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움받는 일 [기자수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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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움받는 일 [기자수첩]
  • 박근홍 기자
  • 승인 2022.11.17 09: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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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박근홍 기자]

언론인이 되고 싶다고 마음먹은 건 군(軍)생활 당시다. 감투를 한번 써보겠노라며 고시 공부를 하던 내게 한 후임병이 기자를 권유했다. 공무원보다는 그게 잘 어울릴 것 같다고 했다. 내 귀는 지금도 얇지만 그때는 더 얇았다. 전역 후 전공·수험 공부를 모두 접었다. 고시 합격을 기대하던 가족들에겐 귀띔도 할 수 없었다. 언론고시 준비에 들어갔다. 수년을 도전했으나 서류 탈락, 1차 탈락, 최종 탈락을 반복했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곳이다. 고시 공부는 일찌감치 접었고, 조그만 언론사에 취업했다고 가족들에게 얘기했다. 과거 경찰서에서 사무직으로 일하셨던 어머니께서 에둘러 불만을 표했다. '박봉이고 힘들다'고. 그래도 괜찮다고 대꾸하니 완곡하면서도 무거운 물음이 돌아왔다. "사람들한테 미움받는 일인데 할 수 있겠어?"

이달은 기업들이 2022년 3분기 실적을 발표하는 때다. 산업부, 경제부 기자들에게 일거리, 쓸거리가 많은 시기다. 각 업체들의 분기보고서를 기업적 측면과 경제사회적 측면에서 분석해 현재를 살피고, 미래를 조심스레 내다봐야 한다. 특히 건설·부동산 출입 기자로서 이번 실적 발표 시즌은 여느 때보다 중요하게 다가왔다. PF(프로젝트 파이낸싱) 대출 리스크가 지난 3분기 말 발생한 레고랜드 사태로 본격 확산된 데 이어, 4분기 초에는 몇몇 대형 건설사들이 자금난으로 인해 부도 위기에 몰렸다는 '지라시'까지 유포됐기 때문이다. 지라시에 언급된 업체들을 비롯해 현재 업계가 어떤 상태인지를 파악해야 했고, 나아가 앞으로 분석 기사를 작성할 때 필요한 자체 데이터를 만들기 위해 각 회사들의 실적 관련 기사들을 단신으로 처리했다. 매출, 영업이익은 물론, 리스크 관련 재무지표 추이도 일부 다뤘다.

그 직후 해당 기사들에 언급된 건설사 중 몇 군데에서 연락이 왔다. 기사에서 다룬 수치에 오류가 있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입장도 반영해 달라는 취지에서다. '수익성이 감소한 건 이런 이유 때문이고, 부채비율이 증가한 건 저런 이유 때문'이라는 설명을 넣어달라는 식이다. 단신 보도와 관련해 이 같은 연락이 오는 건 종종 있는 일이지만 결코 잦진 않다. 각 건설업체들도 이번에 발표된 실적이 향후 경영활동에 중대한 영향을 끼칠 거라는 걸 인지하고 있는 것이다. 입장을 실어달라는 요청을 거절할 까닭이 없다. 설령 과도하게 낙관적인 해몽일지라도, 객관적인 통계를 앞서 소개했으니 이에 대한 해석은 독자들의 몫이다. 그렇게 오후 업무를 마무리하려는데 이번엔 누리꾼들로부터 메일과 댓글을 통해 메시지를 받았다. 이들은 '지라시'에 거론된 몇몇 상장 건설사들의 소액주주였고, '일부러 안 좋은 면만 부각시키는 기사', '기레기가 또 기레기했다', '글 하나에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볼 수 있다', '개미들은 피눈물 흘리고 있다' 등 비판을 제기했다.

업체들의 입장도, 독자들의 반응도 모두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다. 좋게 쓰려면 다 좋게 쓸 수 있다. '부진, '하락', '감소' 따위의 표현을 쓰지 않고, '그럼에도 선방한 것으로 보인다'를 곁들이면 된다. 부정적인 지표를 제외하고 긍정적인 지표만 인용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태영건설은 이번 3분기 전년 동기와 비교했을 때 영업이익, 현금흐름, 부채비율, 우발부채 등이 모두 악화됐으나 매출과 수주잔고가 증가했고, 레저사업·임대사업·기타사업 매출 비중이 늘어 수익 다각화도 실현 중이다. 같은 기간 동부건설도 영업익·순익 적자전환, 현금흐름·부채비율 악화, 미청구공사 확대 등 어려움을 겪었지만 동부엔지니어링, 동부자산관리, 동부당진솔라, 더파크 등 자회사들의 선전이 돋보였다. 롯데건설은 막대한 현금과 자산을 보유한 재벌 대기업집단 소속임을 다시 한번 과시했다. 다만, 이 같은 사항들은 현 시점, 현 국면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대목이 아닐 뿐이다.

비일비재한 일이다. 노사분쟁과 정비사업 수주전 현장 취재에 나갔다가 멱살을 잡히기도 했고, 집값 문제를 다루는 기사를 작성하면 입주예정자, 지역민들로부터 욕설을 듣기도 했다. 아파트 부실시공·하자 관련 기사를 냈다가 왜 건설사와 단지명을 이니셜 처리하지 않았느냐는 항의 전화를 하루 종일 받은 적도 있다. 충분히 수긍 가능한 비판들이다. 그러나 보도하지 않으면 더 많은 피해자를 양산할 수 있다. 집값 하락 가능성이 높은 지역임을, 명백한 하자가 있는 단지임을 모른 채 덜컥 매매계약을 체결한 수요자들, 현장 취재나 분석 없이 업체 보도자료만 인용해 쓴 기사를 보고 특정 회사에 투자한 주주들이 분명 존재한다. 좋은 면을 띄우고, 안 좋은 면을 가리는 건 홍보 담당자가 하는 일이다. 기자는 안 좋은 면을 알리는 게 주된 일이고, 좋은 면은 걸러서 소개해야 한다. 그러면서 월급쟁이로 살고 있으니, 손가락질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미움받는 일이라는 걸 알고 뛰어들었고, 제법 연차가 쌓이면서 뭘 어떻게 하든 결국 미움받는 일이라는 생각은 더욱 굳어졌다. 무조건 어느 한쪽의 원망을 사게 된다. 그렇다면 차라리 더욱 격렬하게 미움받는 게 낫지 않을까 싶다. 단, 욕을 먹더라도 떳떳한 기사를 써서 욕을 먹고, 자아도취와 허위의식, 진영논리를 경계하면서. '사람들한테 미움받는 일인데 할 수 있겠느냐'는 어머니의 되물음을 엉뚱하게도 난 이렇게 받아쳤다. "기자는 기사로 말하는 거래"라고. 그러자 어머니는 한숨을 쉬셨고, 가만히 듣고 있던 아버지는 하늘을 쳐다보셨다.

담당업무 : 건설·부동산을 중심으로 산업계 전반을 담당합니다
좌우명 : 隨緣無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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