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호텔] YS를 3당 합당의 길로 밀어낸 그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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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호텔] YS를 3당 합당의 길로 밀어낸 그 곳
  • 정진호 기자
  • 승인 2021.01.06 18: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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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정당 김윤환-평민당 김원기 신라호텔서 비밀각서 작성…YS, 3김 합의 백지화되자 DJ 신뢰 안 해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정진호 기자]

3김이 도출한 ‘선(先) 5공 청산, 후(後) 중간평가’ 합의안은 불과 일주일 만에 무력화된다. ⓒ뉴시스
3김이 도출한 ‘선(先) 5공 청산, 후(後) 중간평가’ 합의안은 불과 일주일 만에 무력화된다. ⓒ뉴시스

1989년 3월 4일. ‘3김(金)’이 국회 귀빈식당에서 만났다. 노태우 당시 대통령이 공언한 ‘중간평가’ 실시에 대해 입장을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노태우는 1987년 제13대 대선을 치르는 과정에서 “1988년 가을 올림픽을 치른 이후 선거 공약 이행 여부에 대해 국민 여러분으로부터 중간평가를 받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는데, 서울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로 여론이 호전된 틈을 타 중간평가 공약을 이행하겠다고 나선 상태였다.

이에 DJ(김대중 전 대통령)는 “5공 비리 청산이나 민주화, 민생 문제 해결 등이 완전 매듭 되지 않은 상태에서 국민들이 무엇을 보고 평가한단 말인가”라며 “시기에 구애받지 않고 제반 작업이 마무리된 다음에 중간 평가를 실시하는 것이 순리”라고 주장했다. JP도 “헌법상 보장된 대통령 임기를 물리적으로 조정하는 것은 위헌”이라면서 중간평가에 반대한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반면 YS는 이 시기를 놓치면 노태우 정부가 영영 중간평가를 시행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국민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당장 실시해야 한다는 입장을 내놨다. 이처럼 중간평가를 놓고 이견이 드러나자, 의견을 모으기 위해 세 사람이 국회 귀빈식당을 찾은 것이었다. 이곳에서 오랜 시간 격론을 벌인 3김은 결국 ‘선(先) 5공 청산, 후(後) 중간평가’라는 합의안을 도출했다.

그러나 이 합의안이 무력화되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3김의 합의 내용이 알려지자, 노태우는 야당 총재들과의 회담을 거친 후 중간평가 실시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하지만 ‘강경파’인 YS는 회담에서 철저히 배제됐고, JP와 DJ만이 노태우의 협상 파트너 자격을 얻었다. 그리고 DJ는 노태우와의 회담 직후 “중간평가를 신임과 연계하여 국민투표로 실시하는 것은 현행 헌법에 정신에 어긋난다”며 “중간평가를 실시하더라도 헌법에 부합돼야 하고, 정책 평가로 국한돼야 한다”는 입장으로 돌아섰다.

민정당 김윤환 원내총무와 평민당 김원기 원내총무는 신라호텔에서 만나 중간평가를 실시하지 않는 대신 정호용 등을 공직에서 사퇴시키기로 합의한다. ⓒ시사오늘
민정당 김윤환 원내총무와 평민당 김원기 원내총무는 신라호텔에서 만나 중간평가를 실시하지 않는 대신 정호용 등을 공직에서 사퇴시키기로 합의한다. ⓒ시사오늘

YS는 분노했다. 그러면서 노태우와 DJ간 합의의 이면에는 민정당과 평민당의 ‘밀실 거래’가 있었을 것이라고 의심했다. 실제로 김원기 전 국회의장은 2008년 20여 년 동안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문서 하나를 공개했다. 민정당 김윤환 원내총무와 평민당 김원기 원내총무가 1989년 3월 21일 신라호텔에서 만나 서명한 ‘비밀 각서’였다. 이 문서에는 ‘중간평가를 실시하지 않는 대신 80년 광주항쟁 중 무력 진압을 시도한 정호용 등을 공직에서 사퇴시킨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비밀각서에는 이밖에도 △광주민주화운동 문제 처리 △5공 비리 문제 처리 △80년 언론 통폐합 및 해직 관계자 처리 △전직 대통령 증언 문제 처리 △민주화 문제 △지자제(지방자치제) 실시 △공무원노조 등 7개 항의 내용이 기재돼 있었다. YS가 의심한 것처럼, 민정당과 민평당 사이에 오간 비밀 합의가 3김 합의안 백지화의 직접적 이유였던 것이다.

이 사건은 DJ와의 야권 통합을 최우선 과제로 삼던 YS가 ‘차선책’을 고려하게 만든 원인으로 작용했다. 제13대 대선과 제13대 총선 과정에서 DJ에게 ‘배신’을 당했다고 생각했던 YS에게, 중간평가 유보는 DJ와의 결합이 ‘불가능한 바람’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확인시켰다. YS는 자서전에 당시 상황을 “민정당과 평민당 양당을 불신하게 됐다”며 “나는 당시의 정국상황을 ‘1노(盧)3김(金)’이 아닌 ‘1김(金)3노(盧)’라고 표현했다”고 쓰기도 했다.

이후 YS는 야권 통합이 아닌 보수 통합 쪽으로 노선을 바꾼 듯 움직였다. 중간평가 유보 사건 넉 달여 후인 6월 21일, YS는 노태우의 ‘정책 연합’ 제안에 “정책 연합은 안 되고, 하려면 통합을 해야 한다”고 답했다. 이 일에 대해 YS는 “정말 민정당과 합당을 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고, 단지 정책 연합은 잘못이라는 점을 지적한 것”이라고 했지만, 이전이었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발언이었다는 점에서 ‘심경의 변화’가 있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그로부터 석 달이 더 지난 10월 2일에는 JP와 안양 컨트리클럽에서 만나 정계 개편을 심도 있게 논의했다. YS가 야권 통합 대신 보수 통합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는 신호였다. 그리고 1990년 1월 22일, YS는 노태우·JP와 함께 ‘3당 합당’을 발표했다. 신라호텔에서 작성된 김윤환과 김원기의 각서 한 장이, YS를 3당 합당의 길로 밀어내는 결과를 낳은 셈이다.

담당업무 : 국회 및 국민의힘 출입합니다.
좌우명 : 인생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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