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갑길 “민추협 최대 과제는 민주회복…민주화 앞당긴 자부심” [민추협 되짚기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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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갑길 “민추협 최대 과제는 민주회복…민주화 앞당긴 자부심” [민추협 되짚기⑭]
  • 정세운 기자,윤진석 기자
  • 승인 2022.12.15 21: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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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갑길 국기원 이사장(민추통신 편집부장)
김대중-김영삼 두 지도자 중심의 민추협 있어 가능
시민과 학생 재야 종교계 하나 되는 동력 만들어내
양김 분열 後 해체되면서 역사적 재조명 못 받았지만
역사 바로 세우기 위해서라도 재평가 나서는 데 공감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정세운 기자, 윤진석 기자]

1985년 12대 총선 나흘 앞드고 미국에서 DJ가 귀국하자  그를 환영하는 인파들이 현수막들고 DJ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다.ⓒ연합뉴스
1985년 12대 총선 나흘 앞드고 미국에서 DJ가 귀국하자 그를 환영하는 인파들이 현수막들고 DJ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다.ⓒ연합뉴스

1985년 2월 8일 시간이 정오에 다다를 즈음 DJ(김대중)를 태운 NWA 191호 비행기가 김포공항에 막 들어서고 있었다. 미국 망명 생활 끝에 어렵게 결정된 3년 만의 귀국이었다. 바깥에서는 DJ를 보기 위해 모여든 인파들이 까치발을 들고 서성댔다. 까만 머리의 군중들 위로 ‘김대중 선생 환영’ 플래카드가 햇빛에 반사돼 반짝거렸다. 

‘시간이 다 됐는데….’ 몇 년 전만 해도 동교동 178-1번지 DJ 자택의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던 동지들은 점점 초조한 마음이 들었다. 장남 김홍일 씨도 입국항을 뚫어질 듯 주시했다. 

하지만 좀처럼 DJ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같은 시각 DJ와 이희호 여사는 전두환 정권이 파견한 안기부 요원들에게 붙들려 일반인 입국 심사대조차 통과하지 못하고 있었다. 정부 요원들은 다른 루트로 DJ 팔을 잡아끌고 강제로 차에 태웠다. ‘부르릉-----’ 액셀을 밟고 핸들을 돌렸다. 차가 향하는 곳은 동교동 자택이었다. 한국 땅을 밟기도 전에 YS(김영삼)와 마찬가지로 가택 연금에 처하는 순간이었다.

전갑길 전 국회의원(16대 역임‧사단법인 민추협 초대 사무총장, 이하 전갑길)은 그때까지 DJ와 직접적 인연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2‧12 총선이 끝나고 민추협에 들어가면서야 비로소 첫 대면을 하게 됐다. 조선대학교에서 민주화운동을 한 그는 졸업과 동시에 민추협에서 활동했다. DJ 귀국 후 2개월이 지난 4월의 일이었다.

자연스레 일주일에 한 번씩 DJ를 보좌하는 일이 생겼다. 2·12 12대 총선에서 신민당(신한민주당)이 돌풍을 일으키고 난 뒤라 전국적 분위기 면에서 민주화를 향한 해빙기가 찾아올 때였다. 

 

1. 엔테베 작전처럼 


12대 총선이 끝난 뒤 결합한 전갑길 국기원 이사장이 지난달 14일 국기원 사무실에서 만나 민주화추진협의회에 참여하게 된 계기와 역사적 의의 등에 대해 발언하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12대 총선이 끝난 뒤 결합한 전갑길 국기원 이사장이 지난달 14일 국기원 사무실에서 만나 민주화추진협의회에 참여하게 된 계기와 역사적 의의 등에 대해 발언하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민추협은 어떻게 들어가게 됐나요.”

경위가 궁금했다. 지난달 14일 강남구 국기원 사무실에서 만나 이 점부터 물었다. 그는 현재 국기원 이사장을 지내고 있다. 

“민추협의 김형문 국장이라고 있었어요.”

김형문은 금문당 출판사 대표이자 <金大中(김대중), 그는 누구인가>를 지어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인물이다. 민추협에서 업무국장, 총무국장 등을 지냈다. 

“한 선배를 통해 그분을 알게 돼 민추협에 가서 일하고 싶다고 했어요.”

처음에는 민추협 규율을 잡는 회기부장 일부터 주어졌다. 다음으로 <민주통신> 편집부장으로 활동했다. 이협 전 의원이 동교동계 몫의 편집주간을 맡을 때였다. 상도동, 동교동으로 철저히 5대 5원칙을 지켰다. 

- 조율이 안 될 때는 어떻게 했습니까. 

“앞전의 <민주통신>을 보면서 조율해나가요. YS가 먼저 나오면 다음은 DJ를 앞에….”

치열했다. “불꽃 튀죠.” 동교동, 상도동 막론하고 민추협 인사들을 인터뷰할 때면 비슷한 일화들이 어김없이 전해졌다. 동지애와 라이벌 의식을 오가며 끈끈한 깐부애가 생겨났다. 

“만든 것이 중요한 게 아니고 그것을 인쇄하고 발행해서 뿌려야 될 거 아니겠습니까?”

이게 제일 어려웠다. “인쇄소로 가야 하는데 수도권 인쇄소는 경찰이나 정보과에서 다 관리하고 있을 때예요.” 

- 그럼 어떻게 합니까. 

“엔테베 작전을 하죠.”

정예부대를 투입해 인질을 구출한 이스라엘 정부의 대테러 작전을 말했다. 

“서울 외곽의 각 민추협 지부가 있잖습니까. 몇 월 며칠 몇 시에 트럭을 싣고 오라고 하면 동지들이 여러 명 와 있어요. 인쇄소에서 만든 순간 차에 실어요. 한 차 가면 또 한 차에 싣고….” 이따금 정보과에 의해 발각되면 압수되기 일쑤였다. 영락없이 다시 찍어야 했다. 

“일주일은 잠도 못 자고 하죠.” 그리 말하면서도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목숨 내놓고 한 일이지만, 기억에 남고 보람찬 일이었다. 추억을 흔들어 깨우듯 “취재를 하다 보니까 말이죠.” 운을 뗐다. 질문 세례를 퍼붓기 위한 담금질과 같았다. 
​​

 

2. DJ와 후농 


1985년 2월 12일 신민당이 12대 총선에서 성공을 거둔 이후 귀국한 DJ와  YS가 만나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정국 구상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연합뉴스
1985년 2월 12일 신민당이 12대 총선에서 성공을 거둔 이후 귀국한 DJ와 YS가 만나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정국 구상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연합뉴스

- 딱 한 세 가지 관점에서 물어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대답을 잘 해주기도, 안 나오기도 하더라고요. 

"뭔가요.”

- DJ가 맨 처음에 민추협 참여를 반대했잖습니까. 그것을 후농(後農) 김상현(6·7·8·14·15·16대 국회의원)이 밀어붙여서 된 거다, 이게 정설이거든요. 

“….”

잠자코 듣고 있었다. 

- 근데 왜 반대를 했는가 보면….

“아니요. 크게 반대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반박하듯 이 말부터 해왔다. 

하기는 DJ 가신그룹인 한화갑 전 새천년민주당 대표도 재작년 <시사오늘>과의 인터뷰에서 “참여하라, 불참해라. 이런 건 없었다”고 한 바 있다. 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 역시 DJ가 반대하지 않았다고 했다. 

반면 김상현의 얘기는 다르다. YS와 함께 적극적으로 민추협 구성을 주도한 그는 2009년 본지 인터뷰에서 “DJ는 민추협 구성을 반대했다”고 증언했다. 

진실의 퍼즐을 맞추는 작업이 필요했다. 동교동계 인사들과 인터뷰할 때마다 집요하게 묻게 되는 이유였다. 

- 그럼요?

“나야 깊이는 모르지만…. 총선 끝나고 선배들 통해 듣긴 들었죠.” 

그 얘기가 정황상 합리적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가 있었다며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차근차근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첫째는 DJ가 망명 생활을 하고 있었잖아요. 국내 정치에 대해 많은 정보를 들었겠지만, 직접적으로 리얼하게 체감할 수는 없었다고 생각해요.” 일리가 있는 추론이었다. 

“또 전해 들을 수밖에 없잖아요.” 두 번째 이유에 대해 덧붙여 나갔다. “아무래도 말해주는 쪽에서 취지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싶어요.” 다시 말해 “후농이 YS와 공동의장을 하는 것에 대해 DJ 어른이 볼 때 여러 깊은 생각을 했지 않았겠느냐”는 추측이었다. 

어떤 생각들이었을까. “후농을 놓고 보면 DJ 어른의 문하생으로 봐야 할 것 아니에요?” 이 점을 환기했다. “그와 달리 DJ와 평생을 같이 해온 기라성 같은 7~8명분의 동지들이 계세요.”

양순직·박종태·예춘호·최영근·박영록·이용희 등을 말했다. 

“모두 DJ 친구들이잖아요. 그분들하곤 격의 없이 대화하죠. 물론 DJ 어른께서는 권노갑(DJ 비서실장, 13·14·15대 국회의원) 의원을 비롯한 비서진을 제일 믿고 또 아들을 믿었겠지만….” 암튼 정치적 동지 관계에 놓인 이들의 위치는 또 다르다는 얘기였다. 
 
“그분들이 후농을 어떻게 볼 것인가. 본인께서는 DJ 2인자로 생각하겠지만, 어르신과 스스럼없이 가깝게 지낸 분들의 생각은 또 다를 수 있다는 거죠.” 표정에서 조심스러움이 묻어났다.

“그러니까 그분들이 DJ에게 조언할 때는 후농이 너무 나서다 보면 자칫 세대를 뛰어넘지 않겠느냐 생각할 수도 있었겠죠.” 말인즉 후농이 단숨에 크게 되는 것을 우려했을 수 있다는 가늠이었다. 

- 그래서 반대를 했다…?

“아니요. 그것만 가지고 DJ가 판단했다고는 안 봐요.” 

단언했다. 

관련해 더 말은 안 했지만, 가신그룹에서는 DJ가 국내에 없는 상황에서 동교동계가 YS 아래서 민추협이라는 한배를 타게 되면 자칫 조직이 와해해질 수도 있겠다는 걱정을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 때문에 1984년 5월 18일 외교구락부에서 가진 민추협 발족 당시 참여파와 반대파로 동교동계가 갈라졌다. 가신그룹은 참여하지 않고, 후농을 비롯해 조연하‧김녹영‧박종률‧김성철‧김윤식 등만 참여했다. 

 

3. 신민당 반대? 


- 12대 총선을 앞둔 신민당(신한민주당) 창당 때도 DJ가 반대했잖아요. 정대철(9·10·13·14·16대) 의원한테 물어보면 DJ가 민한당으로 나가라고 했다는데 왜 그런 오판을 했을까? 라는 겁니다. 

“신민당을 만들 때는 말이죠.” 

이 말에 재빠르게 끼어들며, “분열로 생각했을까요” 물었다. “그럴 가능성이 크죠.” 수긍했다. “하나로 뭉쳐도 시원찮을 판인데 야권 분열을 하다 보면 민정당을 이기기 쉽지 않을 것이다, 생각했을 수 있잖아요.” 이해가 되는 추측이었다. 

“그때는 또 YS와 DJ를 라이벌로 봤잖아요.” 그 점을 환기하며 말을 이어나갔다. “YS가 지나치게 주도하는 것에 대해 주변 비서들이 경계했을 거예요.” 민추협 구성 때와 마찬가지 논리였다. 

“늘 신경 쓸 거 아니겠습니까.” 동의를 구하듯 말끝을 올렸다. “그렇죠.” 맞장구쳐줬다.

“DJ가 미국에서 왔을 때 정치 주도권이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 그런 미묘한 것들이 작용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이렇게 말하면서도, “결국은 잘 됐으니까 그것은 큰 문제가 없어요. 잘못됐을 때는 지탄받아야 마땅한데 결국은 잘 됐잖아요.” 갈무리했다. 
 

후농 김상현 의원(왼쪽에서 두 번째)은 김대중 대통령 만들기에 앞장 선 인물이지만, 민추협 참여 등을 놓고 이견이 나오는 등 몇 가지 계기를 갖게 되면서 DJ와 소원해졌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연합뉴스
후농 김상현 의원(왼쪽에서 두 번째)은 김대중 대통령 만들기에 앞장 선 인물이지만, 민추협 참여 등을 놓고 이견이 나오는 등 몇 가지 계기를 갖게 되면서 DJ와 소원해졌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연합뉴스

- 후농의 공(功)이 좀 줄어드는 느낌이 들어요. 예컨대 아들인 김영호 의원 시각에서 보면 동교동계 중에서 아버지가 민추협을 만든 공로가 가장 큰데 평가가 좀 박하다고 생각 들지 않겠습니까. 

“….”

- 왜 이렇게 됐다고 봅니까. 

“DJ가 12대 총선 때 국내에 들어왔잖아요. 당시도 공동의장을 놓고 의견이 분분했어요. 측근들은 DJ가 공동의장을 해야 한다고 했어요. 다른 쪽에서는 어차피 어르신이 정치규제에 묶여 있으니까 후농이 지금처럼 YS와 공동의장 하게 놔두자고 했고요. 대신에 YS 격을 후농 급으로 만들자, 그리고 DJ는 더 위에 있는 분으로 가게 하는 것이 좋겠다는 거였죠.”

그는 후농 또한 후자의 입장에서 DJ를 설득하려 했다고 술회했다.

“후농도 DJ한테 ‘내가 YS를 대적해도 지지 않고, 리드할 수 있는데 왜 어른이 나서서 나를 밑에다 내리려고 그러냐.’ 이런 분위기가 있었어요. 그런데 상도동 의견을 안 들을 수가 없잖아요.”

- 상도동 의견은 어땠습니까.

“DJ가 공동의장이길 바랐죠. DJ 역시 정치는 살아있는 생물이기 때문에 현장 일선에서 뛰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주변서도 머물러 있으면 안 된다는 분위기가 더 강하게 형성돼가고 있었고요. 그래서 후농한테 물러나라고 했는데, ‘나를 통해 수렴청정하게 하라’며 버틴 거예요.”

본인이 알고 있는 내용의 자초지종을 전해줬다. 그 뒤로 예전만 못한 관계가 됐다는 얘기였다. 당사자인 후농 스스로 볼 때도 안타까운 감정이 컸을 거로 짐작된다. 그로 말할 것 같으면 1971년 대선에서 DJ를 설득해, YS가 주도하고 있던 40대 기수론에 뛰어들게 했고, 묘수 끝에 정통 야당의 대선 후보가 되는 데 일조한 인물이다. 오랫동안 ‘김대중 대통령 만들기’에 앞장섰던 만큼 소원해진 관계가 뼈아프고 서러웠을 거였다. 

하지만 원심력이 팽창해가듯 골은 더 패어만 간 듯했다. “결정적인 것은 국회부의장 선거 때 DJ가 미는 부회장과 후농이 미는 조연하(5‧8‧12대) 위원이 있었는데 거기서 후농이 DJ 말을 안 들어버린 것이죠.” 

그 결과 완전히 DJ 눈 밖에 나게 됐다는 설명이 보태졌다. “서로 미워서가 아님에도 분위기가 그렇게 작용했다고 봐요.” 

이후는 어떨까. “오해가 풀렸죠.” 말해 뭣하냐는 눈빛을 보내왔다. 다만 “김영호 의원 생각에서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아버지 입장으로 듣다 보니까 그럴 수 있다고 봐요.” 응당 원망할 수도 있겠다, 이해하는 눈치였다. 

- 후농 생전에 두 번 인터뷰했었는데 상세히 말해주더라고요. 김홍일과 심기석이라는 분이 와서는 ‘신민당 만들면 절교할 거다’ 이런 식의 얘기도 들었다고요. 

“전하는 사람이 그렇게 했을 수 있겠지만, DJ는 그런 분이 아니에요.” 

고개를 저으며 그럴 리 없다고 장담했다.
하지만 후농의 말은 다르다. 
 

“그 당시 김 전 대통령(DJ)은 미국에서 인권문제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연구소에 몸담고 있던 심기석 동지를 밀사로 한국에 보냈습니다. 심기석 동지와 평창동에 있는 어느 한 호텔에서 만났습니다. 김홍일도 같이 왔더군요. 그때 ‘김홍일’은 의원이 아니었습니다. ‘DJ가 신당에 반대한다’며 ‘신당에 참여하면 절교를 선언하겠다’고 하더군요.”
-2009년 11월 <시사오늘> 인터뷰 중-

 

4. 양김 단일화


- 그다음에 또 궁금한 게 87 대선 때 말이죠.

“네.”

대화는 점핑해 1987년 6월 항쟁 너머로 이동했다. 직선제 민주주의를 쟁취한 국민적 관심사는 그해 12월 치러질 13대 대선에 꽂혀 있었다. 체육관에서 간접선거로 진행되는 그들만의 선출 방식이 아닌 국민 손으로 직접 투표를 통해 대통령을 뽑을 수 있다는 기대감이 고조되고 있었다. 

민의는 야권 단일화였다. 

이런 맥락을 전제로 질문을 이어갔다. 

- DJ는 대선 후보도 하고, 전국적 인지도도 높았잖습니까.

“그렇죠.”

- 근데 굳이 87년 단일화 때 이를 깨고 평민당을 만들 필요가 있었느냐는 겁니다. 

“….”

- 경선을 통해 승부를 가릴 필요가 있지 않았나 싶은데 우리 총장(인터뷰 상황을 지켜보며 배석 중이던 민추협의 조찬옥 사무총장을 가리켰다)께서는 DJ가 경선에 참여했다면 무조건 YS한테 졌을 거라고 하더라고요. 

“엣흠.”

옆에서 배석 중이던 조찬옥이 헛기침을 했다. 말할 타이밍을 보고 있는 듯.

- 어떻게 판단합니까.

“그때는 직접 어르신을 모셨을 때인데요.”

전갑길이 민추협서 2년을 거쳐 DJ 수행비서로 활동할 때였다. 

“당시는 어떤 객관적 지표를 나타내는 데이터가 없었잖아요. 여론조사를 통해 수치를 볼 수도 없고 말이죠.” 이렇게 말하며, “지금처럼 국민 경선을 하면 DJ가 이겼겠죠” 자신했다. 

- 그런가요.

“다만, 조직이 불리했던 것이 사실이에요. YS는 국내에서 정치하면서 튼튼한 조직력을 갖추고 있었고, DJ는 국민적 지지만 있었지 망명을 갔다 온 터라 당세는 상당히 약했죠. 신민당을 이끈 것도 YS 손에서 주도됐고, 통일민주당도 YS가 만든 거잖아요.”
 

1987년 대선을 앞두고 양김은 단일화 협상을 벌였지만 난항이 거듭됐던 가운데 YS가 막판 담판을 통해 동교동계 안을 수용한다고 했지만 DJ가 이를 받지 않은 바 있다. 사진은 외교구락부에서 양김이 회동하고 있다.ⓒ연합뉴스
1987년 대선을 앞두고 양김은 단일화 협상을 벌였지만 난항이 거듭됐던 가운데 YS가 막판 담판을 통해 동교동계 안을 수용한다고 했지만 DJ가 이를 받지 않은 바 있다. 사진은 외교구락부에서 양김이 회동하고 있다.ⓒ연합뉴스

- 87년 10월 22일 YS가 DJ하고 단일화 협상을 담판하러 외교구락부를 가잖습니까? 

“네.”

- 그러면서 협상 대표였던 동교동계 이용희(10·12·17·18대) 의원의 요구 조건을 모두 들어줬단 말이죠. 이것 때문에 상도동계 반발이 엄청 컸거든요.

“아하.”

권노갑과 더불어 동교동계 계보를 연 이용희는 뿌리 깊은 DJ 사람이었다. 87 대선 기간 야권 단일화 협상 테이블에 앉아 상도동계에 미창당 지구당수 23곳을 달라고 제시했다. 옥신각신하다, 막판에 YS는 어떻게든 단일화해야 한다며 동교동계 안을 전격 수용해버렸다.

- 어느 정도였냐면 상도동계 핵심 측근들이 YS한테 욕을 했다는 증언들이 나와요. ‘이 XXX야. 내가 너 대통령 만들려고 몇십 년 애썼는데 마음대로 그렇게 할 수 있냐.’ 실질적으로 그랬다는 거예요.

‘그런가요.’

하듯, 표정에서 기억을 더듬어 가는 게 느껴졌다.

- 암튼 그래서 물어보는 겁니다. 

“확신이 있었다고 보는 거죠.”

보다 못한 조찬옥이 끼어들었다. 그는 평소 민추협 인터뷰에 참석하면서 YS가 동교동계 안을 모두 들어줄 만큼 경선에 자신이 있었다고 보고 있었다. 그러면서 “국민경선을 했다면 DJ가 됐을 테지만 말이요.” 조찬옥 역시 전갑길과 마찬가지로 국민 경선을 했다면 DJ가 이겼을 거로 봤다. 

이 말에 “글쎄. 그럴까요.” 고개를 갸웃하며 질문을 이어나갔다.

- 김덕룡 전 대표(YS 비서실장‧5선‧전 한나라당 원내대표)는 말이죠. 

“네.”

- 4대 불가론이 있었다고 그래요. 영남, 기업인, 공직자, 군부 4대 세력이 반대하기 때문에 DJ는 대통령 되기 어려웠다고 하더라고요?

“….”

긍정도 부정도 안 했다. 

“당시 그런 게 진짜 있긴 있었습니까?” 
상대 입장에서는 떠보는 듯한 느낌이 들 수도 있는 질문이었다.

“색깔 논쟁 때문이죠.” 다시 조찬옥이 나섰다. 
“시중에서는 DJ가 대통령 되면 공산화된다는 얘기가 있긴 있었죠.”
옳거니 싶게,

- 왜 그랬다고 봅니까. 

“일본의 조총련계가 DJ한테 자금을 지원해준 적이 있는데 그때부터 빨갱이 논쟁이 나온 거예요.”

그는 그 이유 때문이라고 확신하는 듯했다. 

 

5. 노동 친화 정책


12대 총선이 끝난 뒤 결합한 전갑길 국기원 이사장이 지난달 14일 국기원 사무실에서 만나 민주화추진협의회에 참여하게 된 계기와 역사적 의의 등에 대해 발언하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12대 총선이 끝난 뒤 결합한 전갑길 국기원 이사장이 지난달 14일 국기원 사무실에서 만나 민주화추진협의회에 참여하게 된 계기와 역사적 의의 등에 대해 발언하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 영남이나 군에서 반대한다는 건 그렇다 쳐도 기업인들이 굳이 반대할 이유가 있었을까요? 

“서민 대중과 노동자를 위한 경제정책을 펴다 보니까, 기업인들은 자기들이 배제 받는 게 아니냐는 우려를 했던 것 같아요.”

이번엔 전갑길이 바통을 이어받듯 답해 나갔다. 

“87년 대선 떨어지고 DJ는 다음 선거에 크게 기대는 하지 않고 있었어요. 당신께서 나를 불러놓고 그러더라고요. ‘내가 정치를 하면 얼마나 하겠냐.’”

그러면서 상황을 설명해 갔다.
 

 

다음은 관련 장면.

 


 

# 1990년 후반 무렵, DJ와 전갑길 
DJ : 전 동지.
전갑길 : 예.
DJ : 내가 꼭 해야 할 일이 있는데 전 동지가 그걸 좀 맡아줘야겠어. 
전갑길 : 예.
DJ : 내가 자서전도 써야 하고 한국근대사와 정치사를 좀 연계해서 쓰려고 하거든. 자료 좀 준비해 주게나. 
전갑길 : 예.

자료 담당 비서관이 없을 때였다. 

# 국회도서관, 전갑길

아침에 출근하면 국회도서관과 국립도서관 등으로 이동해 자료를 뒤지거나 <조선일보>, <동아일보> 교열부가 있는 지하로 내려가 신문 창간호까지 샅샅이 뒤적이고 있다. 자료 협조를 구하기 위해 관계자에게 명함 주고 사정사정한 끝에 도움을 받게 된 전갑길.

“기막힌 자료들이 다 있더라고요.”

눈에 선한지 이미 마음은 오래전 책 냄새가 가득했던 당시로 가 있었다. 나름으로 손 모양을 지어보며 “이 두께로 30권을 만들었어요. DJ가 어찌나 좋아하는지…. 이런 귀한 자료들을 어떻게 다 만들었냐면서….” 뿌듯함이 드러났다. 용돈도 두둑하니 주면서 고생했다고 격려하는 DJ 얼굴을 눈에 그리는 듯했다.

‘앗 차.’ 여기까지 얘기하다 진짜 중요한 것을 놓쳤다 싶은지, “DJ가 노동자 운동에 관심이 많았거든요.” 다시금 4대 불가론 중 기업인들이 반대한 이유에 대한 답으로 되돌아왔다. 

그 시절을 떠올리면 한국노총하고는 잘 지냈는데, 민주노총이 생겨나면서 DJ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이에 DJ는 자신이 오래전 <사상계>에 기고했던 ‘한국 노동운동의 정당성’에 관한 자료를 찾아보라고 전갑길에게 부탁했다. 

어려움 끝에 구하게 되자, 전갑길은 DJ 지시대로 자료를 민주노총에 갖다 줬다. 읽어본 이들은 논리 정연한 주장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때부터 DJ와 민주노총 간 대화의 물꼬가 트였고 정책연합이 가능해졌다.

“노동자들이 믿는 DJ가 된 거죠.” 오래전 일이지만 기억에 남는 보람 있는 일이라고 했다. 어쨌든 이런 등의 연유로 기업인들이 DJ를 반대한 게 아니냐는 추측이었다. 

 

6. 지역주의의 유탄 


전갑길은 신민당의 12대 총선 승리 이후 DJ와 인연을 맺게 됐다. 사진은 젊은 시절 DJ와 전갑길ⓒ사진제공 = 전갑길
전갑길은 신민당의 12대 총선 승리 이후 DJ와 인연을 맺게 됐다. 사진은 젊은 시절 DJ와 전갑길ⓒ사진제공 = 전갑길

- 근데 말이죠. DJ가 호남 사람이어서 4대 불가론 논리가 통한 것 아닐까요. 호남이 탄압받아왔고, 수십 년간 영남패권론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것 같아요. 민주당만 해도 DJ 이후 대통령은 모두 영남 사람들이었잖습니까. 

“지역주의는 기득권자들이 만들어낸 거잖아요. 원래 지역감정은 없었어요. 박정희만 해도 영남보다 호남에서 표가 더 많이 나왔잖습니까. 그런데 이 사람들이 정권을 잡은 뒤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지역감정을 유발한 것이죠.” 

조찬옥이 나서며 대신 답했다. 그런 이유로 DJ가 지역주의 유탄을 맞고 피해를 받기에 이르렀다는 취지로 들렸다. 

- 또 하나는 DJ와 함께 정치를 했던 분들이 크게 도움을 못 받았더라고요. 김장곤 의원과도 인터뷰했지만 DJ보단 이기택(7선, 전 민주당 대표) 측에서 공천을 받았고 말이죠. 그런 것 보면 DJ가 자기 사람들한테 좀 엄격했던 것이 아닌가 싶어요.

“알다시피 DJ는 계속 탄압받은 투쟁의 역사였잖아요. 공천을 줄 수 있는 입장이 못 될 때가 많았어요.”

전갑길이 곰곰이 생각하듯 가늠했다. 옆에 있던 조찬옥도 “YS 쪽은 동지란 동지들을 다 끌어안았지만, DJ는 우선적으로 실력을 먼저 봤어요.” 변호하듯 거들었다. 

전갑길은 퍼뜩, 하나가 생각났는지 “지금 정당이 국고보조금 받는 것도 DJ 어른이 만든 거잖습니까.” 그리 말하며 눈을 응시했다. 

“그렇죠.”

“옛날에는 정당을 이끌려면 당사도 마련해야 해서 돈 만들 능력이 없으면 당대표도 못했어요. 선거를 치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공천 대가의 자금을) 받기도 했지만, 그 돈이 지도자 호주머니에 들어갔느냐. 절대 아니에요.” 

틀림없다는 듯 강조했다. 시대가 다른 만큼 정치 상황의 특수성을 살펴야 한다는 것으로 읽혔다. “김장곤 선배는 DJ를 모신 동교동계 1세대 선배임에도 다선을 못 한 건 아쉬운 일이죠.” 마음을 헤아리면서도, “그렇지만 기회가 없지 않았던 것으로 알아요.”

평민당에서 비례를 제안하자, 지역구에 출마하고 싶었던 김장곤은 이를 거절했다. 이후 꼬마민주당(통일민주당 잔류파)에 합류한 뒤 평민당 후신인 신민주연합당과 통합하면서 공천을 받아 14대 총선서 당선된 바 있다. 

- 상향식 공천도 DJ가 만들었고 사실상 민주주의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켰는데 그런 것에 대한 선전은 잘 안 돼 있는 것 같아요. 

“한 단계씩 선진국으로 가는 대한민국 정치의 모든 것들은 DJ 머리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말이죠.”

가려운 데를 대신 긁어줬다고 여겼는지 낯빛에 시원함이 어렸다. 

 

7. 민주회복의 시대에서 


한참을 DJ 관련해 질문하던 중 물길을 돌려 다시금 민추협으로 넘어왔다.

- 민추협의 최대 목표가 대통령 직선제였다고 봐도 됩니까. 

“민주회복이었죠”

직선제 쟁취를 뭉뚱그려 민주회복이라고 명명했다. “국민이 원하는 직선제를 하기 위해 호헌철폐 운동을 하고, 결국 법을 바꿨잖아요.”

- 대통령 직선제가 민주화라고 보는 이유는 뭡니까. 시대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었을까요.

“간접선거에 이골이 나다 보니까 국민이 반대한 것이고 체육관 선거의 결과는 독재국가로 가는 데 뻔했잖습니까.”
 

이민우 총재(가운데)는 민주주의 7개항을 전제조건으로 내각제를 할 수도 있다는 취지로 전두환 정권과의 협상의 여지를 남겨두면서 양김과 결별하게 됐다는 설명이다.ⓒ연합뉴스
이민우 총재(가운데)는 민주주의 7개항을 전제조건으로 내각제를 할 수도 있다는 취지로 전두환 정권과의 협상의 여지를 남겨두면서 양김과 결별하게 됐다는 설명이다.ⓒ연합뉴스

- 이민우의 민주주의 7개항도 민주화로 가는 길 아닌가 해서요. 

“국민의 힘을 결집해야 할 때 여러 개로 분산돼 있으면 효과가 없다고 봤던 것 아닐까요.”

1986년 12월 24일 이민우 신민당 총재는 삼양동 자택에서 언론자유 보장과 구속자 석방 및 정치인 사면 복권 등 민주주의 7개항을 발표했다. 전두환 정권이 이를 실천하면 내각제 개헌을 수용할 용의가 있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른바 이민우 구상이었다. 양김은 이에 격분했다. 이민우와 갈라졌고 통일민주당을 창당했다. 직선제 개헌 운동의 정점으로 달려갔다. 

“그니까 묻고 싶은 거는….” 

꼬리에 꼬리를 물 듯 파고들었다. 이번엔 최근 진행했던 본지 커버스토리에 대해 언급해 나갔다. <시사오늘>은 YS 서거 7주기를 맞아 ‘87 민주화 체제가 가져온 대한민국 선진화’에 대해 조명을 한 바 있다. 

- 사실 장기독재가 계속됐다면 우리나라가 세계 10대 강국의 선진화에 진입할 수 있었을까요, 87 체제였기에 가능하다고 보는데요. 그 가정을 전제로 87체제를 만든 일등공신을 따져보자는 거죠. 순위를 매기긴 어렵지만 12대 총선 승리 후 직선제 쟁취라는 담론을 형성하고 시민과 학생, 재야를 규합해 실질적으로 제도를 바꿔낸 민추협의 공이 가장 크다고 보는데 어떻습니까. 

“맞습니다.”

휘몰아친 질문에 곧바로 대답해왔다. 

“그 시대 민추협이 없었다면 민주화가 이렇게나 빨리 올 수 있었을까…. 김대중-김영삼 두 지도자가 중심이 되고 그 뜻을 모은 민추협이 있었기에 시민과 학생, 재야, 종교계 모두 하나가 되는 동기를 갖게 됐다고 봅니다.” 

- 근데 왜 586보다 저평가를 받느냐, 이거죠. 

“지금까지 뿌리를 이어갔어야 했는데 해체됐잖아요. 이후 각자 정치 일선 활동에 전념했잖습니까.”

민추협에는 내로라하는 거물들이 너무 많았다. 저마다 87 이후 여야 핵심으로 부상해 정치권을 주도할 때였다. 

“남은 사람들만이라도 학술적으로라도 재조명 작업을 해나갔어야 했는데 그럴 계기를 만들지 못했지요.” 

현실적인 자평이었다. 

양김 분열 후 민추협은 재떨이, 테이블 등의 집기마저 반으로 나눈 채 갈라선 바 있다. 차례대로 대통령 임기를 마친 양김이 퇴임 후 화해하고 2001년이 돼서야 민추협도 재결합을 이룰 수 있었다. 그렇지만 대다수 희끗희끗해진 원로들의 백발만큼이나 한때 열광적이던 스포트라이트는 희미해져 갔다. 

“시대에서 사라져 간 것이죠.” 

종지부를 찍듯 읊조리는 그 말에서 여운이 감돌았다. 예전과 같을 수 없음이 몇 마디 말에 모두 함축돼 있었다. 스스로 볼 때도 격세지감이 큰 듯했다. 

그러나 민추협의 재평가만큼은 역사를 위해서라도 바로 세워져야 한다. 관련 취지의 질문을 던지자 전갑길도 고개를 끄덕였다. 배석자 포함해 이제라도 역사적 재조명을 잘 완수해야 한다는 각오가 더해졌다. 

 

8. 너머의 대안 


12대 총선이 끝난 뒤 결합한 전갑길 국기원 이사장이 지난달 14일 국기원 사무실에서 만나 민주화추진협의회에 참여하게 된 계기와 역사적 의의 등에 대해 발언하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12대 총선이 끝난 뒤 결합한 전갑길 국기원 이사장이 지난달 14일 국기원 사무실에서 만나 민주화추진협의회에 참여하게 된 계기와 역사적 의의 등에 대해 발언하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뒤이어 여러 대화가 오갔다. 팬덤 정치를 기반으로 극으로 내달리는 현 정치권에 대한 안타까움부터 1세대 민주화 운동가들과 2세대 학생운동권 차이에서 오는 민주당 노선의 문제점과 자성 등이 잇따랐다. 선배 정치인으로서의 애석한 마음이 엿보였다.

질문자로서는 지난 20대 총선을 앞두고 범여권 연합에서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통과시킬 당시 국민의힘 나경원 원내대표가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사례를 들며 요즘 정치인들의 정치력 부재를 꼬집었다. 결국은 지도자 문제가 아니냐고 되묻자, 그 역시 “당연하죠” 공감했다. 이어 “큰 지도자 밑에서 배워야 해요. 그게 정치예요.” 잘라 말했다.

이 지점도 되짚었다. “박주선·이용호·김경진·임재훈 등 오히려 호남 출신의 정치인들이 20대 대선에서 보수진영으로 넘어와 윤석열 후보를 지지했는데 말이죠. 어떻게 봅니까.” 이 질문에 잠시 복잡한 심리가 스쳤다.

이내 그는 젊었을 때는 싫어했지만, 지금은 꼭 그렇지는 않다고 전해왔다. “워낙 정치가 못 쓰게 돌아가니까….” 말을 아꼈다. 다만, “국민의힘에 들어가도 들러리에 불과하거나 고사당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해 왔다. 뿌리를 잘 내리기를 바라는 마음과 그리되기 어려울 것으로 보는 시선이 뒤섞여 있었다. 

대화는 나아가 자유자재로 여러 화제를 넘나들었다. 한반도 통일의 가능성부터 한국전쟁의 원인 및 대북 정책에 관한 논거 등 삼천포로 빠지면 빠지는 대로 넘실거렸다. 내친김에 한반도 역사상 70년 동안 전쟁 한 번 나지 않은 경우는 한미동맹 이후부터고 대한민국이 번영했다고 역설한 장성민 세계와동북아평화포럼 이사장의 주장에 대해서는 어찌 생각하는지 물었다. ‘하하.’ 특별한 표명 대신 듣고만 있었다. 그런 의견도 있다고 존중하는 듯했다. “그분 대통령실 갔잖아요?” “가끔 연락합니다.” 같은 DJ 비서 출신으로서의 연대의식도 느껴졌다.

마무리는 민추협으로 돌아왔다. 87체제 너머의 대안이 듣고 싶었다. 그 또한 소선거구제보다는 중대선거구제를 피력했다. 개헌에 대해서는 “지금의 대통령제는 연방 국가인 미국 외에 성공한 나라가 없는 제도”라며 “프랑스식의 이원집정부제로 가는 게 옳다”고 했다. 내각제는 어떠냐는 질문에, “어렵다”며 고개를 저었다. “내각제는 대통령이 있고, 왕이 있을 때나 가능하다”고 부연한 대목에서는 냉철한 현실 인식이 돋보였다. 

돌아보면 DJ 뜻을 실천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것 같다고 하자, “목숨을 건 단식 투쟁 끝에 지방자치제 시행을 성공시키고, 지역 균형 발전에 투혼을 발휘한 DJ를 가슴 깊이 존경했다”는 말이 뒤따랐다. 흔히들 복심들이 한다는 수행비서였음에도 DJ 지론을 되새겨 광주광역시의원부터 시작해 3선 의원 부의장을 역임했다. 국회의원, 광산구청장 등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나간 행보도 인상적이었다. 

“어르신을 수행할 때 뒷좌석에서 세계적인 석학들과 전화 통화하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귀동냥하듯 전해 들었던 이야기들로 인해 많이 배웠다고 회상했다. 

1957년 전남 광산에서 태어났다. 시종일관 느릿느릿한 목소리에 발그레한 뺨을 유지하고 있었다. 인터뷰는 얼추 점심시간을 앞둬서야 끝이 났다. 지하 1층에 내려가니 도시락집이 있었다. 함께 주문하고, 올라와 도시락을 기다렸다. “하하하.” 다시 대화가 이어졌다. 

담당업무 : 정치, 사회 전 분야를 다룹니다.
좌우명 : YS정신을 계승하자.
담당업무 : 정치부 기자입니다.
좌우명 : 꿈은 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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