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가 부러워하는 의료보험, 누구의 공인가 [정진호의 정책史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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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가 부러워하는 의료보험, 누구의 공인가 [정진호의 정책史②]
  • 정진호 기자
  • 승인 2022.08.04 17:56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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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가 기틀 마련하고 노태우가 전 국민 확대…현 시스템 만든 건 김대중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정진호 기자]

대한민국 의료보험체계는 세계 최고 수준으로 인정받고 있다. ⓒ시사오늘 김유종
대한민국 의료보험체계는 세계 최고 수준으로 인정받고 있다. ⓒ시사오늘 김유종

혹시 ‘식코(Sicko)’라는 영화를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화씨911’로 유명한 마이클 무어 감독이 미국 의료보험제도를 비판하기 위해 만든 영화인데요. 지나치게 과장되고 왜곡됐다는 평가도 있지만,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문제의식에는 많은 사람이 공감했던 작품입니다.

그리고 이 영화는 우리나라에서도 꽤 화제가 됐습니다. 미국식 의료체계의 비인도성을 보면서, 대한민국 의료보험체계가 얼마나 잘 설계돼 있는지 새삼 깨달은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우리 주위에서도 미국 병원비를 감당하지 못해 고통을 참다가 한국으로 돌아와 치료를 받은 일화를 종종 접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대한민국 의료보험제도(국민건강보험)는 과연 어떻게 만들어진 걸까요. 첫 도입은 1963년이었습니다.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권력을 장악한 박정희 전 대통령(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무상 의료’를 내세우던 북한에 대응하기 위해 1963년 12월 16일 의료보험법을 제정합니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의료보험은 시범사업에 불과했습니다. 또한 임의가입, 즉 원하는 사람만 가입하는 방식이라 실효성도 거의 없었습니다. 가입이 가능한 사람도 근로자뿐이었습니다. 심지어 재정이 탄탄하지 못하다 보니 사회보험 유지에 필요한 지원금도 제대로 지급되지 않았습니다. 아래는 당시 상황을 설명한 경향신문 기사 한 토막입니다.

보건사회부는 의료보험법에 가입 신청한 2개의 단체 중 한 단체에 정부 보조를 철회하고 인가마저 취소키로 결정함으로써 첫걸음을 내딛은 의료보험제는 2년 만에 사실상 백지 환원되고 있다.
당국자도 보험제도에 있어 자유가입제인 미국식을 채택한 우리나라의 의료보험제도는 강제가입제도를 택하지 않아 완전히 실패했음을 인정했다. (중략)
의료보험제도란 근로자들이 정기적으로 보험금을 적립하고 근로자 자신과 그 가족들이 직무 이외의 사유로 부상, 질병, 분만, 사망했을 때 보험금을 타서 지정 병원에서 치료하는 제도인데 기업주가 보험금의 45%를 부담하고 정부가 10%를, 나머지는 피보험자들이 적립한다. 보사부는 국고보조금 400만 원까지 확보했으나 사무비조로 단 6만 원을 중앙의료보험조합에 내줬을 뿐 나머지는 사장하고 있다. (후략)

1965년 11월 16일 <경향신문> 사문화된 의료보험제

이러다 보니 ‘무전유병 유전무병(有錢無病 無錢有病)’이라는 말이 돌았습니다. 신문에는 돈이 없어 병원 치료를 받지 못했다는 사연이 심심찮게 등장했습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의 우선순위는 자주국방과 경제개발이었습니다. 때문에 유의미한 의료보험제도가 역사에 등장하기까지는 14년이라는 시간이 더 걸립니다.

의료보험이 처음 도입된 건 박정희 정권 때다. ⓒ대통령기록관
의료보험이 처음 도입된 건 박정희 정권 때다. ⓒ대통령기록관

1977년 7월 1일. 박정희 정권은 의료보험법을 전면 개정해 500인 이상 사업장 근로자와 공업단지 근로자는 강제적으로 의료보험에 가입하도록 합니다. 진정한 의미의 의료보험제도가 시작됐던 겁니다. 1979년 1월에는 공무원과 교직원 의료보험 급여를 시행했고, 같은 해 7월부터는 300인 이상 사업장 근로자에게까지 적용범위를 확대합니다.

국민의료복지 향상의 새 계기가 될 의료보험 제도가 1일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1일 현재 보사부로부터 설립인가를 받은 의료보험은 503개 대상 조합(상용근로자 500인 이상 사업장) 중 481개 조합.
이 조합에 소속되어 의료보험의 혜택을 받게 되는 수혜자는 피보험자 111만6973명, 피부양자 187만2056명 등 모두 298만9029명에 달한다.
1일부터 보험수혜자들은 소속조합에서 발행한 의료보험피보험자증과 주민등록증만 제시하면 조합과 계약이 체결된 지료 기관에서 진료를 받을 수 있다. (중략)
진료비용은 외래진료의 경우 피보험자 40%, 피부양자 50%, 입원진료는 피보험자 30%, 피부양자 40% 범위 내에서 조합정관에 정한 비율로 본인이 부담하고 나머지는 조합이 부담하게 된다.
의료보험조합은 피보험자들이 내는 보험료를 재원으로 운영되며 보험료는 지난 6월분부터 매월 급료의 3~8% 범위 내에서 조합정관으로 정하는 금액(대부분 3~4%)을 공제하게 되며 이를 피보험자와 사업주가 50%씩 분담하게 된다. (후략)

1977년 7월 1일 <매일경제> 의료보험제도 실시

박정희 정권이 의료보험제도를 실시한 이유에 대해서는 다양한 분석이 있지만, 경제 성장에 따라 불가피한 측면이 컸던 것으로 보입니다. 경제 발전은 의료 산업의 발전을 가져왔고, 한편으로는 인플레이션도 동반했습니다. 반면 임금 상승은 제한적이었습니다. 1965~1975년 10년 간 1인당 의료비 증가율은 생계비 증가율의 3배를 상회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러자 개인 차원에서는 의료비를 감당하기가 어려워집니다. 실제로 1970년대 언론을 보면, 돈이 없다는 이유로 병원에서 진료를 거부당해 환자가 사망하는 사건이 눈에 띄게 증가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진료거부 사건을 정리해둔 <조선일보> 사설이 있어 해당 부분만 소개합니다.

이 며칠 동안 구급환자에 대한 의료기관의 진료거부 사건이 크게 문제되고 있다. 그 몇 가지 실례를 들면, 전신에 중화상을 입은 세 살 먹은 어린이가 병원들의 진료거부로 7개 병원을 돌아다니다가 화상 7시간 반 만에 숨진 사건이 있었고, 난산 때문에 병원을 찾아간 출산 직전의 한 잉부가 이 또한 병원들의 진료거부로 진통 20시간 만에 제왕수술을 받아 겨우 사태아를 빼내기는 했으나 중태에 빠진 사건이 있었다. 그리고 교통사고로 다리를 부러뜨린 한 노파가 이 또한 의료기관의 진료거부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가 한 경찰관의 주선으로 7시간 만에야 겨우 입원하게 되었다는 보도도 있었다. 이들 진료거부의 표면적인 이유는 대체로 입원실이 없다, 전문의가 없다 등으로 되어 있으나 그 실질적인 이유는 구급환자들이 필요한 진료비를 안 가지고 있었기 때문으로 알려졌다. (후략)

1972년 8월 11일 <조선일보> 의도의 합리적 재건

여전히 냉전(冷戰)이 이어지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정부도 체제의 안전을 위협하는 이런 사건들을 두고만 보고 있긴 어려웠을 겁니다. 또한 1977년은 박정희 정권이 들어선지 16년째 되는 해이기도 했습니다. 대다수 전문가들은 의료보험제도가 유신체제 하에서 지쳐가던 국민을 달래기 위한 ‘당근’ 성격을 띠었다는 데 동의합니다.

노태우 정권은 의료보험 적용 대상을 전 국민으로 확대했다. ⓒ대통령기록관
노태우 정권은 의료보험 적용 대상을 전 국민으로 확대했다. ⓒ대통령기록관

다만 이때까지도 의료보험 적용 대상은 300인 이상 사업장의 근로자와 공무원, 교직원으로 국한됐습니다. 돈이 없었던 정부가 재원을 전적으로 재벌기업에 의존하는 방식으로 의료보험제도를 설계했던 탓입니다. ‘번듯한 직장’이 없으면 의료보험 혜택을 받기가 어려웠습니다. 의료보험 전 국민 적용은 이로부터 11년 후인 1988년, 노태우 정권이 들어선 이후에야 이뤄집니다.

1985년. 제12대 총선에서 신한민주당이 야당 돌풍을 일으키면서 전두환 정권은 민주화에 대한 압박을 받기 시작합니다. 이에 전두환 대통령은 1986년 9월 2일 의료보험제도의 전 국민 확대를 약속하고 1989년 1월부터 시행할 방침을 밝혔습니다. 의료보험 전 국민 적용이 민주화 열망을 잠재우기 위한 하나의 카드였던 겁니다.

정부는 오는 88년부터 국민연금제 및 최저임금제를 도입하고 의료보험을 확대하는 등 일련의 복지시책을 펴나가기로 했다. 정부는 이 같은 국민복지 증진대책과 함께 종래 성장 일변도의 경제정책에서 탈피, 향후 분배 정책에 역점을 두고 국민의 복지 수요에 적극 부응할 방침이다.
이번에 정부가 마련한 주요복지시책은 의료보험의 경우 오는 88년에 농어촌 지역, 89년엔 도시지역까지 확대, 모든 국민이 의료보험혜택을 받도록 하는 한편 88년 초부터 최저임금제를 도입해 10만 원 미만 저임금을 일소키로 했다. (후략)

1986년 9월 2일 <매일경제> 의료보험 89년 전 국민 혜택

그러나 1987년 대한민국엔 민주화가 찾아왔고, 전두환 정권이 추진했던 정책은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습니다. 이걸 이어받은 사람이 바로 노태우 전 대통령이었습니다. 12·12 군사 반란의 주역 중 한 명이었던 노 전 대통령 역시 1987년 민주화 이후 진정한 ‘민주정부 탄생’을 열망했던 국민을 설득하기 위한 공약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으로 당선된 노 전 대통령은 1988년 7월, 5인 이상 근로자 사업장까지 직장의료보험이 적용되도록 했습니다. 1988년 1월엔 농어촌 주민들이 지역조합을 통해 의료보험에 가입했고, 1989년엔 도시 자영업자들에게까지 의료보험제도 혜택을 확대했습니다. 이로써 1989년, 대한민국은 전 국민의 94.2%가 의료보험 적용을 받는 국가가 됩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의료보험 재정을 하나로 통합해 현 체제를 만들었다. ⓒ대통령기록관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의료보험 재정을 하나로 통합해 현 체제를 만들었다. ⓒ대통령기록관

하지만 마지막 문제가 남아 있었습니다. 이 시기까지 의료보험은 ‘조합주의’였습니다. 직장과 지역, 공무원·교원 등으로 나뉘어 각자 조합을 만드는 식으로 운영됐습니다. 이러다 보니 직장에 따라, 지역에 따라 재정 격차가 컸습니다. 어떤 조합은 늘 적자였고, 어떤 조합은 적립금이 넘쳐나는 불균형이 나타났습니다. 당연히 보장성에도 차이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조합 수백 곳으로 쪼개진 의료보험을 현행과 같은 국민건강보험으로 통합한 사람이 김대중 전 대통령입니다. 김 전 대통령은 의료보험 재정이 넉넉한 편이던 직장의료보험조합들의 격렬한 반대를 뚫고 보험 재정을 통합해냅니다. 그 결과 1997년 48% 수준이던 의료보험 보장성은 2002년 52.4%, 2006년 64.3%까지 증가합니다.

오는 2000년부터 의료보험을 하나로 완전통합하는 것을 주내용으로 하는 국민건강보험법안이 23일 국회 보건복지위를 통과했다.
이에 따라 지난 80년부터 찬반양론 속에 논란을 거듭해 온 의보통합 논쟁은 통합 쪽으로 일단락됐다. 법안은 복지위 원안대로 본회의에서 의결될 것이 확실시되고 있다.
이날 통과된 법안에서, 2000년 1월부터는 의료보호대상자를 제외한 모든 국민은 단일 의보조직인 국민건강보험공단이 관리하도록 했다. 지난 10월 지역의보조합과 공무원·교원 의보공단을 통합한 국민의료보험관리공단과 142개 직장의보조합이 단일조직으로 통합되는 것이다.
따라서 의보가입자는 △5인 이상 사업장 노동자, 사용자, 공무원 및 교직원인 직장가입자와 그 피부양자 △자영자, 4인 이하 사업장 노동자 등 지역가입자로 구분돼 모두 소득능력에 따른 단일부과기준에 따라 의보료를 내게 된다. (후략)

1998년 12월 24일 <한겨레> 2000년 의료보험 완전통합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전 세계를 휩쓰는 가운데 대한민국이 이른바 ‘K-방역’으로 주목받으면서 정치권에서는 ‘성공적 의료복지의 공이 누구에게 있는가’를 두고 치열한 논쟁을 벌였습니다. 보수는 박 전 대통령을, 진보는 김 전 대통령의 공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정확히 표현하면, 기틀을 마련한 건 박 전 대통령, 전 국민에게 확대한 건 노 전 대통령, 현재의 시스템을 완성한 건 김 전 대통령이라고 봐야 합니다. 세계가 부러워하는 대한민국의 의료보험체계는 어느 한 사람의 공이 아닌, 국민들의 요구에 부응한 역대 대통령들의 합작품인 셈입니다.

담당업무 : 국회 및 국민의힘 출입합니다.
좌우명 : 인생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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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식구 2022-09-03 09:54:27
누구의 공인지 따지려면 누구의 희생으로 된 것인지 따져야 맞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