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정의의 탈’을 쓴 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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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정의의 탈’을 쓴 괴물
  • 박근홍 기자
  • 승인 2020.12.10 17: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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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더기가 된 경제노동개혁법, 무산된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박근홍 기자]

'사회 정의를 표방하는 사민당 같은 정당이 빈익빈 부익부를 허용하고, 부자 감세를 추진한다면, 그 정당은 그러한 행동을 더는 정의를 내세워 정당화하지 못한다. 따라서 다른 가치를 끌어와야 한다. 예를 들어 시장의 자유화라는 이름으로 그러한 조치들이 불가피하고, 투자 확대를 통해 일자리 창출과 사회 안정을 이루리라는 주장을 내세울 수 있다. 그런 식으로 정치에서는 어디서나 하나의 가치에서 다른 가치로 쉽게 갈아타는 것을 볼 수 있다. 목표는 오직 자기의 이해관계를 관철시키는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유권자들의 표를 얻는 것이고, 실업자들을 위해 또는 실업에 대처하기 위해 뭔가 하고 있다는 인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미하엘 마리 〈양의 탈을 쓴 가치〉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이하 노무현)은 임기 첫해부터 자신의 지지층인 진보진영으로부터 '배신자'라는 낙인이 찍혔다. 시민단체들의 거센 반발을 뿌리치고 2003년 이라크 파병을 결정했기 때문이다. 노무현은 자서전 〈운명이다〉에서 "이라크 파병은 옳지 않은 선택으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나도 개인이었다면 반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으로서는 불가피했다. 옳다고 믿어서가 아니라 대통령을 맡은 사람으로서는 회피할 수 없는 선택이라서 파병한 것"이라고 털어놨다. 그가 말하는 '회피할 수 없는 선택', 불가피함이란 국가의 외교·경제적 이익이었으리라.

다만, 노무현은 이라크 파병이 정의롭지 못한 결정이라고 판단했고, 이를 국민들에게 숨기지 않았다. 문재인 대통령은 수필 겸 자서전 〈문재인의 운명〉을 통해 이라크 파병 전후 과정을 상세히 밝혔다. 이에 따르면 당시 외교부는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 때문에 치러지는 이번 전쟁은 정의로운 전쟁이며, 우리의 파병은 향후 전후재건 복구사업 등에 유리한 고지를 점하면서 경제적으로도 큰 도움이 된다'는 이라크 파병 발표문을 준비했다. 그러나 이를 본 노무현은 "나는 이 전쟁이 정의로운 전쟁인지 모르겠다. 또한 경제적으로 도움이 될지 안 될지 모르지만, 경제적 이익 때문에 우리 젊은이들을 사지에 내모는 일은 할 수 없다"며 발표문 수정을 명령했다. 그리고 '한반도 평화와 한미동맹이라는 현실적 이해'로 인한 파병임을 국민들에게 솔직히 공개하라고 지시했다.

결과적으로 참여정부의 이라크 파병 결정은 진보진영이 노무현에 등을 돌린 계기가 됐으나, 국익에는 상당한 도움이 됐다.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은 자서전 〈결정의 순간〉에서 "몇몇 주요 현안에서 노무현이 보여준 리더십을 높게 평가한다. 한국군을 파병한 결정과 한미FTA를 체결한 일이 그렇다"고 언급했다. 이라크 파병이 노무현의 업적 중 하나인 한미FTA 체결에 영향을 끼쳤다고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다. 또한 이라크 파병 이후 미국은 노무현의 북핵 해법 3원칙인 '북핵불용', '평화적 해결', '한국의 주도적 역할'에 동조하며 노무현이 추진하는 북핵 6자회담에 적극 협력했고, 이는 2007년 남북정상회담으로 이어졌다. 노무현은 6자회담 합의 직후 국민들에게 이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했다. 그는 "미국이 9·11사태로 대외·대테러 강경정책 분위기 속에 있었기에, 미국 입장에서는 말이 평화적 해결이지 쉽지 않았던 일이다. 우리는 처음 출발 당시 세운 밋밋한 그 원칙을 가지고 밀고 나갈 수밖에 없었다"고 회고했다.

노무현은 자신이 표방하는 가치를 왜곡하거나 가리지 않았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정의롭지 못한 결정이었다는 사실을, 어떤 이유로 인한 회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음을, 나아가 그 전후 과정들을 모두 소상히 국민들에게 설명하고 동의를 구하려 노력했다. 자신의 정의가 아닌 가치를 다른 가치로 가려 정당화하지 않았고, 이해관계를 관철시키기 위해 다른 가치로 갈아타지도 않았다. 순진하고 정직한 시민들을 대상으로 '정의의 속임수', '가치의 속임수'를 사용하지 않았다. 어떠한 '탈'도 쓰지 않고 민낯 그대로. 아마 노무현에게 '바보'라는 별칭이 붙은 건 그의 이런 모습 때문일 것이다. 정의는 그저 실현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 과정이 투명하게 공개되고 눈에 보이는 것 자체도 정의임을 노무현은 알고 있었다.

지난 11월 국회 소통관에서 열린 중대재해기업처벌법 발의·제정 촉구 기자회견에 참석한 더불어민주당 의원들 ⓒ 공동취재사진
지난 11월 국회 소통관에서 열린 중대재해기업처벌법 발의·제정 촉구 기자회견에 참석한 더불어민주당 의원들 ⓒ 공동취재사진

더불어민주당은 지난 9일 본회의에서 공정경제3법(상법·공정거래법·금융그룹감독법), 노조3법(노동조합법 및 노동관계조정법·공무원노조법·교원노조법) 등을 통과시켰다. 경제개혁과 노동개혁을 갈망하는 시민들이 그러라고 부여한 180석의 위력이었다. 

그런데 민주당은 '정의의 속임수', '가치의 속임수'를 썼다. 이번 상법 개정안은 상장사가 감사 중 최소 1명을 이사와 별도로 선출토록 하고, 여기에 대해서는 최대주주와 특수관계인의 의결권을 '총 3%'로 제한하는 게 핵심이었다. 하지만 민주당이 통과시킨 상법 개정안은 의결권 제한을 '개별 3%'로 수정한 것이다. 합산 3%가 아닌 개별 3%가 적용되면 최대주주와 특수관계인 수만큼 그들의 의결권이 늘어난다. 공정거래법 개정안은 완전히 누더기가 됐다. 공정거래위원회의 전속고발권을 폐지하는 내용이 담긴 정부 원안이 아니라 이를 그대로 둔 수정안을 통과시킨 것이다. 이 과정에서 민주당은 국회 정무위원회 안건조정위를 통과하기 위해 정의당까지 속였다.

노조3법도 마찬가지다. 일부 보수언론에서는 '민주노총의 뜻대로 법안이 통과됐다'는 식으로 보도하고 있으나, 정작 노동계는 개악이라고 비판하는 형국이다. 단체협약 유효기간 상한을 기존 2년에서 최대 3년으로 연장해 사측 입장에서는 단체협약을 계속 미룰 수 있게 됐고, '근로자가 아닌 자의 가입을 허용하는 경우 노동조합으로 보지 않는다'는 규정이 잔존해 특수고용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노조설립이 여전히 어려운 실정으로 남게 됐다. 또한 탄력근로제 단위기간 조정에 있어서 '시간외 근로'가 제외돼 사실상 주 52시간 근무제가 '주 64시간 근무제'로 바뀐 셈이라는 게 노동계의 설명이다.

특히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처리가 무산된 건 '정의의 속임수', '가치의 속임수'의 정점이었다. 이낙연 민주당 대표는 지난 9월 국회 교섭단체 대표 연설에서 "산업 안전은 어제오늘의 과제가 아니다. 그래도 해마다 2000여 명의 노동자들이 산업현장에서 희생된다. 도저히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다. 그런 불행을 이제는 막아야 한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이 그 시작"이라고 내세웠다. 하지만 이후 민주당은 중대재해기업처벌법 당론 채택을 차일피일 미뤘고, 급기야 공청회 개최 등 여러 절차적 문제로 이번 정기국회에서 처리가 어렵다는 입장까지 내놓기도 했다. 그리고 공청회가 열린 후에도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은 법안소위 안건에 이름조차 올리지 못했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처리가 무산된 지난 9일 충남 아산 배방읍의 한 대학교 기숙사 신축 공사현장에서는 노동자 2명이 추락해 1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으며, 같은 날 경북 포항에 위치한 포스코 포항제철소에서는 설비 수리에 나선 한 하청업체 노동자가 추락해 목숨을 잃었다

민주당은 10일 오전 현안 브리핑에서 '기업투명성 제고와 공정한 경쟁, 시장의 다양성 보장을 위한 상법, 공정거래법, 금융복합기업집단의 감독에 관한 법률안 등 공정경제 3법', '노동존중사회 실현을 위한 ILO핵심협약비준 등을 위한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공무원노조법, 교원노조법' 등 법안 처리를 '민생·공정·개혁·정의를 실현하는 더불어민주당 정기국회 입법성과'라고 자평했다. 그러면서 민주당은 "21대 국회 법률안 제출건수가 20대 국회에 크게 증가했고, 법률안 처리건수와 처리율도 늘었다. 앞으로도 민주당은 더 나은 성과, 더욱 매진하는 의정활동으로 국민께 보답하겠다"고 내세웠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미국에서 가장 저돌적이고 거침없는 검사', '미국인이 가장 신뢰하는 검사'라는 별명이 붙은 프릿 바라라 전 뉴욕남부지검 검사장은 저서 〈정의는 어떻게 실현되는가〉에서 "내가 이 책에서 주장하고 싶은 것은, 사람들은 결과에 이르는 과정이 공정하고, 그 과정을 책임진 자들의 태도가 공정하다고 여길 때 그 결과도 정당하다고 믿는다는 것"이라며 "정의는 올바른 일을, 올바른 방법으로, 올바른 이유를 위해 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과연 민주당은 올바른 입법을, 올바른 방법으로, 올바른 이유를 위해 한 걸까. 결과에 이르는 과정부터 그 과정을 책임진 자들의 태도, 그리고 그 결과까지, '정의를 실현하는 정기국회 입법성과'를 이뤘다기보다는, 그럴듯한 '정의의 탈'을 썼다고 보는 게 더 합리적으로 보인다.

'괴물'의 사적적 의미는 '괴상하게 생긴 물체', '사람의 입장에서 기이하게 생겼다고 보는 생명체'다. '노무현 정신'을 계승하겠다며 '정의의 탈'을 쓴 민주당, 아마 노무현 입장에서는 마치 '괴물'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을까.

담당업무 : 건설·부동산을 중심으로 산업계 전반을 담당합니다
좌우명 : 隨緣無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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