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메이커, JP·虛舟…이철승·김종인·이준석은? [옛날신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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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메이커, JP·虛舟…이철승·김종인·이준석은? [옛날신문 보기]
  • 김자영 기자
  • 승인 2022.10.28 17: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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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환, 노태우-YS 도와 ‘대권’과 ‘대권 꿈’ 사이 교량역 담당
10대 총선보다 ‘부마항쟁’이 유신체제 몰락에 큰 영향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김자영 기자]

ⓒ 시사오늘 김유종 기자
<시사오늘>은 김윤환·김종필을 포함한 과거 킹메이커에 대해 살펴봤다.ⓒ 시사오늘 김유종 기자

‘킹메이커’는 말 그대로 왕을 만드는 자다. 현대에는 대통령 등 최고 권력자 탄생에 결정적 역할을 한 사람을 지칭한다. 

현대 대한민국 정치사에서 대표적 킹메이커로 이름을 날린 인물로 故 김윤환(허주) 전 의원과 故 김종필 전 총리(JP)가 있다. 허주는 노태우·김영삼(YS) 대통령을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JP는 박정희 정권 창출에 큰 역할을 맡았으며, YS 지지-DJP 연합 등으로 문민정부-국민의정부 탄생과도 연관이 있다. 현대에 와서 킹메이커 또는 차기 킹메이커로 주목받은 인물은 김종인·이준석 등이다. <시사오늘>은 킹메이커에 대해 살펴봤다.

기자 출신인 허주는 10대 국회 입문으로 정계에 발을 들인 뒤 5선을 했다. 이후 노태우 정부에서 대통령비서실장, 정무 제1장관을 지내는 등 6공화국의 실세였다. 문민정부에서 약 8개월간 정무 제1장관을 지내기도 했다.

1990년 1월, 전두환·노태우의 민주정의당,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 3당은 민주자유당으로 합당하는데, 이때 김윤환이 기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1995년 8월 22일 자 <동아일보> ‘친화력 뛰어난 현실론자…김윤환 대표 누구인가’ 기사에선 그를 “전두환-노태우-김영삼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최근의 정권 이양 과정에서 잇따라 킹메이커 역할을 해왔다”고 평가했다. 김윤환은 “노 대통령 시절에는 막후에서 3당 통합을 이끌어낸 뒤 ‘차기 정권은 일단 비 TK(대구·경북)에 넘겨야 한다’는 논리로 여권 내 TK 세력을 설득, 김 대통령 만들기에 앞장섰다”고 알려졌다. 

허주는 민자당에서 박철언·노재봉 등 민정계 세력과 YS의 민주계 세력이 갈등을 빚을 때도 YS에 우호적이었다. 그는 ‘YS를 내세워야 국민들이 6공화국을 납득할 것’,  ‘YS는 3당 합당 때부터 예정된 대세였던 점’, ‘야권의 김대중을 이길 수 있는 인물’이라는 점 등을 들어 대통령 후보직으로의 당위성을 설득한 것으로 전해진다.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캡처본
1992년 12월 20일 자 <경향신문> “대통령을 만든 사람들”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캡처본

김영삼 대통령 만들기 작업에는 수십 년 동안 수많은 인사들이 참여했다. 눈에 드러나는 당 조직도 있고, 보이지 않는 많은 인사들의 헌신도 있었다. 

그러나 허주(김윤환 의원의 아호)가 아니었으면 김영삼 대통령 당선자의 오늘의 영광은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는 지난 1990년 1월, 3당 합당 이후 김영삼 당선자가 위기의 늪에 빠질 때마다 온갖 비난과 위험을 무릅쓰고 그를 구출해냈다. 때로는 권력투쟁의 한복판에서 화해의 중재자로, 때로는 외로운 야전사령관으로 김 당선자를 도왔다. 

1990년 10월 내각제 합의 각서 파동으로 당이 분열 위기에 처했을 때, 정무장관이던 그는 청와대와 마산 사이를 오간 끝에 수습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해냈다. 민정계인 그가 그처럼 김 대표를 감싸고도는 것을 두고 일종의 ‘배반’ 행위라는 시각도 만만찮았다. 그가 소위 신민주계로 불리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중략)

그는 이번 선거 과정에서도 국민당의 침투로 한때 흔들렸던 대구·경북 지역의 선거책임자를 맡아 기대 이상의 압승(60% 선)을 이끌어 냄으로써 마지막 역할을 훌륭히 해낸 셈이다. 

- 1992년 12월 20일 자 <경향신문> “대통령을 만든 사람들”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캡처본
1995년 8월 22일 자 <경향신문> ‘김윤환 체제 그는 누구 정권교체기마다 ‘교량역’’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캡처본

허주(김윤환의 아호)의 정치역량은 유독 난세에서 빛을 발해 왔다. 80년대 이래 그는 여권이 전환기에 처할 때마다 정국의 중심에 서서 난국을 푸는 해결사였다. 정권 이행기엔 ‘대권’을 가진 사람과 ‘대권 꿈’을 지닌 사람의 틈새를 잇는 교량역을 담당했다. 

전두환 대통령에서 노태우 대통령으로의 이행기에 그는 청와대 정무수석과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중매역을 수행했다. 그는 창업공신으로서 6공에서 대통령비서실장과 당 사무총장, 두 차례의 원내총무와 정무 1장관을 역임했다. 

‘5공 청산’과 ‘3당 합당’ 과정의 막후 주역이었고 기획자였다. 6공에서 문민정부로 넘어가는 고갯길에서도 그는 흔들리는 민정계를 ‘YS 추대위‘로 묶어 ‘YS 대권’을 열었다. 그래서 그에게는 킹메이커라는 별명이 따라다닌다. 

- 1995년 8월 22일 자 <경향신문> ‘김윤환 체제 그는 누구 정권교체기마다 ‘교량역’’

 

김종필, 5·16 군사정변-3당 합당-DJP 연합 등 굵직한 사건에 개입
박정희 정권서 초대 중앙정보부장…민자당서 YS 지지·DJP연합까지


김종필 전 총리도 5·16 군사정변, 3당 합당, DJP 연합 등 대한민국 현대 정치사의 변곡점마다 개입돼 있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5·16 쿠데타를 주도했으며, 초대 중앙정보부 부장을 지내며 정권을 호위했다. 

대한민국의 젊은 영관급 장교들은 독재자 이승만 씨가 실각하기 한 달 전부터 군사 혁명을 계획하기 시작했었다고 국가재건 최고회의 중앙정보부장이 말했다. 

김종필 중령은 기자회견에서 그러나 그들의 계획은 이 정권을 전복시킨 바 있는 역사적인 4·19 학생 봉기 때문에 좌절됐다고 말했다. 

김종필 중령은 지난 달의 성공적인 군사혁명 경위를 처음으로 공표하면서 군부 혁명을 일으키려는 생각은 1960년 3월부터 있었다고 말했다. (중략) 

“처음에는 4·19 혁명 일주년이 되는 4월 19일에 거사하기로 결정했으나 그때는 장 정권이 민중 봉기에 대비해 특별경계를 펴고 있었으므로 이를 취소했다. 다음에 5월 12일로 결정했으나 이번에는 모 대령의 배신으로 비밀이 누설됐다” 

-1961년 6월 5일 자 <경향신문> ‘작년 3월부터 계획’

박정희는 △대통령 연임금지 조항 삭제 △대통령 3선 연임 허용 등 내용이 포함된 3선 개헌을 통해 1971년 7대 대선에서 권력을 잡는다. 당시 관권 선거, 금품 살포 등 부정 선거를 했음에도 야당의 김대중(DJ)에 94만 표 차로 간신히 이긴 박정희 정권은 1972년 유신헌법을 선포하기 이른다. JP는 유신정권에서 국무총리를 맡다가 1975년 사퇴하고, 1979년 10·26 사태를 맞는다. 

12·12 군사반란으로 들어선 전두환의 5공화국에서, JP는 활동하지 않았다. 1987년 민주화 이후에는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해 13대 대선에 출마한다. 13대 총선에선 충청권을 중심으로 35석을(11.7%) 획득하며 제3야당으로 올라섰다. 이후 3당 합당에 참여해 14대 대선에서 YS를 지원했다.

한편 3당 합당 초기부터 ‘마루의 받침대’, ‘벽돌론’ 등을 피력하며 스스로 킹메이커 역을 자임해온 김종필 대표 역시 김영삼 대통령의 초석이 된 인물이다. 

그는 지난 경선 때 민정계가 김영삼 대표와 박태준 최고위원 사이에서 우왕좌왕 하던 상황에서 김 대표의 지지를 선언함으로써 대세를 모으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김 대표는 이번 선거 기간 동안 김 후보가 미처 손을 쓰기 힘든 지역을 맡아 보조 유세를 벌였으며 직능단체 간담회 등 ‘얼굴’이 필요한 모임 등을 주재했다. 

- 1992년 12월 20일 자 <경향신문> “대통령을 만든 사람들”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민주자유당이 신한국당으로 개편되는 과정에서 JP는 배제당한다. 당에서 축출되다시피 한 JP는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해 15대 총선에서 50석을(16.72%) 확보한다. 이후 15대 대선을 앞두고 김대중과 ‘DJP 연합’을 이뤄 단일화한다. 연합할 당시 집권 2년 후 ‘내각제 개헌’을 합의했으나 실제론 이뤄지지 않았다.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캡처본
1997년 12월 20일 자 <매일경제> ‘김대중을 만든 사람들 JP·박태준 킹메이커 위력 발휘’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캡처본

김대중 후보가 제15대 대통령으로 당선되기 까지에는 많은 사람들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당 내외를 불문하고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의 최대 견인차 구실을 맡은 사람은 자민련 김종필 명예 총재와 박태준 총재를 꼽을 수 있다. 이들이 김 당선자와 ‘DJT 연합’을 구축하지 않았으면 김 당선자는 또다시 지역분할 구도에서 패배를 맛보았을지도 모른다는 분석도 있다. 

김 당선자가 충청권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김종필 명예 총재의 ‘공로’라 할 수 있고 영남지역에서 얼마만한 표를 얻을 수 있기에는 박태준 총재의 ‘조력’도 무시할 수 없다. 

특히 김 명예총재는 지난달 말 공식 선거 운동이 시작되면서 하루도 빼놓지 않고 충청권과 강원도, 수도권을 돌며 “나를 보고 김대중 후보를 찍어달라”고 호소했다. 김 명예총재는 김 당선자의 충청권 득표를 40%대로 끌어올림으로써 확고한 승리를 이끌어냈다. 

- 1997년 12월 20일 자 <매일경제> ‘김대중을 만든 사람들 JP·박태준 킹메이커 위력 발휘’

ⓒ 시사오늘 김유종 기자
유신 체제 몰락 이전에 선명 대여 투쟁 노선의 YS 신민당 대표 선출, YS 의원직 제명에 이어 부마항쟁 등 사건이 있었다. ⓒ 시사오늘 김유종 기자

1963년부터 1979년 10월까지 박정희가 제5대~9대 대통령을 지낸 동안  제1야당으로는 신민당이 떠올랐다. 당시 신민당 중심에는 유진산·김영삼·김대중·이철승이 있었다. 

이철승 당시 신민당 대표가 이끈 1978년 10대 총선에서 민주공화당-유신정우회가 지역구·국민회의에서 각각 68석·77석으로 총 145석(62.77%)을 얻었고 신민당은 지역구 61석(26.40%)를 확보했다. 유신헌법에 국회의원의 1/3을 대통령이 지명하도록 한 내용에 의해 유신정우회 소속이 77석을 가져간 것을 제외하면 신민당과 민주공화당 정당득표율은 각각 32.82%, 31.70%로 야당이 앞선 결과를 나타냈다. 이 때문에 10대 총선이 유신 체제 몰락의 도화선이 됐다.

하지만 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1979년에 있었던 YH사건-김영삼 총재 의원직 제명 파동-부마민주항쟁으로 이어진 일련의 흐름이 유신 체제 종말에 큰 영향을 끼쳤다. 10대 총선에서 힘을 얻은 신민당은 온건 노선으로 박정희 정권에 협조적 태도를 보였던 이철승이 아닌 보다 강한 ‘대여 투쟁 노선’의 김영삼을 내세우게 된다. 전당대회를 하루 앞둔 29일, 유신 정권에 의해 가택연금 중이던 김대중이 김영삼이 연 아서원 ‘민권의 밤’ 행사에 등장해 지지를 표명하는 일도 있었다.

원주 기독청년관에서 열린 신민당원주 지구당 개편 대회에는 이철승 대표가 참석하지 않은 가운데 김영삼·신도환·이기택·조윤형 씨 등이 축사에서 지도부를 맹 공격. 

김 전 총재는 “이번 전당대회는 정권을 도와주려는 세력과 야당을 하겠다는 세력 간의 투쟁”이라고 주장하고 “당원들은 지난번 총선에서 유권자들이 집권당의 자금 공세에도 야당에 승리를 안겨준 것처럼 정의롭게 당권을 가름해야 할 것”이라고 역설. 

- 1979년 4월 6일 자 <동아일보> “정권 결탁한 지도부 있다면 단호히 배격”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캡처본
1979년 5월 31일 <동아일보> ‘선명과 부담과…제2김영삼 시대’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캡처본

이번 당권 경쟁은 양상이 특이했다. 이철승 씨를 주축으로 한 고흥문·이충환·유치송 최고위원 및 막바지에 가세한 신도환 씨 등 당권파 연합세력과 김영삼 씨를 중심으로 한 비당권파 연합의 대결에 당 외 재야 세력이 가담한 것이다. 윤보선·김대중 씨 등이 30일 전당대회에서 상임고문으로 추대됨으로써 재야 세력은 신민당에 입성한 셈이다.

유신 체제가 출발된 이후 의정 차원·정당 차원의 현실 정치에 발을 담그지 않던 재야가 이번 기회를 통해 당인의 자리에까지 초대되게 된 것은 그들이 현실 정치를 그들의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의 하나로 쓰기로 전략을 바꾸었음을 뜻하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앞으로 김 총재가 재야의 구상을 반영시켜야 하는 ‘선명 부담’을 지게 된 것이다. (중략)

당내 반대 세력은 참여 하의 개혁 내지 중도통합론이라는 노선을 내걸어 김 총재의 직접 도전과는 거리를 보이고 있다. 이들이 거대한 조직을 갖고 있다는 것 자체가 원내 의원들이 현상 타파보다는 현상 유지의 속성을 갖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어서 김 총재의 선명 강행에 제동을 걸면 할 것으로 보인다. 

집권세력으로서도 지난 3년간 계속돼 온 여야 밀월을 계속 기대하기 어렵게 됐고 따라서 야당에 대응하는 자세를 강경으로 되돌릴 가능성도 있다. 

- 1979년 5월 31일 <동아일보> ‘선명과 부담과…제2김영삼 시대’


당권을 잡은 김영삼은 약속대로 강경 대여 투쟁에 나섰다. YH무역 여공 진압 사건 진상 규명 촉구, 외신을 통한 유신 비판 등으로 정부와 사사건건 각을 세운다. 이에 박정희 정권은 이철승계 인물을 모아 ‘전당대회 결과 무효 소송’을 제소하고, 법원은 YS의 총재직을 강제로 박탈하기에 이른다. 전당대회 이후 5개월이 채 안 된 1979년 10월, 정권은 그의 국회의원직까지 박탈한다. YS의 의원직 제명은 민심을 자극했다. YS의 정치 기반이었던 영남(부산·마산·창원 등)에서 유신 반대 시위가 벌어진다. 후에 ‘부마항쟁’으로 명명된 사건이다. 

1979년 10월 26일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 기사에 나와있다. 
http://www.sisa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1792

 

김종인, 박근혜 정부 공약으로 ‘경제 민주화’ 화두 내세워
위기 상황서 민주당·통합당 비대위원장…승리 공신? 면면 살펴야
10%차 완승 호언장담한 이준석, 남녀갈등 심화·尹-安 단일화 반대 


최근까지 ‘킹메이커’로 불린 인물로는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이 대표적이다.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도 헌정사 최초 30대 0선 당대표로 취임하며 ‘차세대 킹메이커’ 주자에 이름을 올린 바 있다. 

김종인 전 위원장은 2012년 18대 대선을 앞두고 새누리당 국민행복추진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그는 ‘경제 민주화’라는 의제와 공약을 내세워 박근혜 전 대통령 당선에 큰 도움을 준 것으로 알려졌다. ‘수구 보수’ 색이 강했던 박 전 대통령 해당 공약은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고 폐기되다시피 했다. 2013년 12월 경 김 전 위원장은 새누리당을 탈당한다. 

20대 총선을 앞두고는 더불어민주당에서 비상대책위원회 대표로 영입 제안을 받았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초대 대표를 맡고 있던 더불어민주당은 당시 ‘친노 패권주의’라는 비판을 받았다. 

20대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이 123석(41%)을 차지하며 여당인 새누리당(122석, 40.67%)을 넘어 원내 제1당으로 올라선다. 때문에 결과적으로 ‘김종인 영입’이 효과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면면을 살펴보면 여러 요인이 있었다. 안철수 의원이 탈당해 만든 국민의당이 민주당 전통 텃밭으로 불리는 호남에서 지역구 28석 중 23석을 가져갔으며, 정당득표율 26.74%을 얻어 더불어민주당(25.54%)을 앞섰다. 공천 갈등을 크게 겪은 새누리당 상황에 대한 반사이익도 있었다. 

새누리당의 20대 총선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진박은 살고 새누리는 죽고’였다. 야권이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으로 분열하면서 새누리당은 이번 총선에서 ‘최소’ 과반 의석을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됐다. ‘텃밭’인 영남을 지키고, 야권 분열로 수도권과 대전·충청·세종에서 어부지리를 얻으면 최대 180석까지도 가능할 것이라는 분석이 나왔기 때문이다. (중략)

자만은 독이 됐다. 이한구 공천관리위원장을 앞세워 TK(대구·경북)에 ‘자기 사람’을 심느라 여념이 없었던 친박계와 ‘옥새 파동’으로 반격을 시도한 비박계는 아직 손에 들어오지도 않은 떡을 두고 볼썽사나운 싸움을 벌였다. 그리고 이는 전국의 새누리당 지지자들에게 크나큰 실망감을 안기는 결과를 낳았다.

친박계가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텃밭’ TK에 공천을 내준 진박 후보들은 대거 당선증을 받아들었다. (중략)

진박 후보들을 살리기 위한 무리수는 다른 지역 유권자들에게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이번 총선에서 새누리당은 강남 3구(강남·서초·송파)에서 3곳을 더민주당에게 내주는 등 수도권에서 말 그대로 참패했다. 새누리당이 수도권에서 얻은 의석수는 불과 35석. 수도권에 주어진 122석의 1/3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치다.

- 2016년 4월 14일 자 <시사오늘> ‘[4·13 총선]진박 살고 새누리 죽고’

김 전 비대위원장은 2020년 3월, 미래통합당 선거대책위원장으로 임명된다. 21대 총선을 한 달 앞둔 시점이었다. 미래통합당은 국정 농단 사태, 19대 대선 패배, 내부 극우화, 7대 지선 패배 등으로 큰 위기를 겪었다. 결과적으로 21대 총선은 더불어민주당-더불어시민당(180석, 60%)의 압승이었다. 미래통합당-미래한국당은 103석(34.33%) 확보에 그쳤다. 

이후 6월 출범한 김종인 비대위에서 시작된 ‘당 체질 개선 작업’이 이뤄졌다. ‘기본소득’ 의제를 꺼내들었고, 광주 국립 5·18 민주묘지를 찾아 무릎 꿇고 사죄했으며,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 과오에 대한 사과를 표명했다. 4·7 재보선, 20대 대선, 8대 지선에서 국민의힘은 연이어 승리했다. 

김 전 위원장의 일련의 행보가 국민의힘에 대한 여론을 반전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했지만, 동시에 문재인 정부와 여당에 대한 국민의 실망감이 축적된 점도 살펴볼 수 있다.

지난해 4·7 재보선 격전지였던 서울과 부산은 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오거돈 전 부산시장의 성비위 사건으로 한동안 공석이었다. 오세훈·박형준 시장의 당선은 ‘정권 교체’ 여론을 상징적으로 나타냈다. 문재인 정부에서 있었던 조국 사태, 윤미향 의혹, 거듭된 부동산 실책, LH 직원 투기 사건 등은 국민의 불만을 일으켰다. 이러한 여론이 국민의힘에 대한 지지로 이어진 것으로도 일정 부분 해석된다. 

최근 정치권에서 ‘이준석’만큼 많은 관심을 받은 정치인도 드물었다. 그는 지난해 당 대표 선거 토론회에서 기성 정치인들을 능한 토론 능력으로 쏘아붙이며 2030 남성들로부터 지지를 얻었다. 이로써 국민의힘은 ‘젊은 정당’ 이미지를 형성했다.  
이 전 대표는 지난해 6월 국민의힘 당 대표로 취임해 ‘헌정사상 첫 30대, 0선 원내 교섭단체 대표’로 화제가 됐다. 국민의힘은 그가 당 대표에 취임한 뒤 20대 대선-8대 지선에서 승리했다. 

하지만 국민의힘 관련 논란 중심에도 늘 이 전 대표가 있었다. 윤 대통령과-안철수 의원이 대선 후보 단일화를 논의할 때 안 의원을 노골적으로 비판했고, 당무 보이콧을 선언하고 지방에 내려가 잠행하는 등 당내 갈등을 표면화했다. ‘남녀 갈라치기’를 정치에 이용해 민주당 중심으로 2030여성이 결집하는 효과를 냈다는 등 책임론이 불거지기도 했다.

국민의힘 지지율이 하락할 때도 ‘단일화 무용론’을 말하며 ‘10% 이상 차로 이길 수 있다’고 자신했다. 결과적으로 0.73%p차로 간신히 대선에서 승리했다. 지난 지선 격전지였던 경기도지사 단일화를 둘러싸고 강용석 전 의원 합류를 거세게 반대하기도 했다.

정세운 시사평론가는 28일 <시사오늘>과의 통화에서 "JP나 허주는 국민이 필요로 하는 시대정신과 정치지형도를 정확히 포착하고 확인한 뒤 실천에 옮기는 데 능했던 정치인들이었다"며 "불리한 상황에서도 과감히 역전시킨 승부사의 면모가 있었기에 자기 배에 대권주자를 태워 성공시킬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반면 "김종인과 이준석은 변화하는 정치 지형에 올라 타 결과적으로 승리한 경우였다"며 "승리하는 배에 승선한 것을 갖고 킹메이커로서 능력이 있다고 할 수는 없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담당업무 : 정치부 기자입니다.
좌우명 : 생각대신 행동으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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