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쏭달쏭 은행 대출약관, 이해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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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쏭달쏭 은행 대출약관, 이해완료?
  • 이해인 기자
  • 승인 2010.03.22 10: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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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 용어 수두룩 이해도 못하고 글자도 깨알
내 집 마련의 부푼 꿈을 안고 대출을 받으러 은행에 간 직장인 유모(36)씨. 순서가 돼 창구에 앉자 은행 직원이 그를 반갑게 맞이한다. ‘빚을 진다’는 생각에 바짝 긴장됐던 몸이 조금 풀어지려는 찰나 은행직원이 깨알 같은 글씨가 빼곡한 대출 약관을 건네준다.
 
워낙에 글씨가 작은데다 말도 어려워 자꾸 눈이 돌아간다. 약관을 잘 읽어 놓지 않으면 문제가 생길 수도 있으니 잘 읽어 보란 은행직원의 말을 못 들은 척 흘린다. 유 씨는 뭉치의 서류를 손에 쥔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난감해 한다.

전세자금, 사업자금 등 한 번 쯤 이용하게 되는 대출. 하지만 금융거래 시 소비자의 권리를 침해하는 경우가 많아 국내 소비자 단체들이 금융기관의 서비스에 본격적으로 태클을 걸고 나섰다. 금융기관들의 편의를 위해 소비자의 권리를 더 이상 침해하지 말라는 것이다.   

실제로 국제소비자기구가 지난해 12월 각국의 소비자단체를 통해 금융서비스 관련 문제점을 조사한 결과 많은 국가의 소비자들이 과다한 대출비용, 수수료 부담, 불공정약관 등 피해를 입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빈곤계층은 아예 은행계좌를 개설할 수 없는 등 접근성도 취약한 것으로 드러났다.
 
국내에서도 문제가 발견됐다. 소비자시민모임(대표 김재옥, 이하 소시모)이 지난 2월 시중은행의 대출약관 내용을 분석한 결과 대출약관에 소비자가 이해하기 어려운 용어가 많고 대출 신청 시 소비자의 개인정보를 과다하게 요구하는 등의 문제점이 있었다.
 

# 대체 뭔 말이여
지난 2월 소시모가 국내 시중은행 4곳(농협, 외환, SC제일, 신한)의 개인 신용대출약정서를 조사한 결과 25개 항목에서 소비자가 이해하기 힘든 단어나 문장이 발견됐다.

일례로 개인 신용대출 약정서에는 ‘대위변제’, ‘물상보증인’, ‘사전 구상권’, ‘모사전송’, ‘질권설정’, ‘실질조달금리 및 시장상황 등을 반영한 유동성프리미엄과 정책적 스프레드(가산금리)’ 등 일반인이 이해하기 힘든 전문용어들이 눈에 띄었다.

내용을 숙지하고 동의한다는 의사표현을 해야만 대출이 이뤄지는 약정서, 과연 얼마나 많은 소비자들이 이 같은 대출 약관을 이해하고 동의할까? 이에 소시모 관계자는 “전문적인 표현이 많아 이해하기 힘들어 소비자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용어로 바꿀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 광고문자… 너였냐?
문제는 대출약정서만이 아니다. 신용카드 발급 신청 시 작성하는 ‘개인 신용정보 이용?조회?제공?활용 동의서’에는 금융사 외 수많은 계열사들이 길게 나열된 채 서비스를 제공받는 자의 정보를 활용 할 수 있다고 나와 있다.

SC제일은행의 경우 BC카드 발급 신청 시 작성하는 동의서에 ‘제일은행의 부가서비스 제휴기관인 백화점 및 대형할인마트, 호텔 및 콘도, 정유사, 이동통신사, 골프장, 놀이공원, 극장, 교통카드 등 SC제일은행의 BC카드 금융 소비자의 개인 신용정보를 영업 목적으로 이용할 수 있다’라고 쓰여 있어 소비자가 신용카드를 만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 

백화점부터 놀이공원까지 범위가 넓은 것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어떤 상호의 제휴기관인지가 명확히 표시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A백화점, B백화점, C백화점도 제일은행의 제휴사이면 SC제일은행 BC카드 발급자의 정보를 활용할 수 있다는 얘기다. 
 

▲ SC제일(위)과 농협(아래)의 '개인 신용정보 이용, 조회, 제공, 활용동의서' 일부분.     © 시사오늘

# 저도 제가 ‘을’인건 압니다만…
개인 신용대출약정서, 개인 신용정보 제공?이용(활용)동의서, 여신거래기본약관 등에는 대출 기간 자동연장 시 대출 금리는 은행이 정하고 이를 10일 이내에 소비자에게 통지하는 등 소비자가 계약서상 ‘을’이라는 위치를 확인(?)시켜주는 불공평 약정 조건들이 숨어 있었다.

외환은행 대출거래 약정서 제2조 5항에는 ‘제1조의 대출기간 자동연장에 따라 기간연장을 하는 경우 은행이 정한 기준금리+가산?감면률로 변경할 수 있기로 하며, 은행은 연장된 대출금의 이자율과 새로운 상환기일 등을 연장 후, 10일 이내에 유선 또는 서면으로 통지하기로 합니다’라고 쓰여 있다.

소시모관계자는 “정해진 규칙에 따라 은행이 대출 금리를 정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은행은 연장에 대한 대출금리 통보가 아닌 금리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고객에게 선택권을 주어야 한다”고 반박했다. 깜박했던 대출자동연장으로 대출 금리폭탄을 맞을지도 모른다는 얘기다.

또 농협은 여신거래기본약관에서 고정금리를 변동금리로 바꿀 수 있는 변경요인을 ‘국가경제?금융사정의 급격한 변동 등으로 계약 당시에 예상할 수 없는 현저한 사정변경’이라는 매우 추상적인 표현을 썼고, SC제일은행은 개인 신용대출거래 약정시 리볼빙 거래를 원하지 않는 소비자도 무조건 이를 승인하도록 적용해 소비자 권리를 무색케 했다.
 
이 밖에 신용정보 제공 활용에 대한 고객 권리 안내가 미비한 점, 약정서 동의서의 글씨가 너무 작고 은행마다 용어가 통일되지 않아 소비자의 혼란을 일으킬 우려가 있다는 점 등이 문제점으로 발견됐다.

소시모측은 “소비자들이 금융서비스 부문 개혁의 중심에 서야 마땅히 받아야 할 금융서비스를 받을 권리가 있다”며 “현재 소비자에게 충분하게 제공하고 있지 않은 정보부족의 문제, 금융관련 정책결정에 소비자대표 참여 등 금융 소비자권리를 확보하기 위해 국제소비자기구 회원단체들과 함께 보다 폭넓은 소비자 운동에 동참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서민의 든든한 버팀목이라는 ‘은행’. 이미지 쇄신을 위해 평판 좋은 연예인을 광고에 내걸 게 아니라 소비자를 위해 한 번 더 생각하는 배려가 더 필요하진 않은지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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