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YS 마지막 인터뷰]김영삼, "3당합당은 군정종식 위한 차선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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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YS 마지막 인터뷰]김영삼, "3당합당은 군정종식 위한 차선책"
  • 정세운 기자 박근홍 기자
  • 승인 2015.11.28 0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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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정종식 된다면 누가 후보 되든 상관없어”
“1988년 야권통합 추진했지만 동교동 거절”
“내도 감방 갔다 왔다”, 1963년 형무소 수감
“김일성 사망, 남북 정상회담 무산…아쉬워”
“살아있는 전직 대통령, 나 하나만 남았다”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정세운 기자 박근홍 기자)

2015년 11월 22일 ‘새벽’ 0시 22분, 대한민국의 큰 별이 스러졌다. 일생을 반독재투쟁과 군정종식에 바치고 민주주의의 ‘새벽’을 연 거산(巨山) 김영삼.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며 ‘새벽’이 틀림없이 오리라 확신했던 민주화의 큰 지도자 김영삼. 이제는 희미하지만 광명한 빛을 발하며 모두가 평화롭게 잠든 ‘새벽’ 하늘을 지키는 ‘새벽별’로 영원히 기억되리라.

<시사오늘>은 고(故) 김영삼 전 대통령(YS)과 세 차례 인터뷰를 가졌다. 2009년에는 정식 인터뷰로, 2010년과 2011년에는 담소를 나누며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YS는 인터뷰를 통해 전직 대통령에 대한 평가, 1987년 대선 후보단일화, 그리고 1990년 3당합당에 대한 비화(秘話)를 소상히 밝혔다. 또한 ‘YS는 감방을 가지 않았다’는 헛소문을 불식시키기 위해 1963년 자신이 내란선동죄로 잡혀갔던 일도 강조했다. 이는 어느 언론에서도 볼 수 없는 YS의 생전 마지막 인터뷰다.

본지는 YS와 가진 세 차례 인터뷰를 모아 재구성해봤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안녕! 김영삼. 굿바이! YS.

▲ 2009년 10월 <시사오늘>과 인터뷰하는 YS(故 김영삼 전 대통령) ⓒ 시사오늘

YS는 한국 현대정치사 그 자체다. 그는 이승만부터 윤보선,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의 모든 역대 대통령들과 함께하며 정치권을 이끌었다. 생전 YS는 이들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을까.

이승만의 사사오입 개헌, YS의 자유당 탈당

YS는 이승만을 ‘건국의 주역’이라며 높이 추켜세웠다. 다만 3선개헌에 대해서는 아쉬움을 피력했다.

-이승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승만 대통령은 기억에 남는 일이 있습니다. 내가 만25세(만26세가 맞다. 편집자 주)에 국회의원에 당선됐는데 어느 날 이기붕이 오후 3~4시경에 청와대로 ‘이 박사’를 만나러 가자는 겁니다. 자유당 정권 때죠.

나는 미국식 민주주의와 정당정치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당시 야당으로 한민당(한국민주당)이 있었는데 마음이 가지 않아서 자유당을 택했어요. 그날 다른 세 사람과 같이 청와대에 들어갔습니다. 김철환이라는 경북 지역 의원과 유도 선수였던 김상도 의원은 이름이 기억나는데 다른 한 사람은 기억이 안 나네요. 그때 청와대는 일제강점기 총독 관저였습니다. 내가 (대통령이 되고) 뜯어버렸지. 이름이 뭐였더라, 경무대라고 했습니다.

넓지 않은 응접실 뒷문으로 이 박사가 들어왔습니다. 그 시절에는 이 대통령을 ‘이 박사’라 불렀어요. ‘3선개헌’소식이 신문에 보도되던 무렵입니다. 이 박사에게 했던 말을 전부 다 할 수는 없지만 ‘박사님, 개헌하시면 안 됩니다, 국부로 남으셔야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이 박사가 80대였는데 손을 떨더라고요. 그러더니 별다른 말없이 뒷문으로 나가버렸어요. 화가 난 것 같았습니다. 이 박사가 나가고 나서 이기붕이 화를 내더라고. ‘왜 쓸데없는 말을 해서 노인을 화나게 하느냐’고 나무랐어요.”

자유당이 3선개헌을 추진하자 YS는 대학 동문인 현석호, 한동석 의원 등과 개헌 반대 투쟁에 나섰다. 1954년 11월 27일 ‘초대 대통령 연임 제한 철폐’를 골자로 한 개헌안이 무기명 투표에 들어갔다. 개표 결과는 재적 203명 가운데 찬성 135표, 반대 60표로 부결이었다.

당시 자유당은 원내 개헌선을 확보하고 있었고, 무소속 의원 10여 명을 포섭해 통과를 낙관하고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1표 모자란 부결. 임흥순 의원 등 무소속 의원들은 찬성표를 던졌지만 YS를 비롯한 현석호, 민관식, 이태용,  황남팔, 김두관 등 12명이 반대표를 던졌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다음 날, 최순주 부의장은 얼토당토않은 계산을 적용해 전날 부결된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203의 3분의 2는 135.333…이므로 사사오입에 따라서 가결됐다는 논리였다. 이른바 ‘사사오입 개헌’이다. 이에 반발한 YS는 즉각 자유당을 떠났다.

“(이승만을 면담한 후에도) 자유당을 탈당하지 않았습니다. 3선개헌이 토요일에 부결 처리됐는데, 일요일이 지나고 월요일에 최순주 국회 부의장이 ‘사사오입’ 원칙을 내세워 개헌안을 다시 가결된 것으로 통과시켰어요. ‘이 당은 안 되겠다’ 결심했지. 동지들을 모아 10명이 함께 탈당했습니다. 이 박사가 너무 노인이었고 기억력이 약했던 것 같아요. 밑에 사람들이 보좌를 잘 못했고, 이기붕이는 건강이 안 좋은 사람이었는데도 대통령 욕심이 있었습니다.”

YS는 ‘다음 대통령이 누구지’라고 기자에게 물었다. ‘윤보선’이라고 답하자, “윤보선은 힘이 없었어요. 내각제에서는 총리가 실권을 갖고 있잖아요. 장면은 무능력자였습니다. 쿠데타를 당한다는 건 말이 안 됩니다. 평가할 가치가 없습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용서할 수 없는 사람 박정희, 반역자 전두환

당시 YS는 본지와의 인터뷰가 있기 전, <월간중앙>과 가진 인터뷰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은 멀쩡한 총재였던 나를 총재가 아니라고 해서 내쫓고, 나를 죽이려 백주 대낮에 염산으로 테러를 가하고 내 측근들을 연행해 얼마나 탄압하고 죽이지 못해 온갖 짓을 다하고 했다. 하지만 박 전 대통령이 죽기 전에 ‘당신이 나를 그렇게 미워했지만 너무 미안해하지 말라. 나는 이미 다 풀었다’고 그런 말을 해주지 못한 게 아쉽다”며 박정희를 용서한다는 식의 말을 했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었다.

-박정희에 대해서는 어떤 견해를 갖고 계십니까.

“쿠데타로 집권한 사람을 바로 볼 수는 없습니다. 누가 뭐래도 중정(중앙정보부)을 앞세워 바로 살자고 하는 사람들을 숨 못 쉬게 했어요. 이 사실을 국민들이 잘 모릅니다. 미화가 심해요. 공과를 따져야 합니다.”

-얼마 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박정희를 용서한다고 하셨는데요.

“그런 말 한 적 없어요. DJ(김대중 전 대통령)와 화해했다고 말했지요. 박정희는 나를 제명해서 죽은 겁니다. 내가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제명당하고 했던 말이 있지요.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고. 박정희는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전두환, 노태우에 대한 평가도 부탁드립니다.

“전두환은 반역자입니다. 선거를 치르지 않고 대통령에 올랐다는 건 용납할 수 없습니다. 노태우는 선거를 치렀다는 점에서는 인정해야 할 부분이 있긴 하지요. 하지만 부정 축재가 너무 심해서 내가 대통령이 되고 감옥에 넣었습니다. 그러고 싶어서 감옥에 넣은 게 아닙니다. 기업인들로부터 수천억 원의 부정한 재산을 모았고 무능과 부정의 극치입니다.”

‘특수 관계' DJ, 그리고 1987년 후보단일화

▲ 2009년 10월 <시사오늘>과 인터뷰하는 YS(故 김영삼 전 대통령) ⓒ 시사오늘

DJ 차례가 되자 YS는 그동안 언론에 공개되지 않았던 이야기를 들려줬다.

-DJ에 대해서도 한 말씀 해 주시죠.

“김대중은 대통령이 된 후 1년 6개월 동안 내 뒷조사를 했어요. 하지만 나온 게 없었지 않습니까. 청문회에 나오라고 하는데 나를 모욕 주려는 자리에 왜 나갑니까. 안 나갔지요. 김대중이 내 뒷조사를 했던 건 용서합니다. 내가 대통령이 되고 나서 김대중의 뒷조사를 했다면 아마 (비리가) 많이 나왔을 겁니다. 하지만 나는 안 했습니다. 김대중은 무서워서 영국으로 도망쳤지요. 그러고는 6개월 만에 돌아와서는 정계 은퇴를 번복한 것인데 그런 짓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지만 대의적으로는 김대중이 나를 많이 도와줬지요. 신민당 경선(1979년)에서 이철승을 꺾을 때 나를 지지해 줬습니다. 노태우가 내각제 하려고 했을 때도 단식 투쟁으로 내게 힘을 실어줬습니다. 김대중까지 그러니까 노태우가 놀라가지고 나를 청와대로 불러서 내각제 포기하겠다고 했었지요."

-두 분은 아직 화해하지 않은 겁니까.

“아, 화해는 분명히 한 겁니다.”

2009년 8월 10일 DJ의 건강에 적신호가 들어오자 평생 정치적 라이벌이자 동지였던 YS는 DJ가 입원한 세브란스 병원에 찾아가 “DJ와 나는 가장 오랜 경쟁관계이자 애증관계다.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특수 관계”라고 말했다. 또 당시 취재진들이 ‘화해한 것으로 봐도 되냐’고 묻자 “이제 그렇게 봐도 좋다. 그럴 때가 됐다”고 술회했다.

1987년 대선 후보단일화 실패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고는 YS와 DJ를 논할 수 없다. 당시 YS와 DJ는 야당인 통일민주당의 걸출한 대권 후보였다. 이들의 후보단일화만 이뤄졌다면 국민의 염원이었던 군정종식은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였다. 하지만 두 사람은 끝내 합의를 보지 못했고, 노태우는 어부지리로 청와대에 입성했다.

당시 통일민주당에서 YS와 DJ가 가진 지분을 따져 보면 DJ 측이 열세였다. 전국 92개 지구당 중 창당지구당이 56곳, 미창당지구당이 36곳이었는데, 미창당지구당을 제외하면 30 대 26으로 YS 측이 우세했다.

통일민주당이 대선 후보 경선을 치르기 위해서는 미창당지구당 36곳의 조직책을 임명해야 했다. 상도동 측 김동영 의원은 18곳씩 50 대 50으로 나눠 임명하자고 제안했고, DJ로부터 전권을 받고 나선 동교동 측 이용희 의원은 상도동계가 창당지구당을 많이 갖고 있으니 23곳을 동교동계에게 달라고 맞섰다.

양측의 대화는 평행선을 달렸다. 9월 8일부터 3일 간 광주, 목포, 하의도 등 호남을 순회하며 바람몰이에 나선 DJ는 “36개 미창당지구당을 서둘러 정비해서 경선을 치르자”고 YS를 압박했다. 이에 YS는 후보경선 문제를 마무리 짓기 위해 10월 22일 외교구락부에서 DJ와 만나 동교동 측 제시안을 전격 수용했다. 이를 두고 상도동계 내부에서는 “김영삼이 결국 후보를 양보했구나”하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DJ는 YS의 수용안을 바로 받아들이지 않고 26일까지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 그런데 통보된 DJ의 답은 뜬금없는 분당 선언이었다. DJ는 28일 ‘4자필승론’으로 무장한 채 신당 창당과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영남 출신 노태우, YS가 영남권 표를 나눠 갖고, JP(김종필 전 총리)가 충청권 표를 가져 가면, 자신이 호남권 몰표와 유권자 수가 많은 서울·경기권에서 상당 표를 얻어 승리를 거둘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이에 대해 YS는 자신의 자서전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3권 112페이지에서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이제 후보단일화를 위해서는 경선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첫째, 경선은 공평한 게임이었고, 김대중은 거부할 명분이 없었다. 둘째, 예측할 수 없는 경선을 통해 단일화가 된다면 어느 누구도 그 결과에 대해 시비를 걸 수 없을 것이다.”

DJ는 <김대중자서전> 530페이지에서 “김영삼은 내가 요구한 미창당지구당 조직책 임명권을 수용하겠다고 발표했지만 이는 선거일정상 너무 늦은 시점이었다. 사실상 후보단일화 협상은 결렬됐다”고 밝혔다.

-1987년 대선에서 DJ에게 후보를 양보할 생각은 없었습니까.

“일방적으로 후보를 양보할 수는 없지요. 경선을 치르든, 합의를 하든 무언가 방법을 통해 후보를 정하는 게 정당정치고 의회민주주의 아니겠습니까."

-10월 22일 DJ와 만난 자리에서 동교동계가 제시한 안을 수용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때문에 당내에서는 YS가 사실상 후보를 양보한 게 아니냐는 얘기가 나돌았는데요.

“군정종식이 된다면 누가 후보로 나서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닙니다. 나는 신민당 경선(1970년)에서도 패배를 깨끗이 인정했었어요. 김대중이 후보로 선출된다면 그의 당선을 위해 지원유세 못 할 게 뭐 있습니까.”

-DJ는 자서전을 통해 ‘너무 늦은 시점에 우리(동교동계)의 안을 수용해 후보단일화가 될 수 없었다’고 회고했습니다.

“아쉬운 대목입니다. 아무튼 후보단일화를 못한 책임에 통감합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어떻게 보십니까. 직접 발탁하셨는데요.

“노무현은 내가 픽업했죠. 아직 평가할 때가 아니라고 봅니다.”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은 김광일 전 청와대 비서실장의 추천을 받아 지난 1988년 YS가 이끄는 통일민주당 간판으로 첫 금배지를 달았다. 이후 1990년 민정-민주-공화당의 3당 합당이 이뤄지자 노무현은 “반역사적 3당통합에 반대한다”며 당 잔류를 선언했고, 이로 인해 YS와 멀어졌다.

1995년 노무현은 민주당 간판을 들고 YS의 아성이라 할 수 있는 부산에서 시장 선거에 출마했다. 선거 초반까지는 집권당이던 민자당도 긴장할 정도로 노무현은 선전했다. 하지만 선거 중반 DJ가 ‘지역등권론’을 들고 나오면서 노무현의 ‘바람’은 꺼졌다. 결국 낙선한 노무현은 “지역주의를 용서할 수 없다”며 DJ를 맹비난했다. 노무현은 그 이후에도 DJ가 민주당을 쪼개 ‘국민회의’를 만들자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려는 반역사적 행위”라며 이를 비난하며 또다시 당 잔류를 선언했다.

그러나 국민회의 후보인 DJ와 한나라당 후보인 이회창이 1997년 대선에서 한판 승부를 벌이자, 노무현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던 DJ를 지지했다. 이후 노무현은 ‘국민의정부’에서 해양수산부 장관을 거쳐 2003년 제16대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노무현은 자신의 회고록 <성공과 좌절>에서 DJ에 대해 “국보급 대접을 받을 만한 훌륭한 지도자”라고 치켜세웠고, YS에 대해서는 “1987년 이전까지의 정치적 업적은 DJ에 못지않지만 3당합당으로 모든 것을 망쳐 놨다”고 평가한 바 있다.

3당합당, 구국의 결단인가 야합인가

▲ 2009년 10월 <시사오늘>과 인터뷰하는 YS(故 김영삼 전 대통령) ⓒ 시사오늘

YS와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3당합당’ 이야기로 흘러갔다. 3당합당에 대한 역사의 평가는 엇갈린다. ‘구국의 결단’이란 호평과 ‘야합’이란 비난이 공존한다. 분명한 건 YS에게 3당합당은 거의 ‘도박’에 가까운 결단이었다는 것이다.

-3당합당을 통해 대통령 자리에 올랐습니다. 위험한 도박에 가까웠습니다.

“힘들었습니다. 25%(민주계)대 75%(민정계)의 싸움으로 시작했으니 정치 생명이 위험했어요. (합당 당시) 정치 상황이 경상도와 전라도가 완전히 쪼개져 있었고 경상도는 경남과 경북이 갈라져 있어서 (합당을 안 하고는) 군사정권을 못 끝내겠다는 판단에, 이를 업고 정권교체를 하려 했던 겁니다. 노태우는 합당 후 온갖 술수를 써서 내가 대통령이 못 되게 하려 했지만 나는 대도무문(大道無門)의 정신으로 정정당당히 싸웠습니다.”

-‘야합’이라는 비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3당합당은 군정을 종식시키기 위한 차선이었습니다. 호랑이를 잡기 위해 호랑이굴로 들어간다는 심정이었어요.”

YS는 1990년 3당합당을 통해 민자당 대선 후보로 나서 14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는 대통령 취임 직후부터 하나회를 숙청했고, '역사바로세우기'의 일환으로 1995년 전두환-노태우 등 전직 대통령과 신군부 인사들을 법정에 세웠다. 그야말로 ‘호랑이굴에 들어가 호랑이를 잡는 쾌거’를 이룬 것이다.

-3당합당 외에 다른 방법은 없었습니까. 예를 들면 통일민주당 단독으로 정권을 잡을 수도 있지 않았습니까.

“13대 대선을 보면 지역이 갈기갈기 찢겨져 있었어요. 이듬해 총선에서도 같은 결과로 나왔습니다. 단독으로 정권을 잡는 건 불가능했지요.”

-DJ가 이끄는 평민당과의 합당은 고려하지 않으셨습니까.

“야권통합을 왜 추진 안 했겠습니까. 야권통합을 전제로 소선거구제를 해야 한다고 (동교동계가) 해서 그것도 수용했지만 무산됐습니다.”

1987년 13대 대선에서 민주세력 간의 분열로 정권을 잡지 못했다는 국민의 비판에 직면한 YS는 총재직을 버리고, DJ가 이끄는 평민당과의 합당을 추진했다. 그리고 민주당과 평민당 간 야권통합협상기구를 발족했다.

평민당은 양당이 합당하기 위한 조건으로 소선거구제를 요구했다. 당시는 한 선거구에서 2명을 뽑는 중선거구제였다. 전국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민정당과 민주당 입장에서는 중선거구제로 13대 총선을 치르면 1당, 2당은 떼놓은 당상이었다. 하지만 군정종식을 위해서는 야권통합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김영삼은 평민당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YS는 1988년 2월 23일 총선을 2개월여 앞두고 마포가든 호텔에서 DJ를 만났다. 이 자리에서 YS는 야권통합의 전제조건으로 내걸었던 평민당의 ‘소선거구제’ 안을 수용했다. 이로써 야권통합은 급물살을 탔다.

YS 복심 김덕룡은 속리산까지 쫓아가서 “소선거구제를 받으면 우리가 제2야당으로 추락할 수 있다”며 재고해줄 것을 YS에게 요청했다. 당시 중앙조사연구소를 꾸리고 있었던 YS 차남 김현철은 ‘소선거구제로 총선을 치를 경우 통일민주당이 평민당에 뒤처져 원내 3당으로 추락할 것’이라는 내용이 담긴 데이터를 전달했다.

하지만 YS는 “군정을 종식하려면 야권통합이 필요하고, 야권통합을 하려면 소선거구제를 받아야 한다”며 일축했다.

급물살을 탄 야권통합은 통일민주당, 평민당 그리고 재야세력으로 급조된 한겨레민주당을 포함해 3자통합으로 가닥이 잡혔다. 통일민주당에서는 최형우와 김수한이, 평민당 허경만과 김영배, 한겨레민주당 제정구 등이 통합협상대표로 나섰다.

이들은 대표최고위원제로 지도부를 꾸리기로 하고, 총선 공천을 주관하는 조직위원장에는 한겨레민주당 장을병을 선임키로 합의했다. 그리고 3월 19일 합의안에 최종 서명하기 위해 서울 마포구 서교호텔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러나 최종안을 들고 DJ에게 결재를 받으러 간 평민당 측 협상 대표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되레 합당서명식은 폭력 사태로 번졌다. 괴한들이 습격한 것이다. 최형우는 이 과정에서 괴한들에 의해 손바닥이 담뱃불로 지져지는 수모를 당했다.

최형우는 1987년 대선에서 YS와 DJ가 분열된 이후에도 줄곧 양 진영의 화합을 위해 애썼고, 통일민주당과 평화민주당이 합당하는 것에 대한 합의까지 이뤄냈다. 하지만 정작 서명을 하는 날 동교동계가 아닌 괴한들이 나타나 결국 결렬된 것이다.

이에 대해 최형우는 2013년 5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합당 서명하려고 할 때, 서교호텔에 깡패들이 와서 결렬됐다”고 밝힌 바 있다.

1963년 서대문형무소, 1996년 ‘깜짝 놀랄 만한 후보’

YS가 DJ를 ‘특수 관계’라 지칭했듯, 상도동계와 동교동계 사이에는 묘한 기류가 흐른다. 이들은 서로를 정치적 동반자라고 추켜세우면서도, YS와 DJ를 논할 때는 서로 헐뜯기 일쑤다. 동교동계에서는 주로 3당합당을 들어 YS를 비판한다. 그리고 ‘민주화투쟁을 했지만 형무소에 간 적이 없는 사람’, ‘이인제로 DJ를 견제한 속 좁은 대통령’이라고 지적한다.

YS는 <시사오늘>과의 인터뷰에서 이는 모두 사실과 다르다고 말했다. 그는 1963년 ‘백조그릴’ 사건으로 형무소에 수감됐었고, ‘깜짝 놀랄 만한 후보’는 ‘이인제’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 아니었다고 밝혔다.

▲ YS(故 김영삼 전 대통령) 서대문형무소 수감 기록 ⓒ 시사오늘

-세간에는 ‘민주화투쟁을 했지만 형무소에 간 적이 없는 사람’이라는 말이 돕니다.

“사실과 다릅니다. 자서전에도 썼는걸요. 1963년에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었습니다.”

YS 구속을 일명 ‘백조그릴’ 사건으로 명명된다. 1960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1962년 3월 ‘정치활동정화법’을 만들어 4374명의 정치인들에게 재갈을 물렸다. YS를 비롯한 정치인들이 재갈에서 벗어난 때는 1963년 2월 1일. 이들은 민정당에 참여해 군부 정권에 대한 정치 공세를 본격적으로 펼치기 시작했다.

이에 당황한 쿠데타 세력은 1963년 2월 18일 민정 불참을 선언했다가, 3월 16일 군정 4년 연장을 공표하기에 이른다. YS와 야당 인사들은 군정 연장 반대 투쟁을 벌이기로 결의, 그해 3월 22일 무교동 백조그릴에서 위장 결혼식을 열고 김준연·김도연·박순천·윤보선·유진산·정해영 등이 모여 정치 집회를 가졌다. 이들은 ‘민주구국선언’을 낭독하고 가두 시위에 나섰다. 백조그릴을 시작으로 을지로, 태평로, 광화문을 거치자 군중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그러자 경찰들이 시위자들을 연행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YS 역시 포고령 위반 혐의로 수도방위사령부 보통군법회의 관활관으로부터 구속영장이 나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YS의 수감 기록은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수감 중에 기억에 남는 일은 없으신지요.

“내가 한 10여 명이랑 같이 수감됐었는데, 그중에 김상흠이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평소에 ‘난 독립운동을 하다가 함흥감옥에도 갇힌 적이 있다’면서 자랑을 했던 분이셨는데, 알고 보니 그분 참 겁쟁이였어. 정말 사형 당할지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면회 오는 사람만 있으면 붙잡고서 ‘우리 어떻게 되는 거냐’고 물어봤었어요.”

YS는 남산 근처에 위치한 군사재판정에 계속 불려 다녀야 했다. 하지만 당시 미국 케네디 대통령이 ‘구속정치인 석방’을 군부 정권에 요구했고, 미국의 눈치를 봤던 쿠데타 세력은 YS를 비롯한 구속 정치인들을 서둘러 석방했다. YS는 22일 만에 서대문형무소에서 풀려났다.

-1995년 미국 <타임>과의 인터뷰에서 언급한 ‘깜짝 놀랄 만한 후보’가 이인제가 맞습니까.

“(빙그레 웃으며) 그건 사실관계가 맞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누구를 염두에 두고 그런 발언을 하셨는지요.

“딱히 누구를 지칭한 게 아니었습니다. 단지 세대교체가 돼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이었지요.”

1995년 6월 YS는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과의 인터뷰에서 “차기 대통령은 반드시 세대교체된 깜짝 놀랄 만한 젊은 인물일 것”이라고 강변한 바 있다. 이를 두고 언론에서는 ‘YS가 이인제를 차기 대권주자로 점찍었다’고 추측하고 대서특필했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이는 정설처럼 굳어졌고, 언론사의 데스크칼럼에도 자주 인용된다.

하지만 당시 상황이나 YS의 증언을 종합해 보면 ‘YS가 이인제를 점찍었다’는 얘기는 어불성설로 보인다. 1995년은 YS가 집권한 지 3년째 되는 해다. 1992년 대선에서 패한 DJ는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유학을 떠났다. 정국은 3당합당으로 탄생한 거대 여당 민자당과 이기택이 이끄는 통합 야당 민주당의 양당체제였다. YS 정권 출범 이후, 집권 세력이 된 민주계는 부패 세력 척결을 내걸고 민자당에서 JP(김종필 전 총리) 등을 내몰았다.

그러자 JP는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을 만들어 지방선거에 뛰어들었다. DJ는 지방선거를 앞두고 귀국, 민주당 조순 서울시장 후보를 지원유세하며 사실상 정계에 복귀했다. JP는 ‘핫바지론’을 내세워 충청권을 녹색(자민련)으로 물들였고, DJ 역시 지역등권론을 앞세워 돌풍을 일으켰다. 지역주의를 앞세워 호남·충청 표심을 잡은 것이다. 이에 민자당은 이춘구를 충청에, 김덕룡을 호남에 내려 보내 ‘배수의 진’을 쳤다. 하지만 정치 9단 DJ와 JP의 행보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춘구·김덕룡이 효과적으로 대처를 못 하자 YS가 직접 나섰다. ‘깜짝 놀랄 만한 후보’ 발언은 세대교체론을 들어 노(老)정치인인 DJ·JP를 견제한 것이었다. YS가 주창한 세대교체론은 1997년 대선에서 DJ가 당선되면서 공허한 얘기가 돼 버렸다. 물론 5년 뒤에 이인제보다 더 깜짝 놀랄 만한 사람이 대통령이 되긴 했다. YS가 ‘픽업’한 노무현이다.

남북 정상회담에 얽힌 비화

YS는 <시사오늘>과의 인터뷰에서 북한의 김일성과 정상회담을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을 나타냈다. 그는 김일성과의 남북 정상회담이 성사됐다면 남북 관계가 상당히 진전됐을 거라고 말했다. 그리고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은 뒷이야기도 밝혔다.

-현재(2009년 10월)의 남북 관계는 어떻게 바라보고 계신지요.

“공산주의자는 어렵습니다. 아무리 베풀어도 욕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재임 중에 쌀 15만 톤을 달라고 해서 5만 톤을 먼저 보내고 나머지는 순차적으로 보낼 생각이었습니다. 쌀을 실은 배가 원산으로 가는데 (북한 지역) 사진을 찍었다고 선장을 감옥에 보냈어요. 선장이 배에서 사진 좀 찍었다고 무슨 문제가 됩니까. 그래서 ‘쌀을 안 주겠다’ 했지요. (공산주의자들은) 매달리다가도 금방 변합니다.”

-남북 정상회담 2주 전에 갑작스레 김일성이 사망한 일은 아쉬움이 있습니다. 어떻게 회고하시는지요.

“2주 후 평양행이 예정돼 있었는데 김일성이 그 나이에 죽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남북 정상회담이 성사됐다면 남북관계가 상당히 진전됐을 겁니다. 당시 미국이 북한을 치려고 하던 상황이어서 북한이 지레 겁을 먹고 카터를 초청했어요. 카터가 북한에 가서 무엇을 하려는 건지 나도 걱정이 돼 클린턴에게 전화를 해서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클린턴이 미국에서는 전직 대통령 하는 일에 현직이 간섭하지 않는 것이 전통이라며 나더러 이해하라고 하더라고요.

그런 후에 카터한테서 직접 연락이 왔습니다. 평양에서 이틀을 자는데 서울에서 먼저 하루 자고 싶다며 청와대에서 점심을 같이 먹자고 부부가 같이 오겠다는 겁니다. 청와대에서 카터가 북한에 가면 김일성을 두 번 만날 건데 중요한 이야기가 있으니 미국 가기 전에 서울에서 다시 보자고 했어요.

카터가 북한에 다녀와서 김일성이 북한이 처한 위기에 대해 ‘이 사태를 어쩌나’ 걱정하면서 ‘김영삼만이 해결 가능하다, 김영삼을 만나게 해 달라’고 했다는 말을 전했습니다. 세계 신문에 톱으로 보도되면서 정상회담 날짜가 급속도로 잡혔어요. 정상회담이 이뤄졌다면 정직하게 회담에 임했을 겁니다. 김일성이 먼저 제의했기 때문에 뭘 갖다 주는 것도 없었습니다.”

“살아있는 전직 대통령은 이제 나 하나만 남았다”

-젊은 정치인들에게 정치 원로로서 해주고 싶은 말이 있으면 들려주십시오.

“정치는 성실하고 최선을 다해야 하고 정직하고 의리를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신진 정치인 중에 눈여겨보고 있거나 잘하고 있다 싶은 사람이 있으면 소개해 주시죠.

“그 대답은 안 하겠습니다.”

인터뷰를 할 무렵 정치권에는 김무성, 안경률, 이성헌, 정병국 등 YS가 영입한 인사들이 활발히 활동하고 있었다. 기자는 YS가 이들 중 한 명을 지목할 것이라 예측했지만, 그는 입을 굳게 닫았다.

YS는 인터뷰를 마치면서 노무현, 김대중 두 전직 대통령의 죽음에 대해 “살아있는 전직 대통령은 이제 나 하나만 남았다”고 말했다. 전두환과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이 생존해 있지만, 진정한 대통령은 YS 자신밖에 없다는 뜻으로 들렸다.

▲ 2015년 11월 26일 YS(故 김영삼 전 대통령) 국가장 영결식 ⓒ 시사오늘

YS의 국가장 영결식이 열렸던 2015년 11월 26일 오후 2시 서울 여의도 국회에는 새하얀 눈발이 흩날렸다. 하늘도 고인의 죽음을 섭섭해한 걸까, 아니면 고인이 보내는 마지막 선물일까. 영결식에는 장례위원 2000여 명, 해외 조문 사절 80여 명, 각계 인사 7900여 명 등 1만 명 이상이 참석해 고인을 애도했다. 고인의 생전 모습을 담은 영상과 육성이 흘러나오자 부인 손명순 여사, 장남 김은철, 차남 김현철 등 유족을 비롯한 참석자들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쳤다.

그가 탄 운구차가 국회를 떠날 즈음 눈발은 멎어들었다. YS는 46년 간 거주했던 민주화 성지, 상도동 사저에 잠시 들렀다가 국립 서울현충원에 몸을 뉘었다. 하늘에는 다시 눈발이 간간이 휘날렸고, 현충원에는 어둠이 짙게 깔렸다. 하늘도, 사람도 YS를 보내 슬픈 하루였다. 부디 영면하소서.

안녕! 김영삼. 굿바이! YS.

담당업무 : 건설·부동산을 중심으로 산업계 전반을 담당합니다
좌우명 : 隨緣無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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