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항쟁 되짚기⑫] 최재호 “故박종철·이한열 피에 보답하려 넥타이 부대로 참여”
스크롤 이동 상태바
[6월항쟁 되짚기⑫] 최재호 “故박종철·이한열 피에 보답하려 넥타이 부대로 참여”
  • 윤진석 기자
  • 승인 2022.03.04 11:3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최재호 전국사무금융노조연맹 초대위원장(넥타이 부대 주역의 일원)
“어린 학생들 희생이 평범한 시민들 움직여”
“명동 거리 넥타이 부대는 시민 참여의 메카”
“노조 최초 4·13 호헌조치 반대 성명 발표”
“민노총 맹아, 최초로 독립 산별노조 만들어”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윤진석 기자]

최재호 전국사무금융노조연맹 초대위원장은 노조 최초 4·13 호헌 조치 반대 성명에 동참했다. ⓒ시사오늘
최재호 전국사무금융노조연맹 초대위원장은 노조 최초 4·13 호헌 조치 반대 성명에 동참했다. ⓒ시사오늘

6월항쟁 넥타이 부대 주역 중 한 명. 또한 대한민국 노동조합 발전사의 단면을 함축한 인물이기도 하다. 노조로서는 처음 4·13 호헌 조치 반대 성명을 발표하고, 독립된 산별 노조의 최초 합법화에 나서며 민주노총의 맹아가 돼준 전국사무금융노조연맹(사무금융노련) 최재호 초대위원장이다. 

1987년 4월 13일 전두환 정권이 호헌조치를 발표했다. 열흘이 지난 23일, 한국노총은 구국의 결단을 환영한다는 담화문을 발표했다.

법적으로 보장됐던 노조는 한국노총이 유일했을 때다. 엄혹한 시대 속 제한적 의미로 노조 활동이 허용된 터라 지금과 달리 어용 시비에 휘말렸다.

그때였다. 한국노총 담화문에 반대한다는 움직임이 노조 내부에서부터 일어나기 시작했다. 

 

 

 

4·13 그때, 노조 최초의 성명서 


 

“우리는 1987년 4월 23일자의 한국노총의 ‘4·13 대통령 특별담화 지지성명’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천명한다. 
1. 노총성명은 노동자의 권익을 증진시키는 정치제도에 대한 진지한 고려없이 정부의 일방적 요구에 의한 것으로서 노동자의 입장이 아니다.
2. 노총성명은 의사결정에 있어서 지극히 비민주적인 과정에 의한 것으로서 전체 의원조합 및 조합원의 견해가 아니다.
3. 노총은 구태의연한 정치적 자세를 탈피하고 이번 성명을 즉각 철회하라.
- 1987년 5월 8일 전국금융노동조합연맹  산하  13개 단위노조 간부  17명 성명서-

 

5월 8일이었다. 전국금융노동조합연맹(금융노조) 산하 13개 단위 노조 간부 17명이 주도해 최초로 4·13 호헌에 반대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노동운동하면 생산직 노동자들의 전유물로 인식돼 오던 시대에서 제도금융권 사무 노조 스스로 연합전선을 구축해 한국노총에 반대하는 반박 성명을 낸 것 자체가 센세이션 한 일이었다. 

최재호 사무금융노련 초대위원장은 이를 주도한 13개 금융노조 대표 중 한 사람이었다. 

지난달 22일 여의도 모처 카페에서 만난 그는 책자를 건넸다. 사무금융노련에서 창립 30주년(올해로 35주년을 앞두고 있다)을 기념해 만든 <합법성 쟁취 투쟁 기록물>이었다. 
 

최재호 위원장은 전국사무금융노련에서 발간한 합법성 쟁취 투쟁 기록물을 보여줬다.ⓒ시사오늘
최재호 위원장은 전국사무금융노련에서 발간한 합법성 쟁취 투쟁 기록물을 보여줬다.ⓒ시사오늘

“여기 보이죠?”

성명서가 스크랩된 지면의 하단을 가리켰다. 한일투자금융노조위원장 정일영, 비씨카드 노조위원장 남을우, 범한화재 노조위원장 박이준, 현대해상화재보험노조위원장 김형철, 신동아화재해상보험노조위원장 허장 등 대표자들의 이름이 열거돼 있었다. 당시 직함인 한국산업은행 자회사 한국산업리스(현 산은캐피탈) 소속의 노조위원장 최재호라고 쓴 서명도 보였다. 

페이지를 넘겨봤다. ‘노총 담화 지지 근로자 뜻 아니다’(조선일보 87.5.9), ‘노총 묵묵부답’ 등 그 무렵 작게나마 보도된 신문들이 스크랩됐다. 

“<전태일 평전>의 조영래 변호사도 신문 칼럼을 통해 지지를 보내줬어요.”
 

“특히 충격적이었던 것은 금융노조 산하 몇몇 조합이 대한노총의 호헌지지 성명을 자기들의 뜻이 아니라고 반박하고 나선 일이었다. 대기업에 소속된 봉급생활자들로서 이른바 ‘보통사람들’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는 은행원들이 보여준 이 같은 시민적 용기는 한국민들의 높은 정치적 수준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하겠다.”
-87년 5월 23일 <중앙일보> 조영래 칼럼 중-


칼럼을 읽어내려가는 얼굴에서 반대 성명서를 낸 데 대한 자부심이 엿보였다. 
 

최재호 위원장은 1971년 서울 상대를 입학해 79년 졸업한 뒤 한국산업리스에서 근무했다.ⓒ시사오늘(사진 : 최재호 위원장 제공)
최재호 위원장은 서울대 상대 출신으로 졸업 후 종합상사 등을 거쳐 1979년 한국산업리스에서 근무했다.ⓒ시사오늘(사진 : 최재호 위원장 제공)

 

71학번으로 서울대 상대 졸업 후 종합상사 등을 거쳐 1979년 한국산업리스에 입사한 그는 학창 시절 학생운동을 한 것은 아니었다. 1983년 직장 내 민주화 요구로 노조가 설립되면서 노동운동과 연을 맺게 됐다.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은 4·13 호헌조치 때였어요. 전두환 정권이 ‘동장에서 대통령까지 내 손으로 뽑자’는 국민의 직선제 요구를 무시하고 개헌하지 못하겠다면서 본 조치를 발표했어요. 가치 판단에서 볼 때 이건 아니다는 생각이 강했어요.”

그 무렵이었다. 최 위원장을 찾아와 같이 하자고 한 친구가 있었다. 성명서 대표 명단에서 보이던 정일영 한일투자금융노조위원장이었다.

“이 친구 보니까 학교 다닐 때 운동을 좀 했더라고요.” 

학생운동 한 사람 중 상당수가 현장에 투신했을 때다. 정 위원장은 위장 취업 대신 회사에 온 경우였다.

“이런 친구들은 옛 동지들에 대한 부채 의식이 있었어요. 자신은 편하게 금융기관에 다니는데 같이 운동했던 동지들은 현장에서 고생하고 있다는 생각에 고통스러웠던 거지요. 그런 의미에서 노동조합 활동에 더 적극적이었던 것 같아요.”

최 위원장도 같이하다 보니 동지 의식이 강해졌다.
 

전국사무금융노조연맹의 최재호 초대위원장은 6월 항쟁은 시민 참여가 성공의 결정타라고 말했다.ⓒ시사오늘
전국사무금융노조연맹의 최재호 초대위원장은 6월 항쟁은 시민 참여가 성공의 결정타라고 말했다.ⓒ시사오늘

- 성명서 낸 후 고초를 겪거나 하지는 않았나요. 

“겪을 뻔했죠.” 

지금 생각해도 간담이 서늘하다며 최 위원장이 웃었다. 

“안기부에서 우리를 DJ(김대중) 지령받고 성명서를 낸 것으로 처음엔 판단했대요. 좌익 세력 인사가 개입된 것으로 보고 색출해 건수를 잡으려 한 거죠. 근데 뒷조사를 해보니까 제 고향은 TK(대구경북)거든요. 대구에서 고등학교를 나오고 서울로 올라온 경우였어요. 핵심 멤버인 정일영이란 친구도 고향이 경남 합천이었어요. 전두환 고향(웃음). 아, 그제야 안기부에서 DJ와는 관계가 없구나 판단하게 된 거예요. 자발적 조직이라고 생각하고 좀 부드럽게 나가더라고요. 안 그랬으면 박살났을 거예요.”

- 고향이 호남이었다면 엮을 수도 있었겠네요. 

“그렇죠.”

지역주의가 팽배했던 상황을 짐작게 했다. 

- 어쨌든 6월항쟁을 앞두고 노조 최초로 성명서가 발표된 건데 오늘에 이르기까지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은 듯합니다.

“핵심 운동권들이 볼 때는 자기들 중심으로 6월항쟁을 생각했을 테니까요. 사무직 노동운동에 대해 우습게 생각하던 때였어요. 그런 이유로 조명받지 못했던 게 아닌가 싶어요.”

 

시민 참여의 메카, 넥타이 부대 


넥타이 부대로 참여한 회사원들과 시민들이 최루탄을 맞고 피하고 있다.©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6·10 민주항쟁 홈페이지 아카이브 화면 캡처
넥타이 부대로 참여한 회사원들과 시민들이 최루탄을 맞고 피하고 있다.©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6·10 민주항쟁 홈페이지 아카이브 화면 캡처

최 위원장이 다니던 한국산업리스 사무실은 서울 명동 거리 롯데백화점 빌딩 안에 자리하고 있었다. 주변에는 은행, 보험회사 등 주로 금융계가 많았다. 김수환 추기경이 있는 명동성당과도 가까웠다. 오다가다 들리면 광주 민주화운동에 대한 필름이 상영되곤 했다. 

1987년 5월 18일이었다. 명동성당에서는 광주민주항쟁 7주기와 함께 故박종철 군의 추모 미사가 열렸다. 

“신부님들이 박종철 열사의 고문치사 축소 은폐가 있었다는 성명을 발표했어요. 누구에게는 아들뻘이고, 동생뻘인 한 어린 학생의 죽임이잖아요. 운동권을 떠나 평범한 시민으로서 굉장히 분노스러워했던 기억이 나요.”

울분과 격정이 고조되던 해였다. 1월엔 박종철 열사가 고문으로 숨졌다. 2월에는 부천 경찰서 권인숙 성고문 사건에 대한 항소심 공판이 열렸다. 4월 13일 호헌조치에 맞선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는 직선제 개헌 운동을 벌였고 5월 27일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를 발족했다. 6월 9일 이한열 열사가 연세대 앞에서 최루탄을 맞고 쓰러졌다. 다음날(10일) 전두환 정권은 장충동 체육관에서 민정당의 새 대통령 후보로 노태우 후보를 선출했다. 전국 곳곳에서 시위가 불길처럼 번졌다. 

6월항쟁의 서막이 올랐다. 

최 위원장도 거리로 나와 호헌철폐를 외쳤다. 6월항쟁을 대표하는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를 상징하는 대표 키워드가 넥타이 부대다. 최 위원장도 그 주역의 일원이다.

“순수하게 나선 넥타이 부대는 시민 참여의 메카와도 같았어요. 저 또한 노조원의 한 사람으로서, 시민으로서 넥타이 부대가 됐던 거고요.”
 

최재호 위원장이 다니던 한국산업리스는 명동성당 부근에 있었다. 6월항쟁 기간 동안 최 위원장은 출퇴근하며 자연스럽게 시위에 동참했다.ⓒ시사오늘
최재호 위원장이 다니던 한국산업리스는 명동성당 부근에 있었다. 6월항쟁 기간 동안 최 위원장은 출퇴근하며 자연스럽게 시위에 동참했다.ⓒ시사오늘

- 어떤 식으로 참여했나요. 

“명동성당 뒤 칼국숫집이 있었어요. 점심 먹으러 가다 시위에 합류하고, 퇴근하다 같이 행진했어요.”

그게 일상이었다. 

“사무실 안에 있을 때는 창문 바깥으로 두루마기 휴지를 내려보냈어요. 최루탄 맞으면 닦으라는 의미도 있었지만, 학생들에게 보내는 응원의 메시지기도 했어요. ”

- 주변 분위기는요.

“시위대에서 노래 부르면 버스 탄 승객들이 따라 부르고, 택시 기사들은 지지의 표시로 클랙슨을 울리면서 지나갔어요. 상인들은 학생들 고생한다고 돈 받을 생각 않고, 도망가면 가게에 숨겨줬어요.”

장면들이 연상됐다. 

“시민들이 그만큼 학생들과 한마음이 된 거예요.”

- 명동성당 안에도 학생들이 많았지요?

“경찰과 대치 중인 학생들이 명동성당에서 밤샘 농성을 했어요. 원래는 다른 장소에서 하려다 사전에 정보가 누출되는 바람에 성당으로 모여들게 된 거예요. 추모 미사도 열리고 시위도 진행되면서 6월항쟁의 성지가 돼갔지요.”

- 6·29 선언이 발표됐을 때는 어떤 기분이었나요. 

“우리가 이겼다.”

당시를 회고하며 외마디를 외쳤다. 

“전두환 정권이 항복 선언을 했다고 생각했어요.”

성취감이 상당히 컸다. 

- 6월항쟁 성공의 결정타로 보는 것은요.

“평범한 시민들의 참여가 없었으면 절대 성공할 수 없었을 거예요. 그때 앞장서 싸웠던 운동권 학생들인 이인영 통일부 장관이라든지 임종석 전 비서실장 등을 만나 들어보세요. 과연 학생들만의 데모로 6월항쟁이 성공할 수 있었겠어요.”

- 시민들은 왜 참여한 건가요. 

“어린 학생들의 희생이 보통의 시민들 마음을 움직인 거예요. 젊은 학생들이 흘린 피에 우리 스스로 뭐 하고 있는지를 되묻게 된 거죠.”

그 결과 시민의 힘이 폭발해 독재자를 무너뜨리고 직선제를 쟁취했다는 평가였다. 

“학생들 피에 보답한 시민의 참여가 6월항쟁 성공의 결정타가 돼준 거예요.”

- YS·DJ(김영삼·김대중)를 주축으로 한 야당 중심 제도권의 노력이 6월항쟁 성공의 결정타라는 조명도 새롭게 진행되고 있는데요.

“정치권이야 원래 자기들 하는 일이 그거니까 당연히 할 수밖에 없는 거 아닐까요.”

- 87 대선을 앞두고 양김 단일화 실패를 지켜봤을 때는 어땠나요. 

“우린 졌다고 봤어요. 단일화돼서 이겼다면 민주세력이 더 단결되고 훨씬 성숙할 수 있었을 거예요. 아쉬운 일이죠.”

- 누구를 지지했어요?

“YS요(웃음).”

 

‘민주노총의 맹아’ 산별 노조 합법화


87년 6월항쟁 이후 노조 활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최 위원장도 우리나라 최초로 독립된 노조 산별단체 합법화를 위해 노력했다. 사진은 금융사무직 노동자 대회ⓒ연합뉴스
87년 6월항쟁 이후 노조 활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최 위원장도 우리나라 최초로 독립된 노조 산별단체 합법화를 위해 노력했다. 사진은 금융사무직 노동자 대회ⓒ연합뉴스

- 노조 활동도 이후 활발해지잖아요?

“노조운동이 폭발적으로 일어났어요. 생산직이나 일부 사무직을 넘어 금융기관, 병원, 언론출판, 대학교, 연구기관 등에 걸쳐 광범위하게 생겨난 거예요. 한 4만여 개에 이를 정도였지요. 국민소득이 크게 오를 때라 임금인상도 많이 됐어요. 어느 곳은 20~30% 월급이 올랐죠.”

금융권 노조도 변화를 시도했다. 한국노총이 자신들을 대변하지 못한다고 본 이들은 탈퇴해 제2금융권 중심의 새로운 독립 노조를 만들었다. 87년 11월 27일 45개 노동조합 250여명 조합원이 명동성당에 모여 한국자유금융노조연맹을 설립했다. 단체명은 폴란드 바웬사의 자유노조에 영감을 얻어 지어진 이름이었다. 

“우리나라 산별연맹으로서는 처음으로 직선제를 통해 위원장을 선출했어요.”

조합원들이 직접 뽑아 선출된 이가 그였다.

- 이후 어떤 활동을 했나요.

“자유금융노련의 합법화에 주력했어요.”

- 합법화하기가 어려웠던 건가요. 

“노조 독점권을 한국노총이 갖고 있던 때예요. 아무도 노총 밖에서는 산별 노조를 만들 수가 없었어요.”
 

최재호 위원장은 노조원들과 장외로 나가 산별 노조 합법화를 위한 투쟁에 나섰다고 말했다.ⓒ시사오늘
최재호 위원장은 노조원들과 장외로 나가 산별 노조 합법화를 위한 투쟁에 나섰다고 말했다.ⓒ시사오늘

하는 수없이 합법성 쟁취 투쟁에 나서야 했다. 

“장외로 나갔어요. 노동부 장관과 국무총리를 상대로 공개 질의하고 면담을 요구했어요. 정부종합청사 앞으로 갔을 때는 경찰이 해산시키기도 했어요. 서명운동을 전개하며 대중에 직접 호소하기도 했지요. 9개월 동안 황야에 있었죠.”

이윽고 온갖 난관을 뚫은 끝에 합법적 지위를 쟁취할 수 있었다. 1988년 8월 13일 자유금융노련은 정식으로 신고필증교부를 받을 수 있었다. 
 

1988년 8월 16일 한겨레신문에 보도된 최재호 위원장 인터뷰ⓒnavernewlibrary
1988년 8월 16일 한겨레신문에 보도된 최재호 위원장 인터뷰ⓒnavernewlibrary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힘을 모아준 단위노조와 조합원들에 대한 고마움이 앞섭니다.” 설립 9개월여의 진통 끝에 13일 노동부로부터 신고증을 교부받아 21번째 산별연맹으로 등록된 전국사무금융노동조합연맹의 최재호(38)위원장은 집행부의 지도노선에 신뢰를 갖고 끝까지 결속해준 조합원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1988년 8월 16일 <한겨레신문> 기사 중-

 


노조 역사상 의의가 컸다.

“우리나라 최초로 독립된 노조 산별단체를 만든 거였어요. 이해찬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언젠가 행사에서 사무금융노련을 가리켜 민주노총의 뿌리라고 소개했던 이유죠. 우리가 싸워 합법화를 이뤘기에 1995년 민주노총이 만들어질 수 있었어요. 민노총의 맹아가 돼준 거예요.”

 

민주공화국이라는 착각


최재호 위원장이 투옥될 당시의 모습이 담긴 전국사무금융노련에서 발간한 합법성 쟁취 투쟁 기록 책자ⓒ시사오늘
최재호 위원장이 투옥될 당시의 모습이 담긴 전국사무금융노련에서 발간한 합법성 쟁취 투쟁 기록 책자ⓒ시사오늘(자료 : 최재호 위원장 제공)

 

전국사무금융노조연맹으로 이름을 바꾼 단체는 6월항쟁의 정신을 바탕으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1991년 노조 최초로 민자당 낙선 운동을 주도했다. 최 위원장은 이 일로 투옥되기도 했다.

2대까지 위원장을 맡은 뒤에는 현업에 복귀했다. 베트남 합작법인 사장으로 파견 나갔을 때는 리스법 제정, 첫 리스회사 설립, 회사채 발행 등을 최초로 시도해 성과로 연결했다. 본사 상무를 끝으로 퇴사했다.

대선을 앞두고는 금융노조 동지였던 정일영 전 삼성증권 지점장 등과 의기투합해 6월항쟁 넥타이 부대 1987명의 이름으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를 지지 선언했다. 이후 민주당 선대위에서 직능본부 부본부장으로 활동 중이다. 

지지 이유를 물었다. 

“<넷플릭스>를 보면 <위기의 민주주의>라는 게 있어요. 부자와 검찰, 언론이 노동자들을 어떻게 패퇴시키는지가 나와요. 과거 군사독재는 아무한테도 견제받지 않는 권력을 행사했잖아요. 지금은 검찰이 그래요. 조국 사태 등을 거쳐 등장한 무소불위의 권력이 바로 검찰과 법조 권력이에요.”

- 어떤 점에서요.

“가령 2019년 문재인 대통령이 법무부 장관을 임명하려는데 (윤석열) 검찰총장이 반기를 들고 조 전 장관의 부인을 기소하는 일이 벌어졌잖아요. 정치검찰과 언론이 협력하면 민주주의가 작동하지 않아요. 아무도 견제할 수 없어요. 우리가 민주공화국이라는 착각 속에 살고 있었다는 걸 개인적으로는 각성하게 된 계기였지요.”

민주주의 위기의식의 발로로 지지한다는 역설적 답이 돌아왔다.

“그리고 촛불 혁명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유능한 경제 대통령이 나와야 해요. 경제를 살려 민생을 구할 때만이 촛불 정신이 완성된다고 생각해요.”

이 말도 덧붙였다. 

“이재명 후보가 애처롭다면서도 민주당 의원들이 미워 안 뽑는다는 지인이 있어요. 그런 진보 진영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요. 당신 방식으로 하면 가장 미워하는 사람이 대통령 된다. 그것만은 막아야 하지 않겠느냐고요.”

P.S.

요약하면 이번 87년 6·10항쟁 되짚기 12번째는 넥타이 부대의 주역을 만나 시민참여의 계기를 살펴보고 산별 노조의 합법화를 이뤄낸 당사자로서 그 시대 노조 발전사의 일면을 담아봤다. YS(김영삼)와 12대 총선의 재발견(정세운)을 모티브로 민주 항쟁의 결집체 역량(김민석), 전대협의 방향 전환(함운경), 비폭력 평화 운동(김현), 4‧13 호헌조치가 결정타(유기홍), 진화하지 못한 586의 명암(明暗)(이현종), 천주교계의 국본 참여(이명준), 박종철 고문치사 조작 사건을 알린 특종기자의 투쟁기(이부영), 시민의 자발적 참여가 성공의 결정타(이재오), YS총선 참여, 6·10항쟁의 동력(이성헌), 언론인으로서 바라본 6월항쟁(최문순)에 이어서다.

담당업무 : 정치부 기자입니다.
좌우명 : 꿈은 자산!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