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숲과 인생의 날씨 [일상스케치(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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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숲과 인생의 날씨 [일상스케치(68)]
  • 정명화 자유기고가
  • 승인 2023.01.23 12: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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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정명화 자유기고가)

설날 연휴, 추위가 유난히 맹위를 떨친다. 새벽 기도 후 작심하고 칼바람을 가르며 뒷산에 올랐다. 찬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른 가지 사이에서 노닐던 새들이, 재재거리며 길손을 반겼다.

혼자 걷는 겨울 숲속 길은 얼음처럼 냉정하게 이성을 때렸다. 옷깃을 여미며 잔뜩 웅크리면서도 번뜩 정신이 든다. 고요한 정적 속에 모든 걸 내려놓고 묵상의 시간을 가져본다. 

겨울 숲. 곧 맞이할 따스한 봄과 활기찬 여름을 잉태중이다. ⓒ연합뉴스
겨울 숲. 곧 맞이할 따스한 봄과 활기찬 여름을 잉태중이다. ⓒ연합뉴스

나쁜 날씨란 없다

시린 산책길, 문득 영국 평론가 존 러스킨의 명언이 떠오른다.

햇빛은 달콤하고
비는 상쾌하며
바람은 시원하고
눈은 기분을 들뜨게 한다.
세상에 나쁜 날씨란 없다.
서로 다른 종류의
좋은 날씨만 있을 뿐이다.

- 존 러스킨 '인생의 날씨' -

그렇다. 적당히 따스한 햇빛은 상당히 달콤하다.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모든 인생 날씨 속 햇빛이 달콤하기만 할까. 때론 지나치게 강렬해 쓰러질 지경까지 가고, 상쾌한 비는 폭우로 변해 사람들이 휩쓸려 떠내려가며 온 세상을 폐허로 만들어 버린다.

게다가 시원한 바람은 돌풍으로 변하여 지붕이 날아가고, 기분이 들뜨게 만드는 겨울 눈 내리는 풍경은 고요함과 더불어 포근하게 세상을 덮는 부드러운 기운이 있으나 폭설로 종종  수많은 생명을 앗아가기도 한다.

모든 게 정도껏이다. 자연의 날씨도 인생의 날씨도.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삶의 상황 속에서 나쁜 날씨와 환경은 없다고 무한 긍정으로 호기를 부리며 장담할 순 없다.

그건 관점의 차이이지 않을까. 물론 방향성에 따라 삶에서 좋은 날씨만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똑같은 환경이라도 누군가에겐 기회와 감사를, 또 누군가에겐 투정과 불만의 소재가 되기도 하니까.

결국 마음먹기에 따라 세상의 모든 것은 감사와 축복이 되기도 하고 절망과 좌절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존 러스킨의 '인생의 날씨'는 세상 모든 희비의 쌍곡선, 평온과 불편의 처지를 초월하는 긍정의 효과를 설파한 것으로 보인다.

새 달력에 쓰다

설날을 맞아 올 한 해 인생의 날씨를 가늠해 본다. 새해 벽두부터 만난 태양이 웅장하게 떠올라 그 강한 힘을 받았으니 좋은 날씨만 펼쳐지려나.

초긍정 '존 러스킨'에 반해 조선시대 '상극성' 옹은 '새 달력에 쓰다'를 통해 다음 같은 인생의 날씨변을 피력했다.

날씨도 사람 일도 종잡을 수 없어서는, 앓고 난 뒤 새 달력을 어이 차마 보겠는가.
모르겠네 올 한 해 많고 많은 날 속에, 비바람 몇 번 치고 기쁨 슬픔 몇 번일까?

- 상극성, '새 달력에 쓰다' -

상극성(1526~1576)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관직 생활에서 많은 파란을 겪었다고 한다. 날씨처럼 사람의 일은 예측하기가 어렵다. 올핸 어떤 어려움과 기쁨을 겪게 될지 그는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인생에서 불안과 설레는 마음을 시에 담았다.

분명 올 한 해도 우리네 인생은 가시밭길을 걸어야 할 지도. 흐린 때론 잔뜩 찌푸린 날씨가 우리를 기다릴 지도. 새 달력 메모장은 회색빛 단상으로 채워질 지도.

만약 비바람이 휘몰아치면 찢어진 비닐 우산속으로라도 들어가 거친 날씨가 잠잠해지길 기다리는 게 상책일지 모른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저 멀리 검은 구름이 비켜나고 하얀 그리고 파란빛이 드리울 테니까. 인생의 이치나 자연의 순리나 크게 다를 바가 없지 않겠나.

그러면 가슴 졸이며 애태운 게 언제였냐는 듯이 곧  넓은 하늘의 작은 푸른 편린에  환호하며 팔짝팔짝 뛰어오를 것이다. 이어 조만간 온통 흰 구름  두둥실 떠다니는 높은 파란 가을 하늘 같은  행운을 만날 수도 있다.

이렇듯 인생의 날씨가 마냥 맑지도 흐리지도 않은 게 삶의 진리다. 시인의 시구처럼 올해는 얼마나 많은 비바람과 천둥이 칠지, 희비가 엇갈릴 지 모른다.

그렇지만 삶의 온갖 풍파에도 순종하고 인내하며 흘러가길 기다리면 끝내는 불운이 저 멀리 달아나지 않을까. 머잖아 날씨도 인생의 풍파도 잠잠해질 것이다.

홍매화. 곧 봄이 오려나. 새해 벽두부터 남녘 봄바람이 기다려진다. ⓒ연합뉴스
홍매화. 곧 봄이 오려나. 새해 벽두부터 남녘 봄바람이 기다려진다. ⓒ연합뉴스

겨울 숲의 웅지를 배우며

겨울 숲은 얼핏 보면 황량하고 텅 비어 보인다. 나뭇가지는 앙상하고 풀 한마디 없는, 작은 꽃 한 포기도 찾을 수 없다. 그런데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 이제 머잖아 등장할 화려한 봄을 품고 있고, 울창한 짙푸른 여름을 잉태할 준비 중이다. 길고 긴 냉한 겨울이 에너지를 축적한 후 새로운 모습으로 환생하길 손꼽아 기다리면 되는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얼마나 소쩍새가 울어댈지, 천둥번개 동반한 비바람은 얼마나 몰아칠지 모른다. 하지만 겨울 숲은 언제나 그래왔듯이 변화무쌍한 사계절을  견뎌낼 힘을  모으고 있다. 지금은 헐벗은 듯 초라해 보이지만.

이 매서운 한파에, 어쩌면 불확실하고 불안하기 짝이 없는 미래와 맞짱 뜨겠다는 결의로 나선 걸음인지 모르나 겨울 숲에서 웅지를 깨우치는 중이다. 겨울 숲의 인내와 기다림을 배우면서. 혹독한 인생의 날씨에 맞서서 견뎌내고 결국은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내디디면서 말이다.

서민 생활을 위협하는 각종 비관적인 경제 예상 지표들이 뉴스를 채우고 있어 올 한 해도 살아내려면 만만치 않겠다. 우울해하고 웅크리기보다는 결기를 가져야 할 때다.

현실의 날씨는 냉혹하게 펼쳐지더라도 긍정의 힘을 믿고 대처해 보려 한다. 곧 봄이 오려나. 벌써부터 남녘 봄바람이 기다려진다. 부디 올 인생 날씨엔 달콤한 햇빛으로 채워져 화창하고 빛나길 겨울 숲에서 기원해 본다. 희망의 끈을 웅켜 쥐며….

정명화는…

1958년 경남 하동에서 출생해 경남 진주여자중학교, 서울 정신여자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연세대 문과대 문헌정보학과 학사, 고려대 대학원 심리학 임상심리전공 석사를 취득했다. 이후 자유기고가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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