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S·박정희 벼랑끝 승부…역사 평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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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박정희 벼랑끝 승부…역사 평가는
  • 정세운 기자
  • 승인 2010.03.22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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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규, “김재규 박정희 독재와 YS 진정성 놓고 고민하다, 총격”
한국 현대정치사는 이른바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의 싸움’을 거쳤다. 양 중심에는 박정희와 김영삼(YS)이 있었다는데 이견을 달 사람은 거의 없다. 2010년 3월, 역사의 평가는 ‘산업화와 민주화에 모두 성공했다’며 양 진영에 대해 모두 승리자라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 이들 간 싸움의 최종 승리자는 누구일까? 역사를 되짚어봄으로써 그 해답을 구하고자 했다.(편집자 주)
 
김영삼과 박정희의 싸움은 치열했다. ‘김영삼과 박정희’의 저자 노병구 전 민주동지회장은 이와 관련해 “독재정치로 일관한 박정희는 집권 내내 김영삼을 없애는 정책으로 일관했고, 결국 YS를 죽이려다가 자신이 먼저 죽음을 당한 것”이라고 말했다.

노 전 회장의 말처럼 역사 곳곳에서 ‘박정희는 김영삼을 죽이려 한 흔적’들이 나타난다. 우선 잘 알려진 ‘초산테러’ 사건이다. 1969년 3선개헌을 전면에 서서 반대하자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김영삼의 배때기엔 철판을 깔았다고 합디까”라며 당시 신민당 고흥문 사무총장에게 협박을 했다.

이 같은 협박을 벌인 며칠 후인 1969년 6월 20일, YS는 괴한의 청년에게 초산테러를 당했다. 71대 제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벌어진 신민당 대통령 후보 경선전에서도 ‘정치공작’이 자행됐다.
 
박 정권, ‘초산테러’, ‘정치공작’ 통해 ‘김영삼 죽이기’
김영삼, 79년 전당대회 통해 당권잡고 박정희 압박


당시 경선전은 40대 기수론을 들고 나온 김영삼과 김대중, 이철승의 3파전 양상으로 전개됐다. 하지만 당내 지분을 가장 많이 확보하고 있던 유진산이 “김영삼을 신민당의 대통령 후보로 추대한다”며 지지하자, 김영삼의 당선은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하지만 선거 막판 이철승의 배신으로 김대중이 2차투표에서 김영삼을 누르고 당선됐다. 하지만 김영삼 캠프에서 ‘이철승의 배신’을 감지하지 못했을까? 상도동 1세대이자 당시 선거캠프의 조직 관리를 맡았단 김봉조 민주동지회장은 “캠프 내에서 이미 이철승의 표가 김대중 쪽으로 간다는 계산도 하고 있었다. 그래도 표계산을 해보니 우리가 이겼다. 하지만 2차투표를 앞두고 이재형의 배신으로 김대중이 승리했다”고 회고했다.

이재형은 30대에 상공부 장관을 지냈고, 공화당 정권 때는 윤보선과 호흡을 맞춰 정치를 해오며 신민당 내 일정 지분을 가지고 있던 인물. 당연히 YS는 이재형 쪽의 대의원들을 자신의 표로 오인했다.

김봉조 민주동지회장은 “선거가 끝난 후 YS가 이재형에게 전화를 걸어 거의 쌍욕을 하다시피 했다. 이재형은 그때 전화기에 대고 아무 말도 못했다. ‘도청 때문에 변명을 할 수가 없었다’고 후에 이재형에게 직접 들었다. 이재형은 ‘중앙정보부의 지시를 거부하기 힘들었다’고 고백했다”고 전했다.

박정희의 탄압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76년 9월 15일 치러진 신민당 전당대회에서도 김영삼을 향한 박정희 정권의 공작은 계속됐다. 당시 YS 지지파였던 고흥문씨를 협박해 이철승을 지지케 한 것. 결국 박 정권의 공작으로 YS는 당권을 이철승에게 내줬다.

당시 고흥문계였던 노병구 전 민주동지회장은 이에 대해 “한번은 고흥문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지구당 사무실로 들어왔다. 이유를 물었더니 청와대에서 박정희와 배드민턴을 치고 오는 길이라고 설명했다.
 
당시에는 거물정치인은 여야를 안가리고 대통령을 만나는 거구나라고 생각했다. 후에 고흥문이 갑자기 돌변해 ‘이철승 지지’를 하명할 때 느꼈다. 왜, 청와대에 들어가 박정희와 배드민턴을 쳤는지를 알았다”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항상 박정희의 공작이 승리로만 끝났을까? 그렇지 않다. 79년 신민당 전당대회는 박 정권의 공작이 먹혀들어가지 않았다.

1979년 5월 30일 신민당 전당대회에 이철승, 김영삼, 이기택, 신도환 등이 당권에 도전했다. 하지만 당권은 이철승과 김영삼의 2파전으로 압축돼 갔다. 박정희 정권은 김영삼의 당선을 막는데 주력했다. 1차 투표에서 과반수를 확보할 후보가 없다고 판단한 박 정권은 이기택과 신도환 등이 결선투표에서 이철승을 밀도록 공작했다.

특히 박 정권은 이기택을 이철승 지지로 틀기위해 처가 쪽에서 운영하는 ‘태광’ 장부를 압수하는 등 압력을 가했다. 1차투표 결과는 재석대의원 7백 51명 중 이철승 2백 92표, 김영삼 2백 67표, 이기택 92표, 신도환 87표.
 

당황한 박 정권, 총재직과 의원직 뺏고 탄압 가속화
김재규 총으로 유신종지부, 이면에는 ‘YS의 진정성’



하지만 2차투표에서 이기택은 자신의 최측근이었던 박관용마저 속이고 막판 김영삼을 지지했다. 박정희는 정치공작에도 불구하고 김영삼이 신민당 총재자리에 오르자 빌미를 만들어, 총재직은 물론 의원직마저 빼앗는다. 이는 부마항쟁을 불렀고 자신의 부하였던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탄에 맞아 박정희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이런 일련의 탄압 속에서도 김영삼은 옥살이를 하지 않았다. 때문에 그의 투쟁이 거짓이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심의석 전 한나라당 성북갑 위원장도 83년 당시 정채권 목사가 민주산악회에 들어오라고 권하자 “YS는 산으로 갈게 아니라 감옥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그의 투쟁의지를 의심했다.

그렇다면 YS가 다른 정치인들에 비해 탄압의 강도가 약했던(?) 까닭은 무엇일까. 이를 두고 해석은 다르지만 일단은 YS의 진정성에서 비롯됐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심의석 위원장은 이와 관련, “여든 야든 정치를 하는 사람들은 서로 앞면이 있기 마련이다. YS에 대한 평(平)이 좋았기 때문에 탄압을 하는 쪽도 강도가 약해 질 수밖에 없다. ‘죽이라’고 명해도 밑에서 ‘그럴 사람이 아니다. 제고해보라’고 하면 권력자도 다시 한 번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실제로 YS의 반대편에 섰던 인사들도, YS의 평가에 대해서는 좋다. 노무현 정부에서 국민관리체육공단 이사장을 지냈던 박재호 전 이사장도 YS에 대해 “솔직 담백한 분”이라고 평했다.

김대중 정권에서 청와대 비서실장과 당 대표를 역임했던 한광옥 전 대표는 ‘상도동-동교동 간의 화해에 과연 진정성이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 “내가 민추협 대변인을 지내 DJ와 YS, 두 분을 잘 안다. YS는 거짓으로 말하는 분이 아니다. DJ가 서거했을 때도 제일 먼저 조문을 온 분이 YS다”라고 설명했다.

박 정권 때 동력자원부 차관보를 지냈고, 이후 재선의 국회의원과 주택공사 사장을 역임했던 고(故)김동규 전 의원도 “김재규가 박정희를 쏜 이면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존재하겠지만, 박정희의 독재정치와 김영삼의 진정성을 놓고 고민하다 그런 선택을 하게 된 것 같다.
 
그 당시 상황은 내가 잘 안다. 김재규가 금령김씨 종친 회장을, 내가 부회장을 맡고 있었다. 박정희 죽음 며칠 전 나를 만나, ‘더 이상 나라가 이렇게 되는 것을 지켜 볼 수가 없다. 내가 희생해서라도 바로 세우겠다’고 말한 적 있다. 김 총재(YS)가 저렇게 되는 것도 안타깝고…”라고 말했다.

역대 대통령 선호도 조사를 하면 박정희 전 대통령은 부동의 1위를 지키고 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최하위를 면치 못하고 있다. 이런 조사가 과연 올바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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