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 지리산을 걷다 [산전주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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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 지리산을 걷다 [산전주전]
  • 최기영 PPI파이프 부장
  • 승인 2022.06.26 12:24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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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기영의 山戰酒戰〉 친구와 함께한 지리산 무박종주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최기영 PPI파이프 부장)

우리는 노루목에서 지리산의 아침을 맞았다. 우리가 산행을 시작했던 노고단 방향으로 바라본 모습 ⓒ 최기영
우리는 노루목에서 지리산의 아침을 맞았다. 우리가 산행을 시작했던 노고단 방향으로 바라본 모습 ⓒ 최기영

최근 나이 50에 그 힘든 이직을 하게 됐다. 그렇지 않아도 일이 바쁜데 나까지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말하는 것이 여간 곤혹스럽고 미안했다. 어찌 됐건, 혼자만의 길었던 고민을 해결(?)하고 새로운 회사를 가기 전 휴가 아닌 휴가를 얻을 수 있었다.

내가 잠시 쉬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대학 동기 하나가 연락을 해왔다. 나 쉬는 동안 자신도 휴가를 낼 터이니 지리산을 한 번 데려가 달라며 말이다. 그 친구는 학교 졸업 후 일본계 회사에 취직해 오랫동안 일본에서 직장생활을 하다 지난해 한국으로 복귀했다. 친구는 일본에 있으면서 그곳의 높은 명산을 다니며 등산에 취미를 붙였다. 그리고 지금은 ‘도장깨기’ 마냥 한국의 명산을 매주 오르고 있는데 아직 지리산을 가보지 못했다고 했다. 그렇게 우리 둘은 성삼재로 가는 심야버스를 타기 위해 동서울터미널에서 만나 지리산으로 향했다. 

새벽 세 시에 버스는 성삼재에 도착했고 우리는 지리산의 주능선의 시작점인 노고단으로 향하며 산행을 시작했다. 

나는 매년 지리산 종주를 했다. 그때마다 대피소에서 1박이나 2박을 했다. 그런데 코로나19 팬데믹의 여파로 대피소가 폐쇄되는 바람에 3년째 종주는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제 다시 일상이 찾아오며 국립공원 대피소가 부분적으로 개방이 되기는 했지만 예약하는 것이 만만치 않다. 지리산 종주에 목말랐던 나 그리고 지리산이 처음이었던 친구는 내친김에 '무박 종주'를 하기로 했다. 

삼도봉에서 지리산 서북능선 방향으로 바라본 모습. 지리산은 산이 산을 품으며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 최기영
삼도봉에서 지리산 서북능선 방향으로 바라본 모습. 지리산은 산이 산을 품으며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 최기영
지리산 영신봉 쪽에서 천왕봉 방향으로 바라본 모습. 천왕봉이 가까워질수록 지리산의 장쾌함은 더해진다 ⓒ 최기영
지리산 영신봉 쪽에서 천왕봉 방향으로 바라본 모습. 천왕봉이 가까워질수록 지리산의 장쾌함은 더해진다 ⓒ 최기영

노고단을 출발해 칠흑같이 어둡던 산길을 한 시간여를 걸으니 서서히 동이 트기 시작했다. 임걸령에 있는 샘물로 물을 보충한 뒤 노루도 지쳐 쉬어간다는 노루목에서 우리는 지리산의 일출을 맞았다. 반야봉에 가려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볼 수는 없었지만, 지리산을 온통 붉은 빛으로 물들이며 해가 떠올랐고 겹겹이 이어진 지리산의 거대하고 장쾌한 자태가 우리 눈앞에 그대로 펼쳐졌다. 어둠에 가려 보지 못했던 노고단도 저 멀리 보였다. 우리는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며 지리산을 만끽했다. 그렇게 지리산의 아침에 취해 아직 갈 길이 멀다는 것을 잠시 잊었다가 다시 정신을 차리고 길을 나서야 했다. 

우리는 삼도봉과 토끼봉을 지나 연하천 대피소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서둘러야 했다. 시간을 계산해 보니 서울로 올라갈 버스를 타기에 빠듯했다. 정신없이 다시 벽소령을 향해 걸었다. 그런데 벽소령에 도착하자 친구가 다리 근육통 증상을 보이며 힘들어했다. 지금까지 왔던 길보다 더 험한 길이 많이 남았는데 이러다가 더 늦어질 것 같았다. 우리는 고민 끝에 예매했던 버스를 취소하고 네 시간 정도 출발이 늦은 버스를 다시 예매했다. 그렇게 문제는 간단하게 해결됐다. 하긴 지리산 같은 산에서 서둘러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우리는 사진도 많이 찍고 여유 있게 걷자며 다시 길을 나섰다. 

지리산 종주길 중 가장 아름다운 연하선경의 모습이다. 연하선경을 넘으면 제석봉과 천왕봉이다 ⓒ 최기영
지리산 종주길 중 가장 아름다운 연하선경의 모습이다. 연하선경을 넘으면 제석봉과 천왕봉이다 ⓒ 최기영
지리산 제석봉의 고목 ⓒ 최기영
지리산 제석봉의 고목 ⓒ 최기영

벽소령부터는 지리 산세를 제대로 느낄 수 있는 만만치 않은 길이다. 어지간하면 이쯤에서 천왕봉이 나올 법도 한데 걸어도 걸어도 산길은 고도를 계속 높이며 끝도 없이 이어진다. 벽소령에서 칠선봉에 오르면 그보다 높은 영신봉이 보인다. 그리고 더 높은 곳에 세석평전이 나타난다. 세석을 지나 또 오르면 촛대봉이다. 촛대봉에서는 드디어 천왕봉이 저~ 멀리 높은 곳에 보인다. 아직도 천왕봉이 멀었다. 그리고 지리산 종주길 중 가장 아름답고 고즈넉한 연하선경을 지난다. 지리산 종주가 참으로 묘한 것이 천왕봉이 가까워질수록 산길은 더 가파르고 힘들어지지만 걷고 오르면 오를수록 아까 봤던 지리산보다 훨씬 더 아름답다. 지리산의 장쾌함과 그윽함이 더해지는 것이다. 그것에 취해 우리는 천왕봉으로 걸어갈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제석봉을 지나 통천문 바위 구간을 힘겹게 오르면 우리가 걸었던 지리산 종주 길이 발아래에 놓인다 ⓒ 최기영
제석봉을 지나 통천문 바위 구간을 힘겹게 오르면 우리가 걸었던 지리산 종주 길이 발아래에 놓인다 ⓒ 최기영
드디어 천왕봉에 도착했다. 정상 주위를 맴돌며 지리산을 만끽하고 있는 친구의 모습 ⓒ 최기영
드디어 천왕봉에 도착했다. 정상 주위를 맴돌며 지리산을 만끽하고 있는 친구의 모습 ⓒ 최기영

드디어 장터목에 도착하며 마지막 결전이라도 앞둔 것처럼 우리는 물을 보충하고 간식을 먹었다. 초장에 도란도란 즐겁기만 했던 산행은 이제는 말하는 것조차 힘든 지경이 됐다. 그리고 아름다운 제석봉을 지나 가파른 바위 능선을 몇 차례 오르니 드디어 지리산 종주의 종착역인 천왕봉에 도착할 수 있었다. 

6월의 평일 늦은 오후 천왕봉에는 우리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지리산 천왕봉은 오롯이 우리 둘만의 공간이었다. 그렇게도 지치고 힘들었는데 우리는 원기를 회복이라도 한 것처럼 천왕봉 표지석을 껴안기도 하고 V자를 그리기도 하며 원 없이 서로의 인증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우리 발아래에 펼쳐진 지리산의 끝없는 봉우리들과 능선을 바라봤다. 차 시간을 맞추려면 서둘러 하산해야 하는데 친구는 내게 말했다. 

“조금만 더 있다가 내려가자” 

우리 둘은 그렇게 천왕봉에서 누워 지리산의 시원하고 포근했던 바람을 한참이나 맞았다. 그러다가 엿가락처럼 눌어붙어 떨어지지 않았던 아쉬움을 남겨놓고 지리산을 내려왔다. 다 내려오니 아까만 해도 그리도 화려했던 지리산은 어둠 속으로 다시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지리산에서 내려온 뒤 주말을 지나 나는 새로운 회사에 출근했다. 나의 처음과 끝에 또 한 번 지리산은 그렇게 든든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최기영은…

고려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前 우림건설·경동나비엔 홍보팀장

前 피알비즈 본부장

現 PPI파이프 기술연구소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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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경희 2022-07-18 13:57:26
내일 지리산 가는데
신비로운 운해를 볼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