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튼호텔] 역사상 최초의 평화적 정권교체 이뤄낸 그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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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튼호텔] 역사상 최초의 평화적 정권교체 이뤄낸 그 곳
  • 정진호 기자
  • 승인 2021.05.22 08: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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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착 상태 빠졌던 DJP연합 협상…한광옥·김용환, 힐튼호텔서 담판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정진호 기자]

서울 힐튼호텔은 역사상 최초의 평화적 정권교체를 가능케 했던 DJP연합이 성사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시사오늘
서울 힐튼호텔은 역사상 최초의 평화적 정권교체를 가능케 했던 DJP연합이 성사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시사오늘

1995년 7월 13일. DJ(김대중 전 대통령)가 정계복귀를 선언했다. 1992년 제14대 대선에서 패한 뒤 정치권을 떠났던 DJ는, 그러나 1995년 제1회 지방선거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하며 복귀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 상태였다. 그리고 지방선거가 민주당의 승리로 끝나자, 때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한 DJ는 정치재개와 신당창당을 선언한다.

“비록 도덕적으로 깨끗하지 못하다는 비판을 일시적으로 받더라도 민족의 운명이 기로에 처해 있는 상황에서 조그만 힘이라도 보태겠다. 이번 정치재개로 국민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것이 됐다. 이에 대해서는 어떤 변명도 하지 않겠다. 1992년 12월 19일 정계은퇴 당시에는 정치를 다시 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현재의 국정현실이 큰 혼란에 빠져 있고 제1야당의 정당기능이 마비된 상황을 그대로 바라볼 수 없다.”
1995년 7월 14일자 <한겨레> 김대중 씨 정계복귀 선언

DJ가 지방선거 직후를 적기(適期)로 판단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우선 민주당이 지방선거에서 승리하며 은퇴 번복의 명분이 충족된 상태였다. DJ는 민주당의 지방선거 승리를 자신의 정계복귀에 대한 국민의 추인(追認)이자 ‘정치인 김대중’에 대한 호출로 받아들였다.

또한 1996년 4월 11일에는 제15대 총선이 예정돼 있었다. 한동안 정계를 떠나 있던 DJ가 대권으로 가기 위해서는 ‘모멘텀’이 필요했고, 총선은 자신의 존재감을 어필할 수 있는 최고의 무대였다. 만약 DJ가 문민정부 임기 말 열리는 총선에서 대승을 거둔다면, 대권으로 가는 탄탄대로(坦坦大路)가 열릴 터였다.

그러나 DJ가 받아든 성적표는 처참했다. 새정치국민회의는 79석을 얻으며 여당인 신한국당(139석)에 완패했다. 무엇보다도 서울에서조차 18석을 확보하는 데 그친 것이 뼈아팠다. DJ는 1987년 대선 당시 ‘TK(대구·경북)는 노태우, PK(부산·경남)는 김영삼, 충청은 김종필, 호남과 수도권은 김대중’이 가져간다는 ‘4자 필승론’을 내세웠을 정도로 서울 표심에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그런 서울에서 참패했다는 것은 DJ의 대권 전략에 ‘급브레이크’가 걸렸다는 의미였다.

(전략) 김 총재가 총선 결과를 어떻게 수용, 어떻게 대응해갈지는 아직 분명치 않다. 다만 김 총재는 이날 선대위 회의에서 “우리 당이 여전히 제1야당이고, 우리는 제1야당의 책무에 충실해야 한다”고 말해 총선결과에 관계없이 당의 현 체제를 고수할 것임을 시사했다.
그러나 총선 결과는 김 총재의 대권가도에 일단 적신호를 켰다. 김 총재의 선택 폭도 그만큼 좁아졌다는 시각이 많다. 김 총재는 대권도전 여부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마다 “총선 결과를 지켜본 뒤 금년 말쯤 결정하겠다”고 말했었다.
김 총재의 이 같은 발언에 비춰 보면 이번 총선 결과로 인해 김 총재가 직접 제15대 대선에 나서기보다는 후계구도를 가시화하거나 권력구조의 개편이라는 우회로를 선택할 가능성이 좀 더 커졌다고 볼 수 있다.
1996년 4월 1일자 <동아일보> 4·11 선택 이후…김대중 총재 어쩌나

바로 이때 DJ의 정책참모기구였던 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아태재단)의 이강래 상임고문이 보고서를 하나 올렸다. 호남 고립 구도를 깨기 위해 JP(김종필 전 국무총리)와 연합하는 방안을 고려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제15대 총선 참패로 위기에 몰려 있던 DJ는 이를 받아들여 JP가 이끄는 자민련(자유민주연합)과의 정책 공조를 추진한다. 혼자 힘으로는 대권을 잡을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판단했던 JP 역시 이에 적극적으로 화답했다. 이에 국민회의는 한광옥을 위원장으로 하는 야권 대통령후보 단일화 추진위원회를, 자민련은 김용환을 위원장으로 하는 대통령후보 단일화 협상을 위한 수권위원회를 발족한다.

한광옥은 대선 두 달 전까지 교착 상태에 빠져 있던 DJP연합을 앞장서 성사시킨 인물이다.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한광옥은 대선 두 달 전까지 교착 상태에 빠져 있던 DJP연합을 앞장서 성사시킨 인물이다.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하지만 합의로 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DJ는 내각제를 수용하고, 권력 분점에 대해서도 JP의 요구를 최대한 받아들인다는 입장을 취하면서도 대선 후보로는 자신이 나서야한다는 태도를 고수했다. 이러자 JP는 민주당과 통추(국민통합추진회의) 등의 후보 결정 상황에 따라 DJP 연대의 단일 후보를 결정해야 한다며 시간을 끌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국민회의와의 연대가 아닌, 내각제 세력을 결집해 개헌을 추진하는 방식을 모색하는 등 DJ와의 거리두기에 나섰다. 그리고 이 같은 협상 교착 상태는 대선 두 달여 전까지 이어졌다.

(전략) 김종필 자민련 총재의 망설임은 특히 신한국당 내에서 반DJP 연대론은 물론, 반 DJ세력 규합론까지 불거져 나온 상황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여부에 모아졌다. 김 총재는 DJP 단일화를 빨리 하면 이회창-조순-이인제 진영에 반DJP 연대에 시간과 명분을 준다며 속도 조절을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단순히 속도조절론이라면 단일화 자체는 시간 문제일 수도 있다.
그러나 거기에 머물지 않고 신한국당 내의 반DJ세력 규합론을 염두에 둔 것이라면 상황은 달라질 수도 있다는 얘기들이다. 반DJ세력 규합이 성사될 경우 JP로서는 또 다른 여지가 생겨날 가능성에 기대를 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중략)
비자금 정국의 추이, 반DJP 연합의 가시화 여부, 김대중 총재에 대한 신뢰 문제 등을 결단의 변수로 여겨온 김 총재에게 신한국당 내 이상 기류까지 겹쳐 ‘결단 시점이 10월을 넘기는 것 아니냐’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1997년 10월 21일자 <조선일보> JP “때가 되면…” 끝없는 장고


상황이 심상찮게 돌아가자, 한광옥과 김용환이 나섰다. 두 사람은 서울 중구에 위치한 힐튼호텔(現 밀레니엄 힐튼 서울)에서 만나 마지막 협상에 임했다. 다음은 한광옥이 <시사오늘> 인터뷰에서 증언한 내용을 대화 형식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한광옥 “선배, 단일화를 선거 끝나고 할 거요? 여기서 담판을 지읍시다.”
김용환 “…. 좋소. 대신 세 가지 조건이 있소.”
한광옥 “그게 뭡니까.”
김용환 “첫째, 아무도 모르게 청구동 자택의 김종필 총재한테 가서 고맙다는 인사를 확실하게 해 주시오. 둘째, 이 일은 기자들에게 철저히 함구하도록 합시다. 셋째, 김종필 총재가 10월 말 대전에서 MBC 초청으로 대통령 후보 연설을 합니다. 대통령 후보 자리를 김대중 총재에게 양보한다는 얘기를 그 때 하게 해 주시오.”
한광옥 “그게 뭐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그렇게 합시다.”

한광옥에 따르면 두 사람은 이 자리에서 합의문을 작성, 서명까지 마친 뒤 DJ와 JP에게 합의문을 들이밀었다.

“할 거면 하고, 아니면 깹시다.”

그렇게 역사는 DJ와 JP의 연합, 호남과 충청의 결합, 그리고 역사상 최초의 평화적 정권교체로 나아갔다.

국민회의 김대중 총재는 27일 밤 자민련 김종필 총재 자택을 찾아 1년간 끌어오던 후보단일화에 마침표를 찍었다.
김 총재는 이날 밤 후보를 양보해 준 JP에게 고마운 뜻을 피력했고 두 사람은 손을 맞잡고 “힘을 모아 잘해보자. 여생을 국가를 위해 보람 있게 보내자”며 덕담을 주고받았다고 한다.
이날 밤 합의는 선거 사상 유례없는 야권 통합 성격의 단일화라는 점에서 하나의 사건으로 기록될 것 같다. 앞으로 성공 여부를 떠나 선거 때마다 분열을 거듭해 온 야당의 습성을 극복한 것 자체로도 평가받을 만하다.
단일화 성사는 대선구도를 5자 구도에서 4자 구도로 압축했으며 ‘DJT(김대중-김종필-박태준) 연대’로 발전할 것으로 전망된다. (후략)
1997년 10월 29일자 <매일경제> DJP 후보단일화 완전 타결 ‘DJT연대’로 발전 모색

힐튼호텔에서의 담판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는 잘 알려져 있다. 호남 이외 지역으로의 확장성이 떨어졌던 DJ는 DJP연합에 힘입어 충청권의 지지를 손에 넣었고, 결국 제15대 대선에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꺾으며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한광옥과 김용환의 ‘힐튼호텔 담판’이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의 평화적 정권 교체를 이뤄낸 셈이다.

담당업무 : 국회 및 국민의힘 출입합니다.
좌우명 : 인생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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