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로 보는 정치] 사문난적의 화신 송시열과 문자폭탄
[역사로 보는 정치] 사문난적의 화신 송시열과 문자폭탄
  • 윤명철 기자
  • 승인 2021.05.16 17: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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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소의 달인 송시열도 상소가 화근, 생 마감 교훈 잊지 말아야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윤명철 기자)

송시열 숭모제(사진 좌), 대깨문의 문자폭탄 피해자 조응천 더불어민주당 의원(사진 우) 상소의 달인 송시열도 상소문으로 생을 마감했다는 교훈을 잊지 말아야 사진제공=뉴시스
송시열 숭모제(사진 좌), 대깨문의 문자폭탄 피해자 조응천 더불어민주당 의원(사진 우) 상소의 달인 송시열도 상소문으로 생을 마감했다는 교훈을 잊지 말아야 사진제공=뉴시스

송시열은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석학이면서 정쟁의 화신이다. 송시열은 효종과 현종의 스승으로서 존경을 받았지만, 예송논쟁과 환국의 중심에서 국정 혼란을 초래한 잘못이 있다. 그가 상소문을 쓰면 분열과 피가 넘쳐났고, 조선의 아까운 인재들이 꽃도 피워보기도 전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송시열은 서인의 한 정파인 산당(山黨)의 영수였다. 원래 산당은 김집을 영수로 모셨고, 송준길, 송시열, 윤선거 등의 인물이 중심이었다. 후일 김집이 죽자 송시열이 영수가 됐다. 이들은 지방의 서원을 중심으로 세력을 규합했고, 중앙 정계에도 점차 영향력을 확대했다.

송시열의 정치는 현실과 동떨어진 ‘주자 절대주의’였다. 그는 주자와 다른 사상이나 경전의 해석을 절대 반대했고. 주자와 다른 사상을 사문난적으로 규정하고 철저히 탄압했다. 송시열에겐 주자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송시열의 특기는 잦은 상소였다. <조선왕조실록>에는 3000회 이상 등장하면서도 관료생활은 비교적 짧았다. 주로 재야에 머물면서 각종 정치적 이슈가 생길 때마다 상소를 올려 중앙 정계를 뒤흔들었다. 송시열을 따르던 유생들은 열광했고, 지지 상소를 쏟아냈다. 조선판 문자폭탄이 아닐까 싶다. 송시열의  상소는 반대파에게는 사형선고가 되곤 했다. 

심지어 조선 중기 최대의 적폐인 방납의 폐단을 해결코자 만든 대동법(大同法)도 불편한 제도라고 반대했다. 대동법 반대는 민생을 저버린 처사로 해석된다.

효종과 송시열이 적극 추진하던 북벌도 현실과 괴리감이 컸기 때문에 실패로 돌아갔다. 당시 조선의 국력으로는 아시아 최강국을 구가하던 청에 대적할 수 없었다. 또한 민생난으로 백성의 삶도 피폐해진 상황에서 큰 나라와의 전쟁은 어불성설이었다. 하지만 효종과 송시열은 북벌을 국정 최우선과제로 삼았고, 조선의 백성은 지옥이 따로 없었다.

송시열은 분열의 화신이었다. 예송논쟁과 환국은 서인과 남인의 혈투였지만 ‘회니시비(懷尼是非)’는 자신이 이끌던 서인의 분열을 초래했던 분열의 극치였다. 

‘회니시비(懷尼是非)’는 숙종 때 스승 송시열과 제자 윤증이 상호 비방했던 사건으로,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된 계기가 됐다. 이 사건은 송시열의 정적인 윤휴에 대한 평가에 대해 윤증의 부친인 윤선거와 송시열 사이에 의견이 갈라진 데에서 비롯됐다. 

이로써 서인은 송시열을 따르는 노론과 윤증을 추종하는 소론으로 분열됐다. 노론은 소론을 가혹하게 탄압했고, 노론 독재가 수백년간 이어졌다. 개인 간의 의견 격차가 후일 정파 간 분열의 신호탄이 된 셈이다. 하지만 송시열도 기사환국의 소용돌이에서 상소를 올렸다가 숙종의 분노를 사 유배 중 사약을 받고 영욕의 세월을 마감했다. 상소의 달인이 상소로 생을 마감했다.
 
4·7 보궐선거 이후 집권 여당이 매우 시끄럽다. 선거 참패 이후 초·재선 의원들 중심으로 당의 변화를 추진하자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반면, 초강성 지지층은 문자폭탄을 난사하고 있다. 현 정부와 다른 목소리를 내면 ‘사문난적’이 되는 모양이다. 사문난적의 화신 송시열이 환생해도 말 한 마디 잘못하면 이들의 문자폭탄에 무덤으로 되돌아갈 지경이다. 민주주의는 사문난적을 원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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