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신문 보기] 선거는 축제?…1987년과 2022년 대선 유세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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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신문 보기] 선거는 축제?…1987년과 2022년 대선 유세 현장
  • 조서영 기자
  • 승인 2022.01.12 17: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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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그날, 인물·신문의 평가는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조서영 기자]

이번 스물한 번째 ‘옛날신문 보기’는 역대 대선 ‘유세 현장’이다.ⓒ시사오늘 김유종
이번 스물한 번째 ‘옛날신문 보기’는 역대 대선 ‘유세 현장’이다.ⓒ시사오늘 김유종

선거는 축제다. 1987년 국민들이 직접 대통령을 선출할 수 있게 되면서, 선거철은 민주주의의 축제 기간이 됐다. 축제의 현장에는 각종 플래카드가 나부끼고, 신나는 음악과 함께 선거 운동원들의 율동도 펼쳐졌다. 후보들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나 출·퇴근 시간대에 맞춰 명함을 돌리며 연설을 펼쳤다.

그러나 20대 대선을 두 달 앞둔 현재, 유세 현장의 풍경이 뒤바뀌었다. 코로나19 사태로 2020년 총선과 2021년 재보궐선거 때부터 차분한 선거 운동으로 옮겨갔다. 어려운 시기인 만큼 요란한 음악과 춤은 사라지고, 직접적인 접촉을 피한 유세가 진행됐다. 이에 SNS나 유튜브와 같은 매체를 활용한 비대면 선거가 대세가 됐다.

<시사오늘>은 과거의 인물, 그리고 과거의 사건에 대한 당대 신문들의 평가를 재조명하며, 보수와 진보 언론 양극단의 평가를 비교해왔다. 여기서 ‘어떤 평가가 옳은가’에 대한 가치 판단은 전면 배제한다. 판단은 ‘사상의 자유’를 만끽하면서도, 동시에 ‘과잉 이념’의 시대에 지쳤을 독자들에게 맡길 예정이다. 이번 스물한 번째 ‘옛날신문 보기’는 역대 대선 ‘유세 현장’이다.

 

1987년 13대 대선, ‘축제의 현장’ vs ‘지역감정 표출장’


ⓒ네이버뉴스 라이브러리
<동아일보>의 1987년 12월 14일자 2~3면에는 13대 대선을 이틀 앞두고 4명의 후보들의 유세 현장이 담겼다.ⓒ네이버뉴스 라이브러리 갈무리

첫 직선제 대선을 앞두고, 유세 현장은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연설을 듣기 위해 수백만 명의 인파가 모여 흥겨움을 더하기도 했으나, 지역감정으로 인해 연단에 돌멩이·계란·각목 등이 날아들기도 했다. 이렇듯 뜨거운 호응과 치열한 갈등이 뒤섞인 대선이었다.

당시 유세 현장을 르포로 담은 기사에는, 연설을 듣기 위해 운집한 인파들과 흥겨운 분위기에 대해 묘사돼있다. 민주정의당 노태우, 통일민주당 김영삼(YS), 평화민주당 김대중(DJ), 신민주공화당(JP) 4당 후보는 유세장에서 얼마나 많은 세(勢)를 모았는지를 겨뤘다.

짧은 선거 기간 동안 많은 사람들을 모으는 방법으로는 ‘연설’이 있었다. <조선일보>는 YS의 유세장에 ‘꽹과리와 북을 두드리며 어깨춤을 췄다’는 설명과, “110개 지역에서 연설하다보니 감기 기운이 있다”는 그의 발언을 서술했다. 이는 당시 유세 현장의 축제 같은 분위기와 함께 각 후보들이 선거 기간에 얼마나 많은 연설을 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코트 입고 연설 하겠다”

이날 첫 유세지인 성남공설운동장에는 김영삼 후보가 도착하기 전 ‘공명선거’라는 머리띠를 두른 대학생 20여 명이 꽹과리와 북 등을 두드리며 시민들과 함께 어깨춤을 추는 등 분위기를 잡아나갔고, 오후 2시 25분 쯤 김 후보가 등단하자 일제히 함성과 박수로 환영.

김 후보는 연설 서두에서 “지금까지 1백 10개 지역에서 연설하다보니 약간 감기 기운이 있어 코트를 입고 연설하겠다”며 청중들에게 양해를 구한 뒤 곧바로 노태우 민정당 후보에 대한 성토로 돌입.

- <조선일보>, 1987.12.11. 3면

명연설로 유명했던 DJ의 유세장도 마찬가지였다. 투표 사흘 전인 12월 13일, 보라매공원에서 DJ의 마지막 대규모 유세가 열렸다. 그는 자서전을 통해 “250만 명 정도가 모였다”며 “연단에서 바라본 유세장의 인파는 도대체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2권, 593쪽)”고 회고했다. 그의 연설이 끝나자 10만여 명은 서울시청까지 15km를 행진하기도 했다.

이러한 열기 속에 DJ는 “모두 승리를 예감하는 분위기였고, 나 또한 압승을 의심치 않았다”고 회고했다. <조선일보>는 이날 유세를 ‘김 후보 당선을 위한 범지지자총궐기대회를 방불케 했다’고 설명했다.

평민 “보라매 대회, 여의도 열기 한 차원 넘었다…승리 자신”

평민당 김대중 후보의 13일 서울 보라매 공원 유세는 청중의 열기, 청중수, 밀집도 등에 있어 지난 29일 여의도 유세를 한 차원 뛰어넘은 것이라는 게 김 후보 측의 자평. 실제로 이날 대회는 김 후보 당선을 위한 ‘범(汎)지지자총궐기대회’를 방불케 했다는 느낌.

(중략) 이날 대회장에는 가로 21m 높이 7m의 노란색 대형 연단과 ‘결론은 김대중’이라고 쓴 가로 21m 폭 4m짜리 노란색 현판이 설치되고 연단을 중심으로 평민당을 상징하는 노란색 삼각기 5천 개가 만국기형으로 대회장에 뻗어나가 청중들이 흔드는 상징 깃발 태극기의 물결과 만나는 장관.

또 ‘3김대중’을 쓴 20m짜리 플래카드가 노란색 애드벌룬 6개에 띄워지고 2백 50개의 가오리연을 이어 만든 줄연이 대회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 <조선일보>, 1987.12.15. 4면

<동아일보>에서는 이를 ‘유세장 정치’라고 칭하며, “인파가 몰리는 것은 이번 선거에 쏠린 정치적 관심의 반영”이라 분석했다.

유세장 정치의 허(虛)와 실(實)

투표일 막바지인 지난 주말 전국의 도시에 몰린 유세 청중은 어림잡아 5백만 명을 넘었으리라는 추산이다. 12일 하루 동안 서울에 모인 인파만 해도 민정당 후보의 여의도 광장 유세에 1백 30만 명 이상, 공화당 후보의 장충단 공원 유세에 30여만 명, 무소속 후보의 대학로 유세에 10만여 명이 몰려들었다.

(중략) 아마도 이처럼 대규모 인파가 몰리는 정치 집회는 세계 어디에서도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울 것이다. ‘기네스북’에 오를만한 기록일지도 모른다.

물론 이처럼 유세장에 인파가 몰리는 것은 이번 선거에 쏠린 정치적 관심의 반영이다. 또한 그동안 정치성을 띤 집회면 ‘원천봉쇄’ 되기가 일쑤였고, 국민의 입과 귀를 막아놓은데 따른 반발이 한꺼번에 폭발한 탓이기도 하다.

- <동아일보>, 1987.12.14. 2면

ⓒ네이버뉴스 라이브러리 갈무리
<조선일보>의 1987년 12월 11일자 신문(좌측)과 <경향신문>의 11월 16일자 신문(우측)에는 지역감정에 따른 갈등 표출 현장이 담겼다.ⓒ네이버뉴스 라이브러리 갈무리

하지만 지지하는 후보에 대한 응원 열기만큼이나, 반대하는 후보에 대한 갈등 표출 역시 엄청났다. 1987년 대선은 3김(金)의 분열로 지역 구도가 강화된 선거였다. 선거 과정에서 노태우는 대구·경북(TK), YS는 부산·경남(PK), DJ는 호남, JP는 충청을 지역 기반으로 지지층을 결집시켰다. 지지 기반이 아닌 지역에서는 상대 후보에게 돌멩이·계란·각목 등이 날아들기도 했다.

폭력 난무…타락 시비…격앙되는 유세장

민정당의 노태우 후보는 10일 오전 군산 유세를 어렵게 마치고, 이어 전주 유세를 위해 전주에 도착했으나 수천 청년 학생들의 유세 방해로 유세를 취소했다.

(중략) 오후 2시 30분쯤 유세장에서부터 “학생들이 청중과 연단을 향해 돌과 화염병 최루탄을 던지는 등 상황이 심각하다”는 연락이 들어오면서 노 후보의 출발이 지연되기 시작했다. (중략) 그는 “국민 뜻에는 항상 따르겠지만 폭력에는 결코 굴하지 않겠다”고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 <조선일보>, 1987.12.11. 3면

YS와 DJ도 마찬가지다. YS는 광주에서, DJ는 대구에서 폭력 시위로 유세가 중단됐다. 유세 전날부터 숙소로 협박 전화가 걸려오거나, 대회장의 마이크선이 절단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YS와 DJ는 끝까지 연단을 지키고자 했다. DJ는 “여기서 지면 민주주의는 절대로 안 된다”며 “머리가 깨지더라도 안 내려간다”고 버텼다.

주말 폭력으로 얼룩진 광주·대구 유세장 투석·야유·방화 “수라장”

주말의 광주 및 대구 유세장은 투석과 방화, 야유로 얼룩진 지역감정의 대결장이 돼버리고 말았다. 15일 김대중 평민당 총재의 대구 두류공원 집회는 일부 군중의 난동으로 극도의 혼란 속에 진행됐고 14일 김영삼 민주당 총재의 광주 역전집회도 폭력 시위로 끝내 중단 사태를 빚었다.

(중략) 김 평민당 총재가 연설한 34분간은 돌, 흙, 유리병, 계란 투척이 이어졌고 외곽에서 연단 중앙으로 들어와 유세 방해를 하려는 괴청년들과 질서 유지를 하려는 대학생들이 도처에서 몸싸움을 벌였다.

(중략) 김영삼 총재가 연단에 오르자 역 광장은 김 총재지지 함성과 ‘김대중’을 연호하는 고함이 맞붙어 마이크 소리가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소란해졌다. (중략) 김 총재는 이런 속에서도 연설을 시도했으나 계란, 판자조각, 재, 돌멩이 등이 날아오는 등 혼란이 계속되자 “더 이상 연설을 하지 않겠다”고 말하고 하단했다.

- <경향신문>, 1987.11.16. 11면

 

2022년 20대 대선…‘비대면’이 대세


ⓒ노무현 재단
2002년 명동 유세 현장에서의 노무현 후보의 발언으로 정몽준 대표가 단일화를 철회하기도 했다.ⓒ노무현재단 사람사는세상_노무현사료관

1987년 이후 7명의 대통령이 선출됐다. 직선제 도입 이후 매 대선 현장도 응원 열기와 반대로 엇갈렸다. 각 유세 현장에서 각종 일화가 벌어지기도 했다.

1992년 대선에서는 국민당 정주영 후보의 연설에 앞서 유흥업소 종업원으로 보이는 20대 여성이 스트립쇼를 벌여 소동이 벌어졌다. <한겨레>의 1992년 11월 29일자 보도에 따르면, “여성은 속살이 훤히 비치는 옷을 입고 무대에 올라 반주 음악에 맞춰 윗도리와 치마를 차례로 벗어 여성 유권자 1천 명 등 1천 5백여 명의 청중 앞에 그대로 드러냈다”며 “여성의 나체쇼는 3분여 동안 이어지다가 청중의 한 사람인 우양균씨가 무대로 뛰어올라가 강력히 항의하는 바람에 중단됐다”고 서술했다. 당시 국민당은 “스탠드바에서 악기 연주 등을 하는 그룹에게 여흥 일부를 맡겼더니 이런 소동을 벌여 당황했다”고 해명했다.

2002년 대선 마지막 날에는 명동 유세 때문에 단일화가 파기되기도 했다. 당시 노무현 후보의 발언으로 정몽준 대표가 단일화를 철회한 것이다. 선거 전 날, 정몽준의 단일화 파기 성명과 그날 새벽 자택 앞 노무현의 모습은 국민들의 정서를 건드려 승리를 이끌어냈다.

ⓒ연합뉴스
이재명 후보는 셀카봉을 이용해 혼자 유튜브 라이브 방송을 진행하며 지하철 유세를 펼쳤다.ⓒ연합뉴스

그렇다면 2022년 20대 대선을 앞둔 지금은 어떨까. 1987년처럼 수백만 명의 군중 앞에서 하는 연설은 불가능해졌다. 코로나19 사태로 거리 두기가 강화된 이 시점에, 인파가 몰리는 곳을 찾는 것은 부담이기 때문이다. 이에 여야 후보들은 음악에 맞춘 율동보다는 음악을 틀지 않고 조용한 선거 운동을 택했다.

1987년 11월 26일 자 <동아일보>의 보도에 따르면, “유세 중 하루 평균 3천 명 정도와 악수를 하는 YS의 오른 손은 부어올라 통통해졌다”고 서술돼있는 반면, 2022년 유세 현장은 마스크를 벗지 않고 주먹 인사를 하는 모습이 포착된다.

이러한 분위기에 맞춰 여야 대선 후보들도 대면 접촉을 최소화하고, 비대면 소통을 강화했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 후보는 버스·지하철·도보를 이용한 이른바 ‘BMW(Bus·Metro·Walk)’ 유세를 진행했다. 길바닥 민심을 통해 직접 시민들과 소통하되, 셀카봉을 이용해 혼자 유튜브 라이브 방송을 진행하며 동행하는 관계자들의 수를 줄였다. 조직력과 세가 중요했던 1987년 선거와 달리, 방역을 고려한 비대면 선거가 중요해진 결과다.

ⓒ연합뉴스
윤석열 후보는 ‘AI(인공지능) 윤석열’을 선보였다.ⓒ연합뉴스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 후보는 지난해 12월 정치권 최초로 ‘AI(인공지능) 윤석열’을 선보였다. 이는 후보가 직접 유세 현장을 방문하지 않아도, 직접 말하는 듯한 영상이 재생된다. 이를 기획한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는 “코로나 갈수록 대면 접촉이 어려워진 상황에서 강력한 무기가 될 것”이라 내다봤다.

담당업무 : 정치부 기자입니다
좌우명 : 행복하게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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