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룡 “민주산악회야말로 민추협의 산실” [민추협 되짚기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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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룡 “민주산악회야말로 민추협의 산실” [민추협 되짚기⑧]
  • 정세운 기자,윤진석 기자
  • 승인 2022.04.02 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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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룡 민추협 공동이사장
민추협 알려면 5·18, YS단식, 민산 조명해야
민산, 언론 공백기 시절 가가호호 소식지 전달
전국 조직만 200만 추산… ‘벤치마킹 모델됐다’
​​​​​​​DJ 권한 대행에 “예춘호 아닌 김상현 맞을 것”
신민당 창당 제안 주역, ‘선거혁명 승리 자신해’
50대 50 지분 나눈 YS, ‘기득권 대신 통합 힘써’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정세운 기자, 윤진석 기자]

김덕룡 이사장은 민추협 회원들에 대한 정치적 속박과 회유가 엄청났다고 말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김덕룡 이사장은 민추협 회원들에 대한 정치적 속박과 회유가 엄청났다고 말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김덕룡(DR)을 다시 만났다. 3월 28일 서초구 방배동 그의 사무실을 찾았다. 지난해 12월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학술회의에서 담소를 나눈 뒤 몇 개월이 훌쩍 지났다. 빼곡한 책장 틈바구니 화분 위로 꽃이 폈다. 황토색 양복에서 봄이 느껴졌다. 이번에 다시 만난 건 2020년 나눈 미공개 인터뷰를 보충하기 위해서였다. 벌써 2년이 흘렀다. 故김영삼(YS) 대통령 서거 5주기를 앞두고 그로부터 격동의 3당 합당 당시에 대해 들었다. 군정 종식을 위해 왜 3당합당이 차선이었는지가 숨은 이야기와 함께 전해졌다. 만난 차에 대화는 민추협 얘기로 넘어갔다. YS 단식부터 민주산악회(민산), 신민당 창당, 2·12 선거혁명 등을 거쳐 여러 일화가 쏟아졌다. 당시 내보내지 못했고, 적절한 때 내보낼 참이었다. 

“반갑네.” “반갑습니다.” 차를 마주하고 잠시 여담을 나눴다.

상도동계 막내 김영춘이 생각났다. 

- 김영춘 전 의원도 은퇴를 선언하고…. 한 시대를 거쳐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만들었다면 만든 건데, ‘흐르는 강물처럼’ 역사적으로 퇴장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3월 21일 김영춘은 “거대 담론은 끝났다”는 말로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대선을 앞두고 2월 18일인지 영춘이로부터 전화가 왔어요.”

김영춘은 학생운동 시절 DR이 발탁해 정계 입문했다. 

“‘서울로 가서 의논드릴 게 있습니다.’ 식사하는데 표정이 심상치 않아요. 선거 끝나면 좀 떠나고 싶다는 거예요. 난 충격이더라고. 진영이라든가 파벌에 빠지지 않고 건강함을 유지하며 균형 잡힌 사고를 하는 사람이잖소. 할 일이 많고 큰 역할을 해야 하는데 이런 사람이 정계를 떠나겠다는 거에 내가 참 충격이 컸어요.”

- 대선 결과와 관계없이 떠난 거네요. 

“대선이 있기 이십 며칠 전의 일이었어요. 영춘이는 한번 결단하면 그대로 가는 친구예요. 내가 말려서 되는 일이 아니다 싶었지. 상도동계 막내가 정계를 은퇴한다고 하니 이제 정말 상도동, 동교동 시대가 끝나가는구나. 공식적으로 막을 내리는구나 실감이 나더라고.”

쓸쓸함이 비쳤다. 

“한 개인의 투쟁은 세월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지지만, 그러나 우리가 민주화운동을 했던 열정과 의지까지 퇴장하고 은퇴하는 것은 아니잖은가. 그렇게 해서는 안 되지 않느냐고 반문했어요. 민추협의 정신 같은 것은 끝가지 갖고 살아가야지 않느냐. 그런 생각도 들었고 말이오.”
좌장의 입장에서 막내 김영춘은 언제나 젊은 정치인으로만 각인돼 있는 듯했다. 그를 생각하는 눈빛에서 격세지감과 애틋함이 교차했다. 

 

1. 민추협을 알기 위한 세 가지
“5·18과 YS단식, 민산”


김덕룡은 신민당 창당을 처음 제안한 인물이라고 시사오늘에 전했다. 김상현과 함께 신민당 창당의 필요성을 피력했다. YS처음에 소극적이었지만 나중에는 적극 주도해 성공적인 선거 투쟁을 이뤄냈다. 사진은 민추협 회원들이 격론한 끝에 신민당 창당을 하게 되는 과정이 담겨 있다. ⓒ김영삼 회고록 자료사진
김덕룡은 신민당 창당을 처음 제안한 인물이라고 시사오늘에 전했다. 김상현과 함께 신민당 창당의 필요성을 피력했다. YS처음에 소극적이었지만 나중에는 적극 주도해 성공적인 선거 투쟁을 이뤄냈다. 사진은 민추협 회원들이 격론한 끝에 신민당 창당을 하게 되는 과정이 담겨 있다. ⓒ사단법인 민주화추진협의(민추협) 제공

“민추협 얘기로 들어가면요.”

각설하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민추협을 연구하려면 세 가지부터 조명해야 해요.”

- 뭔가요. 

“5·18과 YS 단식, 민산”

지금부터는 그가 꼽은 세 가지에 대한 설명이다. 

#1. 광주 민주화운동 = 80년 5월 18일 전라남도 광주 일대 군사 정권에 반대한 학생 시위는 전두환의 계엄령 학살에 맞서 대규모 시민 무장 항쟁으로 확산됐다. 27일까지 열흘간 벌어진 광주 민주화운동은 전남 전역으로 번져나갔다. 계엄군과 공수부대는 탱크를 끌고 진압했다. 수많은 시민들이 희생됐다.

#2. 민주산악회 발족 = 같은 기간 광주에서 벌어진 비극을 접한 YS(김영삼)는 깊은 슬픔에 잠겼다. 그는 야당(신민당) 총재였다. 5?17 계엄 조치 이후 가택연금을 당하던 중이었다. 신군부의 학살을 막지 못한 자책과 분노, 상심이 컸다. 연금은 1년 뒤 81년 5월 1일에서야 해제됐다. 1차 연금 해제였다. 하지만 여전히 정치 규제법에는 묶여 있는 처지였다. YS는 뭐라도 해야 했다. 81년 6월 9일 목요일 김동영·최형우·문부식·김덕룡 등 신민당 중진들과 산행을 시작했다. 민산 발족의 첫걸음이었다.

#3. 23일간의 YS 단식 투쟁 = 82년 5월 31일 YS는 또다시 가택연금을 당했다. 이듬해까지 연금은 지속됐다. 83년 5월 18일 광주 민주화운동 3주년이 되는 날을 맞았다. YS는 단식에 돌입했다. “광주사태(당시는 그리 명명함, 현재는 광주 민주화운동)는 이 민족의 가슴에 영원히 멍울이 될 것이다.” 진상규명을 촉구했다. 언론은 통제됐지만 진실은 퍼져나갔다. 해외에서도 비상한 관심을 보냈다. 단식은 23일째가 되던 6월 9일 중단됐다. 더 했다간 목숨이 위태로웠다. 단식은 멈췄지만 여러것이 바뀌었다. 대중적으로는 광주 민주화운동에 대한 관심을, 정치권과 재야에서는 민주화 세력이 뭉치는 구심점이 돼줬다. 훗날 민추협 출범의 단초가 된 것이다.
 

김덕룡 이사장은 민추협의 의의에 대해 민주세력을 하나로 묶어 6월항쟁을 승리로 이끈 중심체라고 말했다. 민추협이 양김 분열로 역사적 의의보다 조명받고 있지 못하지만 재평가될 날이 올 거라고 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김덕룡 이사장은 민추협의 의의에 대해 민주세력을 하나로 묶어 6월항쟁을 승리로 이끈 중심체라고 말했다. 민추협이 양김 분열로 역사적 의의보다 조명받고 있지 못하지만 재평가될 날이 올 거라고 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이 세 가지를 알아야 민추협 창립 계기와 활동을 바로 알 수 있는 거예요.”

몇 번을 강조해도 모자람이 없는지 되풀이했다. DR은 이 시기 YS비서실장으로서 그의 단식을 외부에 알리는 데 힘썼다. 단식 중단을 발표하는 성명서도 대독했다. 

“민추협 출범의 의미도 중요합니다.”

DR은 이 점도 지목했다.

“YS와 DJ로 대표되는 야권이 하나가 됐다는 게 제일 큰 의미겠지만 민추협이 생기면서 민주화운동의 투쟁 방식이 크게 변화됐어요.”

- 어떻게 바뀌었나요.

“첫째는 산발적 투쟁을 조직적 투쟁으로 바꾼 계기가 됐어요. 전에는 재야나 일부 야권 인사들의 개별적 투쟁이 여기저기 흩어져서 일어난 것에 그쳤거든요. 조직력 있게 응집한 것이 민추협이라고 생각해요.
둘째는 야권의 온건 투쟁 노선을 강경 투쟁 노선으로 바꿔놨어요. 어용 야당들이 있던 때인데 군정종식, 군부세력 타도 같은 강경 투쟁으로 변화시켰죠.
셋째는 민주화운동의 중심을 재야에서 정치권으로 옮겨놨다는 거예요. 이게 민추협 출범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의미라고 생각해요.”

 

2. 민주산악회의 의의
“역사적 재평가 조명돼야”


“인생의 목숨은 초로와 같고
이 몸이 죽어서 나라가 산다면
아아, 이슬같이 죽겠노라”
- <YS회고록>, 민산 산행 중-


“민추협 태동의 산실” 이라고 평가된 민산부터 짚어나갔다. 

- 왜 산실이라고 평가하는지요. 

“다 알다시피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나고, DJ는 내란음모 혐의로 구속, JP(김종필)도 구속되지 않았습니까? JP는 재산을 헌납하고 풀려나 미국으로 갔지요. 또 YS는 정치 활동을 하지 못하게 가택 연금시켰고요. 연금이 풀려 등산을 가게 됐는데 그때 만들어진 게 민주산악회입니다. 야권의 정치가 무너지고, 언론이 공백기일 때 진실을 알리는 입이 돼주고, 발이 돼준 곳이지요. 전의를 다지고 조직화하는 힘을 키울 수 있었죠.”
 

YS 단식을 계기로 민주주의 세력은 단결했고 민추협이 발족됐다. 사진은 김덕룡, 박용만, 박희수 등이 단식 중인 YS를 지켜보고 있다.ⓒ사단법인 민주화추진협의(민추협) 제공
YS 단식을 계기로 민주주의 세력은 단결했고 민추협이 발족됐다. 사진은 김덕룡, 박용만, 박희수 등이 단식 중인 YS를 지켜보고 있다.ⓒ사단법인 민주화추진협의(민추협) 제공

- YS 단식 때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당시는 언론에서 단식에 대해 전혀 다루지 못했어요. 지리산 곰의 생사 문제가 신문 톱으로 나갈 때거든요. 정치 현안이라 해봐야 청와대가 무슨 행위를 했다, 정치권 동정이 술렁이고 있다 정도만 나갔어요. 단식의 단자도 꺼내지 못했어요. 그나마‘재야 정치인의 식사 문제를 논의했다’ 이런 식으로 보도했을 때예요.” 

그때 YS 단식을 세계에 알린 게 민산이었다.

“우리 민산 회원들이 신문 형식의 소식지를 만들어 버스나 지하철, 집집마다 뿌렸어요. 정보과에 발각되지 않도록 인쇄소에는 가지도 못했어요. 등사판을 이용해 동지들 집에서 전단지를 만들었어요. 수많은 사람들이 20일 넘게 구류처분 받고 유치장에 갇혀도 포기하지 않았어요. 엄혹한 암흑시대를 밝히는 전사와도 같은 역할이었죠.”

- 표면은 산악회였잖습니까. 

“거기에는 이유가 있어요.”

빙그레 웃음이 번졌다. 

“YS가 가택연금 됐을 때 동지들이 모여 의논하고 싶어도 사무실을 구할 수 없었어요. 신군부에서 무조건 강제로 문 닫게 하고 건물주에게 압력 가할 뿐만 아니라 안 되면 책상을 끌어냈을 때니까요. 그래서 우리가 산을 가기 시작한 거예요. 은둔의 산이 아니라 투쟁의 장이었어요. 민산을 조직한 YS의 정치 감각이 돋보이는 순간이었죠.”
 

민주산악회는 암흑기 시대의 입과 발이 돼주고, 민추협의 산실이 돼줬다고 김덕룡 이사장은 말했다.ⓒ사단법인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제공
민주산악회는 암흑기 시대의 입과 발이 돼주고, 민추협의 산실이 돼줬다고 김덕룡 이사장은 말했다.ⓒ사단법인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제공

첫 산행 날짜와 관련한 일화도 유명하다.

정확한 날짜는 81년 6월 9일 목요일이다. DR 본인도 처음엔 기억하지 못했다. 도청이나 미행 등 감시가 심할 때였다. 발각되면 큰일 나니 수첩에 적어두지도 못했다. 이 때문에 정작 산행을 간 동지들은 갔던 날짜를 잊고 말았다. 공교롭게도 산행 날짜를 알려준 곳은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였다. 

“안기부에서 알려줘 알았어요. 2박3일 동안 남산 지하실에 끌려가 조사를 받았거든요. 첫 산행일이 그날이라 하대요(웃음).”

산행 당일 미행해 기록해 둔 것이었다. 
참고로 민산 발족이 훨씬 더 전이라는 견해도 전해진다.

과거 <시사오늘> 인터뷰에 따르면 김종순(한나라당 부산시당 상임고문)의 경우 YS의 1차 연금 시기인 1980년 15명으로 이미 ‘거산산악회’를 만들었다고 한 바 있다. 유성환(12·14대 신민당 국회의원)도 김덕룡이 언급한 민산 발족일 이전에 ‘경민산악회’를 만들었다고 했다.

- 산행 첫날 몇 시 어디서 모여 갔나요.

“6월 9일 목요일 오전 故김동영(YS 최측근) 전 의원 집에 모였어요. 한 여덟 사람이 갔어요. 열 명 미만이었죠. 원두봉역에서 출발해 도봉산으로 갔어요. 첫날 갈 때는 동지들 얼굴 보고 대화하고 노래 부르는 정도가 다였지요. 민주산악회라는 이름도 짓지 않을 때에요. 방해도 많았어요. 집을 나서려는데 경찰이 ‘이야기 좀 합시다.’ 막아섰어요. 회유, 협박에 가택연금하더라고요.”

극소수로 시작한 민산은 회원 200만 명에 이르는 조직체로 성장했다.

“처음엔 이민우 씨가, 나중엔 김명윤 씨가 회장을 했어요.”

민산에서 DR은 운영위원이자 상근부회장이었다.
 

김덕룡 이사장은 민산에서 운영위원과 상근부회장을 맡으며 조직을 관장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김덕룡 이사장은 민산에서 운영위원과 상근부회장을 맡으며 조직을 관장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 주로 무슨 역할이었나요.

“조직을 관장하고 있었어요. 지구당 조직 같은 거예요. 전국 시군구별로 만들었으니까.”

- 기억에 남는 일화는요.

“민산은 자발적으로 회비를 부담했어요. 재미난 건 등산갈 때 자기 몫의 회비를 내던 사람들이 지구당 모임에서는 내가 밥값 내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거예요.(웃음) 이에 착안해 지구당 대신 산악회 조직을 많이 만들었어요. 문화원, 학부모회, 녹색어머니회 등도 만들어 대중 조직화에 힘썼어요. 나중엔 벤치마킹돼 선거 등에 많이 활용되더라고요.”

민산은 점점 숫자가 늘어난다.

- 어느 정도까지 발전됐나요.

“전국적으로 200만 명이 넘었어요.”

- 근데 왜 조직을 없앴을까요.

“YS가 대통령이 된 뒤 만에 하나 민폐를 끼칠 위험이 있다고 생각해 해산시켰어요. 노태우 정권 때 국정 폐해 도마에 올랐던 ‘박철언의 월계수회’ 같은 전례를 남기지 않으려 한 거예요. 산악회원들 입장에서는 불만도 많았어요. ‘우리들이 민주화를 이뤄내고 YS 대통령 만든 일등공신 아니냐. 집권 하자마자 공로를 치하하거나 다독인 일도 없이 해체시켰다’고….”

- 역설적으로도 정권을 뺏긴 원인이 된 게 아닌가 싶어요.

“하하.”

부정하지 않았다.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도 말할 수 없지요. 그럼에도 사조직을 없애고 국민통합 정치를 펼치고자 했던 YS 결단을 높이 사게 돼요.”

민산은 92년 12월 24일 해체됐다. YS가 당선된 지 불과 닷새 만에 간판을 내린 것이다. 민산 회원으로서 이를 기록해둔 故노병구 전 민주동지회 회장은 다음과 같이 서운한 감정을 비친 바 있다.
 

“김영삼 대통령 당선으로 축제 분위기였다가, 사무실 폐쇄라니 놀라움과 배신감이 오죽했겠는가. 길게는 32년을 김영삼 상임고문을 따라 군사독재와 싸우느라고 얼마 안 되는 가산마저 지부 운영을 위해 털어 넣으며 천신만고 끝에 얻은 승리감이 채 가시기도 전이었다. 수고했다는 위로의 말과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간판을 내리고 문을 닫으라니, 아무리 올바른 국정운영을 위한 불가피한 조치라 하더라도 납득하기 힘들었다.”
- 노병구 2013년 <시사오늘> 기고문 중 -


깊은 아쉬움과 황망함이 엿보였다. 

“민산 하면서 민주화에 힘쓴 분들 가운데 기초수급자들도 많아요….”

회원들의 동정에 대해 전해준 상도동계 인사의 말이 떠올랐다. 착잡한 일이었다. 

어쨌든 “민산이 없었더라면 민추협이 공식기구로서 성장하고 역할 하는데 굉장한 지장을 받았을 것”이라고 DR은 말했다.  

- 잘 조명은 안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조명돼야 해요.”

2년에 걸친 인터뷰에서 DR이 가장 강조한 것은 민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학계를 봐도 민추협까지는 연구가 되는데 민산은 잘 안되는 것 같아요. 민주화를 이룩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의미 있는 단체인데 말이죠. <시사오늘>에서 그간 많이 다뤄준 것은 알아요. 그렇지만 조명이 더 많이 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본지는 수년에 걸쳐 민산 되짚기를 진행한 바 있다. 연장선상에서 민추협 되짚기가 이어졌다. DR도 민산의 역사적 재평가 작업에 나서려는 듯했다. 민산 회원 박경옥(민주동지회 운영이사겸 시인)은 YS 서거 5주기 당시 본지와의 대화에서 DR로부터 그 같은 당부를 들었다고 했다. 박경옥은 민산 일지를 틈틈이 기록해놨다. 이를 알고 있는 DR이 자료 정리를 부탁했다는 것이었다. 그 역시 “나 또한 건강이 허락하는 한 민산 일지를 정리해 나갈 것”이라고 답했다.

 

3. 민추협 시절 
동교동계와의 50대 50


김덕룡 이사장은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이 출범하면서 민주화 투쟁이 조직적으로 바꾸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김덕룡 이사장은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이 출범하면서 민주화 투쟁이 조직적으로 바꾸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민추협으로 넘어왔다.

- 민추협을 얘기하다 보면 궁금한 게 전두환이 집요하게 방해하잖아요. 굉장히 큰 정치세력이라고 생각해 그랬을까요.

“(끄덕이며) 정치적 속박이 엄청났죠. ‘무역회사’라고 거짓말해 사무실 얻고…. 안 그러면 정권에서 가만 놔두지 않으니까. 안기부에서 나중에 알고 문 닫으라 협박하고…. 퇴근하고, 다음날 오면 집기를 빼가버리고. 오죽하면 사무실 있던 서소문 근처 주차장에서 돗자리 깔고 회의를 했겠어요.”

- 회유도 있었을 텐데요.

“아 그럼요. (YS 최측근인) 최형우 의원은 물론 나한테도 보사부(보건사회부) 장관시켜주겠다, 유학 보내주고 편의를 제공하겠다 등 유혹을 많이 했죠. (민추협 소속 중엔) 귀찮으니미국 가는 일도 있었어요.”

- 넘어간 사람도 있었겠네요.

“그렇죠. 민추협 가입서를 썼다가 빼 달라고 한 사람도 여러 명 있었어요.”

동교동계 한화갑(새천년민주당 대표)이 들려준 얘기를 전했다.

- 그분 말이 민추협 발족 당시 ‘DJ(김대중)는 권한대행으로 후농 김상현(민추협 공동의장 권한대행, 4선)이 아닌 예춘호(6·7·10대 국회의원)를 밀었다’ 하더라고요.

“한화갑 씨가 잘 못 안 거예요. DJ 핵심들은 하나도 참여를 안 해 잘 모르는 거예요. DJ가 예춘호 씨를 내세우려 했다면 YS가 DJ 의견을 무시할 리 있나요. 절대 그럴 리 없어요. 예춘호 씨는 나중에 참여했지만 그렇게 열심히 한 사람은 아닙니다. 
김상현 씨가 제일 앞장서서 열심히 했어요. 당시 나는 김상현 씨가 권한대행을 하기 바랐지만 만약 안 된다면 조연하(12대 국회부의장) 씨가 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DJ가 누구보다 신뢰한 사람이 조 선배였거든요.”

DJ는 미국 망명을 하던 중이었다. 한화갑 전 대표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기억했다.
 

“우리가 예춘호 선생 집에서 회의를 하고 있는데 (DJ 장남) 김홍일 의원이 워싱턴DC에 가서 지령을 받고 온 거예요. ‘아버지가 말이요….’ 예춘호 선생을 권한대행으로 세우라는 DJ 뜻을 전해준 거였어요. 이후 YS 쪽에 전해줬는데 그 말을 안 듣고 ‘김상현·조연하’ 쪽과 타협을 한 거예요.”
-2020년 9월 한화갑 <시사오늘> 인터뷰 중-


- 또 하나 궁금한 게 권노갑 고문과 인터뷰했는데 초반부터 민추협 가입했다고 하던데요. 
“잘 못 알고 계신 거예요.”


고개를 저었다. 

“권노갑 씨 등 비서들은 참여를 안 했어요.” 

권노갑·한화갑 등 가신그룹은 참여하지 않고, 김상현·예춘호·조연하·김녹영·박종률 등만 가담했다는 게 정설이다. 

- 왜 참여를 안 했을까요. 

“미국에 있던 DJ가 뭘 걱정했냐면 자기 세력이 YS계에 흡수될지 모른다는 거였어요. 동교동계 내부 자제령을 내렸어요.”

84년 5월 18일 외교구락부에서의 민추협 발족 때로 돌아가면 상도동계와 달리 동교동계는 절반만 동참했다.

“원래는 민추협을 더 큰 규모로 만들 수 있었는데 그것 때문에 못 한 거예요. YS 배려로 상도동, 동교동 50대 50으로 맞춰야 하니 동교동 쪽서 열 명 참석하면 우리도 열 명으로, 동교동계에서 열 명 상임위원 추천하면 우리도 열명 만 추천해야 했어요. 상도동계에서는 할 사람이 많았는데 많이 참여 못했어요. 나머지는 하부조직 격인 민산을 통해 활동을 이어나가야 했어요.”

DR로서는 아쉬운 노릇이었다. 
 

DJ는 처음에 민추협 참여에 소극적이었고, 가신 그룹의 참여도 반대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12대 총선을 앞두고 귀국해 신민당 승리를 기점으로 민추협에 적극 참여해 YS와 함께 공동의장으서 양대 진영의 한 축을 담당했다. 사진은 1986년 11월 15일 김포공항에서 유럽 순방을 마치고 귀국한 YS가 성명 발표 후 DJ, 이민우 신민당 총재와 손을 맞잡고 있다. ⓒ연합뉴스
DJ는 처음에 민추협 참여에 소극적이었지만 신민당 승리를 기점으로 민추협에 적극 참여했다. 사진은 1986년 유럽 순방을 마치고 귀국한 YS가 성명 발표 후 DJ, 이민우 신민당 총재와 손을 맞잡고 있다. ⓒ연합뉴스

“신민당 창당 가담도 그래서 소극적으로 임하지 않았나 싶어요.”

DJ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어제(3월 27일)도 정대철(새천년민주당 대표, 5선) 씨를 만났지만, ‘자네는 유치송 당수가 있는 민한당에 가라’고 DJ가 했다잖아요. 선거는 민한당이 이길 것이다. 그렇게 판단을 했던 것 같아요. DJ는 총선 나흘 전에 귀국했을 겁니다.”

갸웃했다. 

- 예. 2월 8일.

“공항에 도착해서도 DJ는 신당(신한민주당)을 지지한단 말을 안 했어요.”

2년 간의 미국 망명을 마친 DJ는 85년 2월 8일 김포공항을 통해 귀국했다. 2월 12일 12대 총선을 막 앞둘 때였다. 민추협에서 정통 민주세력이 결집한 선명 통합신당을 둘러싼 찬반 논의 끝에 신민당을 막 창당한 상태였다. 김상현 권한대행 등 민추협에 적극 가담한 동교동계 일부 인사들은 신당으로 합류했다. DJ와 가신그룹은 참여하지 않았다. 신민당 대신 관제야당이라 비판받던 민한당이 승리할 거로 점쳤다는 전언이다.

- DJ가 신당이 아닌 민한당을 지지한 것을 당시에도 알고 있었나요.

“알고 있었어요.”

- YS 쪽에서 DJ에 접촉해 지지를 요청하거나 한 적은요.

“선거 때까지는 만날 수가 없었어요. 차단돼 접촉이 불가능했어요.”

YS와 DJ 모두 정치 활동이 금지돼 있었다. 김상현·김명윤·김덕룡 등도 마찬가지였다. 전두환 정권에서 80년부터 공포한 ‘정치풍토 쇄신을 위한 특별조치법’에 따라 제재를 당하던 때였다. 해금된 것은 3월 6일, 12대 총선이 지난 뒤였다. 그전까지는 DJ 역시 귀국은 했지만 YS처럼 가택연금된 처지였다.

- 언뜻 기억나는 게 12대 총선에 YS가 못 나가니까, 손명순 여사가 대신 유세장 나가서 손 흔들고 그랬거든요. 후보들이 표를 얻기 위해 그랬는지 모르지만 ‘신민당은 YS와 DJ가 계승한다’ 어필했던 기억도 납니다.

“우리는 그렇게 했죠. YS와 DJ가 함께 만든 정당이다.(웃음)”

목소리가 커졌다. 선거 당시가 확 떠오른 듯했다.

- 선거 전략상?

“그렇죠. 선거 전략상.”

 

4. 신민당의 성공 
“선거혁명, 반응 보고 감 잡아”


신민당 얘기가 나오면서 전부터 묻고 싶은 말을 꺼냈다.

- 12대 총선을 앞두고 신당을 창당하네마네, 민추협 내에서도 분분했잖아요. 총선 참여에 반대하는 쪽이었다던데 맞나요.

“아니지.”

단칼에 잘라 말했다. 

“나는 신당을 창당해야 한다. 총선에 참여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한 쪽이었어요.”

늬엿늬엿 말하던 톤이 높아졌다. 열정적으로 내막에 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신당 창당 얘기가 나올 때 말이오. YS도 처음엔 반대했어요.”

처음 듣는 얘기였다. 

- 왜인가요.

“재야에서 총선 참여를 반대했기 때문이에요. 종로 5가 중심으로 기독교계와 청년 학생들이 가열투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이들은 신당 창당을 원치 않았어요.”

- 재야가 반대한 이유는요.

“왜냐면 해봐도 실패할 것이다, 저들 세력(전두환 정권)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들러리 서는 것밖에 안 된다, 군부 통치에 명분을 만들어주는 거다, 생각한 거죠. YS도 재야에서 저렇게 반대하니 ‘우리가 꼭 해야 하나’ 이랬고요. 그렇지만 나는, ‘안 됩니다. 선거 참여해야 합니다’ 했어요. 그때 내가 만약 정치 규제에 묶여 있지 않았다면 ‘국회의원 되고 싶어서 그런다’ 할까 봐 강력하게 주장을 못 했을지도 모르죠.”
 

김덕룡은 신민당 창당을 처음 제안한 인물이라고 시사오늘에 전했다. 김상현과 함께 신민당 창당의 필요성을 피력했다. YS처음에 소극적이었지만 나중에는 적극 주도해 성공적인 선거 투쟁을 이뤄냈다. 사진은 민추협 회원들이 격론한 끝에 신민당 창당을 하게 되는 과정이 담겨 있다. 사진은 민추협 결성 20주년 기념식에서의 김상현(가운데)과 김덕룡ⓒ연합뉴스
김덕룡은 신민당 창당을 처음 제안한 인물이라고 시사오늘에 전했다. 김상현과 함께 신민당 창당의 필요성을 피력했다. YS처음에 소극적이었지만 나중에는 적극 주도해 성공적인 선거 투쟁을 이뤄냈다. 사진은 민추협 회원들이 격론한 끝에 신민당 창당을 하게 되는 과정이 담겨 있다. 사진은 민추협 결성 20주년 기념식에서의 김상현(가운데)과 김덕룡ⓒ연합뉴스

- 김상현도 적극 참여파였다고 알고 있는데요.

“선거 참여 문제를 갖고 처음 김상현 씨를 만난 게 나입니다.”

마침 잘 꺼냈다는 듯 반겼다. 

“나는 김상현 씨부터 설득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만나서는 ‘어떻습니까’ ‘좋습니다’‘우리는 서로 정치 규제에 묶여 있으니까 오해받지 않고 이런 주장을 해도 괜찮습니다.’ ‘선거 참여하고 투쟁합시다’ 김상현 씨도 ‘옳다, 합시다.’ 그렇게 의기투합했어요. 또 ‘나 혼자는 힘드니, YS를 설득해주십시오.’ 얘기가 그렇게 된 겁니다.”

- 신민당 창당을 맨 처음 주장한 분이었군요.

“내가 제일 먼저 주장했지요. 나와 김상현·김동영 등 우리 주변 사람들이 YS 설득에도 성공했고요.”

- 어떻게 설득했나요.

“YS 당신께서는 누구보다도 비폭력 투쟁, 의회 중심의 활동을 해온 분 아닙니까. 우리가 정치 규제에 묶이고 쫓겨나 재야 투쟁을 하고 있지마는 제도권에 갈 수 있다면 해야지 않습니까.”
당시로 돌아간 듯 힘줘 말했다. 

“그러면서 명분으로 만든 용어가 있었어요.”

- 뭔가요. 

“선거 투쟁이에요.”

그에게서 힘이 느껴졌다. 

“합동유세에 착안해 만든 용어였어요. YS께 ‘유세장에 가면 우리 생각을 얘기할 수 있지 않습니까. 합법적인 투쟁을 할 수 있습니다. 이걸 해야 합니다….’”

YS는 이후 적극적으로 나섰다. 상도동계와 동교동계 일부 등 정통 민주세력을 총집결해나갔다. 마침내 85년 1월 12대 2·12총선을 불과 한 달여 남짓 남기고 진통 끝에 신민당을 창당했다. 12대 총선에서 신민당 바람은 상상 이상이었다. 선명 야당으로 부각한 신민당은 승부처인 종로를 비롯해 서울 전역과 주요 대도시에서도 대승을 거뒀다. 관제 야당이라 비판받던 민한당을 제치고 제1야당에 오른 것이다. 정국의 주도권을 얻게 된 계기였다. 신민당 돌풍은 훗날 6월 항쟁과 87 민주화 체제를 여는 데 발판이 돼줬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 승리를 예감했었나요.

“2월 12일 선거 당일 신민당 출입기자들이 와서 묻는 거예요. 같이 점심 먹고 사우나 하다가 ‘선거가 어떻게 나올까’ 토론을 벌이게 된 거죠. 그때만 해도 ‘신민당이 이긴다’는 기자들이 없었어요. 하지만 나는 ‘열두시간 안에 결과가 나올 것이다. 신민당이 이긴다. 제1야당이 된다.’ 장담했지요. 다들 ‘에잇’ 그랬어요. 수긍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어요. 하지만 나는 갈수록 승리할 거라는 걸 예감하고 있었어요.”

- 왜 그랬던 건가요.

“이민우 총재가 신민당 후보로 종로에 출마했는데 내가 선거사무장을 했어요. 민산 회원들과 전단지 뿌리고 집집마다 전화를 해댔어요. 아침마다 보따리로 한 움큼 50원짜리 동전을 바꿔 공중전화로 갔지요. 종로 중구에 있는 전화는, 아무 집이나 무조건 돌렸어요. 전단지는 부잣집 대문 안에는 못 넣으니까, 창신동이나 숭인동 등 중심으로 골목길을 돌며 뿌렸고요.”

- 시민들 반응은 어땠나요.

“초반에는 정권이 무서워 얼어붙어 관심을 주지 않았어요. 근데 시간이 갈수록 다른 거라. 전단지 전달할 때 표정 보면 알잖아요. 한 장 더 달라는 분도 있고 수고한다 격려하고. 전화 역시 중앙정보부나 경찰에서 뭐라 할 까봐 ‘그만 끊으셔’ 하던 사람들이 나중에는 ‘어떻습니까’‘괜찮습니까’ ‘잘 됩니까’ 물어오기도 하고. 민심이 변하고 있구나. 이 선거, 우리가 이기겠구나. 선거가 임박할수록 확신이 들었지요.”

 

5. YS와 통합 정신 
기득권 버리고 지분 나눠


사단법인 김영삼민주센터는 YS에 대해 1987년의 6월항쟁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이 나라 민주주의를 마침내 쟁취해 냈다는 것은 역사가, 온 국민이, 그리고 온 세계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이라고 밝혔다. 사진은 독재 정권에 맞서 강경 투쟁을 벌인 YS와 최형우 전 장관, 김수한 전 국회의장, 이민우 의원 등ⓒ김영삼민주센터
사단법인 김영삼민주센터는 YS에 대해 1987년의 6월항쟁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이 나라 민주주의를 마침내 쟁취해 냈다는 것은 역사가, 온 국민이, 그리고 온 세계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이라고 밝혔다. 사진은 독재 정권에 맞서 강경 투쟁을 벌인 YS와 최형우 전 장관, 김수한 전 국회의장, 이민우 의원 등ⓒ김영삼민주센터

신민당이 승리할 수 있던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여러 계파들이 함께해 세를 모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신민당 태동의 주축이 된 민추협 회원들로서는 희생이 필요한 일이었다.

- 신민당 만들 때 민추협 중심이 아닌 비민추협과 지분을 나눴잖아요. 내부에서는 불만도 있었을 듯한데요.

“YS가 어떻게든 ‘폭넓게 참여시키자’ ‘통합해야 한다’ ‘합쳐야 한다’ ‘그래야 이긴다’ 한 거지요. 그래서 민추협과 비민추협 지분을 50대 50으로 한 거잖아요. 민주화운동가들로부터 사쿠라라고 비판받던 사람들과도 지분을 나눈 거예요. 우리야 민산까지 생각하면 그 숫자가 얼마나 많겠어요. 저쪽에는 참여할 사람이 모자란 데도 50대 50…. 기득권을 버리고, 희생하면서까지 통합을 위해 앞장선 분이 YS였어요.”

YS는 유훈마저도 통합이었다. 문민정부 초 민산을 해체해가며 통합에 나섰던 것까지 상기하니 무게감이 남달랐다. 또 하나, YS와 함께 민주주의를 위해 이름 없이 활동한 이들의 발자취들이 크게 와 닿는 순간이었다.

생각난 김에 이 말도 물었다. 문재인 정부에서 과거 고초를 겪은 민주화유공자를 위한 예우법을 추진하면서 자녀  대학 입학 혜택 등을 포함해 떠들썩할 때가 있었다. 운동권 특권이다, 역차별이다 여러 말들이 오간 바 있다.

고초 하면, DR도 빼놓기 어렵다. 
 

“저 하나를 두고 7~8명이 돌아가면서 신문했는데 지하실이었기 때문에 시간이 얼마나 지난 지도 알 수 없고 다만 세 끼를 주니까, 하루가 지났구나, 이렇게 짐작을 했습니다. 감옥 생활이 두렵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다. 난방이 안 돼 감방 안에 있는 물통이 다 얼었습니다. 그 물을 깨 냉수마찰을 했습니다. 독재정권과 싸운다는 생각으로 했던 겁니다. 그런 기분으로 감방에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2013년 3월 김덕룡 <시사오늘> 인터뷰 중-


1964년 서울대 총학생회장 시절부터 굴욕적 한일 회담에 저항해 6·3 사태로 구속·제적됐다. 같은 대학 선배인 YS를 보필하며 YH사건 백서를 만들다 끌려가는 등 4차례 투옥됐다. 이런 그에게 민주화운동 예우법은 어떻게 와 닿는지 궁금했다.

- 어떻게 보나요.

“유공자의 공을 세워주는 데에는 반대하지 않아요. 내 경우는 6·3사태로 형무소도 가고 긴급조치9호 피해자로 보상을 받을 수 있었어요. 故유성환 의원과 함께요. 그렇지만 우리 둘 다 신청을 안 했어요. 대가를 바라고 민주화운동한 것은 아닌데 하는 생각도 있었고, 직접 신청하러 가기 뭣하기도 하고…. 혹시나 의료혜택이면 몰라도 자녀 입학 특혜 등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6. 사랑방 시절
끈끈한 동지애 ‘그때’


반독재 투쟁 시절 일화를 얘기해달라고 했다. 

그는 YS 가택연금 시절로 돌아가 무교동에서 비빔밥집을 연 사연을 꺼냈다.

“중앙일보 논설위원이었던 이영석씨, 문정수, 최기선, 김병환 등과 십시일반 돈을 모아 무교동에 비빔밥집을 냈어요.”

간판명은 사랑방이었다. 음식점을 개업해서나마 민주화 인사들이 대화할 공간을 만들려고 했던 거였다. 

“전주에서 음식 최고로 잘하는 요리사를 스카우트해서 처음에는 장사가 잘 됐어요. 시청 직원과 무교동 일대 셀러리맨들이 몰려들었죠. 정보기관들이 감시한다는 소문이 퍼진뒤 점점 줄더라고요. 동지들이 오긴 왔지만 다들 빈털터리니까 유지하기가 힘들었어요. 적자를 면치 못해 망했지요.”
 

민추협은 양김 분열로 갈라설 때도 있었지만 민주화운동을 함께한 의리가 있었다고 김덕룡은 소회했다. 사진은 2009년 한광옥(왼쪽), 김무성(왼쪽 두번째), 김덕룡(오른쪽) 등 동교동계와 상도동계가 민추협 월례총회 참석하고 있다.ⓒ연합뉴스
민추협은 양김 분열로 갈라설 때도 있었지만 민주화운동을 함께한 의리가 있었다고 김덕룡은 소회했다. 사진은 2009년 한광옥(왼쪽), 김무성(왼쪽 두번째), 김덕룡(오른쪽) 등 동교동계와 상도동계가 민추협 월례총회 참석하고 있다.ⓒ연합뉴스

이번엔 이 말을 물었다. 

-쉽게 말해 챙겨준다고 하잖아요. 같은 진영이 아닌 사람들, 예를 들어 한화갑, 김태룡(신민당 대변인) 등의 증언을 들어보면 ‘챙겼다’고 하더라고요.(민추협되짚기에서 이들은 DR에 대한 고마움을 전한 바 있다.) 

“우리가 민주화운동 하던 시절은 가족들까지 수많은 박해와 탄압을 받았어요. 친지들도 피해받을까 봐 멀리했어요. 무도한 정권에서 민주화운동한다는 게 얼마나 어리석냐. 계란으로 바위치기라고들 했어요.‘우리들끼리 만이라도 서로 돕고 격려해야지 않느냐.’ 그런 마음들이 강했어요. 사실 두 분(YS·DJ)이 화해를 못하고 돌아가셨지만, 또 상도동과 동교동계가 분열돼 민주화가 늦어졌지만 우리에게는 민주화운동을 함께했다는 공감대가 있었어요. 뜨거운 동지애 말이요.”

깐부 정신이었다. 그는 동지들을 위해 양보를 잘했다. YS단식대책위 당시 민주국민협의회의 대변인을 할 때다. 민추협을 만들면 대변인 자리는 당연히 DR몫이었다. 하루는 김상현이 <중앙일보> 출신의 이협을 추천했다. ‘이협이라면 내가 양보한다.’ 대신 DR은 기획조정실장을 맡았다. 

13대 총선 출마를 앞두고는 은평구나 구로 중 어디든 선택할 수 있는 우선권이 그에게 주어줬다. 판세면에서는 은평이 더 유리했다. 어느 날 YS를 도왔던 김우석(전 건설부장관)이 찾아왔다. 자기는 정치가 처음이니 은평을 양보해주면 안 되겠느냐고 했다. DR은 알겠다며 구로행을 택했다. 그런데 소선거구제로 바뀌었다. 거주지였던 서초로 나갔다. 이번엔 동교동계인 박종률(8대,12,13대 국회의원)이 서초로 나가고 싶어 했다. 그는 지역구 관리가 약해 고전할까 걱정됐다. 당선은 떼놓은 당상인 비례대표행을 도와줬다. 

상을 당하면 상갓집으로 달려가 밤 새워주는 일도 많았다. 3당 통합하고 집권한 뒤에도 동지들 후원회라면 빠짐없이 참석했다. YS도 당선된 뒤에는 동교동 비서진을 여의도 63빌딩 중국집으로 불렀다. 버스를 타고 광주 5·18묘지, 부산 민주공원도 함께했다. 상도동, 동교동계를 막론하고 깐부 정신하면 그의 이름이 자주 오르내리는 이유였다. 

-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서 갈라지기도 하잖아요. 

“그러기도 하겠죠.”

김무성·서청원 전 대표가 그 경우였다. 화해를 주선해보기도 했지만 잘 안 됐다. 한쪽은 OK인데, 다른 한쪽은 반대가 심해서 못한다고 했다. 아쉬운 일이었다.  

 

7. 민추협의 역사적 의의
“재평가 받을 날 올 것”


- 민추협의 역사적 의의는요. 

“군부 정치에 항거해 민주주의를 쟁취해낸 가장 핵심적인 조직이었어요. 정치권뿐아니라 재야 노동·학생계 등 민주세력을 하나로 묶어 국민 혁명을 만들어냈던 중심체였고요. 직선제 개헌을 통해 민주화시대를 개막함으로써 6월 항쟁을 성공시키고 6·29선언을 받아낸 그때가 가장 의미있던 시대가 아닌가 싶어요.” 

- 대한민국 70년사 정치를 공부해 보면 민주주의를 만드는데 민추협 역할이 큰데 조명을 못 받는 이유는 뭔가요. 

“민추협은 YS와 상도동계가 주류가 돼 만들어진 정치단체잖아요. 양김의 분열로 사실상 해체 된데다 DJ 정권 들어 정체성을 강화하기 위해 YS 문민정부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홍보했어요. YS가 정권재창출을 못해 민추협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고 생각해요.”

- 민추협이 87체제의 중심세력인걸 아는데 이상하게 열매는 586 운동권들이 가져간 느낌이 들어요. 

“13대 대선을 앞두고 DJ가 민추협을 만든 통일민주당을 깨고 새로운 당을 만들어나갔잖아요. 재편된 정치세력들이 진영논리에서 못 벗어나 역사를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고 왜곡시키고 있다고 봐요”

- 왜곡된 것이 제대로 돌아올까요?

“나는 역사가 제대로 기록되고 평가될 날이 올 거로 봅니다.”

 

8. 정치적 파노라마를 돌아보며 
현실 정치에 대한 작심비판


돌아보면 민주화대장정의 시간이었다. 격동기를 지나 어느 덧 팔순을 넘기고 있다. 

- 상도동 사단에 입문해 어려운 시기에 민주화투쟁하고, 5선 국회의원하고 차기 대권 영순위까지 올라섰던 때를 파노라마처럼 지켜봤을 때 지금 딱 어떤 심정인가요. 

“개인적으로 능력이 부족해 결국 뜻을 실현 못한 거지요. 영남당의 호남출신으로서 지역적 상황을 뛰어넘기가 어려웠어요. 크게 후회하는 것도 아니고, 내 한계를 자각한 거지.”

- 정치는 뭔가요. 

“정치란 결과적으로 적자를 볼 수밖에 없는 직업이에요. 잘해야 본전이라는 거죠. 정치하겠다는 사람은 그런 걸 각오해야하지 않겠는가 싶어요.”

현실 정치로 넘어왔다. YS서거 5주기를 앞두고 그를 만났을 때 문재인 정부에 대한 평가를 물어본 바 있었다. DR은 2012년과 장미대선 모두 문 대통령을 지지했다. 지금은 어떤 입장일까.

“하하하. 따로 얘기할 날 있을 겁니다.” 

 

김덕룡 이사장은 한 자리에 모인 대선후보들 앞에서 강한 비판을 담은 당부를 전했다.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김덕룡 이사장은 한 자리에 모인 대선후보들 앞에서 강한 비판을 담은 당부를 전했다.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1년 뒤 6주기 추도식이 거행됐다. 동작구 현충원 그 자리에서 DR은 정부를 향해 작심 비판했다. 

- 그때도 그랬고, 민추협 행사 때도 ‘이런 나라 만들려고 민주화운동을 한 것이냐며 자괴감이 든다’고 했잖아요. 어떤 뜻인가요. 

“이 정부 들어와서 내로남불이 일상화되고 거짓과 위선이 완전히 드러나면서 민주화세력이 더 이상 도덕성을 내세울 명분이 없어져버렸어요. 당당하고 떳떳했던 모습을 보일 수 없게 된 거예요. 이런 나라 만들려고 우리가 그 모진 고생하면서 투쟁한 것인가. 정치라는 게 도덕성을 회복하고 깨끗해야 한다는 자세에서부터 출발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데서 오는 회의감이라고나 할까.”

- 문재인 대통령이 민주정부 1기를 김대중 정부라고 했는데, 참 이해가 안 가는게요. 문 대통령이 장미대선 때는 상도동과 동교동이 함께 한 걸개그림도 만들고 YS 민주화운동을 계승하는 것처럼 했단 말이죠. 어떻게 선거운동할 때와 끝날 때가 정반대인건지….

“문 대통령이 당선된 뒤 YS서거 2주기 때 대통령 자격으로 추모사를 했어요. 그 어떤 추모사보다도 가장 김영삼 정부 출범에 대해 극찬과 의미 있는 평가를 남겼거든요.”

당시 문 대통령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독재와 불의에 맞서 민주주의의 길을 열어온 정치지도자들이 많이 계시다. 김영삼이라는 이름은 그 가운데서도 높이 솟아 빛나고 있다”고 추앙한 바 있다. 

“그런 사람이 삼일절 공식 기념사에서 어처구니없는 발언을 했더라고요.”

혀를 찼다.

“문민정부 탄생 없이 군정을 종식하고 하나회를 척결할 수 있었겠는가. 과연 김대중 정부가 탄생할 수 있었겠는가. 연장선에서 노무현 정부나 문재인 정부가 나올 수 있었겠는가. 피흘림 없는 민주화가 가능했겠는가. 난 그 점을 묻고 싶어요.”

말을 이었다.

“옛말에도 음수사원(飮水思源)이라고 물을 마실 때에는 그 우물의 근원이 어디서 왔는가를 생각해야 한다는 말이 있어요. 아무리 편가르기가 정략적으로 필요하다더라도 어떻게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돼요. 문 대통령 개인의 잘못된 역사적 인식에서 출발한 것이고 진영논리에 매몰된 분열주의적인 사고가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싶어요. 실망에 앞서서 패배주의적인 사고를 하고 있는 점이 애처롭다는 생각마저 들어요.”

한바탕 격정토로가 더해졌다. YS차남 김현철 동국대 석좌교수와 김영삼민주센터 김동일 사무총장도 민주정부 초석인 YS를 지우고 DJ정부부터라고 규정한 문 대통령에 대해 “실망과 경악을 금치 못한다”고 강력 제기한 바 있다. 

- 왜 그런 것이라고 보나요. 

“진영논리죠.”

- 자기네 진영 모으려고요?

“선거 전략인 거죠.” 

- 본인 생각도 그럴 까요. 

“5년 동안 행적을 보면 난 그렇게 확신해요.”

- 직접 만날 기회도 있었을 텐데 조언해줄 생각은 못했나요. 

“만난 적이 없어요.”

- 식사도요?

“식사 한번 한 적 없어요.”

그렇게 도왔는데. 의외였다. 

“대통령이라면 저녁도 두 번 먹는 경우도 있고, 그런 게 생활이어야 하는데…. 좋은 말로 자기 패거리에서는 의리 있었을지 몰라도 외적으로는 불통으로 5년을 보냈다고 봐요. 임기 초 모든 국민의 대통령이 되겠다고 한 말을 반영해본 때가 있었나 싶어요.”

뼈있는 말 같았다. 어느 틈에 5년이 지나 새정부 출범을 앞두고 있다. 20대 대선에서 DR은 특별히 누군가를 지지하거나 하지 않았다. 문재인 대통령 손을 들어줬던 시간들을 후회해 이번엔 침묵하는 것이 아닌가도 싶었다.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윤석열 정부에 대한 조언도 구했다.
 
“승리했다는 도취보다 0.75%차로 이긴 것에 대한 반성부터 출발해야 해요.”

책상 위 놓인 <시사오늘> 3월호 잡지 표지 상단의 ‘정권교체 민심이 일등공신’이하는 글자를 보면서 한 말이었다. 

“미숙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직까지는 못미더운 모습이 더 큰 듯 보였다. 

“신구권력이 내전상태가 아닌가 할 정도로 조마조마한 상태인데 국민통합을 하려는 입장에서 거대 의석을 가진 민주당이 함부로 도발하지 못하게 핑계거리를 주지 않으려면 협력하고 좀 더 포용하는 자세가 필요해요. 참모들도 함부로 말해선 안 돼요. 자기를 드러내는 것은 참모의 자세가 아니에요. 선거공약도 조급하게 처리하기보다 국가 백년지대계의 관점에서 종합적으로 검토했으면 해요. 여가부 폐지만 해도 정부조직법을 개정해야 하고 야당 협력이 없으면 안 되잖아요. 단편적으로 하나만 떼어서 생각할 문제가 아니에요. 출산율, 식량 문제, 천연자원 부족, 북한의 도발, 신냉전과 민족주의 등 해결해야할 산적한 난제가 많아요. 이를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 국민통합과 협치예요. 잘 풀어가길 바랍니다.”

의욕이 앞서겠지만 잘해야겠다는 조급증을 버리고 잠시 멈춰 설 필요도 있다는 당부인 듯했다. 

p.s. 김덕룡은 1941년 전북 익산에서 태어났다. 13·14·15·16·17대 국회의원과 정무제1장관을 역임했다. 김영삼 총재 비서실장, 한나라당 원내대표, 민화협 상임의장, 윤봉길 의사 기념사업회 의장, 민주평통 수석 부의장 등을 지냈다. 민추협 공동 의장을 비롯해 김영삼민주센터 이사장, UN 한반도평화번영재단 이사장, 세계 한민족공동체 재단 총재, 세계한인상공인총연합회 이사장 등을 맡고 있다. 

담당업무 : 정치, 사회 전 분야를 다룹니다.
좌우명 : YS정신을 계승하자.
담당업무 : 정치부 기자입니다.
좌우명 : 꿈은 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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