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代散策] 서청원 “5·18 현장서 죽을 뻔… 시대의 역할 피하지 않아”
[時代散策] 서청원 “5·18 현장서 죽을 뻔… 시대의 역할 피하지 않아”
  • 구술 서청원 |정리 정세운·윤진석 기자 
  • 승인 2021.06.26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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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청원 한나라당 전 대표
“‘서 기자, 광주가 심상치 않아’…신군부 만행 몸서리쳐”
“지구상 어떤 폭력이든 사라져야 한다는 신념 갖게 돼”
“민추협 신문 제작… ‘개헌 함성 전국 강타’ 곳곳 뿌려”
“3당 합당 가기 싫었지만 YS 지키겠단 심정으로 동참”
“YS, 요즘도 꿈에 나와, 며칠 전도 꿈에 나타나 내게…”
“이회창 대통령 만들고자 JP와 딸네 집서 비밀로 만나”
“민주계 선배들 살아계셨다면 훌륭한 지도자 됐을 것”
“박근혜 대통령 돕겠다는 약속 지켜…깨끗한 정치인”
“국민도 속고 나도 속았습니다…친박연대 결성해 부활”
“권력 구조 개편 논의할 때… 누가 후보 되든 도울 것”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구술 서청원 |정리 정세운·윤진석 기자 )

서청원 전 한나라당 대표가 조선일보 기자 시절 광주 민주화운동 현장에 있던 당시ⓒ시사오늘(사진 : 서청원 제공)
서청원 전 한나라당 대표(지프차 맨 앞)가 조선일보 기자 시절 광주 민주화운동 현장에 있던 당시ⓒ시사오늘(사진 : 서청원 제공)

“이게 내 5·18 광주 갔던 사진이오. (지프차 맨 앞 좌석 사람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요게 나요. <사진으로 본 서청원> 출간을 준비하고 있는데, 마침 인터뷰도 있고 해서 가지고 나왔지.” 

(6월의 ‘시대산책’ 주인공은 서청원 전 한나라당 대표다. 그도 6·3 학생시위를 거쳐 6월 민주항쟁에 이르기까지 87 민주화 체제를 만든 주역이다. 주섬주섬 책장을 넘기다 찾았는지 한 장의 흑백 사진을 내밀었다. 1980년 5월 광주의 모습이다. 앞쪽이 서청원, 뒷좌석에는 성명 미상의 청년 둘이 서 있다. <조선일보> 광주 주재 박래명·조광흠 기자다.

사진을 보여준 건 6월 20일 오후 여의도 그의 사무실에서였다. 광주 민주항쟁 41주년을 지나고, 6월 민주항쟁 34주년을 앞두던 때다. 한쪽 벽면엔 가보로 내려오는 듯한 서예 전시가 눈에 띈다. <만기요람>(萬機要覽)을 쓴 조선시대 문신 서영보가 그의 6대조 할아버지다. 초여름을 드리운 창문 사이로 사이렌이 굉음을 내며 지나갔다.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소리다. 이야기는 1980년 5월 그날의 광주부터 시작됐다.) 
 

서청원 전 한나라당 대표는 6·3 한일회담 반대 시위부터 87년 6월 민주항쟁까지 민주화 운동에 앞장선 정치인이다.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서청원 전 한나라당 대표는 6·3 한일회담 반대 시위부터 87년 6월 민주항쟁까지 민주화 운동에 앞장선 정치인이다.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1. 기자 시절, 광주 특파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로 있을 땐데 말이오. (서 전 대표는 <조선일보> 기자로 1969년 입사해 12년 재직했다) 지금도 고문으로 있는 김대중 선배(주필 역임)가 사회부 부장으로 있을 때였어요. 내가 시경캡(서울지방경찰청 선임기자) 출신이잖소. (엄지를 세우며) 사회부에서는 이거 아니오.”

- 아, 그렇죠. 

 “시경캡 그만두고, 교통부 출입할 땐데, 하루는 김 선배가 들어오라는 거예요.”

5·18 무렵. 

“이봐, 서 기자. 광주가 심상치 않아.”

김 선배가 내게 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 곤봉을 든 군인들과 물구나무를 선 시민들, 트럭 위로는 학생들이 연행되는 장면이 보였다.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들을 무참히 진압하고, 이를 말리던 시민들까지 탄압하는 만행에 몸서리쳐졌다.

“광주 좀 내려가야겠어.”

사회부 수석기자로서 특파된 나는 그 길로 출장길에 올랐다. 통금 조치로 열차를 이용하기가 어려웠다. 아침 일찍 택시를 타고 광주로 향했다. 현장에 도착하니 난리가 아니었다. 옛 도청 금남로 분수대 일대 시체를 업고 뛰는 사람, 임시로 차려진 빈소에서는 곡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 그렇게 시신이 많았나요. 

“금남로 분수대 앞에서 내가 본 것만 백몇십 명이 넘었어요.”

- 전신주가 끊겼을 텐데 기사는 어떻게 외부에 송고했나요.

“금남로에서 500m 떨어진 곳에 철도 전화가 있었어요. 도경 국장 관사에 가면 쓸 수가 있었죠. 아니면 1km 떨어진 광주역 근처로 가야 했어요. 거리가 좀 멉니까. 죽을 고생하면서 외부에 알린 거요.”

- 위험했던 순간도 많았겠습니다. 

“한 번은 전화하는 데 말이야….”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보도해 서청원 전 대표는 조선일보 기자 시절 노력상을 받았다.ⓒ시사오늘(사진 제공 : 서청원)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보도해 서청원 전 대표는 조선일보 기자 시절 노력상을 받았다.ⓒ시사오늘(사진 제공 : 서청원)

 

긴박한 순간이었다. 
“손들어!!!”
무정부 시기였다. 한 젊은이가 총구를 겨누며 소리쳤다. 수상하다 느껴 쏘았다면 죽는 거였다. 본사에서는 수화기 너머로 상황을 짐작했다. 그러다 전화가 끊어지니, 다들 내가 죽었다고 생각했다. 밤엔가 다시 철도 전화를 이용해 살아있다는 것을 알렸다. 그제야 울고 불던 아내(이선화)도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 위기는 어떻게 모면했습니까. 

“마침 <조선일보> 광주 주재 기자인 조광흠 기자가 있었어요. 상황을 설명했지. 기자증도 보여주고 말이야.”

- 며칠간 있었습니까. 

“한 9박 10일간 있었어요. 5·18에서 5·27까지를 기사화해 특종을 터트렸지요. 다른 기자들은 다 떠나고, 나 혼자 남았더라고요. 솔직히 퓰리쳐상(미국서 가장 권위 있는 보도상) 감이지. 시경캡 출신이라는 깡다구로 버틴 거예요. 1호봉 특진도 하고 노력상도 받았지.”

 

2. 독재정권에 맞서다 


서청원 전 한나라당 대표 시대산책 범위ⓒ시사오늘(그래픽=박지연 기자)
서청원 전 한나라당 대표 시대산책 범위ⓒ시사오늘(그래픽=박지연 기자)

5·18 광주 민주화운동은 내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숭고한 민주 시민의 저항에 감복했고, 지구상에서 어떤 형태이건 폭력은 사라져야 한다는 신념을 갖게 했다. 

- 이후 1981년 11대 총선에서 민한당 공천을 받아 동작구에서 당선돼 정계 입문하잖습니까. 

“그렇소.”

- 1985년 12대 총선 때는 말이죠. 정통 야당인 신민당(신한민주당)이 부활하지 않습니까. 박관용·홍사덕·서석재 의원 등은 관제 야당인 민한당을 탈당해 신민당을 선택했는데, 왜 본인은 안 간 겁니까. 민한당으로 나오면 당선될 거로 생각한 건가요. 

“내가 민한당 소속이 된 것은 유치송(5선 역임) 총재 때문이었소. 유일호 전 기재부 장관 아버지 아니오. 집도 가까웠어요. 우리 집이 상도동 이화약국 근처요. 제일 가깝게는 이수성 총리(29대 역임)가 살았지만, 유치송 총재 집과도 200m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어요. 그 인연으로 민한당 간판으로 출마한 건데 차마 그 어른을….”

- 배신하기 어려웠던 겁니까. 

“….”

끄덕이기만 했다. 

- 그 뒤 YS(김영삼 대통령)를 만나잖아요? 

“YS 집과도 가깝더라고. 500m 차이밖에 안 났지. 하하.”

재선에 실패한 뒤 나는 YS를 찾아갔다. 어쩌면 숙명과도 같았다. 독재정권에 맞서고자 했던 지향점에 그가 있었다. YS는 그 무렵 민주주의를 이 땅에 실현하는 것이 우리 국민 모두의 절대적 사명임을 선언하며 제도권과 재야를 아우르는 데 고무돼 있었다. 사투를 건 23일간의 단식투쟁, 민주산악회(민산)와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신민당 돌풍까지 한 줄기 빛으로 시작한 민주화 여정은 차츰 암흑을 걷어낼 동력을 회복하고 있었다. 12대 총선을 계기로 DJ(김대중 대통령)도 귀국한 데다, YS도 4년여 만에 정치 규제에서 풀려났다. 야권 체제 정비는 더욱 탄력을 얻어 갔다. 원내에서는 민한당을 흡수해 야권 통합을, 장외에서는 민추협과 민산의 규모를 키워 구심점을 확대해 갔다.
 

1985년부터 YS와 서청원 전 한나라당 대표와의 인연이 시작된다. YS와 김수환 추기경, 서청원(뒤)ⓒ시사오늘(사진 : 서청원 제공)
1985년부터 YS와 서청원 전 한나라당 대표와의 인연이 시작된다. YS와 김수환 추기경, 서청원(뒤)ⓒ시사오늘(사진 : 서청원 제공)

상도동계 소속이 된 나는 민추협 안에서 언론자유 특보 위원장을 맡았다. <민주통신>에서는 주필을, 민산 회지인 <자유의 종>에서는 편집위원장으로 활약했다. 

- 민추협 당시 상도동계와 동교동계가 지분을 반으로 나눴다고 하던데요. 신문 만들 때도 그랬습니까. 

“내가 주필이면, 부주필은 동교동계인 울산의 권기술 의원(15·16대 역임)이 맡았어요. 신문 편집도 1면 탑이 김영삼이면 부탑은 동교동계 후농 김상현, 2면 탑이 김대중이면 부탑은 상도동계 인사로 딱딱 반반씩 나눠 냈죠. 신문 제작하고, 제목 뽑고 사설 써서 내려보내면 그게 어디서 인쇄돼 어떻게 배포되는지는 몰랐지.”

- 이성헌 전 의원이 인쇄했다던데요? (국민의힘 이 전 의원은 민추협과 민산 회지 편집위원으로 활동했다.)

“나중에 알았지. 그땐 철저히 자기 일만 했어요. 누가 뭘 하는지 몰라. 검열이 심할 때니 누설되지 않도록 비밀로 했지.”

- 신문 내용이나 제목 중 기억에 남는 것은 무엇입니까.

“민주 함성 전국강타? 가만있자. 그게 아닌데. ‘개헌 함성 전국강타’ 맞아요. 그거였어. 신문에 그 제목을 달고 내보낸 것이 가장 기억에 남아. 가판대부터 시장에 막 뿌리는 거예요. 돈도 누가 대는지 몰랐을 때지.” 

- 한광옥 당시 민추협 대변인 얘기 들어보니 YS와 DJ 두 사람에게 보고하고 결재받느라 고달팠다고 하더라고요. 상도동계 동교동계 신경전도 치열했고 말입니다. 

“내부 완력이 있지, 없을 수 있나. 갈등은 있었지만, 직선제 흐름 앞에서는 별게 아니었어요.”
오히려 애틋할 때가 많았다. 무교동 사무실에서 회의나 데모를 마치면 꼭 회포를 풀었다. 동교동계 좌장 권노갑 선배도 함께했다. 토큰(버스표) 하나만 달랑 들고 출퇴근하던 시절이었다. 현역 의원이나 간부들을 따라 우르르 몰려다녔다. 점심에는 설렁탕 얻어먹고, 저녁에는 근처 참새구이 집이 아지트였다. 소주 한 잔 목구멍에 털면서 막막한 시절을 달랬다. 
 

서청원 전 대표가 6월 민주항쟁 당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진상규명 및 책임자 처벌 촉구 시위에 나서고 있다.ⓒ시사오늘(사진 : 서청원 제공)
서청원 전 대표가 6월 민주항쟁 당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진상규명 및 책임자 처벌 촉구 시위에 나서고 있다.ⓒ시사오늘(사진 : 서청원 제공)

- 그래도 다 지났지 않습니까.

“그랬지.”

소소한 기억부터 굵직한 사건들이 스쳐 갔다. 천만인 서명 개헌 운동, 부천 성 고문 사건 폭로, 1987년 6·10 민주항쟁 기간 ‘박종철 고문치사 항의 시위’ 등….

“가만있자 이 사진인데….”

(꺼내 보여준 사진에는 부천 성 고문 폭로로 수감됐다가 막 출소했을 당시가 담겼다. 흰 무명 한복을 입은 서청원은 ‘고문 정치는 반민주의 덫’이라는 플래카드 쪽으로 시선을 옮기고 있었다. 앞서 그는 1986년 8월 30일 체포됐다. 해당 일자에서 <동아일보>는 ‘서울 남대문 경찰서는 30일 오전 9시 10분경 민주산악회 기관지 <자유의 종> 편집인인 서청원 씨를 자택에서 연행했다. 서 씨는 7월 30일 발행된 <자유의 종> 제7호 1면의 성고문의 진상을 밝혀라 라는 제호의 기사와 관련 조사받고 있다’라고 적었다.)
 

서청원 전 대표가 부천 성고문 사건을 자유의 종 회지를 통해 폭로해 수감됐다 풀려났을 당시ⓒ시사오늘(사진 : 서청원 제공)
서청원 전 대표(사진 가운데 흰 한복을 입고 있다) 부천 성고문 사건을 자유의 종 회지를 통해 폭로해 수감됐다 풀려났을 당시ⓒ시사오늘(사진 : 서청원 제공)

 

3. YS와 3당 합당



“두 분은 위대한 지도자예요.” 

대화는 YS와 DJ 얘기로 넘어왔다. 

“오늘날 민주주의가 간단히 이뤄진 게 아니에요. 그런 용감한 지도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는 거 아니겠소.”

- YS와는 각별했지요. 

“날 어마어마하게 사랑하셨어요. 요즘에도 말이야. 꿈에 자주 나와. 제일 많이 나오는 꿈이 YS 꿈이야. 며칠 전에도 꿨는걸.”

(순간 혼자 폭소를 터트렸다.)

“YS를 모시고 시청 앞까지 데모하러 나가면 말이요. 열댓 명이 최루탄 쏘고 삽시간에 포위해서는 닭장차에 태워요. 야당 지도자니 구치소까지는 못 가고 김포 같은 곳에 버려놓고 가는 거예요. 그래도 계속 싸웠지.” 

(민추협부터 맺은 YS와의 인연은 끝까지 갔다. 신민당 분화를 거쳐 통일민주당 대변인, YS 총재 비서실장을 맡는 동안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문민정부 때는 1994년 정무 1장관, 신한국당 시절 원내총무 등을 역임했다. 계파 내 비주류로 시작해 상도동계 대표주자로 성장했다.) 
 

“측근이라고는 하지만 1970년대부터 YS를 따라다닌 김동영, 최형우, 김덕룡을 비롯한 ‘가신 출신’에 비하면 내부 힘은 약했다. 총재 비서실장인데도 이원종, 홍인길 등 원외 비서들에게 내부 정보를 ‘물먹은’ 경우도 있었다. 대변인 서청원이 언론 브리핑을 하면 개별적으로 접촉해 브리핑 내용을 바꾸는 일도 종종 있었다. 상당 기간 서청원은 찬밥 신세였던 것이다. 그래도 꿋꿋했다. YS가 1990년 3당 합당으로 여당 대표가 되고,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를 통해 집권하기까지 서청원은 돌격대장 같은 행동력으로 고비 때마다 YS를 뒷받침했다.” 
-<정치인 서청원을 말한다- 우정은 변치 않을 때 아름답다>(윤승모 지음) 중-

 

통일민주당 대변인 시절 왼쪽부터 서청원 당시 대변인과 YS 총재ⓒ시사오늘(사진 : 서청원을 말한다- 책 우정은 변치 않을 때 아름답다)
통일민주당 대변인 시절 왼쪽부터 서청원 당시 대변인과 YS 총재ⓒ시사오늘(사진 : 서청원을 말한다- 책 우정은 변치 않을 때 아름답다)

(서청원과 YS 관계는 의리와 정, 행동이라는 세 단어로 요약된다는 평가다. 하지만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 3당 합당 때는 반대했지 않습니까. 결별하지 않은 것은 의리 때문입니까. 

“내가요. 참 정치하면서 가장 고민을 겪은 게 3당 합당 때입니다.”

전두환 독재정권과 싸우겠다는 명분으로 국회의원이 된 나였다. 군 출신인 민주정의당 허청일 후보와 맞붙었던 1988년 제13대 총선 때는 ‘돈이냐 양심이냐’ ‘총이냐 펜이냐’는 슬로건을 내세워 큰 반향을 일으켰다. 정부의 실정을 비판한 국감장 스타요, 국회 내 야당 투사로 활약하는데 자부심이 컸다. 

- YS는 뭐라고 하던가요.

“같이 가자면서 (3당 합당 문제로 결별한) ‘이기택이 못 가게 해라’ ‘노무현이 못 가게 해라’…. 그렇지만 나도 정말 가기 싫더라고.”

- 난감했겠습니다. 

“ ‘모두가 죽는 길이 아닐까?’ 한 열흘간은 잠을 못 자고 고민만 했어요. 새벽에 일어나면 아내도 따라 나와요.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 ‘YS 비서실장인데 가야지 않느냐.’ 그러다 결론 내렸지. ‘배신할 수는 없다.’”

 

서청원 전 대표가 내각제 합의 문서 유출 파동 당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서청원 전 대표가 내각제 합의 문서 유출 파동 당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 3당 합당 후에도 ‘내각제 합의 각서 유출 파문’ 건으로 탈당을 결의했지요? 

“YS가 당연히 대통령 후보가 돼야 하는데, 민정계가 미적미적하면서 안 주려 한 거 아니오. 가만있을 수 있나. 뭐라도 해야 했지.”

(내각제 각서 유출 파문이란 1990년 10월 노태우 대통령, YS, JP(김종필)가 내각제를 추진하기로 합의했다는 각서가 <중앙일보>를 통해 언론에 유출된 사건을 말한다. 합당 후 1년도 안 돼 벌어진 일이었다. 상도동계를 포함한 민주계는 YS를 곤경에 빠트려 차기 대권을 넘겨주지 않으려 한 수뇌부의 음모로 봤다. 배수진을 치겠다는 각오로 서청원 등 소장파 일부가 민자당 탈당을 도모했다. 분당까지 갈 뻔한 위기 상황이었다.) 

- 마산 파동(YS가 내각제 각서 유출 파문에 항의하며, 당무를 거부하고 1990년 10월 31일 마산으로 내려간 사건)이 그 시기 있었잖아요. 당시 얘기 좀 해주시죠. 

“우리가 YS한테 그랬어요. ‘대표님(YS), 여기서 죽으나 나가서 죽으나 마찬가지입니다’ 가만히 있다가는 고사당할 수밖에 없으니 탈당하자고 강력히 설득했지요.” 

(하지만 YS는 다른 선택을 한다. 탈당 대신 당무 복귀를 선언한 것이다. 여기에는 노태우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YS를 만나러 온 허주 김윤환의 설득이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 민주계 소장파들도 결국 탈당을 안 했는데요, 결정적 이유가 뭔가요. 

“(YS가) 만류하는데 어떡하겠소. 결국, 우리가 주저앉았지.”

(서청원의 시각에서 YS가 어떻게 설득했는지는 정치인들의 회고록이 수록된 <이제는 말한다>를 통해 엿볼 수 있다. 해당 책에서 서청원은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1990년 11월 6일 나(서청원)를 비롯한 소장의원들과 중진의원 약 20명이 마포가든 호텔에서 만나 탈당을 결의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근데 그 사실이 YS 귀에 들어가서 새벽에 마포가든 호텔로 YS가 찾아왔다. 그는 우리에게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산다. 나를 믿어 달라. 어제 합의된 것은 잘 된 것이다. 그러니 탈당은 말아 달라.’ 그때 만약 20여 명이 탈당했다면 사실상 당이 갈라지고 YS의 대권 도전은 어려웠을지 모른다. 어쨌든 그 많은 어려움을 물리치고 YS가 대통령 된 것은 대견하고, 3당 합당을 끝까지 지킨 결과였다.”
- <이제는 말한다> 中 서청원 수록 편(MBC라디오국 엮음)-

 

- 92년 14대 대선 경선 때도 민정계와 갈등이 많았잖아요. 대통령 후보 조기 가시화 논란 때 YS를 도와 승기를 잡았다고 하던데요.

“대선을 앞두고 우리는 차기 대통령을 조기에 내야 한다 했고, 민정계랑 공화계는 그럴 필요 없다며 반대했어요. 그때 제가 아이디어를 하나 냈어요. 어느 날 새벽 퍼뜩 떠오른 겁니다. 노태우 정부 핵심 조직이 대구경북 중심으로 형성된 것에 착안한 거죠. TK 배제론을 들고나온 겁니다.”

(서청원이 낸 묘안은 신문을 통해 대서특필됐고, 민정계의 명분을 잃게 하는 동력으로 작용했다.)
 

신문자료-1994년 12월 경향신문 90년 대선 막후 관련 기획 보도ⓒnavernewslibrary
신문자료-1994년 12월 경향신문 90년 대선 막후 관련 기획 보도ⓒnavernewslibrary

 

“91년 말 YS 측은 차기 대통령 후보를 따내기 위해 수단을 다 동원했다. 그때 제기한 것 중 하나가 TK 배제론이었다. 노태우 대통령을 약화시키기 위한 외곽 때리기 전술이었다. 민주계 주장의 핵심은 TK는 더 이상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동안 TK가 잘 해먹었기 때문에 더 이상 등용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였다. 노 대통령의 약점을 공격해 YS 지지를 이끌어 내자는 계산이었다. 당시 TK 배제론이라는 아이디어를 처음 내놓은 인사는 서청원 의원이었다. 어쨌든 상도동의 이 같은 총력전 덕분에 노 대통령은 91년 말 후계를 YS로 결정하게 됐던 것이다.”
-<경향신문> 1994년 12월 25일자 기사 중-

 

4. 정발협과 이회창, ‘JP 비화’



이 생각, 저 생각하던 차,
“정발협은 왜 해체한 거지요.”
기자의 질문이 훅 들어왔다. 
“그건 내가 얘기 못 하는데….”

- YS 지시가 있었던 건지요. 

“김영삼 대통령 말씀을 따랐어요. 내 그것만 말씀드립니다.” 

(서청원은 말을 아꼈다. 정발협은 1997년 6월 3일 여의도 미주빌딩에서 출범했다가 1개월도 안 돼 문을 내린 정치발전협의회를 말했다. 문민정부는 말기에 터진 노동법 문제로 몸살을, 신한국당은 이회창 총재를 비롯해 이수성·이인제·김덕룡·박찬종·김윤환·최형우·이홍구·이한동 등 9룡의 대선 경쟁으로 아웅다웅했다. 이 시기 서청원은 당내 최대 인원이 참여한 정발협을 만들었다. 대선 경선을 주도해 ‘이회창 대세론’에 제동을 걸어 YS 레임덕을 막기 위한 행보로 읽혔다. 하지만, 얼마 못 가 와해됐다. 경선 중립을 강조한 YS 주문 때문이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 ‘배은망덕’이란 말도 1997년 대선판을 뒤흔들었는데요. 

“우리가 (이회창 총재에게) 그리 말했죠.”

- 알죠. 비주류 성토. 

“<조선일보> 1면에 났어요. 그 정도로 싸웠지.”

(15대 대선 경선에서 DJP(김대중+김종필) 연대에 위기를 느낀 이회창 신한국당 대선후보는 임기 말 YS에게 탈당을 촉구해 승부수를 띄우려 했다.)
 

“신한국당 비주류 핵심 21명이 귀빈식당에 모여 이회창 총재와 민정계를 격렬하게 성토했다. 신상우 의원은 ‘문민정부 탄생 후 가장 총애를 받고 영화를 누린 사람들이 김영삼 정부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고 포문을 열었다. 김명윤 의원은 ‘(이회창 총재에게) 감사원장을 시키고 9룡들이 날뛰는 시기에 당 대표를 주고 후보를 만들어준 것이 누구냐. 배은망덕이자 부도덕의 극치’라고 비난했다. 서청원 의원은 ‘나라를 이끌어가기엔 그릇이 안 되는 사람들을 경선과정에서 안 걸러 이렇게 됐다’며 ‘당을 나가야 할 사람은 이회창’이라고 목청을 높였다.” 
-<조선일보> 1997년 11월 8일자 기사 중- 

 

서청원 전 대표는 한나라당 당대표 당시 이회창 선거캠프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았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서청원 전 대표는 한나라당 당대표 당시 이회창 선거캠프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았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하지만 정치란 생물이다. 

“나중엔 도와드렸지.”

혼잣말하듯 말했다. 2002년 16대 선거를 앞두고 그해 6월 나는 전당대회에서 당대표로 선출된 뒤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았다. 

“정치란 굉장히 예민한 거요. 누가 진짜 지도자인지 아시오? 많은 국가적인 대소사 현안이 나오는데 어떻게 정리를 잘해주느냐, 이게 국가 지도자야. 당대표도 마찬가지예요. 어떻게 그림을 그려서 구도를 맞추느냐. 이걸 알아야 해요.”

대선을 진두지휘해야 할 내가 사사로이 과거 악연에 얽매여 이회창 후보와 비토 관계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자당(한나라당) 후보가 된 이상 어떻게든지 그를 대통령 만드는 게 내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 근데 이회창 후보는 왜 대권에 실패했을까요. 일각서는 정치적 상상력이 부족했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마타도어 결과 때문 아니겠소. 김대업이 이회창 후보 아들 군 면제 청탁이 있었다고 정치공작을 펼친 거 아니오. 얼마나 그럴듯해. KBS, MBC 등 언론에 5분 꼴로 보도되다시피 했어요. 국민정서상 이를 돌파하기 힘들었어요.”

그리고 또 하나. 

“김종필 어른을 못 모셔왔잖소.”

- 불발된 내막은 뭔가요. 

“첫째 돌아가신 김용환 선배가 JP와 사이가 안 좋았잖소. 기억날 거요.”

- 예. 알죠. 

“둘(JP와 김용환) 사이가 내각제 때문에 돌아섰잖아.”

이어진 다음 얘기는 비화였다. 

“내가 실은 2002년 10월 대선을 앞두고 우리 딸네 집에서 JP를 만났어요. 나도 같은 충청 사람이잖아.”

(서청원은 1943년 충남 천안의 광덕산에서 태어났다.)

“시집간 딸이 한남동에 살았는데 보안을 지키기 위해 사위가 JP 집에 가서 모시고 왔지.”

- 비밀 회동이네요.

“아무도 모르게 지하 차고에서 만났어요.”

- 무슨 얘기를 나눴나요.

“‘이회창 도와달라’, ‘도와주겠다’ 다 합의했었어요. ‘이회창이 시대 흐름이다’ 나하고 다 끝냈던 문제야.”

- 근데 왜 파기됐습니까. 

“의정부에서 ‘미선이·효선이 사건’이 터지잖소. 자칫 JP 충청권 50만 표 얻으려다 젊은이들 100만 표 날아간다면서 강창희 의원 등이 반대한 거요. 그걸 이회창 후보가 받은 거야.”

- 실책이네요. 

“이 후보가 잘못한 거야. 그 양반이 판단을 못 내린 거지.”

(대선에서 패한 한나라당은 수난을 겪었다. 노무현 정부가 출범했고, 야당에 대한 대선자금 수사에 들어갔다. 조직을 대표해 서청원은 옥고를 치렀다.)

 

5. 朴과 친박연대  


서청원 전 대표는 김동영, 최형우 등 민주계 선배들이 살아계셨다면 훌륭한 지도자가 됐을거라고 말했다.ⓒ시시오늘(사진 : 서청원 제공)
서청원 전 대표는 김동영, 최형우 등 민주계 선배들이 살아계셨다면 훌륭한 지도자가 됐을거라고 말했다.ⓒ시시오늘(사진 : 서청원 제공)

- 차라리 1997년이나 2002년 때 민주계에서 대선주자를 냈다면 결과가 달라지지 않았을까요. 

“...”

한나라당이 1997년과 2002년 대선에서 연거푸 진 것은 개혁보수 쪽이 뭉치지 못해 그런 게 아니냐는 말로 들렸다. 

“만약에 우리 선배들이 말이요.”

- 누구 말입니까.

“예를 들면 김동영·최형우 장관 등…. 우리가 존경한 선배들 아니겠소. 그런 분들이 지도자로 계셨다면 좋았겠지.”

이 말로 대신했다. 

(상도동계 맏형 격인 김동영 전 정무장관, 최형우 전 내무부 장관은 YS의 ‘좌동영·우형우’로 불렸다.)

- 원유철 전 의원도 사실상 상도동계잖아요. 박근혜 정부 때 ‘김무성·이인제·김태호’ 등 전부 상도동계가 지도부를 구성하고 있었습니다. 서로 싸우지 않고 화합했다면 멋있는 그림이 그려질 수 있었는데 말이죠. 

“...”

담배가 태우고 싶어졌다. 

- 암튼 아쉽습니다.

“같은 YS 계파라고 해서 영원히 함께 갈 수는 없어요.”

YS 이후 ‘이회창’이 등장했고, 다시 ‘이명박·박근혜’로 이어지면서 민주계도 가는 길이 달라졌다. 정치적 지도자에 따라 나뉜 거였다. 
 

1964년 6·3 한일회담 반대 학생시위로 인해 투옥되기 전 서청원 전 대표가 학생 신분일 당시 재판을 받고 있는 모습이 신문 자료를 통해 남겨졌다.ⓒ시사오늘(사진 : 서청원 제공)
1964년 6·3 한일회담 반대 학생시위로 인해 투옥되기 전 서청원 전 대표가 학생 신분일 당시 재판을 받고 있는 모습이 신문 자료를 통해 남겨졌다.ⓒ시사오늘(사진 : 서청원 제공)

- MB(이명박)와는 같은 6·3 학생시위 주역이잖아요?

“그래서 6·3 동지회에서 나한테 욕을 많이 했어요.”

- 박근혜 전 대통령을 도왔다고요?

“아, 그렇지. 박정희 정권에 저항하다 감옥까지 간 사람이 어떻게 MB가 아닌 박근혜 후보를 지지하냐면서요. 나는 ‘연좌제는 안 된다. 딸까지 독재 프레임을 씌워서 되겠느냐’고 말했고….”

한동안 6·3 동지들과 굉장히 멀어진 계기였다. 

(1964년 서청원은 한일회담에 반대하는 시위에 가담했다가 군사재판을 받고 4개월간 감옥살이를 했다. 서울대 김덕룡, 고려대 이명박 모두 6·3 학생시위로 투옥된 형무소 동지들이었다. 서청원은 학생 때 중앙대학교 총학생회장이었다.)

“어쩌다 박근혜를 지지하게 됐습니까?” 많이 듣게 되는 질문이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과의 인연은 1998년부터 시작됐다. 사무총장이던 나는 그해 4월 대구 달성 국회의원 보궐선거 공천을 두고 고민을 하고 있었다. 한나라당이 대선 패배로 낙담해 있던 것과 달리 국민의 정부를 출범시킨 DJ는 영남세를 확장하기 위해 동진 정책을 펴나가고 있었다. 보선을 앞둔 대구 달성이 첫 타깃이 된 거였다. DJ는 올인하듯 달성이 고향인 엄상탁 전 병무청장을 공천했다. 전략이 성공한다면 우리로서는 후유증이 엄청날 터였다. 

“잘못하면 엄상탁이한테 넘어갑니다.”

대구시당위원장을 맡고 있던 강재섭 의원이 찾아와 말했다. 엄상탁 후보가 선거운동하는 것을 지켜보다 위기감이 든 모양이었다. 

“어떻게 하면 좋겠소”
“박근혜 씨를 공천해야 합니다. 안 그러면 이길 방법이 없어요.”
“오케이. 당신이 역할을 할 거요?”
강재섭 의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서 의사를 물어보세요.”
얼마 지나 강 의원한테 연락이 왔다. 
“하겠다고 합니다.”
“오케이. 박근혜다.”

그 길로 얼굴도 보지 않고 공천부터 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정치 신인 박근혜’는 재보선에서 61.34%를 받고 당선됐다. 압도적인 승리였다. 

(서청원으로서도 고무적인 성과였다. 사무총장이던 그해 그는 4월 재보선부터 10월 재보선까지 모두 승리하는 성과를 냈다.)

- 처음부터 승산이 있다고 본 건가요. 

“나는 선거를 많이 치른 사람 아니오. 한 닷새 되니까 이길 거 같더라고.”

- 어째서요?

“그게 말이지.”

서청원 전 대표가 박근혜 대통령과의 인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서청원 전 대표가 박근혜 대통령과의 인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설명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박근혜 후보가 시장을 지나면 노점상들이 거꾸로 5000원, 1만 원짜리 돈을 쥐여주는 거요.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도 박 후보가 유세한다는 소식에 숟가락부터 내려놓고 뛰어오는 사람들이 있지를 않나…. 하하.”

당시를 떠올리니 웃음이 났다. 

- 인기 비결은 뭔가요. 박정희 대통령 때문인가요. 

“그렇겠죠.”

짤막하게 답했다.

- 그런 인연 때문에 지지하게 된 건지요. 

“박근혜 전 대통령이 우리 집에 두 번 찾아왔어요. 2006년에 한번, 그 뒤 또 한 번…. ‘도와달라’, ‘알겠다’ 내가 약속을 지킨 셈이지.”

(2007년 17대 대선을 앞두고서다.)

- 민주계가 대다수 MB를 도왔는데 말이죠. 

“안 그래도 YS가 집으로 불렀어요.”

‘朴 돕지 말고 MB를 도우라’라는 거였다. “각하 말씀 한 번도 거역한 일이 없습니다만, 박 후보하고 이미 약속한 일입니다. 이번은 따르기 어렵습니다. 용서하십시오.” 무릎을 꿇고 큰절을 올렸다. 상도동 집에 가면 YS는 늘 문 앞까지 배웅해줬다. “서 실장(YS는 비서실장 직함을 썼다), 참 고집이 세단 말이야.” 그러면서 조용히 날 보냈다. 

- 그런데 떨어졌잖습니까. 

“(경선에서) 떨어졌지. 허허.”

- 친박연대 후일담도 얘기해주시죠. 

“사실, MB가 당선되고서 중국 특사 갔다 온 박근혜를 초청해 청와대서 둘이 만났지 않습니까. 그때 박 전 대통령이 그랬대요. ‘저 도왔던 사람들 공천에서 배제 시키지 마세요.’”

- 아, MB한테요. 

“‘아, 암요. 제가 뭐하겠습니까’….”

(서청원은 MB 말을 따라 하듯 전했다.)

“하지만 결과는 어땠소? 와장창 깨졌잖소.”

(2008년 18대 총선을 앞두고 친박계는 대거 공천에서 탈락했다. 친박계는 공천 학살이라며 반발했다.)

- 그래서 당을 깨고 나간 겁니까. 

“많은 의원이 찾아와서 앞장서 달라고 했어요. ‘오케이’, 그러고선 안 되겠다며 친박연대를 내가 만든 거 아니오?”

2008년 3월 18일 홍사덕 전 국회부의장, 이규택 의원 등과 결의해 친박계로 구성된 정당을 만들었다. 당 이름은 친박연대였다. 며칠 뒤 공천자를 발표하고, 선거전에 돌입했다.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사진과 발언 등이 친박연대 선거 광고에 적극 활용하고 있는 유세차량 전경ⓒ시사오늘(사진 : 서청원 제공)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사진과 발언 등이 친박연대 선거 광고에 적극 활용하고 있는 유세차량 전경ⓒ시사오늘(사진 : 서청원 제공)

- 당시 홍보문구가 화제였는데요. 

“‘저도 속고, 국민도 속았습니다’ ‘반드시 살아 돌아오세요’ ….”

(스크랩해둔 신문 광고 면을 보여주며)

“박 대통령의 발언을 정당 홍보 문안으로 쓴 게 대 히트였잖소. 기억나죠?”

서청원의 아이디어였다. 

- 실제 많이들 살아 돌아왔잖습니까. 

“창당한 지 한 달도 안 돼 14석을 만든 거 아니오. 정치부장들하고 밥을 먹으면 ‘한두 석밖에 안 될 텐데…’ 하곤 했어요. 기자들이 MB 때문에 클로즈업 안 했지만, 역사에 남을만한 겁니다. 어느 누가 14석을 만들어내요. 못 만들어내지. ‘박근혜 죽이기다’ 부산, 대구부터 후보 없는 강원도까지 가서 기자회견을 했어요.”

(여기까지 말하다, 톤이 높아졌다.) 

“내가 무슨 돈을 먹어?”
-그렇죠. 

“다 당으로 들어온 돈 아니오. 지금 정치검찰 얘기하지만, 그때부터 다 똑같아. 날 구속시켰잖아.” 

(2008년 비례대표 총선 차입금 사건을 말하고 있었다)

“신생정당으로서 광고비용 등 최소의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비례대표 후보들로부터 (30억 원) 자금을 빌렸다가 선거비용보존금을 받아서 곧바로 되갚은 사건이다. 모든 입출금은 선관위에 신고된 공식 계좌를 통해 이뤄졌다. 서청원 개인이 받은 돈이 아니었다. 선관위 공식 자료에 따르면 한나라당은 2007년 대선과 2008년 총선 시기 차입금 외에도 특별 당비를 43억 원 받았고, 민주당도 비례대표로부터 10억 원을, 선진당도 비례대표 두 명으로부터 각각 11억 4500만 원, 4억 원을 차입했다. 그러나 이들 정당은 수사도 처벌도 받지 않았다. 유독 서청원 대표만 골라서 ‘정당 차입금’이 문제이니 대표가 책임지라는 논리로 기소하고 징역형을 살게 했다.”
-<정치인 서청원을 말한다- 우정은 변치 않을 때 아름답다>(윤승모 지음) 중-


- 억울했을 것 같아요. 

“그래도 말이오. 내 한마디도 욕 한 일이 없어. 정치하면서 내 업보다. 생각하고 말았지.”

 

6. 청산회 해산과 ‘꿈’


서청원 전 한나라당 대표는 6·3 한일회담 반대 시위부터 87년 6월 민주항쟁까지 민주화 운동에 앞장선 정치인이다.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서청원 전 한나라당 대표는 끈끈한 바닥 조직을 잘 관리하는 정치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화제를 돌렸다)

- ‘청산회’ 조직 당시 7만 명 정도를 모았단 말이죠. 바닥 조직의 끈끈한 힘은 어디서 나오는 건지요. 

“내 힘이 아니에요.”

- 그럼 누구 힘인지요.

“박 전 대통령이 박해받는 것에 대해 국민 저항이 컸고 앞장서서 싸운 사람이 서청원이기 때문에 각계각층에서 내게 지원을 해준 거라고 봐요. 불의에 대해 국민이 저항한 거요. 그건 분명합니다.”

(서청원의 이름을 딴 청산회는 등산 모임을 전국적으로 키우며 세를 확대했다.)

- 해체는 왜 했나요. 

“박근혜 대통령 되고, 내가 해산시켰어요.”

- 민주산악회처럼요? 

“그런 셈이죠.”

(1993년 문민정부가 출범하자마자 YS는 논공행상을 막기 위해 함께 민주화를 위해 싸웠던 정치사조직 민산을 해산시킨 바 있다)

- 다시 조직을 만든다면 큰 힘이 될 텐데 말입니다. 

“난 조용히 지내고 싶어요. 연구소 하나 있는 것, 남아있는 동지들과 가끔 강연도 하고, 책이나 보면서 말이오.”

- 국회 진입 꿈은 접었나요. (8선의 기록을 보유한 그는 지난 21대 총선에서 9선을 눈앞에 두고 도전했지만 고배를 마신 바 있다.) 

“접었소. 다만, 이 정권은 내가 좀 바꿔야겠다 싶어요. 외교고 국방이고 도저히 이해하기가 어려워. 도시락 싸 들고, 누가 되든 내가 돕겠다는 생각밖에 없어요.”

- 근데 이렇게 하면 명예회복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내 분명히 말씀드릴게. 마지막으로 말이오.”

(탄핵 정국 당시 친박 9인회 논란에 대한 종지부를 찍으려는 듯했다.)

“나는 최순실을 본 적이 없고, 그 사람이 청와대 출입한 것도 몰라요. 정치권에 출입한 것도 모르오. 만일 관계가 있었으면 우린 벌써 감옥 갔어요. 박근혜 전 대통령도 외로우니까, 이 양반도 외로우니까…. K스포츠재단을 왜 그 사람한테 줬느냐. 그건 잘못했다고 봐요. 근데 박 전 대통령께 단돈 십 원 한 장 얻어 쓴 사람 있으면 나오라고 그래요. 아무도 없어. 깨끗해.”

잠시 침묵이 흘렀다. 

- 대통령 임기 말은 왜 다들 불행할까요.

“과연 이 권력 구조가 좋은가…. 5년 대통령 단임제에 대해서 학계나 언론에서 활발하게 다룰 때가 왔어요. 1987년에 만들어졌으니 30~40여 년이 흘렀잖소. 대통령 임기 4년째가 지나면 권력 분화 현상이 생겨요. 싸움박질하다 끝나는 거야. 친문(문재인)도 여기서 깨지는 거예요. 이낙연, 정세균, 이재명 등으로 갈라지게 돼 있소.”

- 어떤 형태로 가야 한다고 보는지요. 

“이원 집정부냐, 내각제냐 분분하잖소. 하도 욕하니까 나는 꺼내기 어려워.”

벽시계를 올려다 봤다. 두 시간 남짓 지났나. 다른 일정도 있던 터였다. 

“내가 약속이 있어서 말이야.”


- 궁금한 게 있는데요, 19대 총선 때 김현철(YS 차남) 교수를 낙천시키지 않고 경쟁하게 해줄 수 있었을 텐데 말이죠. 박근혜 당시 비상대책위원장이 안 시켜준 이유는 뭔가요. 워낙 김기춘 측 파워가 세서 그랬나요.

“난 잘 몰라서 답을 못하겠는데….”

고개를 갸웃했다. 

“그때는 비대위에서 관여를 안 한 것으로 알아요.”

- 요즘 ‘김영삼도서관 가압류’ 건이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안 그래도 (김 교수한테) 전화하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잘 해결돼야 할 텐데 말이오. 세상에 조상 무덤을 가압류하는 게 어딨어. YS가 전 재산 기부하고 돈 없이 돌아가셨잖소. 김 교수가 문재인 정부를 도왔다가 비판하자 이런 일이 생겼으니…. 오비이락(烏飛梨落)으로 이 정부가 오해받게 생겼어.”

- 김부겸 총리가 정치적으로 풀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김부겸이는 넉넉한 친구지. 폭이 넓은 사람이에요. 내가 잘 알지.”

(서청원은 벽시계를 다시 쳐다보며 말을 이어갔다.)

“얼마 전에는 지인 결혼식장에서 동교동계 한화갑 선배를 만났어요. 나보다 네다섯 선배셔. 김포로 이사하셨더라고. 마포에 쭉 사셨거든.”

- 아, 그렇다 하더라고요. 

“식사하는데 그 얘길 하시더라고. ‘DJ가 박근혜를 지도자로 키우려고 했다’ 본인도 그래서 지지 선언을 했던 거라고 말이요. 박 대통령 당선되고 한화갑 선배를 만나러 갔어요. 그때 그분이 ‘난 아무것도 안 하네’라고 해요.”

(한화갑 전 새천년민주당 대표는 리틀 DJ로 불렸다. ‘민추협 되짚기’ 인터뷰에서 한 전 대표는 DJ가 영호남 국민통합을 위해 자신을 핍박한 박정희 대통령을 용서하고 그의 딸인 ‘박근혜’도 지도자로 키울 생각이 있었다고 전한 바 있다.)

DJ 경호대장도 생각났다. 이윤수 전 의원이다.

“DJ가 식사하러 가면 대통령 신발이 차가워질 것을 걱정해 가슴에 품고 있었다더라고.”

상도동계인 내가 동교동계 얘기를 하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꺼낸 것인지, 두서가 없지만 아마도 이 말을 하려 했던 것 같다. 

“우리도 학생 때면 학생 때 젊을 때면 젊을 때 다 역할을 했어요. 시대마다 다 역할을 했지.”

살아 보니 시대를 동고동락한 애(愛)만 남았다. 많이들 ‘의리의 서청원’으로 기억하겠지만, 아직 풀지 못한 앙금을 사이에 둔 얼굴들도 여럿 된다. 말하지 않아도 누군지 알 테지만 말이다. “회고록을 안 써요. 내가.” 유구무언(有口無言)이다. ‘사진으로 본 서청원’이나 준비해야지.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잘들 가시오.” 

※<시사오늘>의 ‘시대산책’은 인터뷰이의 구술을 화자의 시점으로 재구성해 정리하는 형식의 코너입니다. 기술상의 이해를 돕고자 화자의 심리적 기법을 가미하거나 배경 상의 설명을 부연한 점 말씀드립니다. 아래 괄호부분은 본지 설명입니다.

담당업무 : 정치, 사회 전 분야를 다룹니다.
좌우명 : YS정신을 계승하자.
담당업무 : 정치부 기자입니다.
좌우명 : 꿈은 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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