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代散策] 정문헌 “종로, 대선주자의 ‘등판’ 정거장 이젠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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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代散策] 정문헌 “종로, 대선주자의 ‘등판’ 정거장 이젠 안 돼”
  • 구술 정문헌|진행·정리 정세운·윤명철·윤진석 기자
  • 승인 2021.12.19 12:33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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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헌 前국회의원 
“초대 사회부 장관, 전진한 제헌 국회의원이 나의 외조부”
“평생을 노동 발전에 헌신 이익균점권 초대 헌법에 보장”
“아버지 정재철, 與 의원 시절 野 인사들과 소통에 앞장”
“노동계 헌신 외조부는 진보 노선, 아버지는 보수서 헌신”
“보수는 현실에 안주 않고 진보는 문제의 원인 직시해야”
“종로밥 먹고 자랐다, 다시 활력 얻는 종로 위해 나설 것”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구술 정문헌|진행·정리 정세운·윤명철·윤진석 기자]

국민의힘 정문헌 전 국회의원을 만나 정치인 가문에 대한 시대산책을 청했다. 그의 외조부는 노동계 대부 우촌 전진한, 아버지는 정재철 전 국회의원이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국민의힘 정문헌 전 국회의원을 만나 정치인 가문에 대한 시대산책을 청했다. 그의 외조부는 노동계 대부 우촌 전진한, 아버지는 정재철 전 국회의원이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외할아버지가 우리나라 초대 사회부 장관이었던 전진한 제헌 국회의원이잖습니까.” 

“그렇죠”

지난달 22일 종로구 사무실로 기자들이 찾아왔다. 정치 가문을 주제로 시대산책을 청해왔다. 

“외할아버지는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작고하셨죠.”

(국민의힘 정문헌 전 국회의원의 외조부인 우촌 전진한 선생은 우리나라 민주노동 발전과 노동자 보호를 위해 헌신한 인물이다. 뇌신경 경화증 등을 앓다 1972년 4월 20일 별세했다.)
 

“가난한 겨레와 노동자를 위해 몸 바쳐 일한 우촌 선생은 이 땅에 노동의 참뜻을 심었다. 일제 치하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노동자들을 위해 불굴의 투쟁을 해온 고인은 복지국가를 이룩하는데 헌신했다. 고인의 유덕을 기린다.”
- 1972년 4월 20일 <동아일보> 중-


(우촌의 또 다른 업적은 한국 노동계를 처음으로 국제사회에 알린 점이었다. 1949년 국제자유노동조합연맹 창립대회 및 아세아지구 파키스탄 카라치와 제2차 이탈리아 밀라노 대회에 참석한 것을 계기로 각각 부의장과 상임이사를 역임했다.) 

 

1. 노동계 대부 우촌 


 

1972.4.24. 초대사회부장관과 전 국회의원인 고 우촌 전진한 선생의 장례식이 엄수되고 있다.ⓒ연합뉴스
1972.4.24. 초대사회부장관과 전 국회의원인 고 우촌 전진한 선생의 장례식이 엄수되고 있다.ⓒ연합뉴스

 

“노동자로 세상에 왔다가 다시 노동자로 돌아간다”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 활활투탈(闊闊透脫)”

외조부가 마지막에 남긴 말이다. 삼천대천세계가 태양계를 넘어선 부처의 광활한 세계라면 투탈은 해탈을 뜻한다. 일찍이 노동운동, 협동조합운동, 조국의 해방을 위해 일했던 분이었다. 다시 노동자로 되돌아가는 것을 해탈로 생각지 않았을까 싶다. 

- 한국노총이 있기까지 노동계의 대부, 거목으로 불렸잖습니까. 

“노동자의 대변인, 노동자의 아버지로 불렸지요.”

- 그 이유가 뭐라고 보나요. 

“단순히 한국노총 전신인 대한노동총연맹 위원장을 역임했기 때문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 그러면요? 

“협동조합운동과 이익균점권 때문이라고 봅니다.”

(정문헌은 이 말을 하면서 생기를 띠었다. 그의 눈빛에서 외조부에 대한 자긍심이 묻어났다. 활기찬 목소리로)

“그러니까…. 외조부가 펼친 협동조합운동은 ‘자유협동주의’ 사상을 기반으로 하는데요.”

나는 설명에 들어갔다. 

“대중의 창의와 자유를 실질적으로 실현하기 위한 사회 건설에 헌신한 것이죠.” 

개인적 자유가 보장됨과 동시에 상호 연대의 협동체 속에서 삶을 향유할 수 있는 ‘자유협동주의’가 그분의 이상이었다. 자유협동주의의 근간에는 노동이 자본과 동등한 입장에서 경영에 참여하고 그러한 결과인 이윤을 일정 공정하게 배분하는 ‘노자협조주의’가 있었다. 다시 말해, 노자협조주의는 노동이 상품으로만 간주되고 자본에 종속되는 상황을 거부하면서, 노동과 자본이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는 생각에 기초한 것이었다. 노자가 동등한 입장에서 서로서로 협력하는 것이 곧 자유협동주의의 길이 아닌가 생각한다.

- 이익균점권은요? 

“훗날 전태일 열사에게도 영향을 미쳤죠.”

이익균점권은 1948년 외조부가 강력히 제기해 헌법에 명시됐다. 노동자가 기업 활동 성과를 사용자와 나눠 가질 권리를 가진다는 내용이다. 4차 개정헌법까지 유지됐다. 노동법 제정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한국전쟁 중 만든 노동쟁의조정법 등 하위 노동법 체계 또한 외조부께서 핵심적 역할을 했다. 

- 우파 정치인이 다소 급진적일 수 있는 법을 만든 것을 두고 의외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많을 듯합니다. 

“외조부께서는 공산주의 독재체제를 반대한 것에 못지않게 자본가에 의한 일방적 사회 지배를 극히 우려했거든요.”

어쩌면 자유협동주의 사상과 실천적 헌신이 없었다면, 외조부는 지금과 같은 역사적 평가를 받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2. 외조부에 대한 기억


1963년 1월 정치활동이 허용되자 윤보선(오른쪽2번째), 김병노(왼쪽2번째),이인, 전진한(오른쪽)씨가 야당 세력의 형성을 위한 사자 회담을 열었다. ⓒ연합뉴스
1963년 1월 정치활동이 허용되자 윤보선(오른쪽2번째), 김병노(왼쪽1번째),이인, 전진한(오른쪽)씨가 야당 세력의 형성을 위한 사자 회담을 열었다. ⓒ연합뉴스

“어릴 적 기억이 있나요?”

외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지 않냐는 의중이 실린 듯했다.

“늦둥이 외손자인 나를 무척 귀하게 아꼈다고 들었어요.”

내가 돌 무렵 됐을 때다. 외조부께서는 한국독립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다. 선거운동 중에도 외손자 얼굴을 보러 자주 다녀갔다고 한다. 

(정문헌은 1966년에 태어났다. 외조부인 우촌은 이듬해 3월 한국독립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다. 공화당의 박정희, 신민당의 윤보선, 대중당의 서민호, 민주당의 김준연과 경쟁했다.)

“어떤 분으로 알고 있나요?” 

자연스레 얘기는 외조부의 생애로 넘어갔다.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배움에 대한 의지가 남달랐다고 해요. 공부하겠다는 생각만 갖고 무일푼으로 서울로 상경해 하숙집 사동, 급사를 전전하면서도 틈나는 대로 책을 펼 정도로 말이죠.”

(우촌은 1901년 경북 문경에서 태어났다. 서울로 상경할 당시 소년이던 그가 어떤 생각을 품었는지는 직접 자신에 대해 기고한 옛날신문의 한 단면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1969년 매일경제 칼럼 캡처©navernewslibrary
1969년 매일경제 칼럼 캡처©navernewslibrary

 

“나는 서기 1915년 15세에 보통학교에 입학했다가 17세 되던 해 봄 4학년에 진학 되자 엉뚱한 생각을 품고 서울로 고학의 길을 떠나왔다. 공상가적 성격을 가진 나는 어릴 때부터 꿈이 많았다. 내가 이 땅에 떨어지면서부터 오늘까지 동상동몽하던 이가 한 분 계셨으니 그이가 바로 우리 친형인 고목촌 전준한 씨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얼토당토않게 큰 뜻을 품었기 때문에 웅변 연습 기타 영웅이 될 수련을 부단히 해오다가 웅도를 품고 향토를 등지고 고학의 길에 오르게 된 것이다. 이때의 생각은 고학을 통해 내 개인의 영달을 꾀하겠다는 작은 욕심이 아니요 내가 큰 인물이 되어서 이 민족을 구출하겠다는 것이었다.”
- 1969년 3월 11일 <매일경제> 중-


서울에서의 고학 후 외할아버지는 기미육영회(己未育英會)의 동경 유학생으로 선발돼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1917년 그의 나이 17세 때다.)

일본에서 외할아버지는 항일투쟁을 위해 비밀결사인 ‘한빛’을 조직했다. 일본 제국주의 착취에 대항하기 위해 ‘협동조합운동사(協同組合運動社)’를 결성해 활동했다. 

이때부터 평생을 청년운동과 노동운동에 투신했다. 광복 후 대한독립촉성 전국청년총연맹 위원장, 대한노동총연맹 위원장을 거쳐 제헌국회의원이 됐다. 남한 단독정부 수립 후에는 초대 보건사회부 장관에 임명됐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에 반대해 곧 자리를 박차고 나와 다시 노동운동에 복귀해 노농당(勞農黨)을 창당했다. 4·19 이후 한국사회당을 조직하면서는 ‘자유협동주의’ 사상의 실현을 위해 애썼다. 

(1963년 이후 우촌은 민정당, 민주당 등 야당의 중진으로 활약했다. 1,2,3,5,6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5선 역임.)

 

3. 평등의 가치 


정문헌 전 의원은 서민들을 위한 정치를 해 온 외조부의 평등의 가치를 본받고 싶다고 말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정문헌 전 의원은 서민들을 위한 정치를 해 온 외조부의 평등의 가치를 본받고 싶다고 말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외할아버지에 대한 공부를 많이 했나 봅니다.”

잠자코 듣던 기자가 덕담을 건네듯 말했다. 나는 멋쩍게 웃었다. 

“외할아버지 흔적들이 국회 기록이나 책에 많이 남아 있으니까요.”

한 인간으로서, 정치인으로서 외할아버지를 존경한다. 

- 어떤 점을 가장 존경하나요.

“가난하고 힘없는 서민들이 잠자리와 끼니 걱정을 하지 않고 자신의 노동에 대해 정당한 대접을 받는 세상을 바란 점이요. 부끄럽지 않게, 담대하게 그 뜻을 잇고 싶습니다.”

평소 외할아버지는 너와 내가 다르지 않고(不二),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불성(佛性)이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한 마디로 평등의 가치라 할 수 있다. 오늘날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참선이 주업이고 정치는 부업이란 말을 자주 했다고 해요.”

불교와 연이 깊은 분이었다. 

“일제 치하에서 협동조합운동을 하다가 신의주 감옥에 수감돼 불온 분자로 지목됐을 때였대요. 일본의 감시를 피해 금강산에서 오대산까지 내려갔는데 그때 불교와 많은 인연이 닿게 돼 불법에 귀의했지요.”

 

4. 정치인 가문 


“정치인 가문이잖습니까.” 

화제를 전환하듯 기자가 물어왔다. 

“아. 네.”

- 부담은 없었습니까. 

“하하.”

(우촌이 그의 외조부라면, 아버지는 재무부 관료 출신의 정치인 故정재철 전 국회의원이다. 1928년 강원도 고성에서 태어난 정재철 전 의원은 산업은행 부총재, 신용보증기금 초대 이사장, 한일은행장, 정무장관을 역임한 후 정계로 진출했다. 

강원 고성에서 당선된 후 4선에 이르는 동안 정치 활동에 전념했다. 11대 국회 초선일 때부터 국회 예결위원장과 당 재정위원장을 겸할 만큼 재경통으로 활약했다. 1992년 민자당에서는 서열 3위 상무위원회 의장을, 신한국당 때는 서열 3위 전당대회 의장을 맡았다.)
 

1985년 6월 21일 민정당 이종찬(앞줄 오른쪽), 신민당 김동영, 국민당 김용채(앞줄 왼쪽) 3당 총무가 회동을 둘러싼 내홍으로 김동영 총무가 박차고 일어서자, 정재철 의원(오른쪽)이 만류하고 있다.ⓒ연합뉴스
1985년 6월 21일 민정당 이종찬(앞줄 오른쪽), 신민당 김동영, 국민당 김용채(앞줄 왼쪽) 3당 총무가 회동을 둘러싼 내홍으로 김동영 총무가 박차고 일어서자, 정재철 의원(오른쪽)이 만류하고 있다.ⓒ연합뉴스

- 외조부가 평생 야당 생활을 했다면, 아버지께서는 평생 여당만 한 분이잖습니까. 재밌네요. 

“외조부께서 야당 성향이 강했던 것에 비해 아버지는 보수 여당 성향이 있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다고 봅니다. 그러나 두 분 모두 정치적으로 상대방을 적대시하거나 배제하지 않았습니다. 함께 살아가고 성장 발전해 나가야 한다는 점에서는  같았습니다.”

- 아버지 하면 떠오르는 게 정치권 내 대표적인 마당발이라는 건데요. 소통 채널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요즘 정치권에 필요한 덕목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렇죠. 아버지는 여당 의원 시절 항상 야당 인사들과 소통하며 나라와 국민을 위한 길이 무엇인지 고민한 분이었죠. 대표적인 여야간의 소통, 여야 협치의 에피소드가 있다면 1982년 11월에 있었던 1983년도 예산안 여야 만장일치 통과일 것입니다. 아버지는 당시 국회 예결위원장을 맡아서 김준성 부총리, 여당의 이종찬 원내총무, 그리고 야당(민한당)의 김현규 정책의장과 홍사덕 의원 사이에서 가교 역할을 하시면서 끊임없이 중재안을 제시했습니다. 결국 여야가 서로 양보하면서, 서로 윈윈하는 결과를 이끌어낸 셈이었죠.

당시에도 여야간에 ‘예산을 늘려 정부사업을 살려야 한다, 세금 인상은 있을 수 없다’는 첨예한 대립이 있었는데, 특히 성역 예산이라 불리던 ‘국방예산’ 삭감 문제가 핵심 쟁점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발로 뛰면서 여야간 물밑 협상을 계속 진행했고, 여야의 협상점을 찾아냈죠. 당시 분위기로선 유례가 없었던, 국방비를 일정 삭감하는 합의를 이끌어 내면서 만장일치 예산안 통과를 만들어낸 것이죠. 이것은 여야 소통과 협치의 중요한 본보기라 생각합니다.”

 

4. 마당발 정재철 


(대인관계가 원만했던 정재철. 관련해 일화가 있다. 1980년 민정당에서는 민주화추진협의회 결성을 추진하던 김영삼 최측근인 최형우나 김덕룡 등 반정부 야당 인사들과 소통 채널이 필요했다. 그때 소통 창구로 나섰던 이가 정재철 여당 의원이었다.) 
 

“정무장관이 정재철 의원이었는데 매일 만나다시피 했습니다. ‘그렇게 고생할 필요가 있느냐’며 보사부 장관이나 건설부 장관 제의를 했어요. 그 후 노신영 안기부장이 불러 입각이 싫으면 민정당 공천을 받아 출마하라고 설득했지요. 그러나 결국 거절했어요.”
- 최형우, 2013년 6월 <시사오늘> 인터뷰 중-


(정재철과 최형우는 정치적 노선과 당은 달랐지만, 동국대 동창으로 각별한 사이였다. 동국대 인맥의 대부로 불렸던 그는 학교 후배인 최형우를 비롯해 황명수, 김동영 등 민주계 동창들을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이런 점들이 민정계 출신 인사임에도 1992년 YS 지지를 선언한 배경이 된 것으로 보인다.)
 

1992년 4월 1일 조선일보 기사 캡처©navernewslibrary
1992년 4월 1일 조선일보 기사 캡처©navernewslibrary

 

“민자당 내 반김영삼 대표 진영이 김 대표에 맞서 단일후보 추대를 적극 모색하고 있는 가운데 민정계 친金 진영 중 중진 9명이 31일 모임을 갖고 김 대표 지지를 선언했다. 정재철, 김윤환, 금진호, 남재희, 김용태, 정순덕, 김종호, 김진재, 이웅희 의원 등 9인은 31일 저녁 서울 S호텔에서 모임을 갖고 절대다수의 침묵하는 의원과 상관없이 특정 몇 사람이 민정계를 대표하는 것같이 움직이는 상황을 우려한다면서 향후 국가 장래를 위하는 방향에서 대통령 후보가 순리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 옳으며 국민 정서상 순리는 김 대표를 의미한다고 밝혔다.”
- 1992년 4월 1일 <조선일보> 중-


(순리에 따라 민자당과 민주계 간 당 내홍을 수습하려는 행보를 보였다는 평가다.)

“물려받은 정치적 DNA는요?” 

아버지처럼 협치와 가교 역할을 잘하고 있는지를 묻는 듯했다. 

“하하. 글쎄요.”

30대에 정치를 시작한 뒤 지금까지 외조부와 아버지의 모습을 따르려고 부단히 노력했던 것 같다. 돌이켜보면 여전히 부족한 부분이 많았다. 하지만 부담이라고 느껴 본 적은 없다. 오히려 ‘정치는 어떠해야 하는가’, ‘왜 정치를 하는가’에 대해 매일 스스로를 돌아보는 정치적 준거가 됐다.

 

5. 아들 정문헌 


1995.11.24. 왼쪽부터 정국 현안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회의에 참석 중인 민자당의 서정화, 정재철, 김윤환 대표, 김종호, 강삼재 의원.ⓒ연합뉴스
1995.11.24. 왼쪽부터 정국 현안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회의에 참석 중인 민자당의 서정화, 정재철, 김윤환 대표, 김종호, 강삼재 의원.ⓒ연합뉴스

- 소통이 진짜 정치라는 생각입니다. 과거 노태우-김대중 간 중평 유보 합의를 이끈 김윤환 같은 경우 당시는 비판받았지만, 지금은 재평가되는 것처럼 말이지요. 위원장께서도 한나라당 시절 중립 성향 소장파로서 친박(박근혜)-친이(이명박)계 갈등 수습에 나서지 않았나요. 

“...”

- 근데 18대 총선에서는 왜 공천을 못 받은 건가요. 

“MB(이명박)가 안 줬어요.”

하하하. 나는 더 크게 웃었다.

(착잡함이 묻어났다. 정문헌은 17대 대선을 앞두고 손학규를 도왔지만, 경선 결과 MB(이명박)로 결정 나면서는 후보의 당선을 위해 열심히 뛰었다. 다른 경쟁자들의 대리인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결과는,

“박형준 당시 MB 대리인만 공천 받고 다 못 받았어요.”

우연인지 아닌지야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정부 출범 초 치러진 총선에서였다. 친이계 외에는 낙천자들이 많았다. 선거 막판 MB를 지지한다고 밝혀 호남 등 외연 확장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DR(김덕룡)도 공천을 받지 못했다. YS가 MB를 향해 ‘혼자 다 해 먹으려고 하면 되겠냐’했다고 한다.) 

- 왜 그랬을까요. 

“MB는 기업가 스타일이에요.”

그렇게만 말했다. 

- 이후 통일비서관으로 갔잖아요?

“(MB가) 미안했던지 오라고 하더라고요. 내 전공이 그쪽이기도 하고요.”

(그는 미국 위스콘신과 시카고를 거쳐 고려대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 과정을 마쳤다.)

 

6. 개혁보수의 길 


아버지 정재철 전 국회의원이 총선에서 당선된 아들 정문헌의 팔을 번쩍 들어올리며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연합뉴스
아버지 정재철 전 국회의원이 총선에서 당선된 아들 정문헌의 팔을 번쩍 들어올리며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연합뉴스

- 2004년 17대 총선서 당선돼 정계 입문했는데요.

“요즘이야 30대 초반 의원들도 많지만, 당시 보수정당에선 흔한 일이 아니었죠.”

- 당시 얘기 좀 해주죠.

“열린우리당, 노무현 정부 시절이었어요. 보수가 여론에서도 밀리고, 시대에도 뒤처지는 분위기였지요. 뭔가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했던 시절이었죠.”

‘젊은 보수’, ‘보수 개혁’의 미래를 꿈꾸며 설계를 해보려던 움직임도 활발했다. 남경필, 원희룡, 정병국, 박형준 의원 등을 비롯한 ‘수요모임’이 꾸려지기도 했다. 

- 초선 때부터 개혁보수의 길을 걷고 있는데요.

“그랬지요.”

- 소회를 말한다면요. 

“생각해 보면 보수 내에서 ‘젊은 보수’나 ‘보수 개혁’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이나 분위기가 부족했던 것 같아요.”

우리 같은 이들이 여론을 주도하고 공론화시키지 못했다는 것도 아쉬운 점이다. 그러나 보수 개혁의 씨앗을 심어놓았다는 점에서는 큰 의미를 지녔다고 생각한다. 

- 보수 개혁이란 뭘 말합니까. 

“무조건 갈아엎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내는 것 아닐까요. ‘지키는 것’만이 보수의 전부가 아니잖아요?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보수, 생산과 발전을 이끌어내는 보수가 필요하죠.”

- 그러고 보니 노동계에 헌신했던 점에서 외조부는 진보 노선, 아버지는 보수 노선이네요. 

“그러게요.”

- 스스로 볼 때 보수, 진보를 평한다면요?

“보수는 이명박, 박근혜 정부를 거치며 독선과 자만에 빠졌기 때문에 국민에게 외면받았잖아요.” 

이후 국민 신뢰를 되찾기 위해 개혁보수를 지향하며 제3지대 정당도 만들었지만, 국민에게 지지 받지 못했다. 

- 본인도 탄핵 국면 뒤 바른정당, 바른미래당, 새보수당을 거쳐 사실상 복당한 경우잖아요?

“나는 그 길이 개혁보수, 새로운 보수라고 판단했습니다.”

기존 보수의 틀이나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길, 그래야 국민이 다시 믿어줄 것이고 권한을 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 왜 그랬을까요. 

“시대와 국민의 변화 요구에 제대로 응답하지 못했기 때문 아닐까요.”

반문하듯 답했다.

“정치 지향으로서 새로운 보수의 길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해요.”

‘껍데기는 가도, 알맹이만 남아’있으면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믿는다.

“다행인 것은, 문재인 정부 5년 동안 보수가 문제를 바로보기 시작했다는 거잖아요?”

다시 말을 이어나가며 긍정에 힘을 줬다. 

“변화와 혁신이 없이는 결코 살아남지 못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다고 생각해요.”

아이러니한 점은 그사이 진보의 행보다. 보수의 후퇴를 자양분으로 삼아 정권을 출범했지만 새로운 적폐가 돼버렸기 때문이다. 

진보는 조국 사태 등 스스로에게만 한없이 관대한 도덕적 준거, 부동산 급등 등 무능력, 기본소득 등 만연한 포퓰리즘 정책으로 국민들의 기대와 바람을 처참하게 저버렸다. 

“보수의 후퇴 그 이상의 후퇴죠.”

그것이 현재 대한민국 진보의 모습인 것 같다. 

- 해결책을 제시한다면요. 

“보수가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대한민국의 변화와 혁신을 이끌어야 하듯 진보는 문제의 원인을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서 찾고 그것을 직시해야 할 때라고 봅니다.”

지금의 기득권화된 진보에게는 어떤 국민도 투표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6. ‘아, 종로’


정문헌 전 국회의원은 현재 국민의힘 종로 지역구 당협위원장으로 활동 중에 있다. 그는 활력 있는 종로로 만들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정문헌 전 국회의원은 현재 국민의힘 종로 지역구 당협위원장으로 활동 중에 있다. 그는 활력 있는 종로로 만들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정문헌은 청와대 통일비서관과 17·19대 강원도 고성에서의 재선을 거쳐 지난 8월부터 국민의힘 종로구 당협위원장을 맡아 3선에 도전 중이다.)

- 종로를 택한 이유는요. 

“종로에서 태어나 초중고를 다녔어요. 종로밥을 먹고 자랐죠.”

또한, 종로는 외조부께서 5, 6대 국회의원으로서 헌신한 기반이기도 하다.

- 애틋하겠습니다.

“그렇죠.”

한편으로는 씁쓸하기도 하다. 

- 왜요. 

“어느새부턴가 외부인의 정치 무대, 특히 대선주자들의 ‘등판’ 정거장이 되면서 길을 잃고 쇠퇴를 거듭하는 모습을 볼 때 그렇습니다.”

지역보다 중앙정치가 우선시된다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지역구민의 몫이 될 수밖에 없다. 교육,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던 종로였지만 지금은 ‘정치 1번지’라는 겉만 번듯한 말만 남았다. 

- 종로가 좀 특이한 곳이긴 합니다.

“네?”

- 손학규·홍사덕·오세훈·황교안 등 내로라하는 거물급들이 와도 표밭갈이가 안 됐잖습니까. 골목 구석구석을 돌며 유권자와의 유대감을 높이는 것이 오히려 당선에 유리하다고 봅니다.

“아하.”

기자도 뭘 좀 아는 눈치다.

“선거 출마 목적이 지역구와 지역구민이 아니라, 대선 출마를 위해 잠시 거쳐 가는 용도로 이용된다는 데에 근본적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 본인은 어떤가요. 

“나는 다르죠.”

몇 년간 바닥을 다졌다. 활력 있는 종로를 다시 만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번 보궐선거를 통해 보여주고 싶다. 

“끝으로 정치 소신은요.”

기자도 마무리할 모양이었다. 

‘바른 것과 의로운 것에 초점을 맞추자.’

나는 좌우명을 떠올렸다. 

<논어>의 정자정야(政者正也), 안중근 의사의 견리사의 견위수명(見利思義 見危授命). 정치는 바른 것이어야 하고, 의로움을 먼저 생각하고, 나라의 위태로움 앞에 목숨을 바친다는 뜻이다. 

“정치는 나와 다르지 않은, 남을 위한 일입니다. 외조부의 정치철학처럼 너와 내가 다르지 않은(不二) 정치, 그것이 우리 모두를 위한 정치라고 생각합니다.”

외조부와 아버지의 모습을 평생의 가르침으로 삼고 나라와 국민을 위한 길을 당당히 걸어가겠다. 

※<시사오늘>의 ‘시대산책’은 인터뷰이의 구술을 화자의 시점으로 재구성해 정리하는 형식의 코너입니다. 기술상의 이해를 돕고자 화자의 심리적 기법을 가미하거나 배경 상의 설명을 부연한 점 말씀드립니다. 괄호부분은 본지 설명입니다.

담당업무 : 정치, 사회 전 분야를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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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명 : 꿈은 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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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2021-12-19 12:57:28
그래 차라리 대권주자보단 자리잡고 오래 지역 관리할 사람이 좋은듯. 화이팅

정치9단 2021-12-19 12:35:10
종로는 대권주의 무덤이 될 수 있어요. 끈끈한 지방 같은 곳이어서 어설픈 사람이 나서면 죽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