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로 보는 정치] 이기붕의 비극적 최후와 정권 말기 증후군
[역사로 보는 정치] 이기붕의 비극적 최후와 정권 말기 증후군
  • 윤명철 기자
  • 승인 2021.04.04 18:3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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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 말 더 기승 부리는 부정 DNA 경계해야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윤명철 기자)

정권 말기에 더 기승을 부리는 부정 DNA 경계해야 한다. 이기붕 강원도 고성 별장(사진 좌), LH 투기 의혹 규탄 현장(사진 우)
정권 말기에 더 기승을 부리는 부정 DNA를 경계해야 한다. 이기붕 강원도 고성 별장(사진 좌), LH 투기 의혹 규탄 현장(사진 우) 사진제공=뉴시스

4·19 민주 혁명은 이승만 12년 독재에 항거한 민심의 승리다. 이승만 대통령은 일제 강점기 내내 독립투사로서 온 국민에게 존경을 받았다. 하지만 국민은 속았다. 독립운동가 이승만과 정치인 이승만은 정반대였다.

이승만은 집권 초부터 친일파 청산에 소극적이었다. 오히려 친일파를 지지기반으로 삼아 권력기반을 구축했다. 행정부와 군대, 경찰까지 권력기관에는 친일파가 득세했다. 친일파 청산을 위한 반민특위 무력화는 이승만 정권의 대표적인 적폐다.

6·25 전쟁도 이승만의 무능에서 비롯된 참극이다. 전쟁 이전부터 38선에선 남북간 크고 작은 무력충돌이 발생했다. 군 정보기관은 북한의 남침 조짐을 감지하고 수차례 전쟁 가능성을 경고했지만 군 수뇌부와 정권은 이를 애써 외면했다. 6·25 개전 전날에도 군 수뇌부는 파티를 열었고 술에 쩔어 있었다.

부산 피난 시절에도 이승만은 권력 유지에만 몰두했다. 당시 대선은 간선제이기에 자신에게 적대적인 국회를 무럭화시키기로 결심했다. 집권 세력은 군경을 동원해 국회의사당을 포위했고 국회의원들은 기립투표방식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한 발췌개헌안을 강행처리했다. 최근에는 군경까지는 동원하지는 않지만 강행처리는 종종 볼 수 있다. 역사는 이를 부산정치파동이라고 기록했다. 이승만 재선은 독재 권력을 위해 국민에게 저지른 만행이었다.

전쟁이 끝났다.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은 영구집권을 획책했다. 전후 복구는 뒷전이었다. 한미상호조약으로 주한미군이 방위를 맡았고, 미국의 원조로 연명하는 비참한 신세가 됐다. 이들의 머릿속에는 이승만의 3선이 최우선 과제였다.

이 대목에서 이승만보다는 이기붕과 같은 자유당 수뇌부를 주목해야 한다. 이기붕은 80대 고령인 이승만 사후를 대비해야 했다. 이승만이 재임 중 사망하면 권력은 야당에게 넘어갈 수 있다는 공포감이 생겼다. 자신이 무조건 부통령에 당선돼야 했다. 3선 개헌도 강행했다.

하지만 국민은 3대 정부통령선거에서 이기붕 대신 장면을 선택했다. 물론 이기붕에겐 악재도 있었다. 야당 신익희 후보의 급서로 이승만 대통령이 무난히 당선됐지만 국민도 이승만 사후를 대비해 이기붕 대신 장면을 선택했다.

이기붕과 친위세력은 민심에 좌절했지만 4년 후를 기약했다. 어느 순간부터 권력은 이승만이 아닌 이기붕에게 집중됐다. 이기붕은 이승만의 총애를 앞세워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며 차기를 노렸다. 심지어 이정재와 같은 조폭까지 동원해 친위세력을 구축했다. 사법부와 검찰, 경찰은 이기붕의 찬위대가 됐다.

이기붕의 주변에는 아첨꾼들이 넘쳐났다. 민생파탄은 덤이었다. ‘못살겠다 갈아보자’는 구호는 민심을 대변한 신음이었다. 권력층은 부정부패가 업(業)이 됐다. 여기저기서 비리가 넘쳐났다. 권력층의 곳간이 넘쳐날 때 백성은 더욱 굶주렸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아사자가 넘쳐났다. 

드디어 1960년 4대 대선이 시작됐다. 이기붕은 자유당 정권에 대한 민심 이반을 잘 알고 있었다. 지난 1958년 총선에서 자신의 지역구인 서대문을 버리고 돌격대장 이정재의 텃밭인 이천을 강제로 빼앗아 겨우 재선에 성공할 정도로 민심이 철저히 돌아섰다는 사실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민심이반을 피부로 느꼈지만 권력욕이 더 앞섰고, 이미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번 대선에서도 장면을 또 만났다. 웬수도 이런 웬수가 또 어디 있을까? 엎친 데 겹친 격으로 미국에서 비보가 들려왔다. 야당 대선 후보인 조병옥 박사의 서거 소식이다. 이승만은 또 당선인데 자신은 민심의 동정을 얻은 장면에게 적수가 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법은 오직 부정선거였다. 온 권력기관이 이기붕 당선을 위해 뛰었다. 드디어 당선됐다. 하지만 국민은 3·15부정선거를 좌시하지 않았고, 봉기했다. 결국 4·19가 터졌다, 이기붕은 일가와 함께 죽음으로써 영욕의 세월을 마감했다.

이기붕의 비극적인 최후는 부정한 권력을 탐한 자에 대한 역사와 민심의 심판이다. 독재 정권은 합법을 가정한 부정선거로 권력을 유지하려는 특유의 DNA가 있다. 히틀러도 수권법으로 총통제를 구축했고, 박정희 정권도 유신으로 영구집권을 획책했다.

독재 권력은 독재자도 문제지만 친위세력이 더 큰 문제다. 독재자 이후, 자신들의 권력 유지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정권 말기가 되면 이 못된 DNA가 더 기승을 부리기 마련이다. 특히 민심을 잃은 정권일수록 최후의 발악 병세가 더 악화된다. 국민의 눈과 귀가 열려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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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분 2021-07-24 04:14:40
역사를 바로 알고 쓰셔야 할 것 같아요
이승만 대통령의 행보를 다시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안 계셨다면 미국이 한국전쟁에 참가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민주주의를 지켰던 것이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