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가을인가… [일상스케치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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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가을인가… [일상스케치㊾]
  • 정명화 자유기고가
  • 승인 2022.08.21 16: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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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실의 계절, 헛헛한 마음에 어디론가 멀리 떠나고 싶어
한여름밤의 꿈이런가, 60 인생길 회한과 소회 한가득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정명화 자유기고가)

아 가을인가, 아 가을인가
아아~ 가을인가 봐
물동이에 떨어진 나뭇잎 보고
물 긷는 아가씨 고개 숙이지

아 가을인가, 아 가을인가
아아~ 가을인가 봐
둥근달이 고요히 창에 비치면
살며시 가을이 찾아오나

<아 가을인가, 김수경 작시>

벌써 이 가곡이 입가에 맴돈다. 더위가 한풀 꺾이며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내리니 마음이 스산하다. 처서를 목전에 두고 계절의 손바뀜이 피부에 와닿는다. 절기는 매년 잊지 않고 찾아온다. 시끄럽게 울어대던 매미 떼들은 어디로 숨어버렸는지 소리가 잦아들었다. 대신 어느샌가 산야 풀숲엔 귀뚜라미, 풀벌레 소리가 정겹게 속삭인다.

가을로 들어가는 길목. ⓒ정명화 자유기고가
가을로 들어가는 길목. ⓒ정명화 자유기고가

버리고 떠나기

입추 즈음 벼 크는 소리에 동네 개가 짖는다는 속담처럼, 따스한 햇살 받은 벼가 무럭무럭, 열매 익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나긋나긋 조잘거린다. 이렇게 계절이 영글어가면 나의 일상과 속내는 더욱 복잡하고 분주해진다.

자연의 결실로 인한 기쁨과는 역으로 계절이 주는 헛헛한 마음을 달래려 주변 정리에 집착한다. 마치 오늘이 마지막 날처럼. 서랍을 온통 파헤쳐 뒤지고 평소 잘 입지 않는 옷가지를 과감히 쓰레기통에 집어던졌다. 종량제 봉투 가득 채워서 버려도 버려도 끝이 없다.

그리고 생활용품도 정리에 정리를 거듭한다. 가진 물건이 왜 이다지 많고 거추장스러운지. 버리고 또 버리고. 그러다 보면 단출해지겠지. 먼길 떠나는 나그네의 채비처럼 말이다.

일장춘몽

무엇보다 가장 어려운 건 머릿속 잡다한 쓰레기들 청소다. 지웠다고 잊었다고 여겼던 잡념들이 부유물처럼 떠오른다. 어디 숨어있다가 나타나는지 때론 고통스러울 정도로 버거워 감당이 안된다. 단순화시키려 애쓸수록 머릿속은 더 엉키고 터질 듯 복잡하고 날 짓누른다.

가능하다면 지우개로 다 지우고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문득 기억상실증 아니 선택적 기억 장애에 걸리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지난 불필요한 안 좋은 기억을 지우개로 지울 수 있다면 정말 좋을 텐데….

이에 조용히 타향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낯선 곳에서 이방인으로 모든 걸 내려놓고 창밖을 내다본다. 거울에 비친  초라하고 노쇠한 낯선 행색. 이 나이까지 무얼위해 달려왔나 싶다. 허망하기 이를 데 없다.

가을이 문 앞에 서성이니 센치해진 탓일까. 석양을 바라보는 쓸쓸한 마음일까. 여고시절 국어 교과서에서 도통 납득하기 어려웠던 선현들의 탄식처럼 되뇌던 '일장춘몽', 그게 이제 나의 것이라니….

찌뿌린 새벽길 영롱한 이슬을 맞으며 산책을 나섰다. ⓒ정명화 자유기고가
찌뿌린 새벽길 영롱한 이슬을 맞으며 산책을 나섰다. ⓒ정명화 자유기고가

무념무상

찌푸린 새벽이슬의 영롱함과 마주하며 아침 산책에 나섰다. 천천히 걸으며 텅 빈 고요 속를 누빈다. 내면에 쌓이고 찌들어 벗겨내지 못한 온갖 상념들이 벗겨지길 기대하면서. 잠시 자연과 사랑에 빠지며 불편한 현실을 잊어본다. 적막강산에 내던져진 채로.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대신 내 머릿속을 말끔히 씻어내 주었으면 좋겠다.

인생 후반부를 걸으며 사람과의 관계도 정리를 조금씩 해 나간다. 온갖 얽히고설킨 관계를 하나씩 하나씩. 오롯이 나 혼자만이 고독 속에 남고 싶다. 잠시라도 온전한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 그리고 새처럼 훨훨 저 멀리 날아가고프다. 다음 생엔 새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든다. 물론 불가능한 일이다. 그저 바람일 뿐, 세상만사 내 뜻대로 되는 건 하나도 없다.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건지. 그거 자조 섞인 읊조림에 한숨만 나온다. 풀벌레 소리가 더욱 애처로이 다가온다. 그래도 나그네 같은 인생길, 풀벌레 소리에 위로를 받는다.

산책 중 가을맞이 중인 초목들을 보며, 인간의 마지막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잠시 슬픔에 빠졌다. 물론 그들의 가을로 가는 길목에 있는 모습은 찬란할 내년 봄을 위한 동면에 드는 상태긴 하나, 그 이후를 생각 안 한다면 아마도 다양한 형태로 돌아갈 우리들의 모습과  많이 닮지 않았나.

비에 젖은 단풍나무. ⓒ정명화 자유기고가
비에 젖은 단풍나무. ⓒ정명화 자유기고가

가을의 향기

상념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고운 단풍을 보며 욕심이랄까, 호사를 부리고 싶어졌다. 정말 형편없이 사그라진 모습보다는, 예쁘게 단풍이 들어 보는 이들에게 기쁨을 주고 싶다는 생각. 바람에 날리고 길거리에서 굴러다니면서도 마지막까지 아름다움을 뽐내는 그 모습이란…. 마지막 내 모습이었으면 한다는….

이제껏 걸어온 여정을 뒤돌아보니 꽃피던 화려한 시절도 있었지만 어렵고 가슴 아팠던 시절, 집채만한 파도가 덮칠 때도 많았다. 그때는 그 세월이 영원할 줄만 알았는데 많은 바람과 아쉬움을 남겨놓고 세월의 무게에 밀려 소리 없이 살같이 스쳐갔다.

세월이 너무 빨리간다. 인생무상, 짧은 세월 허무한 세월이지만 하루하루 연륜을 쌓으며 의미 있게 마무리해야 할 텐데, 정말 아름다운 황혼처럼 말이다.

육체적으로 병들고 늙어가더라도 정신적으로는 강건해야 하는데 가끔은 주저 않게 된다. 그게 가을에 습관병처럼 도진다. 백세시대라지만 이제는 내 인생길도 예순을 한참 지나 피할 수 없는 순리 속에 가을을 준비해야 한다.

눈을 감고 조용히 뒤돌아보기도 하겠지만 그 보다는 현재와 앞날만 바라보고 싶다. 더 나은 삶을 위해서는 과거를 미련 없이 흘려보내고 혼돈 속의 인생길, 무소의 뿔처럼 뚜벅뚜벅 걸어가야겠지.

정명화는…

1958년 경남 하동에서 출생해 경남 진주여자중학교, 서울 정신여자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연세대 문과대 문헌정보학과 학사, 고려대 대학원 심리학 임상심리전공 석사를 취득했다. 이후 자유기고가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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