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비극의 역사, 융건릉을 찾아서 [일상스케치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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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비극의 역사, 융건릉을 찾아서 [일상스케치㊲]
  • 정명화 자유기고가
  • 승인 2022.04.24 12:53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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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와 혜경궁 홍 씨의 융릉
아들 정조와 효의왕후의 건릉
비참한 최후를 맞은 부왕 원혼 위로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정명화 자유기고가)

유사 이래 인간사에서 권모술수와 이전투구는 끝없이 횡행해왔다. 조선시대 그 치열한 역사의 희생양 중 대표적인 인물인 사도세자. 후세에 전해진 가장 비극적인 가족사, 아픔의 주인공으로 회자되는 그의 흔적을 찾아 나섰다.

때는 산천이 춤을 추고 새들은 소란스러울 정도로 연일 지저겨 대는 계절이다. 전국 방방곡곡 행락객이 넘실거리는 완연한 봄날,  광기 어린 비극의 주인공인 사도세자 능은 어떤 모습일까. 목적지인 경기도 화성 융건릉으로 향하는 길은 먹먹한 가슴과 무거운 발걸음으로 착잡했다.

홍살문과 정자각이 보이는 융릉 입구. ⓒ정명화 자유기고가
홍살문과 정자각이 보이는 융릉 입구. ⓒ정명화 자유기고가

융릉은 장조(莊祖, 사도세자)와 그의 비 헌경왕후(獻敬王后, 혜경궁 홍 씨)의 능이다. 근처에 위치한 제22대 정조와 효의 황후 능인 건릉(健陵)과 함께 사적 제206호로 지정되어 있다. 화성팔경 중 제1경으로, 2009년 유네스코가 정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될 만큼 출중하다.

경내 입구 융건릉 역사문화관 내부. 장조(사도세자)와 정조의 생애 기록물과 영상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정명화 자유기고가
경내 입구 융건릉 역사문화관 내부. 장조(사도세자)와 정조의 생애 기록물과 영상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정명화 자유기고가

융릉 가는 길

융릉 가는 길목, 상수리나무와 소나무 숲길. ⓒ정명화 자유기고가
융릉 가는 길목, 상수리나무와 소나무 숲길. ⓒ정명화 자유기고가

우려와 달리 입구부터 봄 기운이 화사하게 내려앉은 경관은 날 무장해제시켰다. 소나무와 참나무 숲길로 이어진 길을 따라 걸으면 두 개의 갈림길이 있는데 오른쪽은 융릉, 왼쪽은 건능으로 통한다.

융건릉 입구에서 경내로 들어가는길 요소요소 활짝 핀 진달래, 철쭉이 관람객들을 맞이한다. ⓒ정명화 자유기고가
융건릉 입구에서 경내로 들어가는길 요소요소 활짝 핀 진달래, 철쭉이 관람객들을 맞이한다. ⓒ정명화 자유기고가

왕릉을 찾아가는 길은 굉장히 섬세하고 정감 넘치게 조성된 단아한 모습으로 평온함이 물씬 다가왔다. 좌우로 노송들이 하늘 높이 솟아 숲을 이루고, 노송길을 따라 진달래꽃이 활짝 피어 손님맞이 한다. 비극의 주인공에 대한 선입견으로 가득 찬 슬픔을 불식시키기에 충분했다.

싱그러운 솔숲 사이로 빗질이 잘 된 고즈넉한 오솔길을 걷노라니 효심 가득한 정조의 정성이 느껴졌다. 마치 오늘을 예상이라도 한 듯 추모의 발걸음을 내딛는 후손에 대한 위로와 배려가 배어 있는 것처럼 따사로웠다.

정자각, 융릉과 비켜져

융릉 정자각과 향로및 어로. ⓒ정명화 자유기고가
융릉 정자각과 향로및 어로. ⓒ정명화 자유기고가

아버지의 죽음에 늘 애통해하며 지극한 효심의 정조였다. 국왕이 되자 비운에 간 아비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능을 이장하여 국왕의 능묘에 버금가는 규모로 화성 융릉을 지었다. 누가 보아도 능 조영에 정성을 들인 정조의 효심을 한눈에 읽을 수 있다.

융릉은 정자각까지 두 사람이 걸을 수 있는 폭의 신도와 어도로 구분하였다. 양지바른 곳에 자리해 사도세자의 고통을 충분히 보상하는 듯한 형상이다. 무엇보다 정자각은 능과 직선거리에 있지 않고 비켜 있다. 이는 뒤주에 갇힌 아버지의 답답한 마음을 풀어드리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장조(사도세자)와 헌경왕후(혜경궁 홍 씨)의 융릉. ⓒ정명화 자유기고가
장조(사도세자)와 헌경왕후(혜경궁 홍 씨)의 융릉. ⓒ정명화 자유기고가

전체적으로 홍살문 넘어 푸른 잔디로 잘 단장되어져 유유자적하며 한적하게 걸을 수 있는 곳으로는 이만한 곳이 드물다. 어두운 역사의 뒤안길을 음미하며 호젓하게 인생을 반추할 수 있다. 푸른 초원에서 펼쳐지는 자연스러움이 평화롭고 정말 아늑하다.

권력의 비정함

오늘날 융릉이 품위와 번듯함은 갖추고 있더라도 그 배경을 지나칠 수는 없다. 고통스럽지만 사도세자의 생을 다시 한 번 반추해 보고자 한다. 융건릉을 둘러보며 평안함과 위로를 받은 것도 잠시 그 시절 역사를 들여다보자니 절로 답답함이 몰려온다. 그러니 당사자인 사도세자의 고통은 어땠겠는가.

장조는 1736년(영조 12)에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정치싸움에 휘말려 부왕 영조의 진노를 얻어 뒤주 속에 갇혀 생을 마감했다. 영조는 비정하게도 아들을 어떻게 뒤주 속에 가둬 죽였을까.

사도세자의 이야기는 온 국민이 아는 가장 비극적인 역사이자 가족사(史)이다. 충분히 극적이기에 수차례 영화와 드라마로 극화되기도 한 소재다. 영화 ‘사도’ 역시 영조와 사도세자의 관계가 어긋나기 시작해 파국에 치닫게 되는 과정을 부자(父子)의 관점에서 아주 생생하게 그려냈다.

"내가 바란 것은 아버지의 따뜻한 눈길 한 번, 다정한 말 한 마디였소." 뒤주에 갇힌 사도세자의 마지막 독백이다. 사도세자가 오랜 울증과 조현병에 미쳐 많은 내관과 궁녀들을 살해하고, 영조를 시해하려 했던 지경까지 간 데엔 모든 일의 시작이 영조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릴 때부터 세자에 대한 혹독한 조기교육, 가학적 대리청정이나 반복된 양위파동 에피소드만으로도 많은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다.

영화 '사도'에서 사도세자로 분했던 유아인은 “사도 세자는 아버지 영조 콤플렉스의 피해자이자, 자신의 운명을 선택할 수 없는 상황에 있었다”며 분석했다. 그만큼 어린 나이부터 세자로서 견디지 못할 짊어지게 된 무게에 시달렸다.

영조와 사도세자의 불편한 동거

영조는 82세까지 살며 왕위에 52년 동안 머물렀던 기록적인 인물이다. 사도세자가 태어나 늦은 나이에 후사를 보게 되자 몹시 기뻐하여 이듬해에는 왕세자로 책봉했다. 부왕의 기대에 걸맞게 세자는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자질을 발휘했다. 일찍이 문무를 겸비한 출중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영조와 세자는 수시로 부딪쳤고, 그런 갈등이 깊어지면서 부자간에 보이지 않는 두터운 철벽이 생겨났다. 이렇게  세자에 대한 영조의 질책이 끊임없이 이어지자 보위를 향한 궐내의 암투도 심화된다. 수시로 세자의 잘못을 고해바치며 세자를 끌어내리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영조는 늘 자신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세자에게 불만을 품었고, 시시때때 양위 선언을 통하여 그를 괴롭혔다. 임금이 양위를 선언하면 당사자인 세자와 신하들은 목숨을 걸고 만류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장차 불충으로 규정되어 어떤 징벌을 받을지 모른다. 그런 과정을 통해 임금은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하지만 당하는 세자나 신하들은 극한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다.

부왕의 변덕이 재발할 때마다 세자가 겪어야 했을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일련의 상황은 당시 영조와 세자의 관계가 어떠했는지를 보여준다. 이때쯤 되면 부자간의 관계가 정상적으로 유지될 리 없었다. 사도세자는 점점 지쳐갔다. 

정신질환의 심화

사서에 전하는 세자의 정신질환은 1755년(영조 31년)경부터 시작되었다. 그 후 세자는 수시로 정신질환이 발작했고, 그때마다 부왕이 엄히 책망하니 두려움에 빠지면서 증세가 더욱 깊어졌다. 수시로 갑자기 돌변하면서 난폭한 행동을 일삼았다.

그는 여러 나인들과 환관들을 죽이고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이런 세자의 극심한 병증은 정권을 쥐고 있던 노론 일파에게 기회로 다가왔다. 그들은 정신이상으로 인하여 수시로 난행을 일삼던 세자를 빌미로 소론과 남인 잔당을 완전히 제거하고자 했다.

그렇게 세자의 상태가 악화되고 있던 1762년(영조 38년), 노론에서는 영조에게 그간 떠돌던 세자의 결점과 비행을 고발하기에 이르렀다. 세자가 그동안 저지른 비행을 알게 된 영조는 궁중은 물론 정계의 모든 불화 요소를 제거하기로 결심한 후 세자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고, 뒤주 속에 가두었다. 결국 8일 뒤 세자는 뒤주 안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사도세자의 비극을 몰고 온 심리적 갈등은 아버지 영조의 깊은 트라우마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재위 초기부터 정적들의 완강한 저항과 유언비어에 시달리던 영조. 그 트라우마는 어린 사도세자에게 깊은 정신적 상처로 전이되었고, 세월이 가면서 수시로 제기되는 부왕의 의심과 질책으로 인해 치명적인 상황으로 전개되었던 것이다.

아버지 곁에 잠든 정조

건릉. 조선 제22대 왕 정조(正祖 1752~1800, 재위 1776~1800)와 부인 효의왕후(孝懿王后) 김 씨(1753~1821)를 합장한 무덤이다. ⓒ정명화 자유기고가
건릉. 조선 제22대 왕 정조(正祖 1752~1800, 재위 1776~1800)와 부인 효의왕후(孝懿王后) 김 씨(1753~1821)를 합장한 무덤이다. ⓒ정명화 자유기고가

한편, 정조는 1800년(정조 24)에 창경궁 영춘헌에서 49세로 세상을 떠났다. 생전 부왕의 융릉을 조성했듯이 자신도 그 옆 조금 떨어진 건릉에 묻혔다. 건릉은 부왕 융릉과 구조적으로 거의 비슷한 형상이다. 

건릉에서 밖으로 나가는 길. ⓒ정명화 자유기고가
건릉에서 밖으로 나가는 길. ⓒ정명화 자유기고가

융건릉은 봄부터 가을까지는 소나무, 참나무 등의 숲이 어우러져 그늘집이 좋고, 드넓은 잔디밭이 있어 수목 그늘 아래 굽이굽이 난 오솔길은 산책길로도 좋은 곳이다.

숲길을 걷다 보면 다양한 야생화를 볼 수 있고, 종종 고라니가 출몰하기도 한다. 이 날도 융릉과 건릉 사이 산책로를 걷다 고라니와 눈이 마주쳤다. 나의 눈길을 알아챈 고라니가 곧바로 숲 속으로 사라져 사진에 담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사도세자의 삶을 바라보자니 처절하고 애잔하기 짝이 없는 외로운 인생이었다. 추모하는 마음이 깊어 황량한 계절에 찾았다면 슬픔이 더 진했을지 모르는 융건릉. 너른 수목원 같은 모습에 새싹이 푸르게 돋은 풍광은 슬픔을 다소 덮어줬다. 아니 도리어 위로를 해줬다.

원혼 기린 용주사

용주사. ⓒ정명화 자유기고가
아버지의 능을 지키고 영혼을 달래기 위해 정조는 용주사를 세웠다. ⓒ정명화 자유기고가

융건릉과 함께 들러 보아야 할 곳으로 융건릉에서 1㎞쯤 떨어진 용주사로 향했다. 아버지의 능을 지키고 영혼을 달래기 위해 정조는 용주사를 세웠다.

용주사 입구. ⓒ정명화 자유기고가
용주사 입구. ⓒ정명화 자유기고가

정조는 능에서 1.5km인 용주사를 증축할 때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을 목판에 새겨 보존하도록 명을 내리고 당대 제일의 화가 김홍도에게 맡겨 아름답게 꾸미도록 했다.

문화재청이 '화성 용주사 대웅보전'을 국가지정문화재인 보물로 지정했다. 대웅전 후불탱화는 김홍도의 지휘로 그려진 걸작이다. ⓒ정명화 자유기고가
문화재청이 '화성 용주사 대웅보전'을 국가지정문화재인 보물로 지정했다. 대웅전 후불탱화는 김홍도의 지휘로 그려진 걸작이다. ⓒ정명화 자유기고가

정조의 융건릉과 용주사 건립으로 사도세자는 사후에라도 안식을 얻고 편안해졌을까. 세자가 좁은 뒤주 속에 갇혀 허기와 기갈에 신음하던 여드레 동안 이 비정한 아버지 영조는 어떤 마음의 고통을 느꼈을까.

조선 후기, 구중궁궐 안에서 벌어진 이 드라마틱한 스토리는 사도세자비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을 통해 전해지면서 오늘날까지 세인들에게 권력의 비정함을 일깨워주고 있다. 권력 앞에는 피도 눈물도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주지시킨다.

정명화는…

1958년 경남 하동에서 출생해 경남 진주여자중학교, 서울 정신여자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연세대 문과대 문헌정보학과 학사, 고려대 대학원 심리학 임상심리전공 석사를 취득했다. 이후 자유기고가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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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우 2022-04-25 08:40:19
좋은 글 잘 보았습니다. 다만, 건능이 아니라 건릉 [걸릉]입니다. "전체적으로 홍살문 넘어 푸른 잔디로 잘 단장되어져……."라는 문장 역시 "전체적으로 홍살문 너머 푸른 잔디로 잘 단장되어……."로 바꿈이 적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