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뉴스를 보면 불행해질까 [주간필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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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뉴스를 보면 불행해질까 [주간필담]
  • 정진호 기자
  • 승인 2023.03.12 16: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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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극적 뉴스만 보도하는 언론 관행…독자 행복 생각하는 문화로 바뀌면 어떨까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정진호 기자]

나쁜 소식이 좋은 뉴스라는 건 언론계의 오랜 믿음이다. ⓒpixabay
나쁜 소식이 좋은 뉴스라는 건 언론계의 오랜 믿음이다. ⓒpixabay

“Bad news is Good news(나쁜 소식이 좋은 뉴스다).”

“개가 사람을 무는 건 뉴스가 아니지만, 사람이 개를 무는 건 뉴스가 된다.”

대학 시절. 기자가 수도 없이 들었던 말이다. 사건·사고는 나쁜 소식이다. 그러나 미디어에겐 좋은 소식이다. 개가 사람을 무는 건 당연한 일이다. 사람이 개를 물어야 이상한 일이다. 그래야 뉴스다. 아마도 이 말이 언론의 본질을 꿰뚫는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당시 신문방송학과 교수님들은.

하긴 지금도 다르지 않다. 저 두 문장이 틀렸다고 단언할 언론인이 있을까. 하지만 꼭 옳은 말도 아닌 것 같다. ‘어쩌면 저런 언론 관행이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든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어서다.

인터넷 창을 열어보자. 십중팔구 뉴스가 뜰 거다. 헤드라인을 읽어보자. 백이면 백 기상천외한 사건일 거다. ‘뉴스의 세상’엔 정상적인 일이 없다. 당연하다. 나쁜 소식이 좋은 뉴스니까. 사람이 개를 물어야 뉴스가 되니까.

혹자는 뉴스를 ‘세상을 보는 창’이라 한다. 이 말이 옳다면, 사람들은 끔찍한 세상을 보고 살아가는 셈이다. 남편이 아내를 죽이고 자식이 부모를 죽이고. 누가 누군가를 속이고 또 속이고. 인면수심(人面獸心)의 악마들이 뉴스 독자들 세상을 가득 채웠을 터다.

정말 현실이 그런가. 통계는 ‘No’라고 답한다. 법은 도덕의 최소한이다. 법만으론 세상이 돌아가지 않는다. 사회가 유지되는 건 신뢰가 바탕에 있기 때문이다. 나를 해코지하려는 사람보단 더불어 살아가려는 사람이 월등이 많다.

하지만 뉴스는 어두운 현실만을 반영한다. 내 세상은 멀쩡한데 뉴스 속 세상은 위험천만하다. 이 괴리는 불안으로 나타난다. ‘지금 내 삶은 평온하지만 언젠간 위험해질지 모른다. 뉴스에 나오는 수많은 사건·사고들을 보라.’

불안은 혐오를 낳는다. 심리학적으로, 혐오는 내적으로 감당하기 힘든 불안을 잠재우기 위한 방어기제(defense mechanism)라고 한다. 모두가 불행한 혐오의 시대. 언론도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독자들의 행복을 위해 태어난 뉴스가 그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꼴이다.

물론 언론은 사건·사고를 알릴 의무가 있다. 소식을 전해 경각심을 갖게 해야 한다. 그래야 피해가 줄어든다. 그것도 언론의 역할이다. 문제는 목적의식이다. 지금 나오는 뉴스들을 보자. 정말 독자를 위한 것인가. 읽는 이를 배려하고 있나. 그저 관성적으로 자극적 뉴스만 쏟아내고 있진 않나.

목표가 바뀌면 모든 게 달라진다. 뉴스가 독자의 ‘행복’을 위해 생산되면 어떨까. 비즈니스에 무슨 행복 타령이냐고? 그렇지 않다. 다른 산업에선 이미 소비자의 행복을 우선시한다. ‘기능의 시대’는 끝난 지 오래다. 소비자의 감정을 고려한다. 행복을 증진하려 한다. 그래야 살아남는다.

언론도 독자의 행복을 최우선 목표로 삼으면 어떨까. 형식도 내용도 방식도 모두 변하지 않을까. 불안감을 증폭하는 대신, 문제 해결을 위한 제언이 우선시되지 않을까. 뉴스가 독자의 행복을 위하기 시작할 때. ‘나쁜 소식’만이 ‘좋은 뉴스’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때. 바로 그 때 벼랑 끝에 몰린 언론에게도 돌파구가 보일 거라고, 기자는 믿는다.

담당업무 : 국회 및 국민의힘 출입합니다.
좌우명 : 인생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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