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추협 되짚기⑥] 김태룡 “전두환 등 모두 불행해 진다며 설득해 6·29 이끌어냈다”
[민추협 되짚기⑥] 김태룡 “전두환 등 모두 불행해 진다며 설득해 6·29 이끌어냈다”
  • 정세운 기자,윤진석 기자
  • 승인 2021.04.19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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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룡 민추협 상임운영위원
“김재규 부하, 감옥 옆방서 10·26사태 전해” “야당성 회복투쟁위, YS 총재 만들기 아냐”
“민추협의 가장 큰 공로자는 창립멤버 전원” “신민당 찬성파, 총선後 직선제 쟁취 운동”
“내각제 파동 이민우 엉뚱한 짓 양김 펄쩍” “홍사덕 자르고 신민당 대변인 김태룡으로”
“직선제 투쟁과 민주화 위해 강력한 논평 내” “민추협 없이는 6·29 선언·민주화도 없어”
“미얀마 같은 계엄 막으려 전두환에 회담 제안” “전두환 6·29 선언 전 계엄 확대도 고려”
“제2 부마항쟁과 10·26사태 경고하며 설득” “6·29 선언, 전두환 설득한 참모는 김윤환”
“양김 분열, 4자필승론 산술적 계산한 DJ탓” “87 열망한 국민, 野 괘씸해 노태우에 표 줘”
“노태우 3당 합당 약속 깨자, YS 탈당 결심” “盧 입에서 YS하라 할 때까지 투쟁해야 설득”
“14대 공천 탈락 盧 반대 때문, 정치 운 無” “구속 또 구속… 그래도 민주화 연 것에 만족”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정세운·윤진석 기자)

김태룡 민추협 당시 상임운영위원은 구속되고 또 구속돼도 민주화를 위한 길을 걸었고 민주화를 이룩한 것에 만족한다고 말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김태룡 민추협 당시 상임운영위원은 구속되고 또 구속돼도 민주화를 위한 길을 걸었고 민주화를 이룩한 것에 만족한다고 말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김태룡(88) 전 국회의원은 선명(鮮明)야당의 길을 걸어온 정치인으로 꼽힌다. 유신 시절부터 강경 투쟁을 전개했다. 6·29 항복 선언을 받아내기까지 YS(김영삼)와 함께 기나긴 직선제개헌 투쟁 선봉에 섰던 인물이다. 1984년 5월 18일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발족 당시 그는 상임운영위원이었다. 지난 3월 30일 국회 헌정회에서 만났다. 민추협을 되짚어감에 있어 먼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듯했다. 

 

1. 김재규 부하를 만난 사연 


“김재규 있잖소?”

운을 뗀 김태룡 전 의원(이하 김태룡)은 1979년 9월 25일 2차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체포될 당시를 상기했다. 그날은 마포구 신민당 새 당사에서 3~4000명이 집결해 ‘김영삼 체제 수호 전국 당원대회’를 개최하고 있었다.

YS 가 1979년 8월 YH 무역 사건을 계기로 <뉴욕타임스>에 박정희 정권을 비판하다 의원직 박탈의 위기에 놓여 있을 때였다. 부마항쟁의 도화선이 된, 일명 ‘김영삼 의원 제명 파동’(1979년 9월 29일)이 드리울 때였다. 당시 DJ(김대중) 또한 가택연금을 당하던 중이었다. 
 

비상계엄 조치 투옥 당시 김태룡 상임운영위원ⓒ김태룡 전 의원
비상계엄 조치 투옥 당시 김태룡 상임운영위원ⓒ김태룡 전 의원


“YS·DJ 모두에게서 당사로 전화가 자주 올 때예요. 그날은 나를 찾아서, 2층 총재실로 가 전화를 받았어요. ‘오늘 연설 톤을 낮춰라’ 왜냐, 지금 사람이 없다 이거야.

‘이 시대에 김태룡 같은 사람이 없다. 잡혀가면 중대 임무를 할 수 없게 되니 제발 톤을 낮춰라’

사정 사정을 했어. ‘알겠다’ 하고 연단에 섰는데 청중이 기립 박수를 쳤지. 열이 올라서는 더욱….”

박정희 정권을 규탄하며 강연한 것이 문제가 돼 끌려간 것이었다. 어둡고 비좁은 감방에서 생활해야 했다.

김태룡은 10·26 사태가 나면서 1979년 12월 27일이 돼서야 출소할 수 있었다.

앞서 그가 김재규 이름을 꺼낸 것은 서울구치소 일화를 들려주기 위해서였다. 

“김재규가 가지고 있는 권총으로 박정희 가슴을 쏘고, 다시 권총 방아쇠를 당기자 총알이 없어 권총을 가지러 가면서 박선우 의전장에게 확인 사격을 하라고 2층으로 올라갔어요. 그러자 박선우 의전장이 옆에 서 있는 경비원의 M16으로 확인사살을 했어요. 가죽으로 된 수갑을 이렇게 차서는…”

그는 박선우 실장이 어떻게 수갑을 차고 있었는지 양팔로 모양을 만들어 보여줬다. 얼핏 봐도 고통스러운 자세였다.
 
“죽을 지경이지. 잠도 그 상태로 자야하고, 밥도 양손이 묶인채 먹었어요. 그 사람이 나보고 누구냐고 해서 신민당 야당성 회복투쟁 동지회(야투) 공동의장 겸 대변인을 지낸 김태룡이오, 했어요. 정보부에 있던 양반이니 대번 탁 알더라고. ‘아 그러시냐’며 마음을 놓는 거야. (10·26사태) 상황에 대해 소상히 들려줬는데, 한 열흘간 있다 옮겨가 죽었지….”

 

2. 야당성 회복투쟁 동지회(야투)


김태룡 민추협 상임운영위원은 야당성 회복 투쟁위원회에서 공동의장 겸 대변인을 맡았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김태룡 민추협 상임운영위원은 야당성 회복 투쟁위원회에서 공동의장 겸 대변인을 맡았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 1979년이 2차 긴급조치로 구속된 거면 1차 때는 뭣 때문에 구속된 건가요(그는 두 사건 외에도 정치범으로 묶여 도합 3년여 간 옥고를 치렀다.) 

“1977년 11월 15일 야당성 회복투쟁 동지회 활동으로 구속됐어요. 당시는 야투라고 신문에서들 많이 말했어. 서울시 지구 결성대회를 을지로4가에 있는 예식장에서 했는데, 800명 청중이 모였어요.

그날도 대회 석상에서 연설한 것이 문제가 돼 체포된 거예요. 1차 때와 마찬가지로 긴급조치 9호 위반이라는 죄명이었지.”

박정희 정권은 유신 선포 후 민주화 인사들을 옭아매고자 1975년 5월‘국가 안전과 공공질서의 수호를 위한 것’이라는 명목으로 긴급조치 9호를 발동했다.

대화는 신민당 시절 그가 동참했던 야투로 거슬러 짚어나갔다.

- 야투가 ‘YS 총재’를 만들기 위한 조직이었다는 평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요. 

“그게 아니라….”

- 그런 평가도 있었잖아요. 

“그것보다는, 이철승 씨가 신민당 대표 최고를 맡았는데 야당 역할을 안 하는 거예요. 이를 성토해 야당을 야당답게 만들자고 한 게 야투였어요. 이철승 씨도 총재직에서 내쫓고 박정희 정권 규탄을 선포하기 위해 만든 것일 뿐 다른 의도는 없었어.”
 

신민당 야당성 투쟁 회복 동지회 결성 ⓒ조선일보 1977년 4월자 네이버 라이브러리
신민당 야당성 투쟁 회복 동지회 결성 ⓒ조선일보 1977년 4월자 네이버 라이브러리

 

신민당은 강경투쟁론을 주장하는 YS계와 온건파 이철승계로 갈라져 있었다.

YS 노선을 지지한 인사들은 선명 야당을 기치로 1977년 4월 야투를 결성했다.

보도된 신문을 통해 참여 면면과 취지를 엿보면 이렇다. 

야당성 회복투쟁 동지회 결성 
“신민당의 이충환, 유치송, 고흥문, 김재광 씨 계보의 원외지구당 위원장급과 중앙당 국장급 인사 33명은 18일 회합을 갖고 ‘신민당 야당성 회복 투쟁동지회’를 결성했다.

이들은 정일형 씨가 위원장으로 있는 신민당 종로-중구 사무실에서 모임을 갖고 최경식, 김기옥, 이우태, 합기환, 김성만 씨를 공동의장으로, 김영배 씨를 총무, 백관옥 씨를 조직, 선전에 김태룡(주석 : 결성 초반 선전부로 시작했던 김태룡에 대해 언급돼 있음을 알 수 있다.), 재정에 정상준 씨를 각각 책임자로 선정하고 취지문과 결의문을 채택했다.

취지문은 ‘구당이 구국이라는 신념 아래 우리의 힘으로 야당성 회복을 위한 투쟁을 전개함으로써 빈사에 직면한 당을 구출하기 위해 일어섰다’고 밝혔다. 결의문을 통해 이들은 전통 야당 본연의 자세를 되찾을 것을 강조하고, 대표최고위원은 반민주적이며 반당적인 국내외 발언으로 당의 위신을 크게 손상시킨 책임을 명백히 하라고 요구했다.”
-1977년 4월 19일자 <조선일보> 신문 중-

 

3. 민추협과 신민당


민주화 운동 시절 왼쪽부터 김태룡·김동영·이기택ⓒ김태룡
민주화 운동 시절 왼쪽부터 김태룡·김동영·이기택ⓒ김태룡

- 80년 들어서서 정치규제에 묶였잖아요.

“그랬지. 10·26 사태가 나고 서울의 봄이 왔잖소. 형무소 나왔지만, 정치규제에 묶여서 국회 진출을 못 했어요.”

김태룡은 유신이 끝나면서 정치 자격정지에서 복권됐지만, 신군부 등장으로 1980년 11월 24일 다른 정치인들과 함께 다시 정치규제에 묶였다. 

- 해금되기까지 민주산악회에서 활동했습니다.

“YS를 비롯해 참모들이 민주화운동 할 방법이 없으니까 만든 게 민주산악회(민산)였어요. 등산을 명목으로 민주화 역량을 모아나간 거지.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를 만든 산실이 돼줬지.”

민추협은 1984년 5월 18일 외교구락부에서 ‘민주화 투쟁 선언’과 함께 결성됐다. 5·18 광주 희생을 기리며 시작된 YS 단식을 거쳐 야당 인사들이 민주화 투쟁 재개를 시사하며 의기투합한 재야정치단체였다. 그는 민추협이야말로 “민주화운동의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평했다. “집권 여당이 허용한 정치적 범주에서만 활동하던 관제 야당과 달리 제도권 밖에서 정치를 전개했다는 점에서 한국정치사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말했다. 

- 가장 큰 공로자는 누구라고 보나요. 

“YS와 DJ 권한대행인 김상현 의원과 김덕룡 비서실장 등이 생각나요. 창립  멤버가 68명이었어요. 민주화운동을 강력히 전개했지요. 그 모두가 공로자 아니겠소.”

공동의장인 YS와 권한대행 김상현(동교동계)을 비롯해 상도동계로는 김명윤, 이민우, 김동영, 최형우, 명화섭, 최기선, 김덕룡, 김명윤 등이 참여했다. DJ(김대중) 계로는 조연하, 김녹영, 박종률, 김성철, 김윤식, 이협 등이, 공화계 등 인사로는 박찬종, 김충섭, 윤혁표 등이 가담했다. 
김태룡도 창립부터 함께했다. 유진산계에서 시작해 한때는 이민우계(견지동계(堅志同繼))로도 인식됐다. 민주화 노선 속 자연스럽게 상도동계로 굳혀진 듯했다.

- 민추협에서 신당(신한민주당)을 놓고 창당하느냐, 마느냐 갑론을박이 있었는데요, 어느 쪽이었나요. 

“나는 찬성이었지.”

1985년 2월 12일 12대 총선을 앞두고 올림픽을 준비 중이던 전두환 정권은 국제적 야유를 우려하고 있었다. 이미지 개선이 필요해 다수 정치규제자를 대상으로 해금 조치를 단행했다. 1984년 11월 30일 제3차정치 해금에서였다. 민추협 소속도 여럿 있었다. 총선을 분기점으로 선명 야당의 재건을 주창한 YS는 김상현·김덕룡 등과 함께 창당 논의에 불을 지펴나갔다. 

창당 여부와 관련해서는 1984년 12월 7일 서울 종로 한일관에서 격렬한 논쟁 끝에 찬성 의견으로 뜻을 모았다. 상도동계를 중심으로 동교동계, 민한당 탈당 인사들이 대거 결합했다. 1985년 1월 18일 서울 앰배서더 호텔에서 발기인 대회를 개최했다. 이후는 파죽지세였다. 신민당은 창당한 지 25일 만에 67석을 석권했다. 제1야당으로 올라섰다. 총선 승리 의미는 남달랐다. 과거 신문이 주목했던 바는 이렇다. 
 

신민당 창당 25일만에 승리ⓒ1985 0213 동아일보, 네이버라이브러리
신민당 창당 25일만에 승리ⓒ1985 0213 동아일보, 네이버라이브러리

 

“초저녁부터 흥분의 도가니였습니다. 신민당은 서울에서 압도적인 우세를 보이자 축제 분위기였어요. 13일 새벽 1시 반에 벌써 ‘이번 총선을 통해 우리는 놀라운 민중의 힘을 보았다’로 시작되는 기쁨에 넘치는 성명을 낼 정도였습니다.

이번 총선 결과는 사실 12대 국회가 어떻게 구성되느냐의 차원을 벗어나는 정치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11대 국회 또는 제5공화국 출범 초기의 정국구도가 일격을 당한 셈이니까요.

무엇보다도 민한당의 온건 노선이 국민의 성에 차지 않았다는 게 극명하게 드러난 것이지요. 신민당이 승리를 거둔 데는 아직도 정치규제 상태에 놓여 있는 재야인사의 정치적 영향력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봐야겠지요. 신민당의 승리에는 ‘영파워’, 즉 젊은 유권자층의 선거 참여도 큰 몫을 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신민당의 부상은 유신 이래 퇴색 기미를 보여온 여촌야도(與村野都)의 전통적 투표성향을 부활시켜놓았습니다.”
-1985년 2월 13일자 <동아일보> 개략 -


김태룡도 4년 만에 정치규제에서 풀려난 뒤 12대 총선을 기회로 첫 국회의원 배지를 달았다. 충청도가 고향인 그는 대전시 중구에 나가 당선됐다. YS가 신민당 승리 여세를 몰아 직선제 개헌을 위한 일천만 서명 운동을 주도했다면 그는 국회 안에서 개헌 노력에 힘을 쏟았다. 1986년 2월 정기국회에서는 개헌 파동으로 입건된 적도 있었다. 같은 해 7월에는 국회 헌법 개정 특별위에서 활약했다. 

 

4. 제1야당 대변인 


김태룡 민추협 상임운영위원은 정통 야당시절 세번의 대변인을 역임했다.ⓒ김태룡
김태룡 민추협 상임운영위원은 정통 야당시절 세번의 대변인을 역임했다. 해당 사진은 민추협 시절 김태룡 대변인이 TV 방송에 나와 개헌을 주장하고 있다.ⓒ김태룡

이야기는 제1야당 대변인 시절로 넘어왔다. 

- 신민당 대변인을 맡았습니다.

“원래는 내가 아닌 이민우 총재 비서실장인 홍사덕 씨가 맡고 있었어요. 그 자리에 양김 (김영삼-김대중)이 나를 앉힌 거야. 사실상 양김이 신민당 주인이고, 이민우 총재는 대리인이었잖소.”

1987년 1월 19일 신민당 총재이던 이민우는 홍사덕의 사표를 수리해 김태룡을 임명했다. 막후에서 양김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얘기였다. 

- ‘내각제 파동’ 때문이었다는데 맞나요.

“그렇지. 이민우 총재의‘내각제 파동’이 ‘홍사덕 작품’ 아니오. 양김이 펄쩍 뛰었지. 이민우 씨가 엉뚱한 짓을 했다, 이거야.”

갈수록 거세지는 민주화 열기에 위협을 느낀 전두환은 내각제 개헌을 제안했다. 정권 연장을 도모하려 한 것이다. 장고 끝에 이민우는 민주주의 내용이 담긴 7개 항이 실천된다면 내각제 합의에 응할 용의가 있다고 했다. 조건부 수용인 셈이었다. 측근인 홍사덕의 안이었다고 회자된다. 양김이 신민당을 나와 통일민주당을 세우는 계기가 됐다. 

“제1 야당의 대변인은 정계의 꽃이었어요. 꽃.” 

대변인 시절을 추억하는지 옅은 미소가 흘렀다. 

“대변인 역할이 클 때였어요. 지금처럼 인원이 많은 것도 아니야. 원내·외 현안이 터지면 홀로 도맡다시피 했어. 양김은 기자회견을 했지, 논평을 낸 게 아니었어요. 전부 대변인이 하던 때였지.” 

- 야투 때도 대변인, 신민당서도 대변인, 통일민주당에서도 대변인을 맡았습니다. ‘김태룡 대변인이~’하면서 신문에 자주 오르내리던 게 기억납니다. 

“내 이름이 신문에 안 나오던 때가 없었어요. 야투 때도 3~4년 맡았죠. 성명을 발표하면 언론에서 (대판 기준) 3단, 5단은 할애해줬지. 6·10 민주항쟁 때는 성명 발표 한 게 5~600회는 돼요. 한국 언론이 전부 봉쇄돼 야당발 논평을 내보낼 수 없던 때는 마이니치, 요미우리, 산케이 등에서 대서특필됐고 말이오. 방송 TV 나가서 토론한 것이 10회, 대중연설한 것이 100회…. 어마어마한 투쟁을 했지.” 

 

5. 비화 - 6·29 선언


YS(김영삼)와 김태룡 등 통일민주당 인사들이 1986년 직선제 개헌 운동을 하고 있다ⓒ김태룡
YS(김영삼)와 김태룡 등 통일민주당 인사들이 1986년 직선제 개헌 운동을 하고 있다ⓒ김태룡

87 체제로 향해 갔다. 한 페이지를 마무리하듯 신민당의 모태이자 6·10항쟁의 동력이 돼준 민추협 의의부터 물었다. 

- 가장 높이 평가하는 부분은 뭔가요. 

“민추협이 6·29 항복 선언을 이끌었어요. 민추협이 아니었던들 6·29 선언도, 오늘날의 민주화도 없어요. 역할이 대단히 컸어요.”

- 6·29 선언을 받아내기까지 비화가 있다면 들려주시죠. 

“영수회담 때 얘긴데…. 신문에 안 나간 내용이에요.”

- 어떤 얘긴가요. 

“6월 항쟁이 벌어졌는데, 20일이 지나가도 전두환이가 아무런 반응을 안 보이는 거예요. 6월 25일, 26일 전국 대대적 시위가 일어나게 돼 있었어요. 그리되면 제2의 부마사태, 계엄이 선포될 우려가 있었어요. 이걸 막기 위해서 우리가 한 게 뭐냐. 영수회담 제안이었어요. 전두환이도 급하니까 딱 받더라고. 자기도 몸이 단 거지. 부마사태가 난 뒤 열흘 만에 박정희가 죽었잖아요. 위협을 느끼니까 수락한 거야.”

- 회담 날짜가 1987년 6월 25일이었지요? 

“응. 나도 함께 갔지.”

- 당시 얘기 좀 해주시죠.

“아침 10시 회담이니까 9시 30분에 미리 가 있었어요. 청와대 정무수석이 김윤환, 대변인이 이종률이야. 차 한잔 먹고 인사를 나눴어요. YS와 전두환은 응접실에서 단둘이 회담을 하고, 비서실장 방에서는 나와 박영수, 김윤환, 이종률이 있었어요. 넷이 대담하는데 예정된 시간보다 늘어져서 닭곰탕을 먹으며 세 시간을 하게 됐어요.”

- 주로 오간 내용은요. 

“심각한 얘기였어요. 전두환이가 사태가 심각해지니까 지금의 미얀마 사태처럼 계엄을 하느냐, 민주화 조치를 해야 하느냐, 이 두 가지 안을 다 준비해둔 채 저울질하고 있던 거예요. 바로 그 시점에 우리가 간 거지.”

- 설득했겠군요. 

“으름장을 놨어요. 계엄을 확대하고, 철권정치를 강화해 정권을 연장한다면 어마어마한 비극이 올 거라고 했지. 탱크로 진압한다면, 결국 그 탱크가 머리를 돌려 청와대로 향할 것이다, 전두환은 물론 참모들 모두 불행하게 될거다, 계엄을 포기하고, 민주화 조치를 즉각 단행하라.”

- 그 말에 뭐라고 반응하던가요. 

“모두 듣고만 있더라고. 세 시간 정도 거의 나 혼자만 말을 했지. 신문사 기자 출신인 김윤환 수석은 나한테 동조해주더라고. ‘김태룡 의원 참 대단합니다.’ 그 시절 누구도 그 얘길 못했는데 서슴없이 하더라, 이거야. 전두환 설득에도 공헌한 참모가 김윤환이에요. ‘각하 큰일 납니다. 제2의 부마사태 나면 불행하게 되니 이제는 민주화 조치를 선언해야 합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게 6·29 선언이에요.”

 

6. 양김의 분열 


양김 분열로 87 대선에서 야권은 국민의 열망과 달리 패하는길을 걸었다.ⓒ1988 경향일보, 네이버 라이브러리
양김 분열로 87 대선에서 야권은 국민의 열망과 달리 패하는길을 걸었다.ⓒ1988 경향일보, 네이버 라이브러리

- 민추협의 한계는 뭐였나요. 

“양김이 갈라진 거지. 어떤 이유로도 갈라져서는 안 됐는데, DJ가 큰 착각을 하고 당을 갈라놔 버렸어. 호남 표는 DJ 혼자 다 먹고, 경상도 표는 ‘노태우-YS’가 갈라먹고, 충청표는 JP(김종필)니 4인이 나가야 본인이 이길 수 있다고 본 거야. 산술적 계산을 한 건데 정치란 건 산술적 계산을 하면 안 되는 거예요. 단결 못 하고 깨진 야당을 괘씸하게 생각하는 국민 표가 노태우한테 간다는 생각을 못 한 거야. 결국, 당선돼서는 안 될 사람이 되고 마는 우를 범하게 된 거지. DJ 본인도 자기 잘못을 아니까, 훗날 일이지만 정계 은퇴 선언 후 영국으로 망명을 간 것이 아니오.”
 

DJ가 당을 깬 뒤 통일민주당은 분당 사태를 맞았다.ⓒ1987.10.26 동아일보, 네이버 라이브러리
DJ가 당을 깬 뒤 통일민주당은 분당 사태를 맞았다.ⓒ1987.10.26 동아일보, 네이버 라이브러리

87 대선을 앞두고 DJ는 통일민주당을 탈당했다. 1987년 10월 26일 DJ는 YS가 제의한 ‘당내경선에 의한 대통령 후보 단일화’에 반대한다는 의사를 전했다. 1986년 5월 통일민주당을 창당한 이래 1년도 못 돼 양 계보가 분당 되는 순간이었다. 그 결과 12월 16일 13대 대통령 선거는 노태우 당선으로 돌아갔다. 

야권의 분열과 대선 참패는 민추협의 해체로 이어졌다. 갈라설 때 재떨이마저 양보 않고 똑같이 나눌 정도로 싸늘했다고 전해진다. 

“12·16 대통령 선거가 참패로 끝나자 양김은 민추협을 해체키로 결정했다. 연말에 실무자들이 조용히 만나 사무실을 폐쇄하고 재떨이까지 양분하는 등 집기 등을 정확하게 나눠 가졌다는 후문이다. 민주화 추진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으나 양김 분열로 공중분해 돼버린 것. 민추협 해체에 대해 마지막 간사장이었던 황명수 씨는 “민추협의 종말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며 “현재의 야권 분열은 민추협 결성 당시의 정신으로 돌아가면 극복될 수도 있을텐데…”라고 피력.”
- 1988년 1월 12일자 <조선일보> 중- 

 

7. 노태우 약속을 받아낸 비화 


1990년 3당 합당(노태우 민정당+YS 통일민주당+김종필 공화당)시절로 넘어왔다. 야권이 분열되면서 이대로는 군정 종식이 어렵다고 볼 때였다. 1992년 14대 대선을 앞두고 YS는 호랑이 굴에 들어가 호랑이를 잡겠다는 말로 전격 3당 합당을 선언했다. 

- 그때는 어땠나요. 

“나는 3당 합당에 반대한 사람이에요. ‘3당 합당에 반대한다’ 신문에 대서특필되고 그랬어요. YS가 깜짝 놀라서는 비서진을 총동원해 우리 집에 보냈어요. 새벽에 말이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김태룡 대변인이 3당 합당 반대하면 내 꼴이 뭐가 되오. 우린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아야 하는 거 아니오.’간곡함에 할 수 없이 함께하기는 했는데….”

말끝을 흐렸다. 

- 우여곡절이 많았잖아요?

“(고개를 끄덕이며) 노태우가 대통령 끝나고 나면 ‘김영삼 당신이 대통령 하시오. 그다음 김종필 당신이 하시오.’ 이래서 3당 통합이 된 건데 그 약속을 지키지 않는 거예요.”
 

김태룡 민추협 상임운영위원은 1990년 3당 합당 후 YS가 탈당을 않고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데 자신의 역할도 컸다고 말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김태룡 민추협 상임운영위원은 1990년 3당 합당 후 YS가 탈당을 않고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데 자신의 역할도 컸다고 말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김태룡은 여기까지 말하다가, 

“이것도 비화요.”

상체를 앞쪽으로 숙였다. 

“노태우가 약속을 안 지키자, YS가 가만있을 수 있나. 담판을 하러 갔는데 실패한 거예요. YS가 나를 비롯해 측근 30여 명을 자신의 상도동 집 2층으로 불렀어요. ‘깨졌어’ 하더라고. ‘나는 민자당과 같이 안 하겠다. 당을 깨겠다. 군소정당 하겠다’ 선언한 거예요. YS가 화두를 던졌으니 모인 사람들도 말을 해야 할 거 아니야. ‘더는 머물러 있을 필요 없다’ ‘노태우와 결별을 선언하고 독자 정당을 만들자’ 이구동성으로 동조를 하는 거예요. 나는 잠자코 듣기만 했소. YS가 나를 쳐다보며 물어요. ‘김태룡 의원은 강경론자인데 어째서 말을 않소?’ 마지막으로 얘기를 하라고 하더군.”

- 뭐라고 했나요. 

“내가 그랬어요. ‘이 자리서는 말 않겠습니다. 회의가 끝난 뒤 단둘이 십분 간만 얘기하겠습니다. 다들 아침 먹고는 가고….’

뜸을 들이자, 재차 질문했다. 

- 단둘이 만나서 무슨 얘기를 했습니까. 

“‘총재께서 던진 화두에 모두가 동조했지만 나는 반대입니다. 야합이라는 비난을 받으면서까지 통합하지 않았습니까. 근데 이제 탈당해 군소정당을 만든다? 어느 국민이 찬성할 수 있겠습니까. 박수받기는커녕 돌팔매질을 가할 겁니다.’ 아주 강경한 얘기들을 한 것이죠. 다시 담판을 지으라, 노태우 입에서 ‘당신이 하시오’할 때까지 투쟁하시라, 한 거예요. 또 내가 그랬어요. ‘여기서 나오면 정치 끝입니다. 정권 잡는 것 포기하고 DJ 밑으로 들어가시오.’ 아주 극한 얘기까지 했어요.”

- YS가 뭐라고 하던가요. 정색했을 것도 같은데요. 

“‘김 의원이 그리 말하니 참말로 다시 생각해 보겠다’하는 거예요. 그 뒤  YS는 어머니 성묘를 하러 (고향인) 거제로 갔고, 나는 김윤환 (당시 국회의원) 씨를 만나러 갔어요. YS와 나눈 말을 전하니‘김 동지 얘기가 일리가 있소’, ‘일 리가 아니라 절대적으로 약속은 지켜져야 합니다’ ‘알겠소. 당신 말이 옳소’ 이튿날이 되자 김윤환의 중재로 노태우와 만났어요. 거기서 내가 담판을 지으라고 했어요. 어떻게 할 거냐. 협박도 하라고 했어요. ‘당신이 약속을 안 지키면 후계자 지명도 우스워진다. 어떻게 할 거냐.’ 협박했어요. 하는 수 없이 하겠다고 하더라고.”

- 노태우는 근데 왜 약속을 안 지키려고 했을까요.

“처음부터 YS에게 안 주려고 했던 거지 뭐. 박태준(포스코 명예회장) 등 여러 사람을 생각한 거야.”

- 민정계 박철언·이종찬·이한동 등도 있었고요. 

“민정계 당원들이 YS를 반대한 것도 크지.”

김태룡의 말처럼 3당 합당 후 YS와 민주계는 수세에 몰려있었다. 상도동계 막내 김영춘 전 해양수산부 장관은 지난 3월 <시사오늘>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회상한 바 있다.

“(유학을 준비할 무렵) YS로부터 만나자고 연락이 왔다. 그는 사면초가 상태였다. 민자당 안에서 민주계는 20% 정도밖에 안 됐다. 80%는 민정·공화계가 좌지우지했다. 제6공화국 황태자 박철언은 공공연히 YS를 공격했다. 

YS는 막전막후의 반전을 노리고 있었다. 사즉생 각오였다. 평소 YS 셋째 아들이라는 말이 들릴 만큼 나를 아껴주던 분이었다. ‘민자당 대통령 후보도 못 되고 결국 토사구팽당하겠구나.’ 그게 솔직한 나의 생각이었다. 3당 합당의 끝이 비극일 거로 예감했다. 마음이 너무 아팠다. ‘정치적 장례라도 치러드리자.’ 유학을 포기하고, 그 길로 YS 대선 캠프 외곽조직에 합류했다.
영광에 대한 기대 같은 것은 없었다. 정치 스승을 위한 마지막 도리를 다하는 것이 내 운명이라 여겼다. 그만큼 YS가 이길 거라고는 단연코 예상치 못했다. 하지만 결과는 달랐다. YS의 승리였다. 민자당 경선을 뚫고 1993년 문민정부를 개막했다.”
- 2021년 3월 김영춘 <시사오늘> 인터뷰 중-


“어쨌든 내 주장이 받아들여져 YS에게 공천을 주기로 한 거야. 나 아니었으면 대통령이 안 됐던 거야.”

- 그랬겠네요. 

“김덕룡 비서실장이 나를 붙들고 눈물을 흘리는 거예요. ‘김 동지’ 하면서 말이오. ‘역시 김태룡 대변인’이다, 이거야.”

또 생각났는지 

“두 가지 비화가 더 있는데, 언젠가 자료로 공개될 날 오겠지.”

- 하나만 더 해주시죠. 

“...”

 

8. 정치와 운 


김태룡 민추협 상임운영위원은 선명 정치 강경 노선의 길을 걸었다. 사진은 1987 대전역서 연설하고 있다.ⓒ김태룡
김태룡 민추협 상임운영위원은 선명 정치 강경 노선의 길을 걸었다. 사진은 1987 대전역서 연설하고 있다.ⓒ김태룡

화제를 돌렸다. 

- 원래부터 강경노선이었던 건가요. 

“강경노선은 자기 성격도 있어요. 타고난 성격. ‘불의를 보고는 참을 수 없다’ 거기서 출발한 거야. 처음부터 나는 4·19 혁명이 나면서 정의감에 불타 민주화운동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사람이에요.”

4·19 세대로, 충남 연기군(현 세종시)이 고향이다. 연동초, 대전 중·고, 충남대, 고려대 대학원을 졸업했다. 대학 시절 총학생회장이었다. 학생 때부터 민주화에 투신했다. 충남대 강사, 신민당 대전 지구당위원장 등을 거쳐 27세 총각 시절 민주당 후보로 나가 충남도의원으로 당선됐다. 
“충남도 대전시 도의원 중에는 최연소였지.”

- 촉망받는 정치인이었겠네요. 

“젊은 후학들을 두려워한다는 말로 ‘후생가외(後生可畏)’라는 말이 있잖소. 나보고들 그런 말을 했어요. 높은 평가를 해줬지. 중앙이야 국회가 주목받았겠지만, 지방에서는 신문 1면을 독차지하기 바빴지. 5·16만 아니면 서른하나에 국회의원이 됐을 텐데 말이야.”

아쉬움이 흘렀다. 

인터뷰는 후반부로 치달았고, 미처 묻지 못한 것들을 물어 나갔다. 

- 14대 총선서는 공천서 탈락했잖아요. 이유가 뭐였나요. 

“현직 국회의원이 아니면 3당 통합 후라 공천을 안 줬어요. 전국구라도 줘야 하는데 노태우가 강력 반대 한 거야. 12대 국회 본회의 시절 자기를 막 공격했다고 말이야. 김태룡이가 미워 죽어 공천은 절대 못 준다는 거야.”

-  억울했겠네요.

“아, 억울했지…. YS는 대통령 돼야 하니 눈치를 안 볼 수 없잖아. 강력하게 밀어붙이지 못했어.”

서운함이 엿보였다. 이래저래, 12대 총선에서의 당선 말고는 결과가 좋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첫 국회의원 출마이던 1971년 8대는 물론 1973년 9대 총선서도 연거푸 낙선했다. 13·14대 총선 실패를 거쳐 우여곡절 끝에 정주영의 통일국민당 후보가 됐지만, 그 역시 잘 안 됐다. 

- 운이 없다고 봐야 할까요.

“정치 운이 없으면 그렇더라니까.”

퍼뜩 생각이 났는지 

“1995년 선거 때만 해도 그래. 당선될 기회가 있었어요. JP가 자민련을 만들었을 때거든. 그 밑에 김용환(4선 역임) 씨가 있었어요. 총책임자야. 나를 만나자고 해서 만났지. ‘김영삼 씨한테 괄시 받았지요?’ 대전·충남지부장을 맡으라는 거야. ‘대단히 고맙지만, 민주세력이랑 등질 수는 없소. 미안하다’, 못 간다 한 거지.”

- 충청은 자민련 판이었잖아요?

“싹쓸이 판이었지. 거기 갔으면 내리 당선되는 건데 말이야. DJP(김대중+김종필) 연합까지 있었으니 국회의원 네다섯 번에 장관까지 했을지 몰라.”

누굴 탓하랴, 하는 표정이었다. 

 

9. 정치적 결별


김태룡 민추협 상임운영위원은 정치 운이 없었지만 민주화 운동에 헌신해 87체제를 연 것에 만족하다고 말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김태룡 민추협 상임운영위원은 정치 운이 없었지만 민주화 운동에 헌신해 87체제를 연 것에 만족하다고 말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 근데 YS와는 왜….

“…. 신문에 다 났었어. ‘김태룡 대변인, YS와 결별’ 내가 인간적인 면은 끊을 수 없지만, 정치적으로는 영원히 이별이라고 했어요.”

굽이굽이 굴곡진 감정의 파편들이 묻어났다. 켜켜이 쌓였을 묵은 일들을 다 꿰뚫기는 어렵겠지만, 발단은 14대 공천 문제가 제일 클 듯했다. 그가 당의 공천 탈락 결정에 반발할 무렵 민자당 대표이던 YS는 탈당을 만류했다. 그러나 “당신만을 위해 무작정 기다릴 수는 없다”는 말을 대신하며 당을 떠난 김태룡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 문민정부 탄생 후 말이죠. 신한국당으로 복당할 수는 없던 건가요. 그랬다면 좋았을 텐데 말이죠. 

“다들 이상하게 생각하긴 했어. ‘김태룡이가 김영삼 정권 만든 일등공신인데 어째 아무것도 못 했느냐….’”

더는 묻지 않으려는데,

“YS 임기 중반을 지날 때인가. 당시 정무장관을 하던 김덕룡 씨가 YS한테 내 얘기를 한 거예요. ‘우리 정권이 만들어지기까지 김태룡의 공이 크지 않습니까.’ 사실 대통령한테 참모가 그런 말을 하는 건 쉽지 않아요. 어려운 거야. YS가 이렇게 쳐다보더래. ‘글쎄. 그렇다. 그렇기는 한데 자리가 없잖나.’‘빈 공단 자리가 있습니다.’ YS가 픽 웃으며 ‘장관이니 알아서 해요’ 그래서 김덕룡 씨가 프라자 호텔에서 나를 만나자고 했던 거예요. 공단 거쳐 대전시장 나가라고 말이야.”

- 수락했나요. 

“처음엔 내가 그랬어요. 임기가 다 지나갈 때 아니오. ‘다 먹은 김칫국에 내가 빠져야 하나?’ 그래도 고마운 일 아니요. ‘김 장관 하라는 대로 하겠다’ 수락했지.”

- 그래서 잘 됐는지요. 

“잘 안됐어…. 나중에 보니 다른 사람이 가더군. 인사 과정 중간에 일이 잘 안 풀린 거지. 암튼 역사가 참 많아….”

‘역사가 많아’ 회한이 뒤섞인 함축적인 말이었다. 그 연장선으로 정치 여정의 소회를 물었다. 
“나는 자유, 민주, 민권을 위한 민주회복 투쟁의 선봉장으로 살았소. 정계에 투신해 마침내 6·10 항쟁을 성공시킨 것에 만족하오. 이 시대에 주어진 사명, 역사적 사명을 정치하면서 다했소. 고난의 길, 처참한 생활을 하기도 했지만, 권력에 굴하지 않고 행동하는 정치인으로 살아온 것에 아무 후회가 없어요.”

한 시간 반가량 내내 또랑또랑한 말투는 힘이 넘쳤다.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였지만 활기가 느껴졌다. 인터뷰를 정리하며 오간 대화는 정치 현안이 주였다. 그러다 차기 대선주자 평가로까지 이어졌다. 

“나는 충청도 토박이지만, 윤석열 충청 대망론은 거품이라고 생각해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총장 그만둔 뒤 귀국할 때 보수 세력이 얼마나 큰 기대와 관심을 가졌습니까. 헌정회도 전부 들떠 있었어. ‘반기문이 차기 정권 잡는다.’ 난 그때도 유일하게 헌정회 안에서 ‘거품이다’ 분명히 얘기했어요. ‘후보 등록도 못 할 거다’ 그 후에 김태룡이가 점쟁이보다 낫다고 했지. 대통령 자리는 그렇게 되는 게 아니에요. 한 나라를 관장하고 위기를 관리를 할 수 있는 감이 있어야 해.”

또 다른, 아쉬운 인물평들도 더해졌다. 

“이낙연이가 당 대표 한다고 할 때 바보라고 했어. 득 볼 게 아무것도 없거든. 당 대표하면 국민적 인기를 모을 수가 없어요. 허구한 날 약점만 생겨. 이재명은 변호사도 했고 성남시장도 했고 경기지사도 했는데, 어딘가 좀 부족하다 싶어. 유승민이는 추진력 면에서 아쉽지.” 

담당업무 : 정치, 사회 전 분야를 다룹니다.
좌우명 : YS정신을 계승하자.
담당업무 : 정치부 기자입니다.
좌우명 : 꿈은 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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