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형우 “민주대장정, YS와 함께여서 행복” [時代散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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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우 “민주대장정, YS와 함께여서 행복” [時代散策]
  • 정세운 기자,윤종희 기자,윤진석 기자
  • 승인 2023.01.28 15:24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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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우 前 내무부 장관
민주화의 주역서, 문민정부 2인자까지… 97년 쓰러진 後 정계은퇴
민산되짚기 이후 10년 만에 본지 인터뷰…15대 대선 당시 조명 
신한국당 최대 계파 ‘온산계’ 이끌며 대의원지지 3분의2 이상 확보
일각서 우려하던 민정계 비토, 최형우 “김윤환 동의 얻었다” 증언
‘당 대선주자=최형우’ 공식 돌았지만 지지율 한 자릿수 그쳐 난감  
청와대 민주계 대선주자 불가론 돌아…YS, 최형우 대권행보 압박  
쓰러진 다음날 김현철 찾아와 “최 장관 이렇게만 안 됐어도…”
‘대권은 나중 문제고 당을 맡으라’… 쪽지 건넨 김무성, 진위는 
“민주계가 대권 못 잡으면 당권이라도 잡아야 한다는 생각에…”
15대 대선 앞두고 여야 막론 대권주자들 ‘최형우 쟁탈전’ 나서
쓰러지지 않았다면 당권 잡고 킹메이커로서 누구 밀었을지 주목
“최형우, 사심 없는 사람…적임자라 생각하는 후보 지지했을 것”
박정희-전두환 정권 들어 정보부에 끌려간 것만 십여 차례
민주주의 열망과 YS 지키기 나서며 제도적 민주화 추동한 주역 
YS 퇴임 후 얼싸안고 울어…“형님과는 뗄 수 없는 불가분 관계” 
대도무문과 대동단결 정신…“민주계 후배들 YS정신 계승해주길”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정세운 기자, 윤종희 기자, 윤진석 기자]

온산(溫山) 최형우(6선 의원·정무·내무부 장관 역임)가 쓰러졌다. 

1997년 3월 11일 오전 8시 50분경 서울 프라자호텔에서였다. 서석재 김덕룡 등 민주계 의원들과 조찬 중이었다.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서울대 병원으로 옮겨졌다. 병명은 뇌출혈이었다. 상태 악화로 수술실 침대에 눕게 됐다. 대수술을 거친 뒤에야 원영일 여사(부인)는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

차츰 의식도 회복됐다. 상태가 호전돼 가족들에게 ‘춥다, 손목시계를 달라’ 등의 의사 표현을 하는 정도까지 됐다. 관절을 굽혔다 폈다도 가능했다. YS(김영삼) 오른팔이자 민주화의 주역, 문민정부 2인자라는 화려한 명성의 소유자였던 그였다. 신한국당 유력 대선주자에서 하루아침에 정계를 은퇴하게 된 비운의 정치인이라는 평가가 신문지면을 장식했다. 

시간이 지나 이런 물음들이 상도동계와 정치권 안팎에서 흘러나왔다. 

- 97년 15대 대선. 최형우 지지율이 높았다면 YS가 밀어줬을까.
- 쓰러지지 않았다면, 당대표를 맡아 정권 재창출을 이끌어냈을까. 
-본인이 대선후보가 안 됐다면 누구를 밀어줬을까. 
- 상도동계에서 대선주자 나왔다면 조직도 와해 안 되고 YS 평가도 달라졌을까. 
- 최형우가 건장했다면 민주계는 지금도 구심력 있고 건재할까.


<시사오늘>은 지난 16일 경기도 성남의 최형우 자택으로 향했다. 원영일 여사와 첫째 딸 은지 씨가 맞아줬다. 오랜 세월 최형우를 보좌한 유영백도 배석했다. 

 

 

최형우 전 내무부 장관은 YS(김영삼)와 함께 한 민주대장정의 길이 행복했노라고 소회를 밝혔다. 최 전 장관과 지난 16일 인터뷰했지만 좀 더 건장했을 때의 모습을 담고 싶다고 해서 따로 사진 촬영을 하지는 않았다. 사진은 지금으로부터 십 년 전 최 전 장관 모습이다.©시사오늘DB
최형우 전 내무부 장관은 YS(김영삼)와 함께 한 민주대장정의 길이 행복했노라고 소회를 밝혔다. 최 전 장관과 지난 16일 인터뷰했지만 좀 더 건장했을 때의 모습을 담고 싶다고 해서 따로 사진 촬영을 하지는 않았다. 사진은 지금으로부터 십 년 전 최 전 장관이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활짝 웃고 있다.©시사오늘DB

“반…갑…습…니…다….”

햇수로 십 년 만이다. 2013년 장충동 자택에 살 때 ‘민산되짚기’ 시리즈를 갈무리하기 위해 서울 장충동 자택을 찾은 적이 있다. 최형우는 어눌하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수고한다며 기자들에게 반가운 인사를 건네 왔다. 혈색이 좋아 보였다. 중간 중간 웃을 때는 천진난만했고, 영욕의 세월을 회상할 때는 주체할 수 없이 흐르는 뜨거운 눈물로 얼굴을 적시었다.

희로애락의 감정들이 파노라마처럼 흘러갔던 그때와 달리 십 년이 지난 지금은 침대에 누워있는 시간이 대부분이었다. 거동이 불편해지면서 근육량도 많이 줄어들었다고 원 여사는 담담하니 말했다. 

본지는 최형우에 관해 여러 번 조명해왔다. 미처 물음표로 남아 있던 퍼즐조각 하나라도 맞추고 싶다는 바람이 있었다. 마침 기회가 돼 자택을 방문했다. 내후년이면 아흔을 바라보는 최형우는 몸은 불편했지만 반가운 인사로 맞아줬다. 

현대사와 동고동락한 원영일 여사, 그리고 최 전 장관을 보좌했던 유영백의 도움을 받아 단편적이나마 새로운 증언들을 얻어나갔다. 그 같은 구슬과 더불어 본지가 기존에 갖고 있던 자료와 인터뷰 증언 등을 조합해나가기 시작했다. 현대사 거물로서의 정점을 찍어가던 중 돌연 뇌출혈로 인해 정치 중심에서 퇴장할 수밖에 없었던 그 시절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쓰러지지만 않았어도….”


쓰러진 뒤 다음날이었다. 1997년 3월 12일 새벽 6시인가 7시경 YS의 차남 김현철이 서울대 병원으로 들어섰다. 정국은 한보 사태로 휘몰아치고 있었다. 야당은 배후로 김현철을 지목했다. 정작 당사자는 억울해하고 있었다. 훗날 검찰 조사에서 한보와 김현철은 전혀 관계가 없는 것으로 판명 났다. 김영삼 대통령 임기 말 야당의 공세는 거침이 없었다. 한보국정조사특위 증인채택을 놓고 김현철을 소환했다. 현철은 자신이 정치적 희생양, 유탄을 맞았다고 생각했다. 

‘털썩.’ 의자에 앉아 힘없이 팔을 걸쳤다. 간밤 술을 마셨다. 초췌하고 취기가 덜 깬 모습이었다. 손에는 붕대를 감고 있었다. 피가 흘렀는지 군데군데 핏물 자국이 보였다.

 

“허탈감과 분노를 이기지 못해 안절부절못하던 현철 씨는 급기야 앞에 놓인 탁자 유리를 치다가 피가 튀겼다…. 민주계 핵심인사의 설명.”
- 1998년 4월 22일 〈동아일보〉 
비화 문민정부 (42) 기사 중-

 

급한 대로 붕대를 감은 김현철은 동이 터오기가 무섭게 최형우부터 찾았다. 중환자실로 옮겨진 그는 코마 상태에 있었다. 대신 원영일 여사와 마주했다.

“와이러노.”

최형우는 울산, 원 여사는 포항이 고향이다. 묻는 말에서 경북 사투리 억양이 묻어났다. 김현철을 바라보는 원 여사 주변으로 싸늘한 냉기가 감돌았다. 

“아버지(YS)가 한보 사건 때문에 법정에 서라고 합니다.”

“그게 문제가 아니고. 들리는 소문에는 김무성이를 보내 최 장관한테 쪽지를 전했다고 하던데 맞나.”
“제가 아닙니다.”

“YS도 아니라하고 현철이 니도 아니라고 하면 대체 누구란 말이노.”
“최형우 장관이 이렇게만 안 됐어도 법정에 설리 없었는데 말이에요.”
김현철의 목소리에서 아쉬움이 역력했다. 

“그러게 누가 이렇게….”

최형우가 쓰러진 탓에 울화통이 치민 원 여사가 분을 참지 못하고 한바탕 퍼부어 댔다. 

세간에는 최형우가 김덕룡, 서석재 의원과 신한국당 이홍구 대표의 후임 문제 등을 논의하다 갑작스럽게 의식을 잃은 정도로만 알려져 있었다. 원 여사의 생각은 달랐다. 청와대 비서관을 지낸 민주계 국회의원이던 김무성이 전해준 쪽지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쓰러지기 며칠 전 최형우는 부산대학교와 자매결연을 맺고 있던 북경대학 교수들과 파라다이스 호텔에서 만찬을 하고 있었다. 후식으로 과일을 먹던 중 김무성이 찾아왔다. 며칠 뒤 최형우가 쓰러졌고, 쪽지를 전달받은 뒤부터 안색이 좋지 않았다는 얘기를 비서진으로부터 전해들은 뒤였다. 

 

김무성 부른 원 여사 


질곡의 현대사 과정에서 동고동락하고 아름다웠던 관계지만 찰나의 오해나 때로는 경쟁 관계에 놓여 있은 적도 있어왔다. 그러나 최형우 전 내무부 장관에게 정치 후배들은 지금도 말로 다 못하는 애틋함으로 남아 있다. 사진은 최 전 장관과 반갑게 인사하는 김현철 동국대 석좌교수,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 김덕룡 전 YS 비서실장ⓒ연합뉴스
질곡의 현대사 과정에서 동고동락하고 아름다웠던 관계지만 찰나의 오해나 때로는 경쟁 관계에 놓여 있은 적도 있어왔다. 그러나 최형우 전 내무부 장관에게 정치 후배들은 지금도 말로 다 못하는 애틋함으로 남아 있다. 사진은 최 전 장관과 반갑게 인사하는 김현철 동국대 석좌교수,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 김덕룡 전 YS 비서실장ⓒ연합뉴스

원 여사가 김무성을 불러들였다. 구기동 자택에 살 때였다. 

“김 의원, 내가 듣기로 쪽지에 ‘대권은 나중 문제고 당을 맡으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카던데 맞나.”
“….”

“그 뜻이 누구 뜻이가. 현철이 뜻이가. YS 뜻이가.”
“아닙니다.”
김무성은 민주계 국회의원들이 모여 의논을 한 끝에 쪽지를 전달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진실을 얘기해주소. 얼른 얘기하란 말이다.”

묵은 감정은 털어졌다. 지금이야 김무성을 다시 예전처럼 최 장관이 아끼던 민주화 후배로 바라보고 있었다. 상도동계를 대표할 정치인으로서 좋은 결실을 이루기를 응원하고 있다. 그러나 바른대로 말하라고 채근하던 그때만큼은 악이 받쳤다. 모두가 한통속 같고 의심스러울 뿐이었다. 

“사모님이 어찌나 나를 원망하던지….” 

김무성은 김무성대로 억울했다. “나는 최 선배를 위해서 그런 건데. 형님은 내가 김현철과 친하니까 나를 보냈다고 오해를 한 거야.” 지난 2020년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속내를 털어놓으며 한 말이다. 

김무성은 김현철과 함께 이원종, 홍인길, 강삼재 등과 함께 문민정부 7인방으로 불렸다. 정권 2인자 최형우와 김현철 사이가 껄끄러워졌다. 

김현철을 참모로서 생각한 YS 신임도 두터웠다. 요즘의 대한민국은 여론조사 공화국이라고 말할 수 있다. 87년 대선 후 여론조사를 처음 도입한 이가 김현철이었다. 여의도연구소 모태인 여론조사기관 중앙조사연구원을 만들어 과학적 선거전략을 최초로 도입해 선보였다. 1988년 총선에서 평민당이 제1야당이 될 것으로 예측했는데 적중했다. 참모로서 두각을 드러냈던 김현철은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실세로 통했다.

1996년 15대 총선을 앞두고서는 당명을 신한국당으로 바꾸고 외연 확장을 넓히기 위해 쇄신과 개혁을 내걸고 인재를 등용해나갔다. 이재오·정의화·김문수·손학규·홍준표·안상수·이완구 등 YS 키즈들을 공천했다. 그 결과 서울에서 처음으로 보수당이 야당을 이기는 사례가 발생했다. 신한국당은 제1당으로 올라섰다. 

공천에 영향력을 행사했던 김현철의 위세가 막강해지면서 곱지 않은 시선도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가 차기 정권 창출까지 관여하려 한다는 의혹 등이 무성했다. 존재감이 커질수록 문민정부를 탄생시킨 민주계 존재감이 약해졌다. 아무래도 외연 확장을 위해 인재영입을 하는 과정에서 입지가 좁아질 수 있었다. 이런 점들도 갈등 요인이 됐다.

그러나 더 중요한 건 김현철 인맥이 위력을 떨칠수록 소위 ‘국정농단’ 시비가 일 수 있다는 점이다. 최형우는 일찍부터 이 부분에 대한 고뇌가 컸다. 그래서 YS에게 직언을 서슴지 않았다.
 

최형우 전 내무부 장관은 YS에게 직언을 서슴지 않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사진은 지난 2013년 인터뷰 도중 최 전 장관이 지난날을 회상하고 있다.ⓒ시사오늘DB
최형우 전 내무부 장관은 YS에게 직언을 서슴지 않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사진은 지난 2013년 인터뷰 도중 최 전 장관이 지난날을 회상하고 있다.ⓒ시사오늘DB

 

“각하.”
전에는 YS를 형님으로 불렀지만 대통령이 된 뒤에는 각하라 표했다.

“현철이를 유학 보내야 합니다.”
할 말은 해야 했다. 충정에서 비롯된 직언이었다. 실제 최형우 말대로 김현철 역시 얼마 안 돼 돌아오긴 했지만, 해외로 나갔다 오기도 했다. 갈수록 신권력과 민주계 간 균열이 생겨났다. 그때마다 YS와 최형우 간 언쟁은 높아져만 갔다. 청와대 문밖까지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하루는 손명순 여사(YS 부인)가 나 보고 빨리 좀 들어오라는 거예요.”
원 여사가 관련 일화를 소개해나갔다. 

“내가 청와대 들어갈 때는 차를 보내주거든요. 아무 차나 못 들어가니까. 그럼 타고 들어가면….”
“아이고 나는 속이 상해 죽겠다.” 
손 여사가 가슴을 쥐어짰다. 

“뭣 때문에 속이 상합니까.”
YS와 최형우가 막역했듯 손 여사와 원 여사도 같았다. 

“다른 사람들은 다 청와대에 들어오면…. 나갈 때는 전부 싱글벙글 웃고 막 기분 좋아 나가는데 최 장관은 보면….”
한숨을 푹 쉬었다. 

“청와대가 떠내려가도록 소리를 지르고 난리가 나는 거야. 나갈 때 보면 장관님 얼굴이 찡그려져 있어. 속이 상해 나가는 거 보면 내가 너무 마음이 아픈 거야. 오죽했으면 각하께 ‘최 장관만큼 당신 생각하는 사람 없다. 그분 말 들어야 한다.’ 그런데도 안 듣는 거라.”
“….”

“최 장관이 이걸 알아야 해. 앞으로 대통령이 10가지 잘못했으면, 그거 다 말하지 말고 다섯 가지만 말하라고 해요.”
최형우를 생각한 손 여사가 원 여사를 통해 귀띔했다. 

이번에는 유영백이 보탰다. 
“청와대 1부속실 번호가 뜨면 대통령이 전화해달라는 얘기거든요. 도청이 우려돼 공중전화나 식당에 들어갑니다. 그럴 때마다 YS와 통화하는 최 장관 표정이 좋지 않은 거예요.”
당시를 회상하며 최형우가 한 말을 흉내 냈다.

“우리가 이러려고 이랬습니까?”
“….”
수화기 너머의 YS 말은 들리지 않았지만, 그도 같이 역정을 내는 듯 숨소리가 거칠었다. 

“떨어져 있어도 대충 무슨 얘기하는지가 들리잖아요. 유추를 해보면 김현철 씨 문제로 다투고 있는 겁니다.”

- 김 교수(현철)에 대해 안 좋은 감정이었던 건가요. 

“아니요.” 
최형우가 고개를 저었다.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고 아들 챙기는 마음으로 대했어요.” 원 여사가 거들며 속으로 각별하게 여겼음을 강조했다. “어릴 때부터 너무 잘 아니까…. 미국 가서 공부해 박사 학위 받고 오면 얼마든지 정치할 수 있다….”
조언을 해줬다고 했다. 

“근데 나도 이 나이만큼 먹고 내 자식들도 보고 하니까….” 
현실로 돌아와 원 여사가 말했다. 

“어떨 땐 현철 씨를 보면 불쌍한 거라. 돌아보면, 정치하던 집 2세들 중 제대로 된 경우가 별로 없어요. 아버지한테 쥐 눌리고…. 밖에 나가면 혹시 아버지에게 누가 될까, 이러면 안 된다, 저러면 안 된다. 항상 애들을 그렇게 누르고 키웠잖아. 특히 YS는 워낙 격동기 세월을 지냈기 때문에 자식들을 따뜻하게 못 보살폈잖아요. 엄마 혼자서 다 키우려니 얼마나 힘들어요. 우리도 아이들이 이 양반 쓰러지고 난 뒤 대학원 자퇴했지…. 내가 회한이 있다면 정치하는 가족으로서 자녀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찰나에 아버지가 쓰러져서…. 우리는 부모로서 자식들에게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어요. 그게 제일 맘에 아파요.”

그 같은 마음으로 김현철에게도 같은 정치인 집안으로서 느끼는 동병상련이 큰 듯했다. 

 

이한동 내정설의 진위


사단법인 김영삼민주센터는 YS에 대해 1987년의 6월항쟁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이 나라 민주주의를 마침내 쟁취해 냈다는 것은 역사가, 온 국민이, 그리고 온 세계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이라고 밝혔다. 사진은 독재 정권에 맞서 강경 투쟁을 벌인 YS와 최형우 전 장관, 김수한 전 국회의장, 이민우 의원 등ⓒ김영삼민주센터
김영삼 대통령 만들기 일등공신이라 불리는 최형우 전 장관은 YS와 함께 민주화 대장정을 함께한 인물이다. 사단법인 김영삼민주센터는 YS에 대해 1987년의 6월항쟁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이 나라 민주주의를 마침내 쟁취해 냈다는 것은 역사가, 온 국민이, 그리고 온 세계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이라고 밝혔다. 사진은 독재 정권에 맞서 강경 투쟁을 벌인 YS와 최형우 전 장관, 김수한 전 국회의장, 이민우 의원 등ⓒ사진제공=김영삼민주센터

이야기는 다시 문민정부 시절로 복귀했다. 앞서 김무성은 본지 인터뷰를 통해 자신이 준 쪽지를 보낸 이가 김현철이라고 최형우가 오해했다고 증언했다. 증언에 따르면 YS 뜻도 김현철 뜻도 아니었다. 이한동 당대표 내정설이 돌 때였다. 민주계가 당권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한 김무성은 가만있을 수 없었다. 그 길로 최형우가 있는 부산으로 향했다. 

 

“‘형님 내가 아무리 봐도 대권 안 됩니다. 근데 당권을 각하(YS)가 이한동이 준다는데 당 대표까지 뺏겨서야 되겠습니까. 당권으로 갑시다. 형님이 결심해 주면 내가 지금 바로 올라가서 YS 만나 최형우 시키자고 이야기하겠소.’ 
고개를 숙이며 잠자코 듣던 최형우가 

‘하-! 니 알아서 해라’ 하고는 가버렸다. 

‘곧장 내가 YS를 만났지. YS가 가만히 듣고 있더라고. 그럴 땐 절대 내색을 안 해. 암튼 월요일에 본회의가 있었어. 근데 최 선배가 목욕하고 머리에 기름 바르고 빗질하고 와서 또 다니면서 악수하고 다니더라고. 다음날 화요일 (1996년 3월 11일) 아침에 쓰러져버렸어. 대통령 하겠다고 돌아다니면서 피로가 누적된 거지.’”
- 2020년 4월 김무성 ‘민추협 되짚기’ 중-


이한동 내정설의 연유는 모른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는 건 아니었을 거로 짐작된다. 김무성이 YS를 만난 뒤 돌아가는 상황을 통해서도 유추해볼 수 있다. 최형우가 쓰러지기 전 구기동 자택으로 전화가 왔다. 원 여사가 받았다. 이한동이었다. 

“최 장관 어딨소? 전화가 안 돼요.”
“부산에 있을 낍니다. 뭣 때문에 그러는데요.”
“….”
다시 전화가 왔다. 

“최 장관 어딨소?”
꽤 다급한 모양이었다. 보다 못해 원 여사가 수소문했다. 
“이한동 씨가 숨 넘어 가게 생겼으니 빨리 전화 좀 해주소.”
이한동과 통화를 마친 최형우가 서울로 올라왔다. 
“무슨 일이었던 거예요?”
“하, 미치겠고만.”

최형우가 넥타이를 풀어헤치며 골치가 아픈 표정으로 한숨을 토해냈다. 알고 보니 YS가 이한동에게 당대표 언지를 주고는 불현듯 10시간 정도 지나 다시 전화를 걸어와서는 없던 일로 하자고 했다는 거였다. 그 말에 이한동이 화가 치민 나머지 최형우를 찾아다닌 거였다. 

김무성이 YS를 만난 뒤 결과적으로 이한동에서 최형우로 적임자가 바뀐 게 아니냐는 추측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최형우는 며칠 못 가 쓰러졌다. 이튿날 새 당대표가 발표됐다. 이회창 대표 체제 출범이었다. 최형우가 쓰러지지 않았다면 당대표로 회귀했을까. 꼭 그렇지만은 아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최 선배가 목욕하고 머리에 기름 바르고 빗질하고 와서 또 악수하고 다니더라고….” 그리 전해줬던 김무성 증언을 상기해보건대 최형우 본인은 대권 행보를 완전히 놓지 못했던 듯하다. 

 

신한국당 별들의 전쟁


1997년 신한국당 대선후보 경선은 별들의 전쟁이었다. 최형우 이인제 이한동 최병렬 김덕룡 이회창 박찬종 이수성 이홍구 등 이른바 ‘9룡’을 형성하며 각축전이 벌어졌다.

최형우는 내무부 장관을 거쳐 ‘정동포럼’, ‘21세기 정보화 전략연구소’ 등 조직을 꾸리며 대권 꿈을 키우고 있었다. 그가 대권에 마음을 품은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우선은 세(勢)였다. 문민정부가 개막하고 화려하게 내무부 장관으로 임명되면서부터 주변에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이인제 서청원 황명수 김정수 노승우 등 이른바 ‘온산계’를 형성하며 당내 최다 계파를 이끌었다. 한때 신한국당 내 대의원 중 3분의 2이상 지지도 확보했다는 풍문이 돌았다. 일각서는 민정계가 최형우가 나서면 지지하지 않을 거라고 했지만, 증언은 달랐다. 
 

“민정계 김윤환과 얘기가 됐습니다. 김윤환 의원이 'YS에게만 받아만 내라. 그러면 우리가 밀게'라고 했어요.”
- 2013년 최형우 ‘민산 되짚기’ 중-

 

YS에게 최형우 전 장관은 정치적 동지 사이였다고 알려져 있다. 최 전 장관은 YS를 형님이라고 불렀다가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각하라고 칭했다고 전해진다.ⓒ사진제공=최형우
YS에게 최형우 전 장관은 정치적 동지 사이였다고 알려져 있다. 최 전 장관은 YS를 형님이라고 불렀다가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각하라고 칭했다고 전해진다.ⓒ사진제공=최형우

문제는 YS였다. 
“YS가 늘 하는 말씀이 큰 뜻을 가지려면 돈에 연연하면 안 된다고 당부했었어요. 그러면서 담에는 ‘네밖에 더 있나?’ 이런 식으로 언지를 줬지.”

- 그런데 왜 대권주자로 밀지 않았을까요. 

“YS 마음이 왔다 갔다 흔들린 것이지….”

최 전 장관이 말끝을 흐렸다. 
본인 역시 “나보다 더 잘하는 사람 있으면 그 사람 밀면 돼지”라는 말을 평소 많이 하던 때였다. 뭔가 확실하게 YS와 약속을 하지 않은 거였다. 

- 장관께서 대통령 안 된 이유가 있네요. 대통령 되는 분들 보면 본인이 독하거나 보좌진이 독하더라고요. 

“….”

표정이 초연했다. 

“이 양반은 참 독하지가 못합니다. 할아버지가 한학자에 한의사, 유학자였잖아요. 경상남도 판정관을 지낸 분이었어요.” 할아버지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얘기로 들렸다. “YS를 너무 믿은 거죠. 오랜 세월 동고동락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끝까지 믿기만 했던 거예요.” 
원 여사가 대신 보탰다. 어쩔 수 없이 야속함이 스쳤다. 

정가에서는 YS가 최형우를 밀 수 없던 이유로 지지율 문제를 꼽았었다.
‘신한국당 대선후보=최형우’라는 등식이 나돌았지만, 여론조사 성적은 초라했다. 지지율이 한 자리 숫자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 연유 때문에 최형우는 청와대로부터 여러 차례 대선 행보 중단을 요구받고 있었다. 

97년 2월 일화다. 
 

# 최형우 사무실. 

“‘따르릉.’ 
한번은 청와대 정무수석 이원종이 전화를 걸어왔다. 
“형님, 접니다, 한번 만나시죠.”
“뭐, 할라꼬, 나 바쁜 사람이다.”
“그 바쁜 것 때문에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이틀 후 서울의 한 시내 호텔 커피숍에서 최형우와 이 수석이 만났다. 
“형님, 자제해 주시죠. 이런 식(대권행보)으로 움직이는 것 각하께 도움 안 됩니다.”
“고(Go)라는 말이다. 스톱(Stop)이란 말은 내 사전에 없어, 나랑 정치를 몇 십 년 해보고도 몰라.”
결론에 도달하지 못한 채 두 사람은 언쟁을 되풀이했다. 
“좋다, 내가 들어가 각하하고 담판을 짓겠다.”

 

# YS, 청와대
 

‘대권 포기 없다, 
 YS와 민주계를 지키기 위해서는…’
최형우는 붉은 주단이 깔린 청와대 2층 집무실을 올라가면서 자신이 왜 대권에 나설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 적은 메모지를 읽어 내려가며 마음을 다잡았다. 
“왔나.”
YS가 반갑게 맞이했다. 
“퇴임 후에 우리 민주계를 살리고 각하를 살리는 길은 이 길(대권도전) 밖에 없습니다.”
거두절미하고 최형우가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냈다. 대권에 도전할 수밖에 없는 출마의 변을 열띠게 설명해나갔다. 한참을 잠자코 듣고 있던 YS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다 이야기 끝났나.”
이번에는 YS 차례였다. 자신의 책상 서랍에서 10여 페이지 정도로 작성된 보고서를 최형우 앞에 펼쳐 보였다. 
“이게 뭡니까.”
“나야 왜 온산을 생각(대권)하지 않겠어, 하지만 이 보고서를 봐라.”
한 장 두 장 넘기던 최형우는 깜짝 놀랐다. 당시 야당에서는 DJ(김대중)를 비롯한 정대철 등이 대선주자로 거론되고 있었다. 이들 중 누구와 겨뤄도 승산이 없다는 내용이었다. 
충격을 받은 최형우의 손을 YS가 덥석 잡았다. 
“사이즉생(死而卽生) 아이가.”
“….”
최형우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정신을 차리고 
“저 갑니다.”
집무실을 나왔다. 
최형우 전 장관은 YS에게 직언을 서슴지 않는 인물이었지만 중요한 사건마다 YS의 말을 따른 인물이기도 하다. 사진은 통일민주당 당시 YS와 이민우, 최형우가 오찬을 하고 있다.ⓒ사진제공=최형우
최형우 전 장관은 YS에게 직언을 서슴지 않는 인물이었지만 중요한 사건마다 YS의 말을 따른 인물이기도 하다. 사진은 통일민주당 당시 YS와 이민우, 최형우가 오찬을 하고 있다.ⓒ사진제공=최형우

YS 설득에 약한 최형우였다. 대권을 포기해야 하나. 당대표로 선회해 킹메이커가 될 것인가. 복잡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터였다. 일각서는 최형우가 YS를 만나고 나온 뒤 대권을 포기했다고 보지만 앞서 김무성 구술에서 보듯 단박에 결정은 하지 못했었을 거로 가늠된다.

당내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만큼 쉽사리 포기하기가 어려웠을 거였다. 자신을 지지하던 측근들과 논의하면서 줄다리기 고민을 거듭하던 중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로부터 열흘 정도 흘러 허망하게 쓰러졌다.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와병 소식을 앞 다퉈 보도하던 언론에서는 향후 대권에 미칠 파장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병상 정치를 하게 될지에 주목했다. 누구를 지지할 것이냐, 누가 그를 등에 업을 것이냐가 관심사였다. 몸을 쓰기 어렵게 되자 최형우는 독일서 4개월 치료를 받고 원 여사와 함께 대체의학 치료를 받고자 중국으로 떠났다. ‘온산계’는 사분오열됐다. 서청원 등 일부는 이수성으로, 다른 일부는 이인제 지지로 양분됐다.

대선주자들의 최형우 쟁탈전은 치열했다. 서울대 병원에 있을 때는 하루가 멀다 하고 이회창이 찾아왔다. 김대중은 장문의 편지를 만리장성처럼 적어 보내와 지지를 호소했다. 조순도 대선 출마한다고 도와달라고 청해왔다. 
중국에 있을 때는 이인제가 비행기 타고 날아왔다. 최형우가 아끼는 후배였다. 

“사모님 좀 도와주소. 이번에 꼭 한 번 해보렵니다.”
“미안하지만 요번에는 차례가 아니라고 봅니다.”
원 여사는 마음을 정하고 있었다. 
“잘났든 못났든 신한국당 대선후보가 선출됐지 않소.”
이회창이었다.
“….” 

“모두 화합해 이회창을 대통령 만들어야 하잖아요. 그게 원론이고 원칙 아닙니까. 갈라지면 둘 다 안 돼요.”
“….”

“빨리 안국동 가서 이회창을 만나요. 둘이 합의를 보고 ‘이번에는 내가 당신을 밀어줄 테니까. 다음에 나를 밀어 달라.’ 나중에 공개할 수 있는 각서를 받으세요.”
그게 순리라고 이인제를 설득했다. 
하지만 독자 출마했다. 
“장관님 성정이면 이인제 나오도록 안 두죠. 어떻게든 주저앉혔을 거예요.”

잠시 정적을 뒤로 하고,

- 장관께서 대선 포기하고 당 대표로 유턴하고 안 쓰러졌으면 이회창이 대선후보가 됐을 수 있을까요.

“솔직히 까놓고 얘기하면 이회창으로 갈 수밖에 없었을 거예요.”

대세론을 염두에 둔 듯 유영백이 답했지만, 다른 주장들도 있다. 무엇보다 YS와 이회창 관계도 악연으로 불렸지만, 최형우 또한 내무부장관 할 당시 이회창과 거리를 두고 있었다는 것은 새삼스러울 것 없는 얘기였기 때문이다. 새마을운동 국고보조금 지원문제 등으로 언쟁하면서 감정이 격화됐다.

늘 입버릇처럼 “이회창은 안된다. 대권후보가 되면 신한국당도 YS도 민주계도 모두 없어진다”고 말하곤 했다. 최형우가 대의원 3분의 2 이상의 지지를 받았던 만큼 그가 건재했다면 이회창이 신한국당 대선후보가 되기는 어려웠을 거라는 얘기들은 여전했다.

‘이회창 불가론’에는 김현철도 참전하고 있었다. 그의 대권플랜에는 이홍구 국무총리가 있었다. 이 총리는 무색무취한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옹립해서 막후 행사를 하려 한 게 아니냐는 의심을 샀다. 

- 이홍구는 아니었다는 얘기도 나중에 들리더라고요. 

“노동법 파동 났을 때 대처하는 모습에서 대가 약한 것을 보고 접었다는 얘기는 있었죠.”
질문을 바꿔봤다. 

- 장관께서 당권을 잡았다면 누구를 밀 계획이었습니까. 

“….”

대답을 듣기는 어려웠다. 

“세평에선 이수성씨를 밀지 않았겠냐는 얘기가 있긴 있었어요.”

유영백 말에 원 여사도 고개를 끄덕였다. 

“온산계 일부에서도 이회창이 안 되면 그 다음은 이수성이란 생각이 있었거든요. 이회창은 좋게 말하면 곧았지만, 소통과 타협이 요구되는 정치의 세계에서 볼 때 우려스러운 점이 적잖았어요.” 

반면에 이수성은 정부가 연착륙할 수 있는 사람으로 봤다고 덧붙였다.

- 쓰러지지 않았으면 말이죠. 

“본인이 후보가 안 됐다면 누구든 자질이나 모든 면을 고려해 최고로 적임자라고 생각할 인물을 밀었을 거예요. 나라를 살리고 당을 살리고 민주계를 살릴 사람으로요.”
원 여사가 정리했다. 

“이 양반은 사심이 없는 사람이라 친하다고 해주고 안 친하다고 안 해주고 그런 거 전혀 없어요.”

이 사람 저 사람 얘기가 더 오갔지만, 당사자인 최형우는 답하지 않았다. 킹메이커로 나섰다면 과연 누굴 밀었을 지에 대한 의견이 지금까지 분분한 이유다. 정설로는 온산계인 이인제나 같은 민주계인 김덕룡을 밀었을 거라는 시각이 많았다.

하지만 청와대발로 민주계 대선 불가론이 새어 나오던 때라 그마저도 여의치 못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최형우의 속사정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이는 원 여사였다.

15대 대선 기간 내내 간호하며 유일하다시피 소통한 당사자였다. 최형우 의중을 모를 리 없을 거로 판단됐다. 설령 이회창이 됐든 누가 됐든, 종국에는 이유 불문하고 도왔을 것이라는 말을 쉽게 흘리기 어려웠다. 
 

15대 대선에서 최형우 쟁탈전은 대단했다고 알려져 있다. 여야 막론하고 이뤄졌다는 후문이다. 그만큼 최형우 전 장관의 조직력은 컸다. 신한국당 내에서도 최대 계파를 자랑하고 있었다. 사진은 최 전 장관의 정계 활동 당시다. 김윤환 등과 기념 촬영에 임하고 있다.ⓒ사진제공=최형우
15대 대선에서 최형우 쟁탈전은 대단했다고 알려져 있다. 여야 막론하고 이뤄졌다는 후문이다. 그만큼 최형우 전 장관의 조직력은 컸다. 신한국당 내에서도 최대 계파를 자랑하고 있었다. 사진은 최 전 장관의 정계 활동 당시다. 김윤환 등과 기념 촬영에 임하고 있다.ⓒ사진제공=최형우

중국서 머무르던 최형우는 15대 대선을 한 달여 앞두고 귀국했다. 선거전은 최고조로 치닫고 있었다. 캠프마다 서로들 최형우를 보기 위해 공항은 마중 나온 인사들로 장사진을 이뤘다. 이윽고 최형우의 모습이 보였다. ‘후다닥….’ 경쟁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멱살을 잡고 몸싸움까지 벌이는 장면이 연출됐다. 

“지난 3월초 뇌졸중으로 쓰러져 중국에서 치료를 받아온 최형우 의원이 출국 5개월 보름만인 28일 귀국했다. 이날 김포공항에는 한나라당 김진재 의원과 국민신당 서석재 의원 등 200명이 넘는 양당 관계자들이 마중 나와 최 의원을 데려가기 위해 멱살을 잡고 몸싸움을 벌이는 등 촌극을 빚었다. 최 의원은 휠체어에 의존했던 출국 때와는 달리 부축을 받으며 걸었다. 최 의원은 입국 후 가족과 함께 곧장 구기동 자택으로 떠났으며….”
-1997년 11월 29일 〈경향신문〉 중 - 

12월 18일은 선거일이었다. 이회창은 대선에서 떨어졌다. 독립해 나간 이인제를 잡지 못했고, JP(김종필)마저 DJ에 뺏겼다. YS를 출당시킴으로써 내부는 분열을, 외연은 축소를 가져왔다. 정치공학상 패배할 수밖에 없는 싸움이었다. 

- 장관께서 쓰러지지 않았다면 신한국당이 정권을 뺏기지 않았을 거라는 견해가 있습니다. 

“김무성 대표가 <시사오늘>에 인터뷰한 게 있대. 안 쓰러졌으면 신한국당에서 대통령 나왔을 거라고. 철들었나 싶었제(웃음).”

이래저래 씁쓸한 일이었다. 김덕룡을 비롯해 김무성 등은 “상도동계에서 대통령이 나왔다면 YS 평가도 달라졌을 것”이라고 한 바 있었다. 
온산계였던 서청원은 존경하는 선배들의 부재를 아쉬워하기도 했다. 
 

“김동영·최형우 장관 등…. 우리가 존경한 선배들 아니겠소. 그런 분들이 지도자로 계셨다면 좋았겠지.”
- 2021년 ‘시대산책’ 중- 

 

현대사 거물의 발자취


커다란 족적을 남긴 이들 거물 정치인들의 정치적 생이 마감된 것을 가장 안타까워했을 이는 누구보다 YS였을 것으로 가늠되고 있다. ‘좌동영(김동영 전 정무장관), 우형우(최형우)’라는 말이 있었다. YS 최측근 중 최측근을 가리켰다. 상도동계 맏형 격이었다. 김동영이 자금을 관리했다면 최형우는 조직을 관리했다. 

김동영이 세상을 떠난 후 최형우는 앞을 헤쳐가며 YS 대통령 만들기에 나섰다. 행동대장 격이었다. 김동영, 김덕룡, 문부식과 함께 YS 대통령 만들기 4인방으로 불렸다. 

1992년 대선을 앞두고서 ‘YS 지지’를 유보하고 칩거에 돌입했던 JP의 청구동 자택까지 들어가 “YS를 한 번 만나시라”며 설득한 주인공도 최형우였다. 민주산악회 3대 회장을 맡았을 때는 회원을 200만 명으로 늘렸다.

문민정부 초 YS가 개혁의 활시위를 과감히 당길 수 있었던 것도 그가 적극적으로 뒷받침해줘 가능했다. 하나회 척결부터 금융실명제, 공무원 재산공개 등 대한민국 제도 개혁에 앞서 선행해야 했던 당 개혁 작업도 만만찮은 일이었다. 최형우가 사무총장을 맡아 전초 작업을 하지 않았으면 어려운 일이었다. 
 

YS와 최형우는 사선(死線)을 함께 넘나들며 민주화를 이룩한 동지였다. 실제로 최형우는 YS가 대통령에 오른 뒤에도 YS를 '형님'이라고 칭했다. 사진은 젊은 시절의 YS와 최형우ⓒ 시사오늘
YS와 최형우는 사선(死線)을 함께 넘나들며 민주화를 이룩한 동지였다. 실제로 최형우는 YS가 대통령에 오른 뒤에도 YS를 '형님'이라고 칭했다. 사진은 젊은 시절의 YS와 최형우ⓒ 시사오늘

최형우가 YS를 만난 것은 60년대 초 ‘4·19, 6·3 범청년민주수호투쟁위원회’를 만들어 3선 개헌 반대 투쟁에 앞장서면서부터였다. 그 후 최형우가 YS 사람이 된 것은 국회의원 8대 선거 때다. 당시 그는 울산 울주에 출마했다.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의 세가 워낙 강한 곳이라 당선 가능성은 희박했다. 가족들조차 고개를 저었다. 전국을 돌며 총선을 지원하던 YS는 “최형우 지역구는 무조건 가야 한다. 최형우의 당선이 곧 나의 당선이다”면서 적극 유세에 나섰다. 서서히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최형우는 1971년 8대 총선에서 36살의 나이로 당선됐다. 

본격적으로 상도동계가 된 최형우는 사선(死線)을 넘나들며 YS 지키기에 나섰다. 1972년 10월 25일 유신이 선포된 지 일주일이 지나던 때였다. 김영삼 김대중 최형우 김상현 조윤형 등 유신 반대자는 일곱 사람이 전부였다. 중앙정보부에서 들이닥쳐서는 YS의 정치자금을 대라며 가혹하게 고문했다. 
 

“기관원들은 나를 발가벗겨놓고 구둣발로 마구 짓밟았다. 그런 다음 내 손을 모아 깍지를 끼게 한 다음 포승줄로 묶었다. 그다음 내 얼굴에다 사정없이 물을 들이부었다. 죽지 않으려면 물을 먹어야 했다. 물을 먹인 다음 전기 봉으로 몸을 지졌다. 정말 수치심으로 피가 거꾸로 쏟아 올랐다.”
- 최형우 자서전 중 - 

 

최형우는 끝까지 발설하지 않았다. 고문관은 “내가 간첩도 잡아봤고 정보부에서도 이름난 사람인데 더 이상은 못 하겠다. 당신 같은 사람은 처음”이라며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최형우한테 감동 받아 한 말이었다. 급기야 고문을 중단하더니 “우리야 위에서 시키면 안 할 수가 없으니 막대기로 벽을 내리치면 ‘아악’ 소리만 내라”고 말했다. 

죽다가 살아난 최형우는 하나님을 불렀다. 순간 구석에 광채가 환하게 비치면서 십자가가 보였다. 그 길로 엎드리고는 “무조건 믿겠습니다.” 처음으로 기도라는 것을 해봤다. 원 여사를 따라 천주교 신자가 됐다. 최형우의 자전적 에세이 <일어서라 부르는 소리 있어>가 그래서 나온 제목이었다. 
고문부터 십자가를 보게 된 상황들이 이야기를 듣는 이들에게도 아스라이 펼쳐졌다. 눈물로 얼룩진 최형우 얼굴에 고통과 환희가 번갈아 스쳤다. 

 

독재 정권 탄압과 회유 


민주산악회 회원들, YS와 김덕룡 최형우 등의 모습이 보인다 ⓒ시사오늘(사진제공=김영삼)
민주산악회 회원들, YS와 김덕룡 최형우 등의 모습이 보인다 ⓒ사진제공=김영삼

“최형우 저것 하나 못하나.”

한 번은 박정희 정권 일각에서 저항하는 최형우를 가리켜 못마땅하게 나온 말이었다. 폭압이 안 통하자 이번엔 회유 작전에 들어갔다. 망원동에 살 때였다. 연탄을 구들장 밑으로 넣고 갈아야 했던 시절이었다.

지인들이 연이어 방문해 “박 대통령 성격을 알아야 한다”며 유신을 반대하지 말라고 호소했다. 이후락이 현금으로 5억 원을 보따리 채 들고 대문을 두드린 적도 있었다. “YS와 내하고는 죽을 각오하고 있습니다.” 모두 거절했다. 

생계를 책임지던 원 여사는 시민문화회관(현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여덟 평짜리 가게를 내어 음식 장사를 하고 있었다. 벌기가 무섭게 “형수님 형님이 돈 좀 갖고 오래요.” “차비 좀 주소.” 반독재 투쟁을 하던 인사들이 배곯고 어려울 때였다. 문턱이 닳도록 민주계 인사들이 찾아왔다. 원 여사의 앞치마 주머니에 돈이 남아 날 일이 없었다.

시대는 유신 정권 말기로 치닫고 있었다. YS를 의원직에서 제명한 박정희 정권은 자신들 입맛에 맞는 총재직무대행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3선의 당기위원장직을 맡고 있던 최형우에게 사퇴를 요구했다. 최형우는 이에 강하게 맞섰다. 조만간 서대문 형무소로 끌려갈 것을 대비해 원 여사에게 솜바지 저고리를 준비하라고 일렀다. 

10월 26일 이른 새벽이었다. 미국에 사는 서상록 씨로부터 전화가 왔다. “큰일 났습니다.” 난리가 났다며 “박정희 대통령이 돌아가셨다고 지금 미국 방송에 나왔어요.”라고….

“무슨 말이에요.” 귀를 의심했다. 믿지 않았다. 동이 틀 때까지 기다려 라디오를 켰다. 새벽 6시 30분 돼서야 서거했다고 나왔다. 최형우는 곧장 상도동으로 향했다. 
 

김영삼 최형우 서석재 이기택 등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정치인들의 지역구가 모두 부산이었다. ⓒ사진제공=김영삼 자서전
김영삼 최형우 서석재 이기택 등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정치인들의 지역구가 모두 부산이었다.ⓒ김영삼 자서전

서울의 봄은 짧았다. 전두환 정권서도 고난과 회유는 반복됐다. 정치규제에 묶였고 고문에 가택 수색은 예사였다. 회유할 때는 정무장관이던 동국대 동창 정재철이 나섰다. 안기부장이던 노신영은 민정당 공천을 약속했다. 나중에는 상공부 장관이나 건설부 장관 제의까지 들어왔다.

최형우가 일언지하에 거절하자, 이번엔 원 여사를 청와대 안가에 데려갔다. 회유에 나섰지만 요지부동이었다. 큰딸 은지 씨도 아버지가 전두환 정권 밑에 들어갈 바엔 차라리 수난을 감수하겠다고 했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야 했던 원 여사는 속옷 장사에 나섰다. 보따리장수였다. 최형우가 박정희·전두환 정권에 걸쳐 10여 차례 정보부에 끌려가 고초를 겪었다면 원 여사는 남편을 돕다 유치장에 갇혔다. 민주화 투사들의 아내들과는 동지였다. 함께 거리에 나섰고, 격려했고 위로했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는 팔을 걷어붙였다.
 

“선전부장 하던 이일성 씨 부인이 애를 낳는다고 했는데 하혈로 위기라고 해서 제가 택시를 타고 병원마다 다니면서 피를 구했습니다. 그렇게 하고 울산에서 서울까지 고속버스 타고 올라오는 내내 울었습니다.”
- 2013년 원영일 ‘민산 되짚기’ 중-


혹독한 핍박과 공포정치로 말미암아 얼어붙었던 민주화의 열기는 YS의 단식투쟁을 계기로 다시 시작됐다. 야권이 결집해 범정치 결사체 민추협이 태동했다. 가택연금에 처해 있던 YS를 대신해 간사장을 맡은 최형우는 실무를 도맡았다. 신군부의 집요한 방해 공작을 온몸으로 물리치며 사무실을 지켜나갔다.

1985년 12대 총선을 앞두고는 YS를 따라 선명 야당 재건인 신민당 조직에 앞장섰다. 당 자금은 원 여사가 사업을 하고 있던 친척에게 다융통했다. 그가 지원 유세한 후보들은 승리했지만, 정작 최형우는 떨어졌다.

“전두환이 최형우만큼은 국회의원 시키면 절대로 안 된다”고 했다는 얘기가 떠돌았다. 부정선거 의혹이 제기됐지만, 거기까지였다. 

6월 항쟁 이후에는 87 직선제 개헌에 매진했다. 야당 대표 자격으로 미국 측 인사를 만나서는 미국이 한국 민주화를 돕지 않으면 YS와 함께 광화문 앞에서 분신자살을 하겠다고 말했다. 이 모두가 군정 종식과 민주화를 위한 대장정의 발자취였다. 

 

민주화 열망과 ‘아, YS’


최형우 전 장관은 민주화에 대한 열망으로 불의에 맞서 독재 정권에 저항했고 마침내 민주화를 이루는 길까지 함께할 수 있었다고 소회했다. 사진은 YS 서거 이후 빈소를 지키며 오열하고 있는 최 전 장관ⓒ연합뉴스
최형우 전 장관은 민주화에 대한 열망으로 불의에 맞서 독재 정권에 저항했고 마침내 민주화를 이루는 길까지 함께할 수 있었다고 소회했다. 사진은 YS 서거 이후 빈소를 지키며 오열하고 있는 최 전 장관ⓒ연합뉴스

이런 그에게 본지는 어떻게 그렇게 용맹할 수 있었는지를 물은 적이 있다. 

“민주화에 대한 열망입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 언제부터 민주화에 대한 불씨를 지닌 건지요. 

“친구들이….”

최형우의 시선이 아득하니 창공을 향했다. 때는 3·15 부정선거 직후였고 4·19 시위가 일어났다. 동국대가 제일 먼저 청와대 경무대로 향했다. 학생운동에 가담한 최형우와 친구들은 종로를 거쳐 돌진했다. ‘탕탕탕!’ 경찰이 총을 쏘기 시작했다. 사상자가 속출했고 ‘픽’ 하니 친구들이 죽어갔다.

“형우야 너만 믿고 간다.” 그 말이 평생을 따라다녔다고 했다. 죽어가던 친구들의 모습이 머릿속에 선명하니 남아 있었다. 민주화를 위해 희생된 친구들의 꿈은 남겨진 최형우의 몫이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YS 때문이었소.” 

최형우가 힘줘 강조했다. 불의에 타협하지 않았던 길에는 언제나 YS가 앞장서줬기에 가능할 수 있었다. YS를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헌신했다. 불도저와 같은 저력은 YS에게 큰 힘이 됐다. 또 최형우 역시 YS가 있었기에 신념에 녹이 슬지 않을 수 있었다. 

- 무슨 관계로 명명할 수 있습니까. 

“불가분의 관계였소.”

정치적 동지라는 말보다 더 끈끈하게 느껴졌다. 나누려 해도 나눌 수 없을 만큼 한 몸과 같다는 생각에서였을까. 무게가 남달랐다. 문민정부 기간 잠시 소원해졌던 적도 있었지만, 감히 깨기 어려운 신뢰였다. 마치 바위와 같았다.

퇴임 후 YS는 최형우 집을 찾아왔다. “자네 말이 맞더라….” “와 그랬습니까?” “청와대가 참 희한한 곳이더라. 눈도 어두워지고 귀도 어두워지고….” 둘은 서로를 부둥켜 한참을 울었다. 붉어진 눈시울이 가실 새 없이 금세 뜨거워졌다. 

“어느 설날이었는데요.” 원 여사가 운을 뗐다. 한 일화가 생각난 듯했다. 구기동 살 때는 설날에 찾아오는 사람들 대접하랴 500그릇을 끓였다. 장충동에서는 100그릇을 준비했다.

한 번은 어느 무리에서 “대통령이 좀 잘해서 정권 재창출이 됐으면 우리도 이래 안 됐을 낀데….” YS에 대한 원망이 새어 나왔다. 

“마루에 앉아 떡국을 먹으며 자기네들끼리 주거니 받거니 한 얘기들이었는데 방 안에 있던 최 장관이 들은 거예요.” 문을 박차고 나왔다.

“YS 욕하지 마라”며 버럭 호통을 쳤다. “우리보다 더 외롭고 불쌍한 분”이라고 말할 때는 목이 잠겨왔다. 수십 년간 YS 지키기에 서슴지 않았던 최형우였다. 

한 나라 임금도 뒤에서는 욕한다던데 자기 욕하는 건 넘겨도 YS한테 뭐라 하는 것은 참을 수가 없는 듯했다. YS 서거 당시 날마다 빈소를 지키며 엉엉 울고 오열하던 모습과 오버랩됐다.

YS 호가 ‘큰 산’ 거산(巨山)이라면 최형우 호는 ‘따뜻한 산 온산(溫山)이었다. 겉으로는 억새보여도 양지 바르고 따뜻한 산처럼 모두가 모여드는 넉넉함을 지녔다고 해 온산이었다. YS 좌우명은 대도무문(大道無門), 최형우는 대하무성(大河無聲)이었다. 두 사람은 나라와 국민을 위한 애국심 하나로 군부독재에 맞섰고, 막힘이 없는 정의로움으로 불의에 맞서 하나가 됐다. 나아가 통합과 화합으로 약자를 품을 줄 아는 정치를 한 것으로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다. 

“신한국당 당시에도 야당 인사들조차 장관을 만나려고 문전성시를 이뤘던 것이 지금도 생생해요. 정치란 곧 파트너십에 기초함을 몸소 실천한 정치인이었지요.”  
그 시절을 그리며 유영백이 전했다.

권력은 화무십일홍(權不十年 花無十日紅)이나 정신은 영원하다 했던가. 최형우가 쓰러졌든 아니든 대선후보가 됐든 아니든 당대표가 됐든 아니든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은 여전히 큰 듯했다. 윤석열 정부에도, 안철수네 김기현이네 당대표 선거가 한창 진행 중인 국민의힘에도, 또 민주당에도 YS와 최형우 같은 정신이 되새겨지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며 인터뷰는 끝으로 향해갔다. 

“문민정부 30주년을 맞는 해입니다.” 그 말에 왜소해진 어깨가 흔들렸다. 두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흐느껴 우는 모습이 아이처럼 애잖았다. 그리움과 아쉬움, 회한이 뒤섞인 옛 감정이 한꺼번에 몰아친 듯했다. 

김덕룡과 김무성을 중심으로 상도동계는 민주산악회와 민추협에 대한 역사적 재조명에 나서고 있다. 김현철은 문민정부와 87체제의 주역 YS를 재조명하는 책을 준비 중에 있다. 이들과 함께 서청원, 이인제까지…. 최형우는 인터뷰 말미 YS를 부르듯 한 사람 한 사람 정치 후배들의 이름을 읊어보았다.

“YS 정신을… 잘 계승해… 못다 이룬 꿈을 완수하고 국가와 국민을 위해 활약해주길 바랍니다….” 그가 말한 미완의 꿈은 무엇일까. 좀 더 묻고 싶었지만, 쉬어야 할 때였다. 천천히 방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우두커니 바라봤다. 

“YS한테 최형우가 있었다면 최형우한테는 원영일 여사가 있다는 평가입니다.” 배웅을 준비하는 원 여사에게 덕담을 건넸다. 그 말에 부끄럽게 웃으면서도 60년 가까이 부부로 살아오면서 민주화에 대한 열망만큼은 부창부수 일심동체였다고 소회하는 모습에서 자부심이 엿보였다. 
돌아보면 언제가 새록새록 기억나는지도 물었다. 

최형우 전 장관은 여초 김응현 선생에게 서예를 배운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최 전 장관은 부인 그림을 그려온 부인 원영일 여사와 함께 금혼식 날을 기념해  인사동에서 서예전과 미술전을 개최한 바 있다. 사진은 왼쪽부터 최 전 장관이 쓴 광개토 대왕비와 갤러리에 전시한 서예작품, 원영일 여사의 작품을 뒤로하고 웃고 있는 최 전 장관과 원 여사의 모습이다.ⓒ사진제공=최형우
최형우 전 장관은 여초 김응현 선생에게 서예를 배운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최 전 장관은 부인 그림을 그려온 부인 원영일 여사와 함께 금혼식 날을 기념해 인사동에서 서예전과 미술전을 개최한 바 있다. 사진은 왼쪽부터 최 전 장관이 쓴 광개토 대왕비와 갤러리에 전시한 서예작품, 원영일 여사의 작품을 뒤로하고 웃고 있는 최 전 장관과 원 여사의 모습이다.ⓒ사진제공=최형우

“조지 부시 취임식 때요….”

1989년 조지 부시 취임식에 부부가 초청됐을 때였다. 최형우와 원 여사는 격식을 갖추면서도 자유로움이 넘쳐나던 미국식 문화를 접하면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대한민국 민주화가 군정과 불편한 동거를 할 수밖에 없는 불완전한 단계였다면 미국식 민주주의는 선진 시스템과도 같았다. “여보, 우리도 돌아가서 열심히 해야 해.”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더욱 노력하겠다고 다짐하는 계기가 됐다고 술회했다.

취임식 파티에는 노방주로 만든 전통 한복을 입고 들어갔다. 너도나도 다가와 한복을 만져보며 “뷰티풀”을 외쳐댔다. 한국 전통문화의 아름다움을 예찬했다. 국위선양을 했다는 생각에 뿌듯했다는 말도 여담처럼 전해줬다.

2016년 금혼식 때도 가슴 뛰는 일이었다고 회상했다. 부부가 특별히 인사동에서 서예전과 미술전을 열었다. 여초 김응현 선생에게 배운 최형우가 서예에 능하기로 유명했다면 그림을 그려온 원 여사는 첫 데뷔를 치른 셈이었다. 찾아온 사람들이 “이 열정을 어떻게 참았냐” 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했다. 소녀로 돌아간 듯한 원 여사와 인사하고 문을 열었다. 

봄이 오고 있다. 꽃은 다시 필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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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EORK17 2023-02-07 03:37:33
현대사 거인 중 한 인물... 지금의 정치인들과 급이 다른 진정한 정치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