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추협 되짚기④] 한광옥 “YS·DJ 결재받으려면 고달퍼…직선제 목표만은 분명”
[민추협 되짚기④] 한광옥 “YS·DJ 결재받으려면 고달퍼…직선제 목표만은 분명”
  • 정세운 기자,윤진석 기자
  • 승인 2021.03.14 09:43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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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광옥 민추협 대변인(前 새천년민주당 대표)
​​​​​​​“금기 깨고 5·18 진상규명, 김대중 석방하라 공론화”
“‘한 동지 고맙소’… 돌아온 DJ, 민추협 대변인 맡겨”
“건대·고대 사태 당시, 학생들 보호하려다 구속돼”
“DJP 연합, 김용환과 담판 짓고 두 총재께 들이밀어”
“민주노총 설득해 노사정 대타협 이뤄 외환위기 극복”
“DJ 통합 유지 계승, 朴 마지막 비서실장 외면 못 해”
“국민참여경선제로 盧 대통령 만들었지만, 신당 차려”
“지금 백성 호민화… 잔잔한 배 뒤집히는 것 한순간”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정세운 기자, 윤진석 기자)

한광옥 전 새천년 민주당 대변인은 85년 DJ(김대중) 권유로 민추협 대변인을 맡았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한광옥 전 새천년 민주당 대변인은 85년 DJ(김대중) 권유로 민추협 대변인을 맡았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장기집권을 꿈꾼 정권은 사상 최대 규모로 학생들을 잡아갔다. 본보기를 보일 심산이었다. 연행된 1525명 가운데 1287명이 구속됐다. 1986년 일어난 이른바 ‘건대 사태’에서다. 

“어떠한 이유로도 용공으로 몰아서는 안 된다.” 학생들을 살리려는 한 장의 성명서가 발표됐다.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대변인 한광옥 전 새천년민주당 대표의 글이었다. 그러자 그도 잡아갔다.

“시작할까요?” “시작하지 뭐.” 

지난달 19일 여의도 모처에서 한광옥 전 대표(이하 한광옥)를 만났다. ‘조찬옥·임성규’ 등 민추협서부터 함께한 ‘한광옥 사람들’도 배석했다. 

질문지를 보고, “내 호(號)가 말이야. 여럿이 있어요. 주로 범봉(凡峯)이라고 하던데, 나는 우산(愚山)이라고 해줬으면 좋겠어. 중국에 우공이산(愚公移山)이라는 야화가 있잖아요? 어리석은 사람이 산을 움직인다. 거기서 딴 거지.

한광옥 전 대표 민추협 되짚기 범위 ⓒ시사오늘(그래픽=박지연 기자)
한광옥 전 대표 민추협 되짚기 범위 ⓒ시사오늘(그래픽=박지연 기자)


대화는 4·19 학생운동서부터 민추협 시절로, 그리고 DJP 연합과 노사정 대타협 등으로 옮겨졌다. 

 

1. 파란만장 史


그도 4·19 주역이다. 1960년 서울대 1학년 때 4·19의거가 났다. 부정선거 무효, 자유민주 결사 수호를 외쳤다. 1964년 6·3항쟁 때는 한일협정에 반대하다 제적됐다. 반독재 학생운동으로 두 번 구속됐다. 1942년 전주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어린이 학생회장을 할 때부터 정치에 뜻을 뒀다. 1960년대 신민당에 입당했다. 박정희 정권 삼선개헌 반대에 가담했다. 
 

한광옥 전 대표는 12대 총선에서 민한당으로 나왔다가 낙선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한광옥 전 대표는 11대 총선에서 관악구로 출마해 국회의원이 됐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국회의원이 된 건 39세 때. 

- 1981년 11대 총선에서 민한당으로 서울 관악구에 나가 당선되잖아요. 정치규제에 묶여 있지 않아 가능했던 건가요. (전두환 신군부가 들어서면서 정통 야당인 신민당은 강제 해산됐다. 김영삼·김대중 등 주요 지도자들의 정치 활동도 금지됐다. 이후 명목상 만들어진 야당이 민한당.)

“민한당이라는 당이 정권의 2중대니 3중대니 이런 얘기가 나왔잖아요. 근데 학생 운동하던 사람들도 필요하거든. (정치인 개개인별로 보면 용감한 이들이 적지 않았다) 정릉에서 살았는데 출마는 관악구에서 했어요. 서울대에서 학생운동 한 인연도 있고, 신상우(4·19 주역) 선배가 많이 밀어줬지. 그래도 공천되기까지 어려운 일이 많았어요. 1차 공천에서는 잘 안 됐지.”

- 관악구가 분구되면서 가능해진 거죠?

“(고개를 끄덕이며) 나는 관악, 서청원(상도동계) 의원은 동작으로 나갔어요. 아마 나는 분구가 안 됐으면 출마 못 했을 거예요. 솔직한 얘기야.”

관악구는 1980년 분구됐다. 공천 과정에서 한광옥을 끌어준 신상우는 신도환(신민당 최고위원)계다. 한광옥도 DJ 사람 전엔 신도환계였다. 신민당 때부터 함께했다. 1970년대 신도환이 신민당 최고위원일 때도 그를 보좌했다. 

- 원래 신도환계잖아요. 여러 원로와 인터뷰하다 보면 인품이 참 좋았다는 평가가 많습니다. 궁핍한 생활의 정치인을 보면 쌀도 갖다 주고 했다던데 리더십이 있었나봐요. 

“인간적인 면에선 그분처럼 훌륭한 분이 없었어요. 누가 아프다고 하면 아랫사람 시키지 않고 당신이 자초해서 가요. 이승만 박사가 키운 사람이야 사실은. 그 양반이 개성고등학교 선생 하다가 공산당한테 맞았어요. 컬럼비아 대학 나오고 외국에 있다가 4·19 나기 전 뭣도 모르고 반공 청년단을 6개월가량 한 거야. 그것 때문에 이미지가 좀 안 좋았지만, 평소 존경을 받았기에 4·19 선배들(이기택·신상우 등)이 나보고 도와주라 한 거야. 그래서 모시게 된 거지. 인간적인 면에서는 신도환 선생 같은 분이 드물어.”

질문은 12대 총선으로 넘어왔다. 

- 민한당으로 나오면서 안 된 거잖아요. 

“낙선했지.”

1985년 12대 총선에서 민한당은 참패했다. 서울 시내에서 강남 한 곳만을 제외하고는 당선자를 낸 곳이 없었다. 제1야당 자리는 신민당이 갈아치웠다. YS(김영삼) 단식을 계기로 1984년 5월 18일 민추협이 발족됐다. 이 동력이 모태가 돼 신민당이 만들어졌다. 67석. 선거를 앞두고 25일 만에 창당돼 돌풍을 일으켰다. 정치규제에 묶여 있던 신도환도 풀려나 신민당에 합류했다. 서석재·홍사덕·박관용 등도 선명 야당을 기치로 민한당에서 신당행을 택해 당선됐다. 4·19 선배들은 한광옥도 함께하자고 했다. 

- 근데 왜 신민당 참여를 안 했나요.

“내 성격의 장점인지 단점인지는 모르지만 말이요. 사쿠라 정당이라고는 하지만, 민한당으로 공천돼 국회의원이 됐는데 신민당이 유리하다고 해서 그리 갈 수 있느냐, 하는 생각이 있었어요. 소위 공천을 줬던 정당에 대한 의리라고 할까. 못 가겠더라고.”

안 간 데에는 자신감도 한몫했다. 한광옥은 처음으로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공론화시킨 인물이다. 5·18이란 단어가 ‘김영삼’, ‘김대중’ 등과 함께 신군부에서 금기시되고 있을 때다. 초선의원이던 한광옥은 이를 깨고 용기 있게 나섰다. 1982년 10월 7일 11대 첫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공개적으로 거론했다. 

- 당시만 해도 안기부에서 국회의원들의 대정부 질문을 사전 검열한 거로 압니다. 어떻게 용케 하게 된 건가요. 

“광주 참상이 말이 되며, DJ 사형선고가 말이 되냐. 도저히 이건 아니다 싶어 결행한 거죠. 하려면 과감하게 하자. 발언하기 일주일 전부터 집에 안 들어갔어요. 안기부 사람들도 살려줘야 할 거 아니야. 나를 못 만난 건 괜찮지만 만나고도 알아내지 못하면 책임을 져야 할 테니까. 국회 발언 시간이 오후 2시였어요. 비서관 보고는 ‘내가 발언하고 난 뒤 10분 후에 2층 기자실의 기자들한테만 알려라.’ 그리 일러두고 본회의장으로 들어갔어. 보통 긴장된 게 아니었지.”

- 뭐라고 말했나요. 

“광주 진상 조사하라, 김대중 석방하라, 언론자유 보장하라, 전두환 씨는 민정당 총재직 내놔라, 대통령 직선제, 지방자치 실시하라….”

민주화 7개 항을 요구했다. 정국이 발칵 뒤집혔다. 그 일로 안기부 조사도 많이 받았다. 역사적으로는 오래 남는 사건이 됐다. ‘11대 국회 한광옥처럼 하라’는 말들이 회자됐다. 당시 DJ는 내란음모 혐의로 구속돼 있었다. 그런데 한광옥 발언이 있은 지 며칠 안 돼 석방됐다. 미국으로 떠날 수도 있었다. 시점상 묘했다. DJ를 탄압하지 말라는 미국 측의 압력이 가해져서겠지만, 한광옥 발언도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다. 암튼 이런 일로 한광옥은 자부심이 컸다. 비록 당은 욕을 먹어도 자신이 올바르게 활동하면 국민이 알아줄 거라 여겼다. 12대 총선에서 민한당으로 나가도 내심 당선을 기대했던 이유였다. 

“하지만 떨어졌지. 허허허.”

겸연쩍게 웃었다.

 

2. 민추협 대변인


한광옥 전 대표는 12대 총선에서 낙선 후 DJ 권유로 민추협 대변인을 맡게 된다.ⓒ시사오늘(사진 제공 : 한광옥 전 대표)
한광옥 전 대표는 12대 총선에서 낙선 후 DJ 권유로 민추협 대변인을 맡게 된다.ⓒ시사오늘(사진 제공 : 한광옥 전 대표)

 

- 이후 DJ와 함께했죠?

“김대중 대통령이 미국으로 망명한 지 2년 만인 85년 2·12 선거 나흘 앞두고 김포공항을 통해 들어왔어요. 그것이 신민당 붐을 일으킨 거 아니야…. 전부 다 제압했지.”

아이러니함도 있다. DJ는 신민당 성공에 회의적이었다. 이는 동교동계 다수가 참여하지 못한 원인이 됐다. 정대철(민주당 대표·4선 역임) 등도 신민당으로 가고 싶었는데 DJ가 민한당으로 출마하라고 해 결국은 못 가고 떨어졌다. 정작 DJ는 귀국해 신민당으로 가는 바람에 잠시 원망도 했다고 전해진다. 미국에 있으니 국내 정세 판단이 어두워 그랬을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어찌 됐든 한광옥 말대로 DJ 귀국은 신민당 돌풍의 화룡점정과도 같은 결과를 낳았다. 선거 기간 신민당 선거운동원들도 YS와 DJ가 합심해 만든 당임을 내세웠다. 그만큼 전두환 정권에 맞서 두 거목이 손을 잡았다는 상징성은 컸다. 

한광옥은 다시 말을 이었다. 

“어른이 오셨는데 인사라도 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전에는 먼발치서 본 게 다거든. 내가 동교동에 갔어요. 많은 사람 가운데서 나를 골방으로 부르는 거야. ‘한 동지.’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11대 국회 대정부 질문에 관한 얘기였다) 나는 깜짝 놀랐어. ‘어휴 제 할 일을 했는데요.’ ‘앞으로 뭘 할 건가.’ ‘미국에 가서 공부 좀 하렵니다.’ ‘한 동지는 여태까지 몇 번 떨어졌지요?’ 그분은 아랫사람한테도 반말을 안 하더라고. ‘한 번 떨어졌습니다.’ ‘난 세 번 떨어지고 네 번째 됐어요.’”

“껄껄껄” DJ 말투가 연상됐다. 

“‘정치를 계속해야죠.’ 며칠 내로 내가 연락드리리다 그래. 난 대답도 안 하고 인사하고 나왔어요. 며칠 있다가 오라고 해서 갔더니 민추협 대변인을 맡으라는 거예요.”

돌아온 DJ는 민추협 공동의장이 됐다. 민추협을 이끌어온 YS는 지분 50%를 DJ 측과 나눴다. 상임위원장도 공동, 대변인도 공동으로 했다. 한광옥에 대한 제안은 동교동계 대변인 자리였다. 그 전엔 이협(동교동계)이 맡았다. 한광옥은 원내 있을 때부터 민추협에 대한 관심이 많았었다. 

“그래서 하게 됐지.”

- 신민당 때도 그랬지만 권노갑(동교동계 좌장) 등 가신들은 민추협 초반에 참여를 안 했잖아요. DJ가 반대해서 그랬다는 말이 있거든요. 김상현(민추협 초대 공동의장 권한대행)은 민추협에 적극 참여한 거로 DJ 눈 밖에 나 그 흔한 사무총장 한번 못 해봤다 하더라고요. 

“김상현 선배가 그렇게 말한 건 나는 잘 모르지. 간접적으로 들은 바에 의하면 민추협이 만들어질 동안은 DJ가 미국에 있었으니 시기적인 견해차가 있었던 것 같아요. 김상현 선배도 김대중 대통령 만들기 위해 많이 노력한 사람 아니요.”

- ‘김상현 없이는 민추협도 없었고 결국 신민당 돌풍도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평가되는 것에는 공감하는지요. (김상현은 YS와의 연합을 강력 주장해 상도동계와 동교동계가 한배를 타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열심히 한 것은 인정해줘야지. 그러나 민추협은 역사적 산물이지 어느 개인이 만든 단체가 아니라는 게 내 생각이에요. 왜냐면 김영삼 대통령께서도 민추협 발족 1년 전인 1983년 5월, 23일간의 단식투쟁할 때부터 범민주세력 구축을 생각한 거거든. 그땐 내가 민한당 국회의원이었지만 병문안을 갔어요. 정파와 진영을 떠나, 이 정권은 안 되겠다. 군부 독재를 청산시켜야겠다는 게 국민 여론이었어. 이를 받들고 실현하는 게 국회의원이고. 결국, 그런 기구가 태동 되게 돼 있었다는 말이지. 물론 김상현 선배가 촉매제 역할을 한 것은 맞아요. 그렇지만 그 없이는 안 됐다? 이런 극단적인 논리는 성립되지 않지.”
 

한광옥 전 대표는 민추협 당시 상도동계와 동교동계를 오가며 두 공동의장의 결재를 받으러 다녔다는 일화를 전해줬다.ⓒ시사오늘(사진 제공: 한광옥 전 대표)
한광옥 전 대표는 민추협 당시 상도동계와 동교동계를 오가며 두 공동의장의 결재를 받으러 다녔다는 일화를 전해줬다.ⓒ시사오늘(사진 제공: 한광옥 전 대표)


화제를 돌렸다. 

- 대변인을 맡으면서 재밌었던 일화가 있었을 듯싶어요.

“재밌다기보다는 고달픈 게 많았죠. 왜냐하면 양 김(YS·DJ) 공동의장 체제니까. 결재를 맡아도 두 분한테 같이 맡아야 해. 동교동 갔다가, 상도동 가고 보통 바쁜 게 아니야. 두 분 견해가 또 다를 때가 있어.”

- 예를 들면요.

“직선제를 위한 천만인 서명운동도 말이야. 우린 능력이 백만 명밖에 안 되니까 백만으로 하는 것이 어떠냐, 아니다 국민이 볼 때는 천만 명이라고, 거창하게 나가야 한다. 옥신각신했어요. 명분상 천만인 서명운동이 더 낫겠다는 쪽으로 결정이 났지. 결론에 도출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리고 인내가 필요했어요.”

- 민추협 회의 끝날 때 상도동, 동교동 간에 서로 견제하느라 싸우기도 하고, 의장 자리 배치도 신경전이 대단했다던데요. 

“실무진 선에서는 그럴 수 있겠지만 나는 신경을 안 썼었어요. 큰 틀에서 생각했지.”

- 민추협 최대 목표가 직선제 쟁취였나요.

“민주화하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적어도 장충동 체육관 선거만큼은 막아야 할 거 아니냐. 대통령 직선제가 공통분모였어. 직선제 개헌을 관철하자. 당면 목표가 된 겁니다.”

- 역사적 의미는 뭐라고 보나요.

“전에는 반독재 투쟁운동이 산발적으로 일어나서 힘이 없었어요. 근데 민추협을 통해 양 김 세력이, 영호남 세력이 뭉친 거예요. 많은 민주화 세력을 흡수할 수 있었지. 민주화의 마중물 역할을 한 것이 소위 민추협이에요. 민추협이 없었으면 6월 항쟁의 성공도, 6·29 선언도 나오기 힘들었어요.”

- 양 김이 1987년 대선을 앞두고 갈라져서 민추협이 해체된 거잖아요. 2009년 DJ 서거 때 YS가 제일 먼저 조문한 것이 계기가 돼 상도동계와 동교동계가 화해하긴 했지요. 다시 뭉치려는 노력도 있었고요. 그렇지만 활동은 미비했습니다. 정치 학교라든가, 국민통합을 위한 가교역할 등에 나서주면 좋겠는데 더는 여력이 없는 건지….

"민추협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를 정확히 해주고, 그 바탕 위에서 그런 얘기가 나와야 하는데 잊힌 사건, 잊힌 사람들, 잊힌 의미가 너무 많은 거예요. 민추협뿐만 아니라 건국대 사태(1986년 10월 28일 전국 26개 대학생 2000여 명이 모여 민주화 투쟁한 사건)도 그래. 얼마나 중요한 건데, 다 잊히고 있잖아.”
 

<한광옥 건대 사태 구속 사연>
※ 아래 동영상은 해당 기사 본문에서만 볼 수 있습니다

 

 

- 당시 얘기 좀 해주시죠.

“학생들이 굉장히 위험한 지경에 몰렸어요. 학교는 봉쇄됐고, 헬리콥터가 뜨고 전쟁을 방불케 할 정도로 살벌했지. 무려 학생 1287명이나 공산혁명 분자로 몰려 구속됐어요. 지금까지 그런 사례가 없었어.”

이 일로 한광옥도 구속됐다. 전두환 정권이 강경일변도로 학생들을 탄압하자, 민추협 대변인으로서 성명서를 냈다. “학생들은 군사혁명분자가 아니다.” “국민의 투사, 국민의 의사를 대변하는 울부짖음이다.” 민추협 상임운영위 결의사항이었다. 한광옥이 도맡았다. 양 김을 대신해 책임지고 총대를 멘 거였다. 

- 고초가 심했겠네요.

“심했지. 서대문 형무소에서 6개월 만에 풀려놨더니 이듬해(87년) 4월이 돼 있더라고.”

건대 사태 전에는 고대 시위 사건으로도 구속된 바 있었다.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해 나섰다가 박찬종·조순형 등과 잡혀 들어갔다. 전두환 정권에서는 무리하게 국가보안법을 걸었다. 아무리 걸어도 안 되니 나중에는 국가모독죄를 적용했다. 훗날 이 법이 없어지면서 그는 면소 판결을 받았다. 

 

3. DJP 연합 


대화는 정치 쪽으로 넘어왔다. 그의 정치 인생사에서 최고를 꼽자면 DJP(김대중+김종필) 연합을 성사시킨 거다. 1992년 14대 대선에서 패해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해외로 떠난 DJ는 이듬해 돌아왔다. 1996년 15대 총선을 앞두고는 정계복귀를 선언하며 선거를 진두지휘했다. 새로 당을 만들고 지역등권론을 내세웠지만, 결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당시 상황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있다. 
 

“4·11 총선에서 패배한 직후 새정치국민회의 분위기는 썰렁했다. YS 실정에 대해 심판해 달라고 호소했는데 결과적으로 DJ의 정계복귀에 대한 심판처럼 돼 버렸으니 그럴 만도 했다. 특히 서울에서 해방 이후 최초로 야당이 졌다는 사실은 적잖은 충격이었다. 일산 자택에서 선거결과를 지켜보던 DJ의 얼굴엔 실망감이 역력했다. 그는 밤늦게까지 선거결과에 따라 향후 정국이 어떻게 변할지 분석한 모든 가판 신문 기사를 꼼꼼히 읽었다. 대부분 국민회의가 총선에서 패배하면 DJ의 당 장악력이 급격히 떨어지고, 차기 대선 후보가 되기도 어려울 것으로 전망하고 있었다.” 
- <중앙선데이> 게재, DJ 비서 장성민 전 국정상황실장 회고록 중-

 

한광옥 전 대표는 외환위기 당시 노사정 대타협을 성사시켰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한광옥 전 대표는 외환위기 당시 노사정 대타협을 성사시켰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수세에 몰려있던 DJ에게 돌파구처럼 마련된 것이 있었다. JP와의 선거 공조였다. DJ 참모 이강래(아태평화재단 상임고문)가 호남 고립 타파 책으로 JP와의 연합 방안을 제시했다. 받아들인 DJ는 한광옥에게 실무협상의 책임을 맡겼다. 당시 한광옥은 3선을 역임한 뒤 국민회의 부총재 겸 사무총장을 맡고 있었다. 

“내 정치 인생 50여 년을 나름 반추해보니까 DJP 연합이 참 의미가 있어요. 처음으로 수평적 정권교체가 된 사례였죠.”

- 자료를 찾다 보니 이게 궁금하더라고요. 자민련 협상 책임자인 김용환 사무총장과 막판에 만나 담판을 지었잖아요. 장소가 어딘가요. 

“힐튼호텔이었어요.”

DJ, JP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은 두 사람만의 회동이었다. 

- 요즘 보궐 선거를 앞두고 야권에서도 국민의힘과 안철수 국민의당 간 단일화 논의가 치열합니다. 순탄한 상황은 아닌데요 과거 단일화를 성사시킨 분으로서 당시에 어떻게 성공시켰는지 잠깐 얘기해주시죠. 

“내각제 고리로 단일화 협상을 추진한 건데 한 일 년 동안은 애를 먹었어요. 그분들(자민련) 지지율이 5%밖에 안 된다지만 요구사항이 많았거든. 근데 내 생각은 그래요. 100이 있어야 이기는데 1%가 부족하다면, 그 1%는 100%와 같은 거야. 정치란 1+1이 아니에요. 1+1이 100 또는 1000도 되고 하는 거지.”

이런 전제로 말을 이어갔다.

“단일화가 (1997년) 10월 23일까지도 안 되는 거라. 선거가 12월 18일이었으니 두 달도 안 남았잖아요. 내가 힐튼호텔에서 김용환 선배를 만났어요. ‘선거 끝나고 단일화할 거요? 담판 지읍시다.’ 건방진 얘기지만 우리 둘이 먼저 합의문에 사인하고 두 분 총재한테 들이밀었어. ‘할 거면 하고, 아니면 깹시다.’” 

- 그래서 한 거네요. 

“그렇지. 근데 김용환 선배가 머리가 좋은 사람이야. 합의문에 사인하기 전 나한테 3가지 조건을 제시하더라고. 첫째 아무도 모르게 청구동 자택의 김종필 총재한테 가서 고맙다는 인사를 확실하게 해 달라. 두 번째 이 일을 기자들에게 절대 공개하지 않는다. 세 번째 김종필 총재가 10월 말 대전에서 MBC 초청으로 대통령 후보 연설을 한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김대중 후보한테 양보한다는 얘기를 그때 하게 해 달라. 그게 뭐 어려운 일이겠어. ‘합시다.’”
 

한광옥 전 대표는 12대 총선서 낙선한 뒤 DJ 권유로 민추협 대변인을 맡게 됐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한광옥 전 대표는 12대 총선서 낙선한 뒤 DJ 권유로 민추협 대변인을 맡게 됐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 JP 자택은 DJ와 같이 간 건가요?

 “아, 그럼 같이 갔지. 대통령 후보를 양보받는 게 보통 일인가. 두 분이 차 한잔하면서 얼싸안고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어. 김용환 선배가 <조선일보> 기자가 와서 돌려보냈다고 해. 나도 기자들한테 자꾸 전화가 왔지만 안 받았지. 하지만 다음날 <조선일보>와 <한국일보>가 톱으로 내보낸 거야.”

- 누가 알려준 건가요. 

“지금까지 미스터리야. <한국일보>는 김종필 총재 댁 앞에 초소가 있었거든. 거기서 지키고 있었던 것 같아. <조선일보>는 여러 설이 있는데…. 나머지 기자들은 물 먹었다고 때리는 기사만 쓰는 거야. 단일화를 일컬어 간음인양 몰아갔어. 아, 그래서 지지율이 떨어졌네. 하지만 나는 이제 봐라. 우리가 이긴다. 결국, 그것 때문에 이긴 거 아냐? 신한국당 이회창 후보한테 38만 표 차로 이겼잖아. 당시엔 많은 표차였어.”

 - 단일화가 됐으니 박태준까지 끌어들일 수 있었던 거죠.

“DJP 단일화가 안 됐으면 어려웠을 거야.”

1997년 11월 공식 발표된 DJP 연합은 TK(대구·경북) 정치인 박태준의 합류로 완성됐다. 호남+충청 외에도 DJ 열세 지역인 경북까지 지지세가 확장되는 계기였다. 포항제철 초대회장인 그는 6공의 후계자로 불렸다. 자민련 총재로 추대돼 DJ 당선을 도왔다. 

“근데 김용환 선배가 역할분담이 중요하다고 자꾸 얘기해.” 또 다른 일화가 생각난 듯했다. “난 처음엔 김용환 선배가 총리 생각을 하나 했더니 그게 아니라 김종필 어른이었던 거야. 나중에 총리 권한을 강화해 놨지.” 앞서 힐튼호텔서부터 작성된 DJP 합의문에 관한 내용이었다. 대통령 후보는 DJ, 총리는 JP로 할 것, 내각제 개헌 등이 담겼다. 

- 내각제 약속은 깨졌잖아요? 

“사실 난 내각제 합의에 서명한 사람이니까 끝까지 주장했어요. 근데 국정 운영을 대통령 혼자 하는 게 아니잖아.”

- DJ도 내각제를 굳이 반대한 게 아니네요? 

“반대한 게 아니고 못 이룬 거지. 그 어른이 약속 안 지키고 그런 분이 아니에요.”

 

4. 노사정 대타협과 비서실장 


한광옥이 DJP 연합보다 더 큰 자부심을 보이는 게 있었다. 노사정 대타협이었다. “한광옥은 덕이 있고 포용력 있는 사람”이라고 전한 권노갑은 자신의 회고록 <순망>에서 다음과 같이 평했다. 
 

“DJ 당선된 다음 해인 1998년 한광옥은 노사정위원장으로서 외환위기에 빠졌던 한국 경제를 살리기 위해 대타협을 이뤄내는 큰 공을 세웠다. 뚝심이 그 일을 성사시킨 것이다.” 
- <동아일보> 게재, 동교동계 좌장 권노갑 회고록 중-


노사정 대타협 얘기가 나오자, 한광옥도 신나 했다.

“단일화는 정권교체 차원이지만 국가를 위해서는 노사정 대타협을 이뤄낸 것이 더 큰 일인지 몰라요. 국가 부도를 막으려면 IMF에 돈을 빌려야 했고 그러려면 노사정 타협을 해야 했거든. 민주노총이 거부하는 데 내가 그랬죠. ‘국가가 있어야 기업이 있다. 기업이 있어야 직장도 있다. 국가가 부도나면 기업이 없어지고 직장도 없어진다. 그러니 같이 살자.’ 그렇게 해서 노사정 대타협이 탄생된 거예요.”

- 김대중 정부 때는 비서실장을 맡았지요.

“원래는 안 하려고 했어요. 민화협 상임대표로 있던 1999년 구로구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나가 당선됐을 때거든. (이때까지 합하면 4선 역임) 몇 개월도 안 됐는데 청와대에서 호출이 왔어요. 정국을 강타한 옷 로비 사건이 나서 대통령이 어려울 때였지.”

신동아그룹 회장이 외화 밀반출 혐의를 받자 그의 부인이 남편을 구명하기 위해 고위층 인사 부인들에게 고가의 옷 로비로 청탁한 사건을 말한다. 

“‘공관이 비어 있으니 비서실장으로 오세요.’ ‘일주일만 여유를 주십시오. 저도 유권자들에게 양해를 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취임하고 양해를 구하세요.’ 내가 인간적인 얘기에는 약한 사람이에요. 국정 혼란으로 고생하시는 데 어떻게 해요”

한광옥은 그해 11월 대통령 비서실장에 임명됐다. 이듬해(2000년) 9월까지 역임한 뒤 새천년민주당 대표를 지냈다. 

 

5. 통합 유지, 朴 지지로 이어져 


한광옥 전 대표는 국민 통합을 강조했다. 그는 역대 두 정부에서 비서실장을 지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한광옥 전 대표는 국민 통합을 강조했다. 그는 역대 두 정부에서 비서실장을 지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혹자는 그를 두고 비운의 비서실장이라고들 한다. DJ 때문이 아니다. 2016년 말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가 터졌다. 탄핵 위기에 놓여있던 박근혜 대통령의 마지막 비서실장이 된 이력 때문이다. 십몇 년 만에 비서실장을 두 번이나 한 유례없는 기록이었다. 몰락해가는 정부의 비서실장으로 가기란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내가 참 괴로웠어. 근데 보니까 실장을 맡을 사람이 없는 거라. 곁을 지켜줄 사람이 없던 거지.”

- 고뇌가 많았을 것 같아요. 

“왜 아니겠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이 불행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 나는 항상 나보다는 당, 당보다는 국가…. 이런 차원에서 정치를 해왔어요. 대통령 불행은 결국 국가적 불행 아닌가. 5년 단임제 중 불행하게 안 된 대통령이 있어?”

- 본인이 구속되거나 가족이 구속되거나 했지요.

“그러게 말이야. 민주당 대표 시절 김대중 대통령 탈당서를 받은 사람이 나예요. 생각을 해봐. 이런 비극이 어딨어. 그전에 어른이 나한테 전화를 했어. 당신께서는 좋은 이야기는 길게 하고 나쁜 얘기는 짧게 해. 아들들이 막 구속되고 그랬잖아. ‘나보고 탈당하라는데 한 대표는 어떻게 생각해요.’ 탈당이란 말은 안 했지만 ‘여론이 대단히 안 좋습니다.’ ‘알았어요.’ 딱! 끊고 다음 날 정무수석 통해 탈당서를 보내온 거야. 내가 그걸 당무위 때 낭독을 안 했나. 그런 아픔을 갖고 있단 말이야. 이런 일은 없어야겠다. 국가를 위해 누군가는 그 일(박근혜 대통령 비서실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 거야. 소명의식이랄까. 어렵더라도 인간적 도리라고 여겼지.”

- 근데 잘 안 됐잖아요?

“(대통령직에서 내려오기까지) 6개월 남겨둬서인지 잘 안 되더라고. 이미 기울어져서….”

여기까지 말하다, 한광옥은 안 그래도 물어보려던 말을 먼저 꺼내왔다. 

“보통 사람들은 말이야. 한광옥이가 어떻게 박근혜 비서실장을 하느냐 이러는데 그 전에 내가 박 대통령을 밀게 된 분명한 이유가 있었어.” 


- 뭐였나요. 어쩌다 지지하게 된 건지 궁금합니다.

“어른(DJ) 생전에 박근혜 당시 대표(한나라당)가 동교동으로 온 적이 있어요. 자기 아버지 상암동 기념관 만들어줘 고맙다면서 여러 얘기를 했지. ‘아버지 때 고통받고 어려우셨는데 딸로서 사과드립니다.’”

2004년 때였다. 

“김대중 대통령의 평생 숙원이 동서화합 국민통합이잖소. 대통령께서는 박근혜 대통령뿐만 아니라 박정희 대통령하고도 정신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이미 화해했어요. 박정희 대통령 생가에 가고, 국립묘지 참배하고, 기념관 지으면서 스스로 다 끝낸 거야. 국민을 통합하지 못하면 통일도 어렵다는 게 평생의 대통령 지론이었어. 그 유지를 받들 사람이 있어야 할 거 아니야.”

한광옥은 2012년 18대 대선에서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를 지지했다. 이후 국민대통합위원장을 맡았다. 원래 안 하려다 김용환의 거듭된 권유로 맡게 된 측면도 있는 듯했다. DJP 연합 때부터 인간적 신뢰 관계를 쌓아온 연이 컸다. 

문득 이 점이 궁금했다. 

- DJ는 보수인가요 진보인가요. 

“우리는 중도 개혁주의에요. 나도 그렇고.”

뒤이어

“박근혜 대통령 그 양반도 완전히 보수라고 보긴 어려워. 개혁적인 면모가 있거든. 그런데 말이야. 대통령을 그렇게 오래 가두는 게 아니에요. 내가 볼 땐 상당히 문제가 있어. 그 양반이 무슨 뇌물을 받았나? 뇌물 받을 이유가 없어요. 국정원 특활비 그건 역대 대통령들도 다 받은 거야. 다른 거 다 떠나서 석방해줘야 한다고 생각해.”

 

6. 盧 대통령 만들기 주역?


한광옥 전 대표는 새천년민주당 대표 시절 국민참여경선을 처음으로 도입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한광옥 전 대표는 새천년민주당 대표 시절 국민참여경선을 처음으로 도입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따지자면, 한광옥은 ‘노무현 대통령 만들기’ 일등공신이었다. 새천년민주당 대표 시절 16대 대선을 앞두고 국민참여경선제를 처음 도입해 흥행시킨 주인공이 한광옥이다. 지금이야 국민경선이 익숙하지만, 그때만 해도 생소했다. 이를 과감하게 정착시킨 게 그다. 만약 ‘노사모’ 참여의 발판을 마련해준 국민경선이 아니었다면 당내 대의원들의 지지를 받던 이인제 후보가 본선에 올랐을 가능성이 컸다. 


“문제는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한테 도저히 안 될 것 같더라고. 국민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국민참여경선제를 하게 된 거지.”

- 하지만 참여정부가 출범한 후 지금까지 친노 진영과 척을 져왔잖아요. 혹시 그 같은 반목이 원인이 돼 2012년 대선에서도 문재인 대신 박근혜 지지로 돌아선 측면이 있지 않나요. 

“내가 그들 진영과 헤어진 건 다른 게 아니에요. 국민참여경선으로 노무현 후보가 돼서 우리가 다 밀었잖아. 근데 대통령 돼서는 새로운 당을 하나 또 만든 거야. 나 같은 사람이 성격이 있는데 가만히 있겠어? 그래서 헤어진 거야.” 

2003년 열린우리당이 생기면서 새천년민주당은 낙동강 오리 알 신세가 됐다. ‘팽’ 당했다는 분노가 빗발쳤다. 그 사이 한광옥은 부침을 겪었다. 우여곡절 끝에 한솥밥을 먹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얼마 안 돼 다시 또 갈라섰다. 그 원인으로 한광옥은 주류 진영의 패권주의를 꼽았다. 

“나와 의견이 다르다고 적이 아니에요. 그런데 적으로 몰잖아.”

요즘도 같은 생각일까? 문재인 정부 평가와 정국 진단 등을 물었다. 윤석열 현상부터 4·7 보궐선거까지 뒤숭숭한 상황이다. 

“여럿이 걸어도 길이 될지 안 될지 모르는데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길을 어떻게 가라는 거야. 길게는 얘기 않겠지만 대단히 위험한 지경이라고.”

- 왜 그렇다고 보나요. 

“정치라는 건 정직해야 해요. 정도로 가야 해. 그런데 안 그러잖소. 절차적 민주화는 됐지만, 민주주의를 실천하는지 의문이오. 삼권분립을 무시하고 권력을 독점하려 들면 되겠어.”

그가 평소 자주 인용하는 <호민론>(豪民論)이 전해졌다. 

“허균 선생이 백성은 세 부류라고 했어요. ‘정권이 좋으나 나쁘나 항상 따르는 항민(恒民), 원망만 하는 원민(怨民), 뒤집어보려는 호민(豪民)….’ 지금 백성은 호민화 되고 있어요. 민심이 바뀔 땐 무섭잖소. 배를 뒤집는 것도 물 아니요? 고요히 있다가도 수틀리면 확 뒤집는 거야.”

부인이 폐암 투병 중이라 현재 그는 병간호 중이다. 틈나는 대로 공부하기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후배 정치인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가 그 고민의 일부다. “정치란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것”이라 했다. 그러려면 어떤 지도자 유형이 나와야 할까. 

“통합의 정치인. 내공이 많은 준비된 사람이 필요해요.” 

담당업무 : 정치, 사회 전 분야를 다룹니다.
좌우명 : YS정신을 계승하자.
담당업무 : 정치부 기자입니다.
좌우명 : 꿈은 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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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도사 2021-03-14 22:33:31
시사오늘 유투브 채널로 들어가면 다운로드 받을 수 있을 듯요.

인동초 2021-03-14 15:21:44
동영사 소스 퍼가기가 안되는데요
어떻게해야 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