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스케치㉓] 한계령 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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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스케치㉓] 한계령 연가
  • 정명화 자유기고가
  • 승인 2022.01.16 10: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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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쉼터 같은 노래 '양희은의 한계령', 심금을 울려
한계령 출신 하덕규와 정덕수의 혼이 새겨져 명곡 탄생
폭설이 내리면 동화 속 장관 펼치는 한계령으로 가고파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정명화 자유기고가)

고독과 허무로 심연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일 때 문득 떠오르는 노랫말이 있다. '저 산은 내게 우지 마라 우지 마라 하네….' 삶에서 한 편의 시가, 한 곡조의 노래가 메말라가는 영혼에 촉촉한 단비가 되곤 한다. 설경이 펼쳐지는 한겨울이면 아스라한 추억처럼 애절한 시구를 연상시키는 노래 한 곡이 에이는 가슴을 뚫고 슬며시 베어 나온다.

1980년대 중반, 고려대 인근 안암동 찻집에서 흘러나온 노래가 나의 귀에 꽂혔다. 바로 '양희은의 한계령', 그렇게 운명처럼 처음 만났다. 매우 느린 템포의 전주곡으로 시작해 전체적으로 가라앉은 듯한 곡조였다. 거기에 평소 청아하고 낭랑한 음색의 양희은은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 힘을 뺀 채 살짝 내던지는 창법으로 한계령을 불렀다. 얼핏 염세적인 분위기의 가삿말과 곡조가 조화를 이뤄 나의 감성을 강타했다. 그 후 현실이 녹록지 않고 쉼이 필요할 때마다 찾아 듣곤 하는 애청곡이 되었다.

눈꽃 핀 한계령. ⓒ연합뉴스
눈꽃 핀 한계령. ⓒ연합뉴스

강원도 여행길 지나는 한계령의 지리적 의미 

한편, 한계령(寒溪嶺)의 지리적 위치는 강원도 인제에서 양양으로 넘어가는 백두대간 고갯길이다. 한자 의미는 ‘차가운 시내’로, 높이는 1,004m에 이른다. 대청봉과 그 남쪽의 점봉산을 잇는 설악산 주 능선의 안부이며, 영동지방과 영서지방의 분수령을 이룬다.

과거, 양양군에 해당하는 산을 설악산이라 하고 인제군에 해당하는 산을 한계산이라 지칭했다. 이에 한계령은 한계산 명명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런데 양양군에서는 한계령을 오색령, 소동라령(所東羅嶺)이라고도 했으며, 조선시대에 ‘오색령’이라 불리다 일제감정기 한계령으로 변경되었다.

따라서 고개 이름을 두고 인접한 두 지자체 간에 갈등이 있었다. 양양군은 ‘오색령’으로 복원하길 원했으나 인제군은 반대했다. ‘오색’은 양양군 서면 오색리, ‘한계’는 인제군 북면 한계리의 지명으로 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기 관할인 양양군은 한계령 휴게소에 ‘오색령’이라 적힌 표지석을 설치했고 오색령이라고도 부른다.

한계령은 양양군 사람들이 설악산을 넘어 인제군이나 서울로 갈 때 주로 이용되던 험한 산길이었다. 내설악은 산세가 수려하고 계곡이 아름답지만, 내륙 깊숙이 있고 교통이 불편하여 등산객 외에는 찾는 이가 드물었다. 그러다 1971년 한계령을 지나는 44번 국도인 한계령도로가 닦이고, 설악산 및 동해안을 찾는 관광객의 증가에 대비하여 1981년 인제군에서부터 양양군과 속초시까지 이어지는 도로가 확장, 포장됨으로써 설악산의 북쪽으로 돌아 진부령이나 미시령을 넘던 자동차들이 이 고개를 이용하게 되었다.

이 도로는 설악산을 지나기 때문에 주변의 빼어난 경관을 구경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한층 소통하는데 용이해져 과거 미시령 진부령을 통하던 속초행 길이 원활해졌다. 다만 해발고도가 높아서 폭설이 내리면 설국을 방불케 하지만 차량 운행하는 데는 통행금지 조치가 내릴 정도로 위험한 마의 구간이 되는 것이다.

명곡 한계령 탄생 배경

수려한 장관을 자랑하는 한계령 못지않게 유명세를 떨친 노래 한계령. 한계령 고개를 넘지 않은 사람은 있어도 노래 한계령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만큼 유명한 노래 한계령의 탄생에는 소설 같은 비하인드 스토리가 존재한다.

이 노래는 발표 당시인 1985년부터 ‘시인과 촌장’의 하덕규가 작사·작곡한 것으로 돼 있었다. 기타리스트 함춘호와 함께 ‘시인과 촌장’으로 데뷔한 하덕규는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방황의 날들을 보냈다. 지금 목회자가 된 그는 한 간증에서 20대 중반 한계령에서 떨어져 삶을 등질 생각으로 어릴 때 늘 바라보던 마음의 고향 한계령을 찾았다고 한다. 하덕규는 한계령 자락 홍천 출신이다. 거기서 그는 죽음 대신 삶의 영감과 노래를 얻었다. 산은 우지 말고 내려가라 했고 다시 치열하게 삶을 살아내라고 밀어내는 느낌을 받아 그 감흥을 노래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사실 ‘한계령’은 하덕규 작사·작곡으로 발표됐지만 20년이 지나 한계령 시인 정덕수의 ‘한계령에서 1’이라는 시의 구절구절을 원작자 허가 없이 발췌해 만든 것으로 밝혀졌다. 한계령 발표 후 20년이 넘어서 원작자가 나타난 것이다. 한계령 아래 산골짜기 오색에서 태어난 정덕수라는 무명시인이 그의 나이 18세때인 1981년 한계령에서 고향 오색을 바라보며 쓴 시였다.

1985년에 발표되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양희은의 노래 '한계령'은 정덕수 시인의 시 '한계령에서'가 그 바탕이 되었다. 이 시가 작곡가 하덕규의 손에 들어가 노래 '한계령'이 탄생하면서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는 노래로 거듭났다.

하덕규는 이 시에 감명을 받아 부분 부분 발췌해 가사로 만들었음을 인정했고 그동안의 저작권료에 대한 보상을 하겠다고 했다. 정덕수는 DSLR 카메라 한 대면 충분하다고 했다고 한다. 다만 원작자의 허가 없이 군데군데 가져다 곡조를 붙였지만, 하덕규의 탁월한 시적 감성과 재능이 노래 한계령의 주체이자 자양분이 된 것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노래 한계령의 모태, 시인 정덕수

이렇게 한계령 노래 출발점엔 고단한 인생을 살던 한 시인이 있었다. 이 산 저 산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살고 싶다 되뇌던 산사나이가 있었던 것이다. 그는 산이 상처를 감싸주기는커녕 현실로 내려가라고 지친 내 어깨를 떠민다고 탄식했다.

찢어지는 가난에 어머니는 일찍 집을 나가고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못한 정덕수는 무작정 상경해 봉제공장에서 삶을 이어갔다. 그러다 1981년 나이 열여덟에 그런 삶을 내던지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어릴 때부터 설악에서 나무지게를 지고 다니며 한계령의 구름과 바람을 벗 삼아 ‘한 줄기 바람처럼 살고 싶다’고 글을 끄적이던 소년은 그렇게 한계령 시인이 된다. 그의 고난과 꿈은 ‘한계령에서’라는 연작시로 승화됐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이 한참일 때 그는 대청봉에서 등반객들과 산장에 묵었다. 그때 여대생들이 노래를 불렀는데 노랫말이 귀에 익었다. 자신이 쓴 시의 구절들과 너무 비슷했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 저작권법이 제대로 정비되지도 않아 개의치 않다 노래가 나온 지 22년 만인 2007년 지인들이 발 벗고 나서 비로소 이 노래의 작사가로 인정받았다. 마침내 한국음악저작권협회에 하덕규와 함께 공동 작사가로 등재되었다. 현재 그의 근황은 봄이면 어린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여전히 산나물을 채취하며 시집 ‘한계령에서’와 ‘다시, 한계령에서’를 내고 설악의 사진을 찍으며 설악에서 살고 있다.

한계령 폭설과 장관의 설경을 담는 등반객들. ⓒ연합뉴스
한계령 폭설과 장관의 설경을 담는 등반객들. ⓒ연합뉴스

영혼의 고향 한계령

폭설이 내리는 날이면 거센 눈발을 뚫고 한계령으로 달려 가고프다. 비록 오가지 못하게 갇힐 지라도 잠시나마 현실의 굴레에서 벗어나 스스로 묶이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대학시절 동아리 한 친구가 홀로 떠난 강원도 여행길 한계령에서 만난 함박눈 세례에 동화 속 설국을 연상시켰다고 감탄해 마지 않았다. 혼자 보기 아까울 정도로 신비스럽고 환상적인 풍광이 펼쳐져 누군가와 공유하고 싶었다며 생생한 감동을 묘사, 벅찬 심경을 전했던 기억이 난다. 한계령에 올라 눈꽃 펼쳐진 환상 속 고독이 주는 축복에 감사한 지점이었다고.

겨우내 혹한의 바람과 눈 속에 제 몸을 가두었던 산은 따스한 봄날을 희망하며 내일을 꿈꿀 것이다. 하덕규와 정덕수 시인이 다시는 찾지 않으리라 마음먹으면서도 힘들 때마다 발길은 한계령으로 향했고 그럴 때마다 한계령을 말없이 그를 안아주고 위로해 주었듯이 말이다. 한계령 노래에서 시작은 삶의 아픔과 처연함을 토로하는 것 같지만 사뭇 희망까지도 언급한 것처럼.

설악의 사계는 이렇듯 한계령에서 절정을 이룬다. 백설이 점령한 계곡과 안개가 피어오르는 산 아래, 구름도 쉬어 넘는 정상을 바라보며 오만가지 상념에 잠기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사람은 추억을 먹고 산다. 그 추억 속엔 한 시절을 떠올리는 음악 같은 상징적 대상이 존재한다. 한계령은 그런 의미에서 이중적 의미와 가치를 지닌다. 이제 자연 한계령의 기개와 함께 노랫말 한계령이 시사하듯, 녹록지 않은 현실 속에서 다시 한 번 인고의 삶을 향한 불굴의 의지를 불태워야 하지 않겠냐며 스스로를 독려해 본다.

저 산은 내게 우지 마라
우지 마라 하고
발 아래 젖은 계곡 첩첩산중
저 산은 내게 잊으라
잊어버리라 하고
내 가슴을 쓸어내리네

아 그러나 한 줄기
바람처럼 살다가고파
이 산 저 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저 산은 내게 내려가라
내려가라 하네
지친 내 어깨를 떠미네

<한계령, 하덕규 정덕수 공저>

정명화는…

1958년 경남 하동에서 출생해 경남 진주여자중학교, 서울 정신여자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연세대 문과대 문헌정보학과 학사, 고려대 대학원 심리학 임상심리전공 석사를 취득했다. 이후 자유기고가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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