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2억 원’의 무게
[기자수첩] ‘2억 원’의 무게
  • 박근홍 기자
  • 승인 2021.07.28 15:26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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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박근홍 기자)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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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40대 전세살이들은 이 나라 국민도 아닌 애만 낳고 사교육비로 집 한 채 없이 쫓겨다닙니다'라는 제목의 글이 올라왔다. 자신을 40대 중반 여성이라 밝힌 청원인은 "남편이 현 정권을 믿고 무주택으로 살면서, 애가 둘이고 무주택점수도 있으니 청약을 하자며 수년째 전세를 살고 있다. 그런데 이번에 집주인이 보증금을 '2억 원' 올려주든지 아니면 나가라고 하더라. 소시민이, 그것도 맞벌이하는 부부가 법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겠느냐. 벌금을 올리든, 손해배상 청구 절차를 간소하게 해서 정부해서 진행하든, 현실적인 제도를 만들길 바란다"고 말했다.

#2. 지난 4월 배우 윤여정씨는 영화〈미나리〉를 통해 제73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한국인 최초의 오스카상 연기상 수상이다. 윤여정씨는 제작비용 약 50만 원이 들어간 오스카 트로피, 그리고 한 마케팅 전문업체로부터 선물 가방인 '스웨그백'(Oscar Swagbag)을 받게 됐다. 그의 실제 수령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관련 업계에 따르면 스웨그백에는 럭셔리 크루즈 여행권, 순금 펜, 다이아몬드 목걸이, 비타민 테라피, 무료 PT권 등 한화 '2억 원' 상당의 물품과 서비스가 들어간 것으로 전해진다.

#3. 지난 6월 통계청이 발표한 '2019년 일자리행정통계 개인사업자(기업 부채)'에 따르면 2019년 기준 우리나라 자영업자들의 1인당 평균 부채(금융기관 대출)는 약 '2억 원'(1억7165만 원)인 것으로 집계됐다. 연령별로 살펴보면 50대 평균대출이 1억9821만 원으로 가장 많았으며, 이어 60대(1억8485만 원), 40대(1억8123만 원) 등 순이었다. 또한 사업 기간이 10년 이상인 자영업자 부채는 2억115만 원, 3년 미만은 1억3518만 원이었다. 아울러 종업원이 있는 자영업자의 대출은 3억4572만 원으로 종업원이 없는 자영업자(9357만 원)의 4배 가량이었다.

#4. 지난 27일 서울중앙지법 형사5단독 김준혁 판사는 그룹 계열사를 동원해 자신과 아들 소유 회사를 부당하게 지원한 혐의로 기소된 이해욱 DL그룹(옛 대림산업) 회장에게 벌금형을 선고했다. 검찰은 이 회장과 DL그룹이 자회사인 오라관광(현 글래드호텔앤리조트)이 사용할 호텔 브랜드 상표권(글래드, GLAD)을 이 회장과 아들이 지분 100%를 보유한 APD에 넘겨 수수료 등 부당이익을 챙겼다고 보고 이 회장에게 징역 1년 6개월을 구형한 바 있다. 그러나 재판부는 "공정거래법 입법 취지를 고려하면 피고인에게 엄한 처벌이 필요하다"며 모든 혐의에 대해 유죄 판단을 내리면서도 이 회장에게 징역이 아닌 벌금 '2억 원'을 선고했다.

재판 과정에서 검찰은 "이 회장이 공정거래법을 정면 위반해 상응하는 책임을 져야 한다. 이 회장은 아들 경영권 승계를 염두에 두고 APD를 전방위 지원했다. 신사업 진출이라는 거창한 목적보다 아들이 승계자로 크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상응하는 처벌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 회장 측은 "APD가 브랜드 사업을 영위한 건 특수관계인의 사익편취를 위한 게 아니다. (이 회장이) 이를 지시하거나 관여한 사실도 없다"며 모든 혐의를 부인했다. 검찰에서 "법정에서 범행을 부인하는 등 반성의 기미를 보이지 않는 태도는 불리한 양형으로 반드시 고려돼야 한다"고 할 정도였다.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린 40대 여성에게 집주인이 올려달라는 보증금 '2억 원'은 너무나 무겁다. 그는 좌절감에 극단적인 선택을 고민할 정도라고 청원글에 적기도 했다. 55년 연기인생 끝에 세계를 들어 올린 윤여정씨는 '2억 원'짜리 스웨그백에 대한 관심이 그리 크지 않았을 것 같다. "우리 사회에 사실 경쟁이란 있을 수 없다. 나는 단지 운이 좀 더 좋아서 이 자리에 서있는 것"이라는 수상 소감에서 드러난 그의 겸손한 인생철학을 보면 더욱 확신이 든다. 코로나19 사태 장기화로 힘겨운 자영업자들에게 '2억 원'이라는 빚은 그야말로 고통이다. 고통의 무게는 점점 무거워지고 있다. 정의당 장혜영 의원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2020년 자영업자 대출 증가액이 2019년의 2배라고 한다. 

이 회장에게 벌금 '2억 원'은 마치 깃털과 같을 것이다. 부당이득을 취한 일이 없고, 모든 게 사업상 결정이었다면 이 회장과 DL그룹은 즉각 항소에 나서야 하는 게 이치에 맞다. 그러나 이 회장은 판결 결과에 대한 입장이나 항소 여부를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묵묵부답으로 일관한 채 곧장 서울중앙지법을 떠났다. 검찰 측 항소 여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아마도 이 회장 측에서는 항소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결과적으로 '고작 2억 원'에 오너 리스크를 해소하게 됐기 때문이다. 최근 그룹 지주사 재편작업도 마무리했으니 얼마나 홀가분한 마음일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아, 2억 원의 무게는 5만 원짜리 지폐로 치면 3.88kg이다.

담당업무 : 건설·부동산 및 유통을 담당합니다.
좌우명 : 隨緣無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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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2021-08-07 10:42:59
글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