴 총선 전 야권 통합 논의는 김대중의 총재직 사퇴까지는 이끌어 냈으나, 폭력사태로 결국 판이 깨지고야 말았다.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3권 142~143쪽

3월 17일, 나는 총재직을 사퇴하면서 이제는 통합 논의를 재개하자고 촉구했다. 그토록 민주당이 원했던 것을 들어주었다. 그러자 이번엔 민주당이 선 부분 통합, 후 평민당 합류를 주장했다. 양당은 통합 협상 대표들이 만나 의견을 조정했지만 협상은 계속 겉돌았다. 그러다가 학생과 당원들이 협상 장소로 몰려가 민주당의 성의 있는 협상을 촉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통합 협상 중단을 선언해버렸다. 돌이켜보면 민주당은 애당초 진정한 통합에는 뜻이 없었다. 그저 의원들을 빼가고 당 전체를 흔들어 평민당을 와해시키고 나를 정치적으로 매장시키려 했음이 분명했다.

김대중 자서전 1권 542쪽

두 사람의 기억 중 어느 쪽이 진실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최형우는 자서전 <더 넓은 가슴으로 내일을>에 “양당의 협상 대표들이 만장일치로 합당 합의서에 서명을 하고 기대에 들떠 있었는데, 웬일인지 DJ의 서명을 받으러 간 평민당 대표들이 돌아오지 않았다”며 “뒤늦게 돌아오기는 했으나, 그들의 낯빛이 별로 밝지 않았다. DJ가 끝내 우리 협상안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썼다.

당시 재정국장으로서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김무성도 “서교호텔 폭력사태는 평민당 측, 연청(새시대 새정치 연합청년회) 청년이 다수 있었다”고 증언했다. 이에 대해 한화갑은 <시사오늘>과의 통화에서 “나는 당시 실무진으로 참여하지 않아 그때 일은 잘 모른다”고 답했다.

어쨌든 한 가지 확실한 것은, YS가 제13대 대선 단일화에 이어 제13대 총선 야권 통합 과정에서도 DJ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믿었다는 것이다. YS 역시 DJ와의 통합이 최선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두 차례 통합 협상 과정을 통해 조금씩 ‘최선을 현실화하는 일’이 쉽지 않다는 점을 인식하기 시작한 듯하다. 그리고 이로부터 1년 후, YS가 ‘최선의 길’을 포기하게 만든 결정적인 사건이 벌어진다.

 

중간평가 유보
노태우와 협상 뒤 3金 합의 깬 DJ


3金은 한 자리에 모여 선(先) 5공 청산, 후(後) 중간평가 실시에 합의했다. ⓒ뉴시스
3金은 한 자리에 모여 선(先) 5공 청산, 후(後) 중간평가 실시에 합의했다. ⓒ뉴시스

1987년 제13대 대선 과정에서 노태우는 한 가지 흥미로운 공약을 내세웠다. “1988년 가을 올림픽을 치른 이후 오늘의 약속을 포함해서 6·29 선언과 그간의 모든 선거공약의 이행 여부에 대해 국민 여러분으로부터 중간평가를 받도록 하겠다”는 약속이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노태우의 이 공약은 YS와 DJ가 완전히 등을 돌리게 만든 원인으로 작용한다.

1989년 2월. 취임 1주년을 맞은 노태우는 “당과 정부는 언제라도 중간평가를 실시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하라”고 지시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로 여론이 호전된 시점에 중간평가를 실시하면, 5공 청문회에서 드러난 군부독재정권의 치부를 덮고 야당의 기세를 꺾어 정국을 타개할 수 있으리라는 계산이었다.

DJ는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그는 “민정당이 신임 연계 중간 평가를 강행하려 함은 국민에게 심판을 받으려는 자세가 아니다. 그것은 국민을 협박하는 것”이라며 “5공 비리 청산이나 민주화, 민생 문제 해결 등이 완전 매듭 되지 않은 상태에서 국민들이 무엇을 보고 평가한단 말인가. 시기에 구애받지 않고 제반 작업이 마무리된 다음에 중간 평가를 실시하는 것이 순리”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JP도 “헌법상 보장된 대통령 임기를 물리적으로 조정하는 것은 위헌”이라며 중간평가에 반대한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반면 YS는 이 시기를 놓치면 노태우 정부가 중간평가를 영영 시행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국민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중간평가가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처럼 세 사람 사이에 이견이 드러나자, 3김은 조율의 필요성을 느끼고 3자회담을 개최한다.

같은 해 3월 4일. 3김은 국회 귀빈식당에 모여 중간평가에 대한 야권의 대책을 협의했다. 격론 끝에 세 사람은 ‘선(先) 5공 청산, 후(後) 중간평가’ 실시로 의견을 모았다. 하지만 여당은 “중간평가를 실시하지 않아도 무방하다는 등의 보장이 없는 상황에서, 5공 청산을 이유로 중간평가 연기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강행을 시사했다.

여야의 주장이 엇갈리자, 노태우는 야당 총재들과의 회담을 거친 후 중간평가 실시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태도를 취했다. 그러면서 3월 7일에 JP를, 10일에 DJ를 개별적으로 만났다. ‘강경파’인 YS는 회담에서 제외됐다.

DJ는 노태우와의 회담 후 3金과의 약속을 백지화했고, 결국 YS는 3당 합당으로 나아가게 된다. ⓒ김영삼 민주센터
DJ는 노태우와의 회담 후 3金과의 약속을 백지화했고, 결국 YS는 3당 합당으로 나아가게 된다. ⓒ김영삼 민주센터

3월 10일. 노태우와 DJ는 3시간 10분 동안 대화를 나눴다. 유감스럽게도 이 3시간은, DJ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시간이기도 했다. 노태우와의 회담 후 DJ가 “중간평가를 신임과 연계해 국민투표로 실시하는 것은 현행 헌법에 정신에 어긋난다”며 “중간평가를 실시하더라도 헌법에 부합돼야 하고, 정책 평가로 국한돼야 한다”고 입장을 바꿨기 때문이다. 불과 일주일 전 야3당 총재가 문서화했던 중간평가 관련 합의가 백지화되는 순간이었다.

YS는 분통을 터뜨렸다. 그는 회고록을 통해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노태우로서는 스스로의 대선 공약을 이행하지 않는 부정직하고 불성실한 태도를 드러낸 것이었다”며 “김대중·김종필의 경우, 새해 들어서만 세 사람이 두 차례나 모여 합의하고 또 국민 앞에 발표한 원칙을 뒤집어엎었다. 그것도 3월 4일의 야3당 총재회담으로부터 1주일이 채 지나지 않아서였다”고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이 일을 기점으로 YS는 야권 통합이라는 ‘최선책’을 사실상 포기한 것 같다. 중간평가 유보 사건 두 달여 후인 4월 26일, 야3당 총재 회담에서 만난 YS와 DJ는 중간평가 문제로 설전을 벌였다. 그로부터 두 달이 지난 6월 21일에는 노태우의 ‘정책 연합’ 제안에 YS가 “정책 연합은 안 되고, 하려면 통합을 해야 한다”고 답하는 일도 있었다. 이전이었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발언이었다.

물론 YS는 회고록에서 “이때 내가 정말로 민정당과 합당을 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며 “단지 정책 연합은 잘못이라는 점을 지적한 것”이라고 했지만, YS가 DJ와의 야권 통합이라는 ‘최선’ 대신 ‘차선’을 고려하기 시작했음은 분명해 보인다. 그리고 석 달여가 더 지난 10월 2일, YS는 JP와 안양 컨트리클럽에서 만나 정계 개편을 심도 있게 논의했다. 사실상 YS가 DJ와의 야권 통합 대신 보수 통합, 즉 ‘호랑이굴에 들어가 호랑이를 잡는’ 쪽으로 방향을 바꿨다는 신호였다.

김덕룡도 <시사오늘>과의 만남에서 “YS의 목표는 언제나 단 하나, 군정 종식이었다. DJ와 손을 잡으려 했던 것도 군정을 종식시키기 위해서였던 것”이라며 “그런 의미에서 보면, DJ와의 통합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YS가 3당 합당을 선택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야권 통합은 군정 종식으로 가는 수단이었지 목표가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군부독재를 끝내기 위한 더 좋은 방법이 존재한다면 YS는 언제든지 그 길을 택할 준비가 돼있었다는 의미다.

YS가 3당 합당으로 나아간 것이 정말 그가 ‘대통령병 환자’였기 때문이었을까. ⓒ시사오늘
YS가 3당 합당으로 나아간 것이 정말 그가 ‘대통령병 환자’였기 때문이었을까. ⓒ시사오늘

역사의 물줄기가 3당 합당 쪽으로 흘러가려 하자, YS의 ‘오른팔’이었던 최형우는 “아무리 그래도 군부독재정권과 손을 잡을 수는 없다”며 또 한 번 ‘야권 통합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때도 주요 중진 의원들이 대거 참여했던 민주당 측과 달리, 평민당은 통합에 미온적이었다.

평민당 내 통합 찬성파는 정대철·조세형·김덕규·이해찬·이상수 등 10여 명에 불과했고, 그조차도 적극적으로 나설 수 없는 형편이었다. 동교동계 인사들의 증언에 따르면, 4당 체제에서 제1야당 총재 지위를 누리고 있었던 DJ는 어떤 방식으로든 4당 체제가 무너지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김덕룡도 “DJ가 야권 통합보다는 제1야당의 지위를 즐기고 있었다고 본다”며 “4당 체제가 무너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고 생각한다”고 추측하기도 했다.

DJ가 야권 통합에 소극적인 입장을 보이면서, 최형우에게 동감하던 평민당 측 인사들도 뜻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민주당의 요청에 평민당이 응답하지 않자, 최형우의 목소리는 자연스럽게 힘을 잃었다. 그렇게 역사는 ‘3당 합당’을 향해 줄달음쳤다.

이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당시 상황에서 최선은 무엇이었을까. YS와 DJ의 야권 통합이었을 것이다. 이 사실은 YS도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다. 실제로 YS가 기득권을 버리면서까지 야권 통합을 위해 노력했던 흔적은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그렇다면 YS는 왜 야권 통합이라는 최선이 아닌 ‘호랑이굴에 들어가 호랑이를 잡는’ 차선을 택할 수밖에 없었을까. 정말 YS가 ‘대통령병 환자’였기 때문이었을까. 판단은 당신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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