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代散策] 권노갑 “박정희, DJ 두려워 유신 선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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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代散策] 권노갑 “박정희, DJ 두려워 유신 선포”
  • 구술 권노갑|진행·정리 정세운·윤진석 기자
  • 승인 2022.01.21 16:31
  •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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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노갑 김대중기념사업회 이사장
“학창 시절 동경한 DJ 원래부터 거물 정치인” “박정희·전두환 가장 크게 위협해 목숨 잃을 뻔”
“모진 고문 이길 수 있게 한 힘 김대중 대통령” “71년 신민당 대선 경선 이철승 설득은 김상현”
“DJ, 민추협 반대한 적 없어, YS 민주 공로 인정” “민추협 초창기부터 참여, 신민당서 공천 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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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와 창당한 민주당은 내 정치적 뿌리” “민주주의史 남을 민추협 계승, 후원회 없어 어려워”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구술 권노갑|진행·정리 정세운·윤진석 기자)
 

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영원한 비서실장인 권노갑 김대중기념사업회 이사장을 1월 6일 서울 마포구 동교동 김대중기념도서관에서 만났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故김대중 전 대통령의 영원한 비서실장인 권노갑 김대중기념사업회 이사장과의 인터뷰는 1월 6일 서울 마포구 동교동 김대중기념도서관에서 진행됐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시작할까요.”

기자가 쳐다봤다. 

“그러지.”

(영원한 DJ(故김대중 전 대통령) 비서실장 권노갑을 만났다. 그는 1930년생으로 우리 나이 아흔셋이다. 인터뷰는 1월 6일 서울 마포구 동교동 김대중도서관에서 진행됐다. 김대중기념사업회 이사장, 김대중노벨평화상기념관 명예 이사장,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이사장을 맡고 있다. 동교동계 좌장, 권노갑 고문으로 더 잘 불린다. 동지들이 문턱이 닳도록 오고 간 DJ 자택이 위치한 동교동은 권노갑에게 마음의 고향 같은 곳이다. 호칭은 권노갑으로 통일했다.)

 

1. DJ와의 인연 


권노갑 회고록 순명 표지ⓒ시사오늘
권노갑 회고록 순명 표지ⓒ시사오늘

 

“회고록 두 번 읽었습니다.”
“허허.”

(제목은 <순명(順命)>)

“제일 궁금한 게 첫 번째….”

기자가 운을 떼며 말을 이었다. 

- DJ가 정치 초창기 세 번 낙선하잖아요. 

“그렇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1954년 정치에 뛰어든 DJ는 3대 민의원 선거서 무소속 후보로 출마한 이래 6·5 강원 인제 재보선, 5대 총선 모두 떨어졌다.)

- 별 볼 일 없는 정치인이라고 판단했을 수 있는데, ‘내가 이 사람과 평생 같이 가겠다’고 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이미 김대중 대통령께서는 학창 시절부터 우리 후배들의 우상이었어요.”

(인터뷰 내내 그는 ‘김대중 대통령께서는~’이라며 꼬박꼬박 경어를 썼다.)

“내가 그분을 처음 만난 것은 지금으로부터….”

해방도 되기 전인 1943년. 태평양전쟁이 한창 진행 중일 무렵이었다. 목포 상업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김대중 대통령은 나보다 4년 위 선배였다. 당시만 해도 조선인 학생 절반, 일본인 학생 절반이었다. DJ는 건장했고 전교 1등이었다. 연설도 잘했다. 우리 눈엔 동경의 대상이었다. 

“큰 인물이 될 줄 알았지.”

(자부심이 어렸다. 억양도 DJ와 비슷하고, 허스키한 목소리가 인상적이다. 전남 목포에서 자랐지만, 안동 권씨다. 부모님 모두 경상도 사람이다. 아버지는 일찍 여의었고 어머니는 목포서 참기름 집을 운영했다.)
 

청소년 시절 권투선수가 꿈이었다. 동국대 다니면서는 영어에 푹 빠져 살았다. 그러던 내가 미군 통역관, 목포여고 영어교사를 거쳐 정치에 발을 들여놓은 계기는 순전히 DJ 때문이었다. 
“어머니 임종을 계기로 한동안 몸담아 왔던 목포여고 영어교사를 그만두기로 했습니다. 3·15 부정선거를 겪으며 의분을 느끼던 나는 서울행 열차를 탔습니다. 지금도 내 귀에는 그때의 기차 바퀴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습니다. 김대중 선배가 연거푸 낙선하자 미력이나마 힘을 보태고자 상경하게 됐던 것입니다.”
-권노갑 회고록 <순명> 중-

 

“이렇게 훌륭한 사람이 선거에서 계속 떨어지면 안 된다. 나라도 솔선수범해서 도와야겠다. 자발적으로 그런 결심을 하게 된 거요.”
 

권노갑 비서실장은 학창시절부터 DJ를 동경했다고, 그 같이 훌륭한 사람이 선거에서 꼭 이겨야 된다고 생각해 돕게 됐다고 말했다. 왼쪽부터 권노갑·DJ·이희호 여사ⓒ권노갑 회고록 순명
권노갑 비서실장은 학창시절부터 DJ를 동경했다고, 그 같이 훌륭한 사람이 선거에서 꼭 이겨야 된다고 생각해 돕게 됐다고 말했다. 왼쪽부터 권노갑·DJ·이희호 여사ⓒ권노갑 회고록 순명

이후 나는 재경 목상 동창회를 처음 조직했다. 그러던 중 1961년 5월 김대중 대통령 지역구인 강원 인제에서 보궐선거가 열린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나는 곧장 인제로 달려갔다. 

 

“트럭에 입후보자의 간판을 써 붙이고 거리를 돌아다녔는데 찬조연설은 훗날 국회의원이 된 김상현 의원이 주로 맡아 했고, 나는 지역 사정은 모르지만, 김대중 후보의 동생인 김대의 형님과 같이 지프차를 타고 다니며 일했습니다. 5월 13일에 선거가 있었고, 14일엔 김대중 후보의 당선이 확정됐습니다. 나는 내 일처럼 기뻤습니다.”
- 권노갑 회고록 중- 

 

(당선의 기쁨은 잠시였다. 5·16 쿠데타가 발발했다. 국회가 해산되면서 DJ 의원직도 박탈됐다.)

“목포에서 그리 유명했던 분이 애당초 굳이 인제까지 간 이유는 뭐였나요.”

기자가 궁금함이 든 모양이었다. 

“목포에서는 민주당 공천을 못 받았어요.”

(첫 무소속 도전 실패 후 DJ는 1956년 민주당에 입당했다.)

“이미 현역 국회의원인 지역위원장이 있었기 때문에 장면 박사가 강원 인제로 공천을 준 거요.”

한국전쟁 전 북한 땅이었던 강원도 인제는 우리 군이 탈환하면서 한국 땅이 됐다. 그곳엔 파견 나온 군인들이 많았다. 김대중 대통령은 이들 표를 의식해 인제로 갔다. 

- 의식한 이유는요?

“민주당을 많이 지지하니까.”
“아, 많이 지지했어요?”

기자가 의외라는 듯 되물었다. 

“근데 결국 두 번 떨어졌으니까….”

나는 말끝을 흐렸다. 

 

2. 거물 정치인 DJ

 


“회고록을 읽다 보면요.”

이런 게 궁금해진다며, 기자가 말을 꺼냈다.

- 박정희, YS(김영삼), 이후락이 DJ를 거물 정치인으로 키웠다는 항간의 얘기가 생각납니다. 

“….”

- 박정희가 7대 총선에서 떨어뜨리려고 했는데 안됐고, YS 가 40대 기수론을 먼저 부르짖었다가 역전패당하고, 이후락이 현해탄에서 빠트리려다 실패해서 거물 정치인이 됐다는 얘기 말입니다.

“그런 건 하나의 방법일 뿐….”

“세 사건이 거물 정치인이 되게 한 큰 계기는 맞지요?”

재차 물어왔다.
나는 긍정도 부정도 안 했다.

“대통령 하겠다는 마음은 변함이 없었으니까.”

(동문서답과 같은 답이었다. 처음부터 거물 정치인임을 강조하고픈 눈치 같기도 했다.)
 

권노갑 이사장은 박정희·전두환이 가장 위협을 느낀 정적은 DJ라고 말했다. 사진은 1971년 대선에 출마한 DJ가 장충단 공원에서 열변을 토하고 있다.ⓒ연합뉴스
권노갑 이사장은 박정희·전두환이 가장 위협을 느낀 정적은 DJ라고 말했다. 사진은 1971년 대선에 출마한 DJ가 장충단 공원에서 열변을 토하고 있다.ⓒ연합뉴스

- 각론으로 들어가면요. DJ가 거물 정치인으로 성장하게 된 첫 번째 계기가 7대 총선 때죠?

“6대 국회의원 됐을 때부터 김대중 대통령은 이미 장래를 내다볼 수 있는 미래 정치인으로 각인됐어요.”

(DJ가 목포에 나가 당선된 건 1963년 6대 총선부터다.)

“아니, 그때 얘기가 아니고요.”

정정하듯 기자의 톤이 높아졌다. 

- 7대 총선 당시 구호가 ‘박정희 삼선개헌을 막아야 한다’ 였잖습니까. 선거 전략으로 보면 하나의 프레임을 만든 건데 이건 대체 누가 만든 거며, 적중하게 된 배경이 궁금합니다. 

“당의 방침이었어요.”

나는 잘라 말했다. 

(신민당 때였다.)

유진산·박순천 당수, 김영삼 총무, 김대중 정책위의장 등 모두가 삼선개헌을 저지하겠다는 각오로 투쟁을 했다. 특히 박정희로 봐서는 김대중 당시 국회의원이 공화당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야당의 기수로 비쳤다. 가장 위협적인 존재였다. 

“‘공화당 국회의원 열 석 이상 잃어도 좋다. 김대중만 떨어뜨려라.’ 이렇게 방침을 내렸어요.” 

돈 선거, 관권선거는 물론이고 저녁에 불 끄고 투표함 바꿔치기 계획까지 세울 정도로 방해 공작은 집요했다. 

- 박정희가 DJ를 낙선시키려고 목포까지 내려왔잖아요. 

“그랬지.”

지금도 기억난다. 목포시민을 향해 연설하면서 ‘이번에 우리 후보(김병삼) 당선시켜 주면, 공장 유치하고 청년실업자 전부 고용시키고, 목포를 대한민국 제일가는 도시로 발전시키겠다’고 하던 것 말이다. 

- 그런데 결과적으로 실패했어요. 

“하하.”

- 결정적 이유가 뭐였을까요.

“박순천 씨 때문이오.”

(신민당 총재였다.)

“그분이 와서는….”

나는 유세 장면을 떠올렸다. 

# 목포, 박순천 연설

“박정희가 김대중을 괴롭히고 떨어뜨리려는 것을 보니 아무리 봐도 자기의 라이벌이 될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아예 김대중을 대통령에 당선시켜서 목포를 더 발전시킵시다, 여러분.”

박정희의 유세를 역으로 이용해, 이렇게 바꿔버렸다. 

(DJ 대망론에 불을 지핀 첫 계기였다는 평가다.)

- 당수의 발언이 큰 효과를 본 거네요.

“그렇죠.”

사실상 결정적이었다.

 

3. 40대 기수론


권노갑 이사장은 DJ는 처음부터 거물 정치인의 면모가 있었다고 말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권노갑 이사장은 DJ는 처음부터 거물 정치인의 면모가 있었다고 말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39세 때 결혼했잖아요.”

(이제 거물 정치인이 된 두 번째 계기를 물어볼 차례였다.)

- 배운 것 많은 부잣집 딸과 결혼할 수 있던 것은 김대중 비서관이라는 타이틀 때문이라고 했는데요. 

“그랬지(웃음).”

(권노갑 부인 박현숙 여사는 경기고, 이화여대, 미국 뉴욕 패션스쿨을 유학한 서울 명문가의 재원이다.)

- 3공화국 당시 전도유망한 정치인들이 커나갈 수 있는 환경이었는지 궁금합니다.

“당시 40·50대 정치인이었던 김영삼·김대중·장준하 이런 분들이 대통령 될 가능성이 있다는 흐름이 있었죠.”

(대화는 자연스레 40대 기수론으로 유도됐다. 1969년 42세이던 YS는 신민당 전당대회를 앞두고 40대 기수론을 들고 나왔다. DJ·이철승과 함께 바람을 일으키며 무기력하던 야권을 일깨웠다.) 

- 장준하 선생은 40대 기수론에 반대해서 탈당하지 않았나요?

“반대한 게 아니고, 대통령 후보가 되고 싶어 했어요.”

결국에는 ‘나는 대통령 되는 것보다 내 후배인 김대중을 대통령 후보로 만들겠다’해서 우리를 도와줬다. 

- 故김상현 의원 증언에 따르면 DJ가 40대 기수론에 동참하기를 꺼려 했다고 합니다.

“그것이 아니고요. 김상현 동지가 그런 이야기를 어디에서 했는지 모르겠지만….”

(후농 김상현은 생전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김영삼과 이철승이 40대 기수론의 기치를 내걸고 나왔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습니다. ‘준비도 안 됐는데 어떻게 할 수 있느냐’고 하더군요. 저는 40대 기수론에 참여해야 정치적 꿈을 이룰 수 있다고 말했지요. 그랬더니 ‘하루만 생각하고 내일 점심을 같이 하자’고 하더군요. 다음 날 ‘풍림’이라는 한정식 식당에서 만나서야 동참의 뜻을 밝혔습니다.”
-김상현, 2010년 <시사오늘> 인터뷰 중-

 

“우리 둘 다 김대중 대통령을 위해 몸 바친 사람들이에요.”

나는 이 말부터 전제했다. 

“그분이 대권을 꿈꾼 것은 원내총무 경선 때부터였어요.”

40대 기수론 전의 일이다. 김영삼 총무가 원내총무를 세 번 이상 하려 하자, 유진오 신민당 총재가 김대중 대통령을 총무로 지명했다. 그런데 지명직은 경선을 거쳐야 했다.

(수적으로 열세이던 DJ는 인준을 받지 못했다. 그러자 DJ는 권노갑과 차를 타고 유진오 총재에게 갔다.) 

# 유진오, 필동 자택

“고려대 총장 하던 사람을 신민당 대통령 후보 시키겠다며 총재로 앉혀놓더니 내가 지명한 사람을 인준 않는 건, 나를 흔들려는 게 아닌가.”

상당히 흥분해 있었다. 

“예 그럴 수 있죠.”

듣고 있던 기자가 당시 상황이 그려진다는 듯 웃었다. 

- 유 총재는 뭐라던가요.

“‘내가 다시 김대중 의원을 재지명하겠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만류한 것은 DJ였다.) 

# DJ, 유진오 총재에게 

“선생님 제발 부탁입니다. 이번에 고배를 마신 것은 내 잘못입니다. 선생님 잘못 하나도 없습니다. 부덕의 소치니 제가 물러나겠습니다. 재지명은 마십시오.”

- 그래서요.

“유진오 총재가 가만히 계시더라고요.”

김대중 대통령은 이후 차를 타고 가면서 자신이 왜 그랬는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 DJ, 차 안 

“계파 때문에 이 당에서 나는 인준 받기 어렵네. 어떻게 해서든지 전당대회에서 승부해야겠어.” 

목표는 대통령 후보였다. 그때 이미 결정된 거였다. 
 

서울 마포구 동교동 김대중기념사업회 복도에 전시된 DJ 보도물 표지ⓒ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서울 마포구 동교동 김대중기념사업회 복도에 전시된 DJ 보도물 표지ⓒ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 여담이지만 경선대회에서 피켓이 처음 사용됐잖습니까. 누구 아이디어였나요.

“정일형 박사요.”

- 외국에서 공부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아이디어네요.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이었지.”

(신민당 부총재를 지낸 정일형 박사 아들은 정대철 전 민주당 대표, 손자는 정호준 전 국회의원이다. 3대가 정치를 한 정치 명문가인 셈이다. 부인은 한국 최초의 여성 변호사인 이태영 여사다.)

“또 궁금한 게…”

기자가 입을 다셨다.

- DJ가 YS한테 지다가, 2차 경선서 역전했잖아요. 결선투표를 앞두고 이철승한테 ‘당권 줄게’ 한 것은 누구 아이디어인가요. 

“우리 쪽은 김상현, 이철승 씨 쪽은 조연하.”

이 두 사람이 한 거다. 

- 기막힌 수였잖아요. 

“그것도 그거지만 우리 조직이 그만큼 철저했어요.” 

(1971년 DJ는 신민당의 제7대 대선후보로 선출됐다.)

“요즘 관련 영화도 만들어진다고 하는데요.”
“뭐요?”

(영화 <킹메이커>를 말했다. 선거의 달인이라고 하는 엄창록에 관한 얘기였다. DJ 책사였다가 1971년 대선을 기점으로 결별했다.)

- 이분이 박정희 캠프로 넘어가서는 ‘호남이여 단결하라’라고 해서 지역감정을 일으키는 선거 전략을 썼잖아요. 

“….”

(DJ 기세에 위협을 느끼던 박정희 측은 지역주의를 이용했다.)

 

“공화당 후보였던 박정희 측은 선거의 달인으로 불리던 ‘엄창록’을 캠프로 끌어들였다. 엄창록은 ‘김대중에게 승리하려면 지역감정을 자극하라’는 메시지를 중앙정보부장이었던 이후락에게 전달했다. 4월 27일 대통령 선거를 하루 앞둔 시점에서 영남지역에 대대적인 전단지가 뿌려졌다. 내용은 ‘호남인이여 단결하라, 김대중을 대통령으로’였다. 이런 괴문서가 나돌자 영남인들의 표심은 ‘박정희’를 향했다. 결과는 박정희의 승리였다. 박정희는 김대중을 약 100만 표차로 누르고 당선됐다. 영남에서 박정희는 김대중보다 약 170만 표를 더 받았다. 반면 김대중은 호남에서 박정희보다 약 70만 표가 앞섰다. 결국, 표차를 계산해 보면 박정희는 지역감정을 자극해 대통령 자리에 오른 것이다.”
 - 2010년 <시사오늘> 기사 중-


 

권노갑 이사장은 DJ가 1971년 대선후보였지만 당내 비주류 신세라 공천권 등을 갖는데 한계가 있었다고 말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권노갑 이사장은 DJ가 1971년 대선후보였지만 당내 비주류 신세라 공천권 등을 갖는데 한계가 있었다고 말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 풍문으로는 엄창록이 비서실장과 전국구(비례대표) 국회의원 자리를 요구했는데 DJ가 안 들어줘서 공화당 쪽으로 갔다고 합니다.

“전국구는 맞아도 비서실장을 달라고 한 것은 아니오.”

당시 비서실장은 김상현, 특별 보좌역은 나였다. 엄창록이 조직의 명수인 것만은 틀림없었다. 인제, 목포 선거 때도 참여했다. 

- 전국구 의원을 보장해 주지 그랬어요. 

“할 수가 없었어요.”

김대중 후보는 비주류였다. 당 주도세력은 진산계였다. 마지막 공천 심사 때 일화가 생각났다. 김대중 후보가 전국구 자리로 딱 한자리를 부탁했다. 이화여대 법정 대학장으로서 장충공원에서 찬조연설해준 정일형 박사 부인 이태영 여사였다. 하지만 당을 꽉 쥐고 있던 진산이 펄쩍 뛰었다. 

- 왜요?

“남편이 국회의원인데 부인까지 할 수 있냐는 거였어요. 단호히 거절하더라고.”
“하하.”

기자는 그럴 수도 있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암튼 세력도 조직도 돈도 그쪽에 있었어요. 후보는 전혀 힘이 없었지.”

 

4. DJ와 YS


이야기는 유신 선포 후로 흘러갔다. 

- 일본에서 돌아오지 않고 체류하게 된 이유는 뭔가요. 

“활동 못 하고, 연금되고 감금되니까 반민주적 헌법 체제를 종식하기 위해서는 재외동포들, 미국, 독일 등에 알리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그런 차원에서 한 거지요.”

(미국 방문 중이던 YS가 귀국해 투쟁했다면, 일본에 있던 DJ는 국내 실상을 해외에 알리는 데 주력했다.)

- 성과가 있었나요. 

“있었으니까 납치한 거지. 세계적으로 알려지니까, 그걸 저지하기 위해 납치한 거 아니요?”

(1973년 DJ는 일본의 한 호텔에서 중앙정보부에 의해 납치됐다 풀려났다.) 
 

DJ 납치사건 관련 매일경제 기사 캡처ⓒnavernewslibrary
DJ 납치사건 관련 매일경제 기사 캡처ⓒnavernewslibrary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은 29일 ‘김대중 씨 사건에 중앙정보부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언명했다. 이 부장은 이날 아침 남북조절위원회공동위원장 자격으로 기자들과 회견한 자리에서 질문을 받고 ‘만약 중앙정보부 한 사람이라도 김대중 씨 사건에 관련이 있다면 자신은 어떠한 책임이라도 지겠다’고 말했다.”
-1973년 8월 29일 <매일경제>기사 중-

 

- 회고록에서 동교동계의 투쟁은 생존의 문제, 상도동계는 미래에 관한 방법의 문제라고 말했는데요. 무슨 뜻인가요. 

“상도동계보다 우리가 더 많은 탄압을 받았어요. 그 뜻이오.”

- 왜 더 심하게 받았을까요.

“김대중 대통령이 더 강적이기 때문이지.”

- 가장 큰 라이벌이었다?

“암. 그렇고말고요.”

나는 자신 있게 말했다.

“박정희는 어떻게든 우리를 말살시키려 했어요. 교통사고를 빙자해 죽이려고도 했고, 현해탄에 던지려고도 했어요. 1971년 대선서 위협이라 느낀 이후 유신헌법도 그래서 만든 거예요. 전두환 정권 때는 사형 선고까지 받았잖소. 카터와 레이건 때문에 집행을 못 했을 뿐, 김대중 대통령은 박정희·전두환에게 가장 부담이 되는 정적이었어요.”

(권노갑은 회고록에서 DJ가 죽을 고비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경험이 있다고 했다. 현해탄에 서도 DJ는 예수를 만났다.)

 

“김대중 선생은 세 번이나 예수님을 만난 체험이 있다고 훗날 회고한 적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일본에서 납치돼 바닷속에 던져지려 할 때 배 위에 나타나신 예수님입니다. 선생은 예수님의 옷자락까지 만졌다고 하는데, 그 사건은 꿈속이 아니라 생시였다고 합니다. 두 번째는 5·17 민중 항쟁 전 수사기관에 끌려갔을 때, 선생에게 말씀의 소리로 나타나신 예수님입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용기를 얻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교도소로 이감된 후 선생에게 빛의 형태로 나타나신 예수님입니다. 이것은 생시가 아니고 꿈이었다고 합니다. 선생은 꿈속에서 죽음의 곳으로 버려지기 위해 발가벗겨졌습니다. 그리고 수레에 실려 교외의 황야로 끌려갔는데, 꿈속의 계절은 한겨울이라 몹시 추웠다고 합니다. 그때 하늘에서 두 줄기의 빛이 내려와 선생과 선생을 끌고 간 일꾼의 몸까지 따뜻하게 녹여주더니 선생을 다시 안전한 곳으로 데려오셨다는 것입니다.”
-권노갑 회고록 중-

 

권노갑 이사장은 YS가 민주화를 위해 가장 앞장서서 싸운 지도자가 맞다고 본다고 말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권노갑 이사장도 YS가 민주화를 위해 가장 앞장서서 싸운 지도자라고 보는 데 공감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 DJ는 탄압받은 정치인. YS는 박정희와 싸운 정치인이라는 평가에 대해서는요. 

“나도 그렇게 봐요.”

공감했다.

“YS께서 단식 투쟁부터 국내서 가장 앞장서 싸운 것은 사실이오. 거기에 우리가 동참했고요.”

- 호남 차별도 탄압의 배경이 됐을 듯합니다. 

“지금은 많이 좋아졌지만, 예전엔 많았어요. 대학교 1학년 때 하숙집 가서 전라도 사투리 쓰면 방을 안 줬어요.”

거짓으로 고향이 충청도라고 해야 얻을 수 있었다. 그런데 정작 호남 사람들은 지역 차별을 안 했다. 경상도 출신인 부모님이 목포 집 문패에 호주 이름 쓰고 경우회(경상남북도 향우회)라고 해도 차별 같은 게 없었다. 

 

5. 민추협과 단일화


 
(대화는 1970년대를 지나 격동의 1980년대로 가고 있었다. DJ가 사형 집행에서 풀려나 미국 망명 중일 무렵 YS는 1984년 민주화추진협의회를 발족했다. 반독재 투쟁기구인 범정치결사체를 만들고자 동교동계와 50대 50으로 지분을 나눴고, JP(김종필)까지 설득하기 위해 애썼다. 민추협이 태동함으로써 신민당 돌풍과 6월 항쟁의 승리, 87 체제의 여명이 열렸다.)

“민추협이 YS와 DJ의 합작품이긴 합니다만, DJ가 처음에는 참여를 반대한 이유가…”

기자가 조심스럽게 꺼냈다. 

- 1979년 전당대회에서 DJ가 YS를 지원했지만, 당직 인선 과정에서 신뢰가 깨졌다는 말이 있잖습니까. YS 경우도 DJ가 1971년 대선 당시 2등 한 사람을 선거대책위원장으로 세우기로 했는데 자기 대신, 정일형 박사로 하는 바람에 미묘한 갈등이 생겼다는 말이 있습니다. 

“….”

- 이런 이유로 DJ가 민추협 참여에 소극적이었다는 평가가 있는데요. 

“그건 아니에요.”

고개를 저었다.

(동교동계 한화갑 전 민주당 대표도 권노갑과 마찬가지로 DJ가 “참여하라, 불참해라. 이런 건 없었다”며 2020년 <시사오늘>과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하지만 YS와 함께 민추협 구성을 주도적으로 이끈 故김상현 의원이 전해준 건 또 다르다. 그는 2010년 <시사오늘>과의 인터뷰에서 미국에 있던 DJ는 초기에 연합 전선보다 동교동계만의 독자노선을 만들라는 입장이었다고 했다.)

- 김상현을 비롯해 조연하·김녹영·예춘호 등은 민추협이 출범할 때부터 동참했지만, DJ 가신 그룹인 권노갑·한화갑 등은 뒤늦게 참여했어요.

“민추협 초기부터 신민당 창당까지 우리도 많이 도왔어요. 동교동은 김상현 동지가 주도적으로 앞장서 일했잖소. 그래서 우리가 다 들어갔어요.”

- 어쨌든 초반에는 참여를 안 했잖아요. 

“했어요.”

-1984년에요?

“창당 발기인 64명 안에 들어가 있었어요.” 

(1984년 5월 18일 서울 외교구락부에서 출범을 알린 민추협은 초창기 지도부라고 할 수 있는 64명의 인선을 발표한 바 있다.) 

- 그럼 나중에 빠진 건가요?

“아니에요. 계속 들어가 있었어요.”

- 운영 소위나 당직은 안 맡았잖아요.

“나는 공동의장 비서실장이니까.”

기자가 거듭 똑같이 물어와 나는 이 말도 덧붙였다. 

“12대 총선을 앞두고 창당된 신민당에서는 목포 신안 부안 지구당위원장으로 공천까지 받았어요.”
 


- 그런데 출마를 포기했어요.

“출마 준비를 하고 있는데 김홍일(DJ 장남)이가 아버지한테 전화받았다고, ‘이번 선거는 참으셔야 합니다. 아버지가 들어오면 정치 다시 하자 했다고 합니다’라고 했어요. 그 뜻을 받들어서 안 하게 된 거요.”

(DJ는 신민당이 성공할 것이라고 예상치 못했다. 미국에 체류 중이어서 국내 사정에 어두웠다.)

- DJ가 무오류의 정치인이라고 하지만, 오판한 거 아닌가요. 

“나중에는 이 양반이 돌아와서 ‘그때 자네가 12대 국회의원이 됐으면 좋았을 것을’ 이렇게 얘기하더라고.”

(DJ는 2·12 총선 나흘 전 귀국했다. 이후 민추협과 신민당에 본격적으로 합류했다.)

- 정대철 전 대표도 DJ 때문에 신민당서 출마 못 했다고…. 그래서 미안하다고 DJ가 했답니다. 

“...(웃음).”

- 87년도 단일화 실패 원인은 뭔가요. 

“결정적인 것은 문익환, 문동환 목사나 교수 등 재야인사들이 김대중 후보를 따라 통일민주당에 입당하려고 했는데, 김영삼 총재께서 심사하겠다고 한 것 때문이에요.”

‘무슨 근거로 우리를 심사하느냐. 그따위 당에 들어가지 않겠다’며 반발이 심했다. 

- 하지만 YS가 모든 조건을 수용하고 경선하자고 했잖아요. 그것까지 안 받은 이유가 궁금합니다.

“그분들이 입당도 안 됐는데, 받아들이기 힘들었어요.”

- 그럼 경선을 수용하지 않은 원인이 그것 때문인가요? 

“입당을 다 받아줬어야죠.”

(권노갑은 이 문제를 불발의 가장 큰 이유로 지목했다. 그러나 YS는 13대 대선을 앞둔 1987년 10월 22일 미창당 지구당 수를 대폭 요구한 동교동 측 안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경선을 하자고 했다. 하지만 DJ는 4자 필승론을 내세워 독자 출마했다. 결과는 민주세력의 분열, 노태우 후보 승리로 이어졌다.)
 

DJ는 1987 대선에서 평화민주당을 창당해 독자출마했다. 사진은 회의를 앞둔 DJ와 권노갑ⓒ연합뉴스
DJ는 1987 대선에서 평화민주당을 창당해 독자출마했다. 사진은 회의를 앞둔 DJ와 권노갑ⓒ연합뉴스

- 88년 13대 총선을 앞두고도 양김 통합의 시도는 있었습니다. 

“그랬지.”

(통일민주당의 YS는 군정 종식을 위해서는 DJ의 평화민주당과 합당밖에 없다고 생각해 이를 추진했다.) 

-  양당이 소선거구 합의를 전제로 합당하기로 했는데요.

“평화민주당 만들 때 우린 이미 소선거구를 결정해서 한 거예요.”

(총선을 앞두고 선거구제와 관련해 평민당은 소선거구, 통일민주당은 중선거구를 주장했다.)

- YS가 통합을 위해 총재직도 사퇴하고 자신에게 불리한 소선거구제도 전격 수용했습니다.

“그랬지.”

- 그런데 상도동계 최형우 전 내무부 장관이 합당 합의문에 서명하기 위해 서교호텔에서 기다렸지만, 동교동계가 안 나타났어요. 

“…”

- 불발된 이유는 뭔가요. 

“그것까지는 내가 잘 모르겠어요.”

(최형우 전 장관은 양 진영의 통합을 위해 노력한 인물이다. <시사오늘>은 최 전 장관과 그의 부인 원영일 여사를 만나 양당 통합이 불발된 날 현장의 소리를 들은 바 있다.)
 

“정작 합의서에 서명하는 날 동교동계가 아닌 깡패들이 나타나서 결렬됐어요. (그 당시 통일민주당과 평화민주당의 합당이 정말 어려웠는지를 묻자) ‘어려웠다고 봅니다. 결국에는 대선 후보 문제였습니다. DJ는 1987년 대선 이후에도 ‘4자 필승론’을 계속 마음에 두고 있었다고 봅니다. YS와 같이 대통령 후보로 나가자는 것이죠. 그래야 자신이 당선된다고 믿었던 것 같습니다.’”
-2013년 6월 최형우, <시사오늘> 민산되짚기 중-


- 양김이 갈라서면서 민추협도 해체됐어요. 후보 단일화를 하지 못한 책임이 동교동에 더 있다는 평가에 관해서는 동의하나요. 

“우리의 책임이 더 크지.”

(아마도 분당의 책임을 말하는 듯싶었다.)

 

6. 늦은 국회 데뷔 


 

목포에서 당선된 권노갑이 DJ의 축하를 받으며 환하게 웃고 있다.ⓒ권노갑 회고록 순명
목포에서 당선된 권노갑이 DJ의 축하를 받으며 환하게 웃고 있다.ⓒ권노갑 회고록 순명

(DJ 비서로 정치를 시작했던 권노갑은 정치 입문 25년이 지난 1988년 13대 총선이 돼서야 그가 자란 목포에 출마해 처음 금배지를 달았다.)

- 60살이 돼서야 공천을 받은 거네요. 

“만 58세 때요.”

- 재선한 뒤에는 DJ 아들(김홍일)에게 지역구를 넘겨줘야 했잖아요. 섭섭했을 것 같아요. 

“그런 것이 아니오.”

나는 정정이 필요하다고 생각됐다. 목포에서 두 번 당선됐지만, 이후 나는 정계를 은퇴하려 했다. 14대 대선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낙선된 후 정계 은퇴를 선언하면서 나도 그같이 결심했다. 

# 1992년 12월 대선 후, DJ와 권노갑 


DJ : 자넨 계속하게.
권노갑 : 대통령하고 같이 정치했는데, 나도 같이 그만둬야죠. 이제 목포를 떠야 고향인 안동으로 가겠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는 홍일이를 주겠습니다. 


(DJ는 영국으로 떠났다가 1995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귀국했다.)

- 다시 돌아왔을 때 정계 은퇴 번복 아니냐며 여론이 너무 안 좋았던 것이 기억납니다. 

“안 좋았지. 사설에도 나오고.”

 

권노갑 이사장은 DJ가 정계은퇴를 결심했을 때 본인도 DJ를 따라 은퇴를 결심했다고 말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권노갑 이사장은 DJ가 정계은퇴를 결심했을 때 본인도 DJ를 따라 은퇴를 결심했다고 말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 그럼에도 신당(국민회의)을 추진할 수 있던 배경은 뭔가요. 

“처음에는 그럴 생각이 없었어요. 이기택 씨를 민주당 대표로 내세우려고 했지요. 그런데 이 대표가 자기 고집을 너무 부렸어요. 지방선거에서 서울은 김대중 대통령이, 경기도는 이 대표가 공천하면 됐는데 두 지역 모두를 본인이 하려 한 거예요.”

(1995년 6월 지방선거 기간 공천 배분을 놓고 갈등이 발생하자 이기택 대표 측과 동교동계의 갈등이 높아졌다.)

- 국민회의 창당한 것은 그 때문인가요?

“막판에 합의를 봤으면 됐는데, 잘 안됐어요.”

아쉬운 노릇이었다.

“김정길 전 행정자치부 장관이 북아현동으로 가서 이기택 총재를 데리고 김대중 대통령 있는 일산으로 오는 도중이었어요. 이 총재 부인이 전화한 거예요. ‘왜 가냐. 당신 뜻대로 안 되고, 설득당할 거다. 만나지 말고 돌아와라.’ 그 말에 우리한테 안 왔어요.”

김대중 대통령도 그때부터 ‘안 되겠다. 내 소신대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국민회의를 그래서 창당하게 된 거예요.”

창당 때 여론도 나빴고, 많은 반대도 있었다. 그러나 2년 후 김대중 대통령은 1997년 대선에서 당선됐다. 

“좋은 기회를 놓친 거지.”

(이기택 대표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 그분(이기택)의 정치 행보를 보면 독자 세력을 만들려고 했던 게 강했던 듯합니다. 

“애를 많이 썼지.”

(이기택 대표는 1990년 3당 합당 때도 독자노선을 택한 바 있다. 그의 계보인 박관용 전 국회의장은 YS를 따라가야만 차기 대권을 잡는 길이라고 설득했다. 하지만 이 대표는 박찬종·김광일·김정길·노무현·이철 등과 꼬마민주당을 창당했다.)

# 이기택에 대한 박관용의 기억 
(2020년 12월 <시사오늘> 인터뷰에서)

기자 : 이기택 의원이 3당 합당에 합류했다면 차기 대선주자가 되지 않았을까요?”
박관용 : 가능성이 매우 컸죠. 나중에 후회했죠.

(DJ와 이기택 대표 간 화합을 중재한 김정길 전 장관은 처음엔 DJ가 국민회의를 창당한 것을 두고 명분이 없다며 비판했지만, 마음을 돌린 경우다.)

“대선을 앞두고 저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정권교체가 정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 지역주의 해소를 위해서는 DJ가 대통령을 한 번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2011년 10월 김정길, <시사오늘>과의 인터뷰 중-


- 정대철 전 대표는 당시 DJ가 대통령 될 줄 몰랐다고 하더라고요. 대선 경선에 나선 것도 DJ로는 안 되니까 그랬던 거라고요. 판단 착오일까요. 

“정대철이 엘리트 아니오. 경기고, 서울대 출신 그룹에서는 김대중 대통령으로는 어렵다고 생각했어요. 오히려 ‘네가 나가라.’ 정대철을 많이 추대했었지.”

- 김상현 당권, 정대철 대권이란 말이 있었잖아요?

“공동 작전이었지만 실패했지.”

 

7. 국민의정부 


권노갑 이사장은 DJ가 평화적인 정권교체를 이뤄내고 화합과 통합의 정신을 발휘했다고 말했다. 사진은 김대중기념사업회 전경ⓒ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권노갑 이사장은 DJ가 평화적인 정권교체를 이뤄내고 화합과 통합의 정신을 발휘했다고 말했다. 사진은 김대중기념사업회 전경ⓒ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국민의정부가 갖는 역사적 무게감은 컸다. 50년 만에 이뤄진 평화적인 정권교체를 상징했다. 

“DJ가 김중권·이종찬·이강래 등 군부세력을 중용했는데요….”

어찌 생각하는지 묻고 있었다. 

“이종찬 국정원장은 민자당 대통령 후보로 나오려다 포기할 때부터 이미 김대중 대통령 쪽으로 와 있었어요. 이강래 기조실장과 두 사람은 대통령께서 출마 선언하지 않았을 때부터 깊은 인연이 있었어요.”

-김중권 비서실장은요. 

“정무수석에, 국회의원에, 법사위원에 경륜도 많은 사람 아니오. 경상도 사람이고. 동서 간 화해 차원으로 한 거지요.”

(DJ는 자기 사람 아닌 이들을 중용했다. 함께 고생한 동교동계는 대선 성공의 열매를 맛보기 어려웠다.)

- 아쉬웠겠어요. 

“우리는 대통령 선거 전에 이미 ‘김대중 정부에서 어떤 임명직도 받지 않겠다’고 발표한 사람들이에요.”

- 요즘 정치는 자기 사람 돌려쓰고, 회전문 인사가 많잖아요. 

“우리 대통령은 그리 안 했어요. 광범위하게 인재를 뽑았지.”

- 탕평 인사도 좋지만, 그것 때문에 상교동계나 동교동계 모두, 세력이 약해졌다고 합니다. 
“이 양반은 원칙이 있었어요.”


측근이라고 해서 덮어놓고 중용하지 않았다. ‘얻어먹으려 하지 말고 노력해서 이겨라. 스스로 자기 자신이 발전해라.’

다시 기자의 팩트 체크가 시작됐다. 

-2002년 대선을 앞두고 DJ는 노무현 vs 이인제 중 누구를 지지했나요. 

“대통령은 중립이었고 나는 첫 번째 이인제, 그다음에 노무현.”

하지만 이인제 후보가 발언을 잘못했다. ‘대통령과 박지원이 협력해 노무현을 돕고 있다’는 식으로 발표한 거였다. 그러지 말라고 했다. 그래도 수용하지 않기에 안 되겠다 싶어서 나도 노무현 후보를 도왔다. 

(박지원 대변인도 DJ정부에서 비서실장을 지냈다.)

“박 비서실장은 동교동계입니까. 아닙니까.”

이런 논란이 많이 있어왔다고 한다. 

“기지(맞다).”

- 둘 사이 권력 다툼 설도 있었는데요.

“아니요.”

(권노갑은 단칼에 부정했다.) 

- 동교동계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인물은 누구입니까. 

“심재권이오.”

(심재권 전 국회의원은 1970년대 서울대 운동권의 전설로 불렸다.)

“학생으로서 민주화를 위해 노력했고,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때도 앞장서서 독재 정권에 맞서 싸웠던 사람은 누가 뭐라 해도 심재권이에요. 그 같은 사람은 정말 높이 평가해야 해요.”

외신에 광주의 참상을 알린 것도 그였다. 윤보선 전 대통령, 함석헌 선생을 비롯해 김대중 대통령이 이끌었던 단체(민주회복민족통일국민연합)에서 학생대표 위원을 맡고 있던 심재권은 광주 5·18 때 성명서를 만들어 내게 전해줬다. 

‘김대중을 석방하라. 계엄령을 해제하라.’ 

이런 내용이 담겨 있었다. 나는 이를 외신에 전해주기 위해 <아사이신문>의 미스 윤을 찾아갔다. 

- 미스 윤요?

“신문사 직원요.” 

택시를 타고 도망 다니면서 미스 윤을 만나 전해준 거였다. 

“그 뒤 <아사이신문>에서 1면 톱으로 보도가 됐고, 그게 결국 세계로 퍼진 거예요. 한국 신문에는 나오지도 못할 땐데 그 역할을 심재권이 한 거요.”

 

8. 고난의 시절 


권노갑 이사장은 중앙정보부와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 심한 물고문을 받았다고 말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권노갑 이사장은 중앙정보부와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 심한 물고문을 받았다고 말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화제가 전환됐다.

- 기억력이 좋으세요. 

“내가 지금도 수첩을 안 갖고 다녀요.”

(그는 걸어 다니는 인명사전으로 불린다.)

대학 시절 영어 암기 하던 것이 습관화된 것도 있지만, 민주화 투쟁 내내 정보부로부터 감시를 당했다. 메모지 같은 데 잘못 썼다가 노출이 되면 안 되니 전화번호 등 웬만한 것들은 항상 머릿속으로 기억하고 있어야 했다. 

- 고문도 많이 당했잖습니까. 

“많이 당했지.”

유신 때는 중앙정보부에서, 신군부 때는 남영동에서 심한 물고문을 받았다. 1972년 유신 반대 운동으로, 1976년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중앙정보부에 잡혀 들어갔을 때다. 수사관들이 몸을 다 벗겨놓고 거꾸로 매달았다. 물을 먹이면 숨이 막혀왔다. 
1980년 5·18 때는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갔다. 목욕탕 같은 곳에서 발가벗겨 눕게 했다. 벨트 6개로 손과 발을 묶은 뒤 그 위에 사람이 올라타서는 입안으로 물을 뿌려댔다. 

- 최형우 전 장관 경우는 고통도 고통이지만 수치심이 너무 컸다고 하더라고요.

“….”

고문도, 수치심도 참기 힘든 고통이었다. 

 

“권노갑은 고문을 당할 때 수사관이 놓고 간 볼펜을 바라보며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한다. ‘차라리 저걸로 내 눈을 찔러버리면 잠시라도 고문을 멈춰주려나….”
-권노갑 회고록을 함께 쓴 <동아일보> 
김창혁 기자의 글 중-

 

- 그런 고문을 당하면, 불러주는 대로 안 할 수 없지 않나요. 

“죽기를 각오하고 안 불었어요.”

고문이 안 통하면 회유도 들어왔다. 당시 돈으로 3000만 원을 주겠다, 미국으로 유학을 보내주겠다 등….

- 갈등이 생겼을 것 같습니다.

“유혹이 많이 들어왔지만 안 넘어갔어요.”

어떤 순간에도 나는 김대중 대통령과의 신의를 지켰다. 일편단심이었다. 내게는 반드시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겠다는 집념이 있었다. 그게 내 모든 고통을 이기는 힘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너무 맹목적으로 ‘DJ한테 충성한 것이 아니냐’는 얘기도 들려요. 

“그런 건 아니에요.”

오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권노갑 이사장은 회고록에서 옥고 치른 이야기를 많이 전했다. 사진은 한보 사태 때 권노갑ⓒ연합뉴스
권노갑 이사장은 회고록에서 옥고 치른 이야기를 많이 전했다. 사진은 한보 사태 때 권노갑ⓒ연합뉴스

- 회고록에 유독 옥고 치른 얘기를 많이 할애했어요. 

“제일 억울한 것은 있지도 않은 현대 사건에 연루됐던 거요.”

(목소리가 잠시 격앙됐다. 진승현 게이트가 무죄로 판명 난 지 얼마 안 돼 무수한 의문을 남겼던 현대 비자금 수수 사건으로 권노갑은 유죄를 받았다. 한보 사태로도 고초를 겪었다. 이를 두고 권노갑은 기구한 운명에 빗댔다.)

“구속되고 풀려나 다시 구속되고 풀려나는 일이 되풀이된 내 팔자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전생에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러 팔자가 이리도 기구한 것일까. 수즉다욕(壽則多辱)이라 했던가? 한보 사태 이후 내가 치르는 이 치욕적인 옥살이는 사건의 ‘진실’과는 하등 연관이 없습니다. 언젠가는 나의 무고함이 밝혀지게 될 것입니다. 진실은 하나이지 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는 스스로에 물어보았습니다. 왜 하늘은 내게 이런 고통을 준 것일까?”
- 권노갑 회고록 중-

 

9. 시작도 끝도 DJ



(인터뷰 중간중간 그는 자문자답하듯 이런 말을 쓰곤 했다.)

“모든 것은 운명이오.”

(억울함 역시 묻어두고, 마음을 비운 듯했다. 천명에 순종한다는 회고록 제목인 <순명>이 떠올랐다.)

“책은 순명, 별명은 쑥구잖아요?
“그렇지.”

동교동계에서 나는 쑥구 형님으로 통했다. 

“무슨 뜻인가요.”
“쑥구는 전라도 사투리로, ‘어리숙한 바보’라는 뜻이에요.”
“아하.”
“어렸을 때부터 나는 순하고 어리숙했소. 뭐든지 ‘응, 예. 알았어요.’ 화도 안 내고 나쁜 사람도 나쁘게 안 보고.”

(다시금 <순명>이 떠올랐다. 권노갑을 만나 본 사람들은 느낄 수 있다. 한 시간 반 남짓 인터뷰에서조차 사람 참 좋아 보인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좌절과 고난, 영광과 환희, 회환과 슬픔 모두에 순응해온 듯 초연함만이 어려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엔 역시나 DJ가 있었다.) 
 

권노갑 이사장은 DJ와 같이 일생을 보낸 정치 동반자, 김대중의 제자로 기억되고 싶다고 말했다. 사진은 유세 현장을 누비는 DJ와 권노갑ⓒ연합뉴스
권노갑 이사장은 DJ와 같이 일생을 보낸 정치 동반자, 김대중의 제자로 기억되고 싶다고 말했다. 사진은 유세 현장을 누비는 DJ와 권노갑ⓒ연합뉴스

- 어떤 정치인으로 후세에 기억되고 싶은가요.

“김대중 대통령과 같이 일생을 보낸 정치 동반자, 김대중의 제자로 기억되고 싶소.”

대통령은 용서와 화해의 정신으로 자신을 탄압했던 자들마저 포용했다. 훌륭한 정책을 만들어 국민으로 하여금 신뢰받는 국정을 이끌었다. 노벨평화인권상을 수상해 세계적으로 대한민국의 자긍심을 높였다. 

“그분이 대통령까지 가는데 내 삶을 바쳤다는 것, 가장 가까이 모셨다는 것이 내 일생 가장 큰 자랑스러움이오.” 

내 비석에는 아무 관직을 쓰지 말고, 오직 ‘김대중 대통령의 비서실장 권노갑’이라는 말만 담기길 바란다. 

(정치 시작도 김대중, 끝도 김대중의 사람이고 싶다는 얘기였다. 어찌 보면 동교동계 가신들의 특징 같기도 했다.)

“DJ를 위해 나를 바치자는 생각이었으니까. DJ가 ‘너 필요 없어’ 쫓아 보내도 다리 붙들고 대통령 될 때까지 있겠습니다, 할 판이었어요. 왜냐면 나는 확신이 있었거든요. DJ는 반드시 대통령이 된다는 확신이 있었어요. 신념과도 같은 거였죠.”
-한화갑, 2020년 <시사오늘> 민추협 되짚기 중-


- 민주당으로 복당하시죠?

“다시 내 정치적 뿌리로 돌아가는 거요. 김대중 대통령과 우리가 창당한 정당, 민주당으로 말이오.”

(평화민주당이 지금의 더불어민주당 뿌리다. 권노갑은 민주당에 대한 호남 심판론이 거세던 2016년 정대철·박지원 등과 탈당해 안철수 국민의당 창당을 도왔다. 권노갑은 정대철 등과 1월 13일 복당 신청서를 낸다고 했다.)

“잠시 떠나 있었지만, 마음만은 늘 민주당에 있었어요.”

(그 말을 하는 눈에 북받침이 스쳤다.)

“정치권 중에서는 누구를 눈여겨보나요.”
“김민석, 송영길, 박용진.”

(김민석 의원과 송영길 대표는 권노갑이 정치권에 영입한 케이스다. 그들에 대한 애정이 여전한 듯했다.)

“지난번 뵀을 때도 그렇지만, 참 정정합니다.”
“하하.”

(2021년 12월 국회도서관에서 진행한 민추협 학술회의 때를 말한다. 그날, 김덕룡과 함께 민추협 공동이사장인 권노갑은 개회사를 통해 민추협 정신인 화합과 통합을 강조했다. 인터뷰를 마무리하면서는 다시 민추협 얘기로 끝을 맺고 싶었다.)

“제가 민추협에서 느낀 감정은 권선징악. 정의가 승리한다입니다.”
“험난한 역사였지만 민주주의사에 남을 자랑스러운 업적이지.”

6·10항쟁도, 직선제 쟁취도 민추협이 앞장섰기에 가능했다.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아카데미를 만들면 어떨까요.“ 
“후원회가 없어서 어려워요. 노무현 재단 같은 곳은 잘 걷히지만 우리는 없어요. 김영삼기념사업회도 잘 안 되잖소?”

쓸쓸한 말들이 오갔다. 

※<시사오늘>의 ‘시대산책’은 인터뷰이의 구술을 화자의 시점으로 재구성해 정리하는 형식의 코너입니다. 기술상의 이해를 돕고자 화자의 심리적 기법을 가미하거나 배경 상의 설명을 부연한 점 말씀드립니다. 아래 괄호부분은 본지 설명입니다.

담당업무 : 정치, 사회 전 분야를 다룹니다.
좌우명 : YS정신을 계승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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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인 2022-01-28 15:32:32
정치인들이 다들 정신이 이상해지는건 알았지만, 권노갑까지 이 정도인줄을 몰랐다. 정상적인 사람들이라면 정치를 멀리 해야하나보다.

하하 2022-01-26 11:49:46
DJ와 비서실장 고문님이 민주화를 이뤄내셨죠!!!

하하하 2022-01-26 11:47:30
말씀 등이 너무 존경스럽습니다. 한눈에 역사를 다 배우게 되네요 DJ 그립네요 ㅠ

2022-01-25 18:20:11
지랄하고 자빠졌네요

정치도사 2022-01-23 15:51:47
지나간 역사가 한눈데 보이네요. 민주주의를 쟁취하던 그때의 감동이 느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