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오부치’ 이전 ‘무라야마 담화’이끈 YS 있었다 [옛날신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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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오부치’ 이전 ‘무라야마 담화’이끈 YS 있었다 [옛날신문 보기]
  • 김자영 기자
  • 승인 2022.08.18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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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민정부 ‘역사 바로세우기 운동’으로 역사적 단죄 문제 대두
고노 장관 ‘위안부 사과’…무라야마 총리 ‘통절한 반성’ 표명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으로 사과 대상 ‘한국’ 명시 공식화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김자영 기자]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5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 잔디마당에서 열린 제77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경축사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5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 잔디마당에서 열린 제77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경축사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1945년 8월 15일은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날이다.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는 ‘한일 관계’에 대한 현 정부의 국정방향을 엿볼 수 있는 지표가 되기도 한다. 윤석열 대통령은 광복절 경축사와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을 언급했다. 

하지만 한일 관계의 기틀 마련이 국민의정부에서 처음 이뤄졌을까? 한일관계는 일본이 과거사에 대해 진정한 사죄와 반성을 표한 ‘고노 담화’와 ‘무라야마 담화’가 문민정부에서 이뤄졌기 때문에 진일보될 수 있었다.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은 역사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진정한 사과의 뜻이 담긴 ‘무라야마 담화’가 기반해서 이뤄질 수 있었다. <시사오늘>은 일본으로부터 전쟁 피해에 대한 사과를 받고 한일 관계의 교류 물꼬를 트기까지 여러 우여곡절을 알아봤다. 

 

군부정권서 이뤄진 ‘한일기본조약’에 분노한 YS-DJ


1945년 8월 15일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이후 한국과 일본 간 관계는 단절되다시피 했다. 1951년부터 1961년 사이에 제1차~제5차 한일회담이 있었지만 합의엔 이르지 못했다. 그러다 5·16 군사정변으로 박정희 정권이 들어섰다. 박정희 정부는 1965년 한일청구권 협정 등 한일기본조약을 체결하고 일본 정부로부터 5억 달러를 받는다. 이로서 징용 피해 한국인 등 식민 지배에 대한 배상이 포기된다. 당시 박정희 정부 측의 지나친 양보가 논란이 됐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1965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정부가 이번 월남 파병을 결정하고 한일 협정을 맺게 된 것은 이런 역사적 요구에 따른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대표적 민주화 투사였던 YS(김영삼)와 DJ(김대중)은 당시에도 이런 식으로 한일 관계가 규정되는 것에 비판적 입장을 취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자서전에서 “결과적으로 박정희는 불과 수억 불의 돈과 과거 36년을 맞바꾼 셈이었다. 수십 년 동안 한 나라를 송두리째 집어삼킨 대가가 고작 몇 억 달러로 계산될 수는 없는 일이었다”고 말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자서전에서 “협정 내용을 보고 분노를 넘어 수치심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고 기록했다. 두 전직 대통령 모두 당시 일본의 과거사에 대한 뼈저린 반성과 사죄 없이 이뤄진 한일기본조약에 대해 분노했던 것으로 보인다.

“나는 협정 내용을 보고 분노를 넘어 수치심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우선 대일 청구권은 3억 달러는 역대 정부가 요구한 액수 가운데 최저였다. 이승만 정권은 20억 달러였고, 장면 정권도 국교 정상화를 위해 28억 5000만원 달러를 요구했다. 이에 비해 3억 달러는 터무니없이 적었다. 35년간 수탈의 역사를 3억 달러로 보상받는다는 것에는 누구도 동의할 수 없었다. (중략) 

이 협정으로 아무런 유보 조건도 없이 일본과 관련된 모든 과거사가 통째로 증발해 버리는 셈이었다. 이는 엄하고도 중대한 문제였다. 히로시마 한국인 피폭 사건, 한국인 노동자 강제 연행 사건, ‘종군위안부’ 문제, 사할린 교포 송환 문제 등 숱한 비극적 사건이 산재해 있는데도 이제 법적으로는 아무런 방법도 취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겨레와 역사 앞에 죄를 짓는 행위라고 생각했다.”

-김대중 자서전, 177-178페이지

 

1993년, 문민정부 들어서며 ‘일제 잔재 청산 작업’ 본격화 
日 정부, ‘위안부 사과’ 이어 ‘식민지 지배 공식 사죄’ 표명


1994년 11월, 김영삼 대통령이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무라야마 도미이치 일본 총리와 악수하며 환담하는 모습. ⓒ 연합뉴스
1994년 11월, 김영삼 대통령이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무라야마 도미이치 일본 총리와 악수하며 환담하는 모습. ⓒ 연합뉴스

1993년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역사 바로세우기’ 운동 일환인 일제 잔재 청산 작업도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김영삼 대통령은 집권 2달 차에 상해와 중경(충칭)의 임시정부청사를 복원했으며 상해만국공묘에 안치됐던 상해 임시정부 요인을 비롯한 독립운동가 유해를 국내로 봉환했다. 임시정부요인 묘역을 조성부터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까지. YS는 처음으로 ‘친일 행위에 대한 역사적 단죄 문제’를 수면위로 끌어올린 대통령이기도 하다.

일본 정부도 과거사에 대해 사죄하는 발언을 내놓는다. 1993년 8월에는 고노 요헤이 당시 일본 관방 장관이 일제강점기 당시 위안부 강제 연행을 인정한다. 

1993년 8월 5일자 <경향신문> ‘日 정신대 강제연행 첫 인정’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캡처본

일본 정부는 4일 한·일 양국의 최대 현안인 종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 모집 및 이송·관리 등에 강제성이 있었다고 처음으로 공식 인정했다. (중략)

고노 장관은 이어 “종군 위안부로서 많은 고통을 겪고 심신에 치유되기 어려운 상처를 입은 모든 분들에게 마음으로부터 사과와 반성의 뜻을 표한다”고 말하고 향후 보상문제에 대해서는 “앞으로 그 방법을 진지하게 검토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1993년 8월 5일 <경향신문> ‘日 정신대 강제연행 첫 인정’

1995년 8월, 무라야마 도미이치 당시 일본 총리는 과거 일본의 침략 행위와 식민지 지배 등을 반성하는 담화문을 발표한다. 무라야마 총리의 담화문 발표가 있기 직전, 김영삼 대통령은 아사히 신문 회견을 통해 “과거의 역사를 거짓말로 미화하거나 불문에 부치는 것은 일본 자신을 위하는 일이 될 수 없다. 침략과 식민지배에 관해 겸허한 반성이 있어야 새로운 한일관계가 구축될 수 있다”고 말한다.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캡처본
1995년 8월 16일자 <경향신문> ’日 총리 「침략」 인정’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캡처본

일본의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는 15일 종전 50주년에 즈음한 특별담화를 발표, 일본의 전쟁이 침략이었음을 공식 인정하고 통절한 반성의 뜻을 표명했다. 일본의 총리가 각의 결정 형식을 거쳐 ‘침략’이라고 명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중략) 

무라야마 총리는 이날 오후 아시아 태평양 각국으로부터 종군위안부와 강제연행노동·징병자 등 40여 명을 초청, 증언을 듣는 자리에서 “여성으로서의 명예와 존엄을 범하고 그 심신에 참기 어려운 굴욕과 고통을 준 것은 무엇으로도 보상할 수 없다”며 “깊이 사죄드린다”고 말했다.

-1995년 8월 16일 <경향신문> ’日 총리 「침략」 인정’

 

국민의정부, ‘일본문화 개방’부터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까지
‘무라야마 담화’ 기반한 공식문서화…사과 대상 ‘아시아’서 ‘한국’으로


기자회견하는 오부치 일본 총리와 김대중 대통령 모습 ⓒ 연합뉴스
기자회견하는 오부치 일본 총리와 김대중 대통령 모습 ⓒ 연합뉴스

1998년 취임한 김대중 대통령은 한일관계를 더욱 원만하게 유지했다. 문민정부는 ‘고노 담화’와 ‘무라야마 담화’로 일본의 사과를 이끌어냈고, 이를 국민의정부가 이어 받았다. 

DJ는 ‘한일간 국민적 협력’에도 힘썼다. 취임 첫 해에 일본 대중문화를 개방을 주장하고, 오부치 게이치 당시 일본 총리와 ‘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을 발표한 것이 협력의 대표적 일환이다. 해당 공동선언은 기존 담화형식이 아닌 공식문서로 기록된 점, 최초로 한국을 지칭해 사과 한 점에서 진일보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일본 대중문화를 개방하기 위한 정부 차원의 구체적 논의가 4월중 시작된다. (중략) 김대중 대통령도 이날 문화관광부 업무보고에서 “일본 대중문화 개방을 두려워할 것이 없다”고 말해, 적극적인 개방 의지를 시사했다. 

-1998년 4월 18일 <조선일보> ‘일본 대중문화 ‘빗장’ 푼다’

내용을 입력하세요.오부치 게이조 일본 총리는 7일 중의원 본회의에서 행한 취임 첫 연설에서 한일관계 개선과 관련, “올 가을 김대중 대통령의 방일을 앞두고 21세기를 향한 새로운 파트너십 구축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어업협정 체결을 위해 계속 힘을 쏟겠다”고 말했다. (중략)

한편, 오부치 총리는 이날 태평양 전쟁 종전일인 8월 15일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지 않을 것임을 밝혔다. 

-1998년 8월 8일 <동아일보> ‘韓-日 관계 개선에 최선 올 신사참배 안하겠다’

오부치 게이조 일본 총리는 일본의 종전기념일인 15일 정부 주최의 전국전몰자추모식에 참석, 아시아 각국의 전쟁피해자에 대해 깊은 반성과 애도의 뜻을 표했다. 

-1998년 8월 17일 <경향신문> ’日 총리 “전쟁피해자에 깊은 반성”’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캡처본
-1998년 10월 8일 <조선일보> ’사과 대상 ‘아시아’서 ‘한국’으로’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캡처본

오부치 총리는 8일 발표할 공동선언 전문에서 “우리나라가 과거 일정기간 한국 국민에 대해 식민지 지배를 통해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안겨줬다는 역사적 사실을 겸허히 인정하고 이에 대해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표명한다”고 밝힐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지난 95년 무라야마 당시 총리의 ‘전후 50주년 담화’ 내용에서 ‘아시아 제국’을 ‘한국 국민’으로 바꾼 것이다. 

한국 정부가 “사과문안은 무라야마 수준이면 된다”는 입장이었으므로 형식면에서 소기의 성과는 거둔 셈이다. 더욱이 ‘말’이 아닌 ‘문서’로 사과했다는 점이 의미가 크다는 정부 설명이다. 

-1998년 10월 8일 <조선일보> ’사과 대상 ‘아시아’서 ‘한국’으로’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문’을 통한 일본의 사과에 김대중 대통령은 ‘오부치 총리의 역사인식 표명을 받아들여 평가하는 동시에 양국이 과거 역사를 뛰어넘어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해 상호노력하는 것이 시대의 요청’이라는 입장을 표했다. 과거사 관련 발언 이외 선언문 요지는 다음과 같았다. 

△21세기를 향한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구축 △정상간 상호방문·협의 정기화 및 각료급 협의 강화 △대북정책 공조 △민관투자촉진협의회 개최 △온실효과 가스배출 억제 등 환경정책 대화 추진 △2002년 한·일 월드컵 개최를 계기로 한 문화 및 스포츠 교류 추진 등이다. 

YS 차남 김현철 동국대 석좌교수는 18일 <시사오늘>과의 통화에서 “한일 관계에 있어서 역사 바로세우기 차원에서 관계정립을 새롭게 하는데 가장 기념비적 사건은 무라야마 담화다. 무라야마 담화를 통해 일본에게 위안부 문제 등 과거사 문제에 대해 사죄받고 새로운 한일관계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천명했기에 이를 발판삼아 ’김대중-오부치 선언’이 나올 수 있었다. 이번 광복절 경축사에서 앞의 역사적 맥락이 생략된 채 이야기 됐다는 점에서, 윤석열 정부 역사인식에 있어 아쉬운 부분이 있다”고 전했다.

이현종 <문화일보> 논설위원은 “윤석열 대통령이 ‘오부치-김대중 선언’을 강조한 것은 해당 선언에 담긴 미래지향적 정신 때문이라고 본다. 과거에 너무 얽매일 경우 관계 발전이 어려워지는 측면이 있다. 때문에 윤석열 정부가 해당 선언을 언급하며 강조하려고 한 것은 ‘미래지향성’이라고 본다. 강제 수용 등 과거 문제의 경우 사법권을 적극 행사해서 이들에게 배상하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는 것 같다. 문재인 정부에서는 한일 관계에 대한 일체의 진전이 없었다. 윤석열 정부는 ‘김대중-오부치 선언’에 담긴 정신을 출발점으로 삼은 것 같다”고 밝혔다.
 

담당업무 : 정치부 기자입니다.
좌우명 : 생각대신 행동으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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