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환자생활⑥] 미세 암세포 결국 뇌종양으로
[슬기로운 환자생활⑥] 미세 암세포 결국 뇌종양으로
  • 정명화 자유기고가
  • 승인 2021.05.23 09:3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두통 심해 마약성 진통제 의존
진료 대기 중 119로 응급실 직행
대뇌 우측두엽 종양 뇌수술 실시
점진적 치매로 인지 기능 저하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정명화 자유기고가)

인생의 곡절은 때로 깊은 수렁으로 우릴 빠지게 하는데, 그 누구도 미래를 예단할 수 없다. 사노라면 간혹 감당키 어려운 삶의 무게에 짓눌리거나, 불가항력적 사태가 거센 파도처럼 물밀듯이 밀려오곤 한다. 기대 이상으로 항암 치료 효과가 커 방심한 사이, 어느 날 동생으로부터 다급한 연락이 왔다. 엄마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이다.

Semi coma, 뇌수술이란 극단의 처치가 필요해 충격에 빠졌다. ⓒ정명화
Semi coma, 뇌수술이란 극단의 처치가 필요해 충격에 빠졌다. ⓒ정명화

반 혼수상태로 응급실행

공항에서 만난 엄마, 이번엔 또 다른 모습의 위기 상황이었다. 항암 치료 후 회복된 모습과는 달리, 휠체어에 기대어 앉아 거의 눈을 뜨지 못했다. 극심한 두통에 시달려 신음소리만 낼 뿐, Semi coma, 즉 반혼수상태였다.

그동안 두통이 심해 마약성 진통제에 의존하고 지내온, 정상적인 의식 수준이 아니었다. 비전문인인 내가 보기에도 뇌 안이 뭔가 크게 잘못되어가고 있음을 짐작케 했다. 치료 시작 전 뇌전두엽에 암세포가 올라가 있다던 검사 결과가 불현듯 뇌리를 스쳤다. 그렇다면….

집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진료 예약 때까지 기다릴 수 없어서 119를 불러 응급실로 향했다. 응급실 전공의가 띄운 검사 모니터엔 내 눈에도 선명히 커다란 뇌종양을 알아볼 수 있었다. 계속 외래로 정기검진을 다닌 걸로 알고 있는데 이 무슨 일인지.

분명 완전 관해로 검사상 암세포가 사라졌었지만, 크기가 커져야 보이기 시작하는데, 검사상 발견되지 않는 전이암을 ‘미세 전이암’이라 일컫는다. 치료 후 눈에 띄지 않게 남아 있다는 의미로 ‘미세 잔존암’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전이와 재발의 단초가 되는 요주의 대상으로, 엄마의 경우 언젠가부터 세밀히 체크하지 않는 사이 커다란 뇌종양으로 발현한 것이다.

주로 목 아래까지 체크하고 그 위 뇌는 거의 체크를 안 한 거였다. 즉 흉부 검사는 계속해 문제가 없다니 안심했는데, 뇌로 전이된 암세포는 꾸준히 검사를 않고 아무런 제지를 않자 질주하듯 커진 거 같다. 미세 암세포, 작은 사인 하나도 소홀히 여기지 않고 체크를 해 초창기 방사선 치료 등을 받았다면 일이 그토록 커지지 않았을지 모른다.

뇌전이 징후 두통에 시달려

거기엔 공동 책임이 있었다. 환자인 엄마 자신이 두통을 직접 호소하지 않았고, 엄마의 뇌전이를 알고 있던 내가 진행 상황을 꾸준히 챙기지 않은, 그리고 병원 의료진의 체크 직무유기였다. 대형병원은 환자가 워낙 많다 보니 구멍이 생길 수 있는 게 맹점이다. 의료기술은 탁월해 결정적인 순간에 필요한 도움을 받을 수 있으나, 자칫 놓치기 쉬운 것은 당사자인 환자나 보호자가 철저히 챙겨야 한다.

한편, 응급실에서 위로 보고를 하자 신경외과 교수가 수술을 진행하겠다는 전갈을 보내왔다. 그렇게 만난 신경외과 의사는 뇌종양뿐 아니라 뇌수막도 그렇고 엄마의 뇌 상태가 비정상적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숨골 가까이 까지 커진 뇌종양을 그대로 두면 숨골을 눌러 언제 사망할지 모른다, 가만히 앉아 있다가 사망할 수도 있는데 그래도 수술하면 6개월에서 1년은 생명 연장이 가능하다는 소견을 표했다.

난 혈액종양내과 임상 환자로 계속 외래를 다녔는데 어찌 이 상태까지 방치했느냐고 항의했지만, 신경외과 측은 미리 알았더라도 이미 뇌로 암세포가 올라 간 이상 큰 차이는 없었을 거라는 입장이었다. 뭐 그럴까 만은 지나간 거 추궁해봤자 소용없고, 그 시점에서 최선을 다할 수밖에. 그리하여 최종 뇌수술을 결정하고 또 두 남동생이 올라와 동의서에 서명했다.

소식을 들은 외삼촌이랑 외숙모가 병문안을 와 외숙모가 전하길, 엄마가 한쪽 머리를 쇠꼬챙이로 찌르듯 아프다고 고통스러워해 나한테 얘기하라고 했다는데, 끝까지 말을 안 했던 것이다. 그토록 위중한 처지에서도 자기 삶이 바쁜 자식에게 부담주지 않으려 배려한 엄마의 마음에서 초래된 결과였다.

그렇지만 결국은 내가 알 수밖에 없는데, 그 정도로 극심한 두통에 시달렸으면 의료진이나 나한테 얘기를 했어야지 하는 속상함과 아쉬움이 남지만, 만시지탄 해봤자 이미 돌이킬 수 없이 늦은 상황이라 더 이상 거론치 않았다.

응급 뇌수술 시행

결국 바로 응급 수술에 들어갔고, 난 혼자 보호자로 수술실 앞을 지키고 있었다. 다른 환자 보호자들과 대기하던 초조한 기다림 속 1시간 30분 정도 지났을까? 수술이 길어질 것으로 예상했는데 생각보다 빨리 누구 보호자하며 찾았다.

이에 간호사따라 회복실에 들어가니 놀랍게도 엄마가 침상에 똑바로 앉아서 날 알아보고 내 이름을 불렀다. 거의 의식불명에 가까웠었는데 멀쩡히 앉아 있을 정도로 수술은 대성공이었다. 수술 집도의도 수술이 잘 됐다고 안심하라는 듯 결과를 전했다. 누구라고 이름을 기재하지 않으나 지금도 그 의사 수술 실력에 감탄해마지 않고 이 자리를 빌려 감사할 따름이다.

물론 두개골을 열어 종양 제거 후 봉합하느라 오른쪽 머리엔 굵은 스테이플러로 길게 꿰맨 자국에, 수술로 제거한 우측두엽 부위는 푹 꺼지고 예전 두뇌 모습은 아니었다. 달라진 머리 모양에 붕대로 전체를 감은 채였지만, 일반병실에 돌아온 엄마는 식사도 잘하고 상당히 호전된 모습이었다. 다만 상처 회복하느라 상당기간 입원한 후 퇴원했다. 이어 방사선 치료까지 받았고, 아무래도 엄마에겐 이러저러한 부작용이 나타났지만 수술 이전에 비하면 상당히 회복된, 놀라운 결과였다.

그 후 수술을 집도한 신경외과 의사는 미국으로 연수를 간다며 외래 다른 의사를 연결해 주고 떠났다. 그래도 엄마는 정기 검진을 꾸준히 다녔다. 의사들이 보수적으로 환자의 상태를 예견하고 주의를 주지만 1년 후 연수를 끝낸 후 복귀해서도 엄마는 여전히 외래를 다니고 있었다.

담당 의사는 자신이 최선을 다해 수술을 집도했더라도, 예후를 낙관적으로 보지 않은 환자라 엄마가 그때까지도 생존하여 진료 온 걸 보고 반갑고 놀라는 눈치였다. 우수했던 엄마의 총기는 상당히 옅어지고 예전만 못하지만, 최악의 상태에 병원을 찾은 것에 비하면 엄마의 경과와 생명력은 대단했다.

참 드라마틱하다고 해야 할까. 독한 항암 치료와 뇌수술까지 받고도 그 정도로 견뎌냈으니 말이다. 워낙 강인한 성정에 더해 엄마는 자신이 평소 항생제나 진통제등 화학 약품 섭취를 멀리해와 결정적인 순간, 즉 항암제가 잘 들었다고 자체 해석했다. 우리 키울 때도 약을 거의 안 먹이고 엄마의 만병통치약은 안티푸라민이었다. 모기에 물렸을 때뿐만 아니라, 감기에 걸리면 목이나 코에 안티푸라민을 바르고, 열이 나면 목이랑 이마에, 또 엄마는 근육통 외에도 두통이나 감기에 약 대신 파스를 코나 머리, 목에 잘라 붙였다.

우리나라 병원은 쉽게 주사나 약을 처방한다면서 평소 화학적 처치를 못마땅해왔다. 내성이 생겨 결정적인 순간에 약발이 받지 않고 독이 될 수 있다며 우리 아이들 육아 때에도 웬만하면 약을 먹이지 못하게 했다. 민간요법이나 엄마 나름의 방법이 치료 효험이 있을 수 있어도 그건 엄마의 주관적 지론으로, 평소 생활 습성이 얼마나 암 치료에 극적 효과를 발휘했는지는 모르겠다. 

암이 아닌 폐렴으로 영면

뇌수술과 방사선 치료 후 아쉽게도 점점 엄마의 뇌 인지능력이 떨어져 치매가 심해지고, 집에서 그리고 나중엔 요양병원에서 한동안 지낸 후 애석하게도 폐렴으로 끝내 생을 마감했다. 60대 초반에 발병하여 거의 말기에 병원을 찾아 70대 중반에 암이 아닌 폐렴으로 말이다.

다만 유방암을 처음 발견하고
바로 병원으로 향해 수술을 받았더라면,
머리가 아프면 병원에 불편함을 호소하거나
나에게라도 언질을 했더라면,
엄마가 아직 생존해 있을지도 모른다는 안타까움이 남아 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엄마의 천수가 거기까지 인가보다 하며 애써 위안해 본다. 처음 혈액종양내과 의사는 적절한 치료 시 2~3년 여명을, 뇌수술 당시엔 6~12개월을 예측한 시한부 선고를 받았기에, 그래도 처음 발견시보다는, 병원의 예상보다는 훨씬 오래 살았으니 그걸로 만족했다.

그 당시 엄마의 병증과 여러 가지 난관에 안타까워 힘들고 심란한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허리케인 같은 충격에 휩쓸려본 경험이 있기에, 정작 내가 암환자가 되어서는 얼마 지나지 않아 진정되고 차분해질 수 있었다. 그러나 엄마와 그 때를 반추하는 지금, 최선을 다하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이 몰려오고 비통함과 괴로움에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일부 발췌 인용)

킴벌리 커버거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더 즐겁게 살고, 덜 고민했으리라.

진정한 아름다움은 자신의 인생을 사랑하는 데 있음을 기억했으리라.
부모가 날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알고
또한 그들이 내게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믿었으리라.

​분명코 더 감사하고,
더 많이 행복해했으리라.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다음 편에 계속>

정명화는…

1958년 경남 하동에서 출생해 경남 진주여자중학교, 서울 정신여자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연세대 문과대 문헌정보학과 학사, 고려대 대학원 심리학 임상심리전공 석사를 취득했다. 이후 자유기고가로 활동 중이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