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시인 김소월과 국제화 [이병도의 時代架橋]
스크롤 이동 상태바
민족시인 김소월과 국제화 [이병도의 時代架橋]
  • 이병도 주필
  • 승인 2023.06.10 15:2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국민애송시 ‘진달래꽃’ 발표 100주년, 전용문학관 현안 대두
소월 시작품과 시정신의 세계화 추진할 ‘국제소월협회’ 발진
세계 7군데의 대학과 기관에 소월해외지부 갖가지 사업 모색
시의 외국어 번역, 시교재 해외보급, 소월기념사업 다각도 추진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이병도 주필)

ⓒ연합뉴스
진달래꽃의 고장 영변의 설경ⓒ연합뉴스

국내 최고의 서정시인이자 민족시인인 김소월의 국제화 논의가 활발하다. 관계 요로의 관심이 높다.

시인 김소월의 작품과 정신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한 ‘국제소월협회’(이사장 이재혁 유라시아교육원장)가 부산에서 출범, 본격적인 활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김소월 시는 ‘진달래꽃’을 비롯해 여러 편이 초·중등 교과서에 실려 있어 그의 이름이나 시를 모르는 한국인은 거의 없다. 시비도 전국에 178기나 있다. 김소월 시에 곡을 붙인 가곡과 유행가도 60여편에 달한다. 리메이크 가수까지 포함해 320여 명이 소월의 시를 노래했다.

최근 남한의 계간 시전문지인 ‘시인세계’ 창간호가 ‘한국 현대시 100년, 100명의 시인’ 평론가 설문조사를 벌인 결과 김소월이 모두 87명으로부터 추천을 받아 최고의 시인에 올랐다. 김소월은 그만큼 우리민족 최대의 시인으로, 한국적 정서를 시로서 가장 잘 드러낸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권영민학장도 우리 민족문학사에서 근대시 형성에 가장 주도적인 역할을 한 시인으로 김소월을 꼽았다.

“소홀히 취급하는 현실”

그러나 국내에는 김소월 전용 문학관 조차 하나 없다. 세계적으로 한류와 한국학 열풍이 일고 있지만, 김소월은 해외에서 아직 낯선 존재다. 이에 국제소월협회측은 “진달래꽃·산유화·금잔디 등 주옥같은 작품 200여 편과 그의 시 정신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협회를 창립한 것”이라고 밝혔다.

협회 이재혁 이사장은 “러시아 푸시킨과 독일의 괴테, 스페인 로르카, 칠레 네루다, 아일랜드 예이츠처럼 한국에는 김소월이라는 자랑스러운 국민 시인이 있다”며 “그런데 한민족을 대표하는 시인이 전용 문학관 하나 없어 소홀히 취급되는 현실이 안타까워 소월협회와 소월기념사업재단 설립을 추진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협회는 앞으로 김소월 시 세계를 국제적으로 알리는 일에 나설 계획이다. 우선 러시아 모스크바 국립인문대, 사할린 국립대, 이르쿠츠크 철도대, 카자흐스탄 국제관계와 세계언어대, 타슈켄트 아주대, 키르기스 한국 중앙아대학, 필리핀 투게더 영어아카데미 등 세계 7곳 대학과 기관에 협회 해외지부를 두기로 했다. 향후 유럽·중남미·아시아 등에도 지부를 설립할 예정이다.

올해 주요사업으로는 진달래꽃 초판본(1925년 12월 26일·매문사)의 유라시아 외국어 번역, 중앙아시아 한국학 교수협의회와 연계한 소월 시 교재 개발, 소월 학술대회, 국제 청소년 소월 시낭송 대회 등을 기획하고 있다. 또 전국 자치단체·기업과 연계해 가칭 소월기념사업재단을 발족하기로 했다. 이를 통해 소월 국제 음악 축제, 소월 시 대중강연회, 북한에서 소월 시 보급과 학교 교육 실태조사, 소월 청소년 문학상 시상 등 다양한 행사를 할 계획이다.

협회 이재혁 이사장은 “국제소월협회를 통해 소월을 우리 스스로 더욱 사랑하고, 소월을 세계 문화창달에 공헌한 세계의 시인으로 발돋움시키려 한다”고 말했다.

소월 해외지부 박차

지난해인 2022년은 국민시인 김소월(1902~1934)의 ‘진달래꽃’이 세상에 발표된지 꼭 100주년이 되는 해다(1922년 7월 <개벽>25호). 세계적으로 부는 한류와 한국학 열기에도 불구하고 한국을 대표하는 국민시인 소월은 해외에서도 잊혀진 존재다.

사실, 소월시 ‘진달래꽃’은 국민 애송시 조사에서 1위를 놓쳐본 적이 없고, 소월의 시 여러 편이 초중등 교과서에 실려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국내에 소월 전용문학관과 소월기념사업재단 하나 없고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한류붐과 한국어 교육열기 현장에서도 소월시가 교재로 활용되지 못하고 있는게 사실이다. “이는 세계 10위권의 대한민국 경제규모에도 맞지않을 뿐 아니라, 민족 정기를 짓밟는 행위라고 본다“고 이 이사장은 말했다.  

정신적 기둥이자 서정의 샘물

소월은 누구인가. 김소월은 굳이 시인들에게뿐만 아니라 한반도에 사는 우리들 모두의 정신적 기둥이자 서정의 샘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남북한의 초중등 교과서에 가장 먼저 그의 작품이 실렸고, 누구나 시 ‘진달래꽃’을 암송하는게 아닐까?

그러나 우리는 안타깝게도 소월을 망각하고 홀대하고 방치해왔다. 한류 붐을 타고 세계 각국의 한국학 관련기관에서 우리 문화 콘텐츠를 가르치지만, 해외에서도 소월을 소홀히 하기에 소월의 시세계와 시정신을 아는 외국인은 많지 않다. 이것은 세계 10위권의 발전된 국가라는 우리의 위상에 맞지않는 실태이고, 민족의 정신과 정서를 짓밟는 행위라고 생각된다.

우리도 우리의 국민시인 김소월을 저 유라시아 대륙으로, 그리고 세계의 다른 지역으로 널리 알려서 국가와 민족의 위상을 더 높이고 세계문화 발전에 더욱 기여해야 하겠다.

 앞으로 국제소월 협회는 (가칭)소월기념사업재단과 소월박물관을 설립하여 주요 외국어로 소월 시집을 번역하고, 다양한 소월 시교재와 영상 콘텐츠를 개발하여 해외 한국학 거점대학에 이를 보급하려고 한다. 아울러 소월을 사랑하는 분이면 누구나 참가할 수있는 시낭송대회, 국제 소월문학제, 학술대회, 청소년 소월문학상 시상 등의 사업을 활발히 펼쳐나가려한다.

일제 강점기 활동

소월은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한국의 시인이다. 본관은 공주(公州)로 본명은 김정식(金廷湜)이지만 본명보다 소월(素月, 흰 달)이라는 아호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일제강점기 민족의 토속적인 한과 정서를 그대로 담아낸 시를 써냈다.

1902년 평안북도 구성군 서산면 왕인리의 외가에서 김성도(金性燾)와 장경숙(張景淑)의 아들로 태어났다. 자란 곳은 아버지의 고향인 평안북도 정주군 곽산면 남단동(현 평안북도 곽산군 남단리)이다.

이후 김소월은 사립인 남산보통학교(南山普通學校)를 졸업하고 1915년 평안북도 정주군에 있는 오산학교(五山學校) 중학부로 진학한다. 김소월은 오산학교에서 시로서의 스승인 김억과 사상적 스승인 조만식을 만나게 되는데, 이는 그의 인생에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1919년 3.1 운동의 여파로 오산학교가 문을 닫자 김소월은 배재고등보통학교에 편입학해 졸업한다. 1923년 일본의 도쿄상과대학(오늘날 히토쓰바시대학)으로 유학을 갔으나 하필이면 입학 직후 관동 대지진과 일본의 잔혹한 한국인 학살 사건이 발생해 일본 분위기가 흉흉해진 탓에 신변의 위험을 느끼고 1924년 도쿄상과대학을 중퇴한 후 귀국한다. 귀국 후에 김소월은 스승 김억과 경성에 가서 일자리를 알아보지만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채 고향으로 돌아온다. 경성에서 김소월은 자신과 비슷한 처지인 나도향과 친하게 지냈으며 경성에서 구성군으로 돌아오기 직전인 1925년 자신의 유일한 시집이 된 <진달래꽃>을 김억의 자비 출판으로 출간했다.

현실적인 문제 고뇌의 흔적

김소월이 시인이다보니 현실에 대해선 무감각할 것 같은 예술가적 이미지로 생각하기도 하는데 1977년 발견된 그의 미발표 창작노트를 보면 가장으로서의 고된 삶에 대한 고뇌와 일제 치하의 현실에 대한 비판을 적은 글이 보이는 등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굉장히 고민을 많이 한 인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시집 <진달래꽃>에 실린 시들로 대표되는 전성기 시절 후 발표하는 시들에서 가장 빈번하게 나타나는 시어는 ‘집’과 ‘돈’이며 말년에는 시 쓰기를 직업으로 생각하지 않고 일종의 취미활동으로 여겼다고 한다.

한국인 귀화 필기시험에 <진달래꽃>의 지은이가 누구냐는 문제가 나온다. 즉 김소월을 모르면 한국인이 아니라는 뜻이다. 민족시인이자 한국 서정시의 원류, 민족시의 발원지로 불리는 우리나라를 대표 하는 시인이다. 전 국민 애송시 1위 역시 한국 서정시의 기념비적 작품인 김소월 시인의 <진달래꽃>이다. 김소월은 노래로 불려진 시가 가장 많은 시인, 교과서에 맨 처음으로 시가 등재된 시인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사진 하나 남기지 못한 불운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의 사진이 널리 알려지지 않은 탓에 김소월의 이름과 시속의 화자들이 여성적인 느낌을 많이 주어 가끔 그를 여류시인으로 오해하는 사람도 있다한다. 자신의 이름을 유명하게 만들어준 진달래꽃으로 유명한 영변의 약산은 현재는 북한 지역이라 분단 이래 남한(대한민국)에서는 마음대로 갈 수 없을 뿐더러 오늘날엔 다른 의미로 유명해지게 됐다.

남북간의 시각 비교

남한에서는 그를 우리민족 최대의 서정시인으로 부르는 반면 북한에서는 식민시대에 우리민족의 삶은 사실적으로 그려낸 비판적 사실주의시인으로 평가해 왔다. 그러나 한때 항일문학을 강조하던 시기에는 투쟁성이 약하다는 이유로 잠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가 최근에는 민족의 고통, 민중의 삶을 가장 잘 표현한 시인으로 새롭게 조명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시의 형태적인 특성을 고려해 볼때도 소월의 시가 굉장히 중요할 뿐만 아니라 우리민족의 전통적인 정서의 여러 가지 측면을 새로운 근대시의 형식속에 담아내는데서도 소월이 탁월한 성과를 드러냈기 때문에 소월은 한국근대시 형성에 가장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시인으로 평가할 수 있겠다.

서른 셋의 짧은 인생을 살다간 김소월시인은 시대의 변화, 세대 교체속에서도 끈질긴 생명력을 계속해서 이어가고 있다. 그의 시집이 현재까지도 유명, 무명 출판사에 의해 끊임없이 발행돼 오고 있는 것은 곧 소월의 시가 계속해서 읽히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고 서울대 권 학장은 설명한다.

‘나약하고 서정적인 시인만은 아니다’

여러 관점에서 그의 시에 대한 재발견, 깊이 있는 작품분석을 하고 있는 가운데 평론가 정효구 씨는 그 동안 소월 작품의 근간인 정(情)과 한(恨)의 개념과는 다른 국가민족관을 강조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그는 ‘빼앗긴 땅, 꿈꾸는 노동’이라는 글에서 소월의 작품이 서정보다는 남성적인 강인한 언어로 망국민의 비애와 현실 극복의지를 노래하고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이러한 분석은 그동안 서정성 위주로 소월의 문학을 평가하던 남한의 경향과는 사뭇 다르지만 북한자료에 따르면 북한 쪽에서는 이런 평가가 별로 이채로운 것은 아니라는 지적이다.

소월은 오산학교 동급생을 선동해 3.1만세 운동에 참여한 후 일본경찰에 잡혀가던 중 탈출했다는 얘기도 전해지고 있어 그가 나약하고 서정적인 시인만은 아니었다는 시각이다.

북한에서의 시대적 평가

북한에서 소월 문학에 대한 평가가 시대적으로 어떤 변화를 보여왔는지. 또 문학에 대한 관점에 있어 남북한이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권 학장의 견해를 다시 인용한다.

“북한에서 김소월을 보는 관점은 북한의 문학계 전체가 문학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는 문예정책, 북한의 문예정책 방향과 관련돼 있다. 김소월이 상당히 삶의 체험에 근거해서 사실적인 자세를 많이 견지했다, 이 점을 중시하고 그러면서 그것을 비판적 사실주의라는 이름으로 명명을 했다. 그런 식으로 김소월을 논의함으로서 남한이 그 시기에 김소월을 민족을 대표하는 서정시인으로 평가했던 것과 좋은 대조가 된다.

그런데 60년대말부터 70년대, 80년대 중반까지는 북한에 이른바 김일성주체사상의 시대가 되는데 그 시대 북한의 주체시대문학이라고 하는 것은 전부 다 김일성의 항일혁명투쟁이 문학정신의 기조가 돼야한다 그런 주장을 내세웠던 시기다. 그러니까 김소월이 시에 그런 투쟁적 의지라든지 저항적인 자세가 부족하다, 지나치게 개인적으로 일종의 퇴행적인 정서같은 것이 있다, 그래서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중반까지는 거의 김소월에 대한 연구논문이 나오질 않았다. 그러다다 80년대 중반이후에 다시 김정일이 등장하면서 김소월에 대한 논의가 새롭게 제기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시기적으로 50-60년대에 아주 중요하게 평가했다가 6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까지 다시 비판되고 백안시되고, 논의에서 제외하고 그러다가 80년대 후반이후에 다시 적극적으로 평가하고 있는 그런 상황이다.”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의 한과 슬픔을 노래했던 시인 김소월. 다시 태어날 수 없는 김소월의 아름답고 아련한 시들은 그 자체가 한민족의 얼이고 정신이다. 더 적극적으로 국제화, 세계화 시켜 나가야 한다.

 

이병도는…

부산고·서강대 신문방송학과를 졸업, 1979년 동양통신 정치부 기자로 출발한 후 연합뉴스 정치·경제·외신부 기자·차장, YTN 차장, 평화방송(PBC) 정경부장, 가톨릭 출판사 편집주간을 지냈다. 연합뉴스 재직 중에는 한국기자협회 부회장으로 일했고, '홍콩 유령바이어 사기사건' 보도로 특종상을 수상했다. 일본 FOREIGN PRESS CENTER 초청으로 자민당을 연구하였고, 남북회담 취재차 평양을 방문하였다. 저서로는 <6공해제(解題)>, <YS 대권전쟁>, <최후의 승자>, <영원한 승부사>, <대한민국 60년> 등이 있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