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주년 3·1절①]저항의 현장 '군산근대역사박물관'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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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주년 3·1절①]저항의 현장 '군산근대역사박물관' 가다
  • 군산=김인수 기자
  • 승인 2016.02.29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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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호남 최초 3·1만세운동 일어난 곳-전국 최대 농민항쟁 전개한 '저항의 도시'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군산 김인수 기자)

▲ 군산근대역사박물관 입구. ⓒ시사오늘

일제강점기에 군산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곡식 수탈의 거점’이다. 조선시대 군산은 전국최고의 곡창지대인 세곡이 모이는 군산창과 이를 보호하기 위한 군산진이 설치돼 경제, 군사적 요충지로 중시됐다.

1899년 5월1일 군산항은 개항 이후 일제의 필요에 의해 종속돼 왜곡된 성장을 겪은 역사의 희생량 중 하나이다. 군산은 호남 최초의 3·1만세운동이 일어난 도시였고, 일제강점기 수많은 노동자와 농민항쟁의 불길이 타올랐던 저항의 도시였다. 전국적으로 1만4264명의 국가유공자 중 군산은 총 73명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해 전북지역에서 임실(126명) 다음으로 많은 유공자를 배출한 애국충절의 고장이다.

군산의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고, 군산근대사의 역사를 한 곳에 모아둔 ‘군산근대역사박물관’에 이같은 내용이 집결돼 있다. <시사오늘>은 제97주년을 맞아 저항의 현장인 군산근대역사박물관을 27일 오전에 찾았다.

생생한 산 교육의 현장을 보여주다

군산근대역사박물관은 군산시 해망로 240(장미동)에 위치해 있으며, 지하1층 지상4층 규모로 2011년 9월30일에 개관했다. 건물은 △1층에 해양물류역사관, 어린이 박물관 △2층은 특별전시관, 근대규장각실 △3층은 근대생활관, 근대기획실 등으로 구성돼 있다.

특히 학생들의 관심을 높이기 위한 이벤트, 군산근대항구거리를 투어하고 스탬프를 받는 재미도 쏠쏠하다. 군산근대역사박물관을 시작으로 (구)군산세관본관, (구)일본18은행군산지점, (구)조선은행군산지점, 진포해양공원 등 8곳을 이동하며 스탬프를 날인하고 미션을 수행하면 소정의 기념품도 받을 수 있다.

박물관 측은 “‘역사는 미래가 된다’는 모토로 과거무역항으로 해상물류유통의 중심지였던 옛 군산의 모습과 전국 최대의 근대문화자원을 전시해 서해물류유통의 천년, 세계로 뻗어가는 ‘국제무역항 군산’의 모습을 보여주는 박물관”이라고 소개했다.

제97주년 3.1절을 사흘 앞둔 주말(2월27일)에 군산근대역사박물관을 찾았다. 기자가 도착한 시간은 오전 10시경. 토요일 오전임에도 불구하고 박물관 앞에는 가족단위, 친구, 연인 그리고 학생들이 줄을 이었다.

초등학생 아이와 함께 박물관을 찾았다는 차영희 씨는 “3.1절을 앞두고 주말을 맞아 아이들에게 우리 고장의 산 역사를 보여주기 위해 왔다”면서 “군산근대역사박물관은 아이들에게 우리 고장 선조들이 군산을 지키기 위해 어떠한 노력을 했는지 보여주는 생생한 현장이다”고 말했다.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끊고 박물관 안으로 향했다. 1층 해양물류관은 국제무역항으로써의 군산의 역사와 문화를 보여주는 유물들로 아이들이 호기심으로 발휘하기에 충분한 공간으로 구성돼 있다. 어린이체험관 또한 상상력을 발휘하기에 충분한 바다여행 체험프로그램으로 구성돼 아이들이 박물관에 흥미를 유발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 최신형 외식도 화포로 쌀 수탈을 방어했다. ⓒ시사오늘

쌀 수탈 거점지역, 최신형 ‘오식도 화포’로 저항하다

특히 눈길이 끄는 전시물 중에 ‘오식도 화포는 왜 군산에서 발견되었나’라는 내용설명과 함께 전시된 화포다. 설명에 따르면 외세의 침입이 심해지던 조선 말 헌종 13년(1874) 고군산군도에도 이른바 이양선이 출몰해 조선정부를 신장시킨다. 당시 군산은 전라북도의 세금을 보관, 운반하는 조운창이 있는 주요 거점지역으로 오식도는 군산항의 입구에 자리해 세금을 운송하는 선박이 쉬었다가는 중간 기착지였다.

이러한 이유로 고종 8년(1871) 정부는 전라도 서해안의 중요읍진에 포군을 설치했고, 이 때 군산지역에도 포군이 배치됐는데 오식도 화포는 당시 군산에 배치된 포군의 화포로 추정된다.

화포는 고종 때 제작한 것으로 밝혀졌다. 군산지역이 우리나라 최초로 화포를 이용한 전투였던 진포대첩의 현장이지만 화포와 같은 유물이 출토된 적은 처음이다.

군산에 오식도 화포가 있었다는 것은 특히 일제강점기 쌀 수탈의 거점지역 역할을 한 군산으로서는 이 땅을 외적에게 무기력하게 넘겨준 것이 아니라 당시로서는 최신형 대포를 배치해 방어했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 전국 최대 규모의 옥구농민항쟁이 기록된 문서. ⓒ시사오늘

전국 최대 농민항쟁 ‘옥구농민항쟁’ 발발

2층에 올라가면 일제강점기 시절의 생활상을 한눈에 보면서 실제로 체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꾸며져 있다. 특히 전국 최대의 농민항쟁이었던 옥구농민항쟁의 과정을 이해하고 처절했던 당시 농민들의 삶을 확인할 수 있다.

옥구농민항쟁은 1927년 11월 옥구 서수면의 이엽사 농장에서 일어난 군산 농민들이 가혹한 일본인 지주의 수탈에 맞선 대표적인 소작농들의 저항이다. 옥구농민항쟁은 이엽사 농장이 수확량의 75%를 소작료로 요구한 것에 소작농들이 서수농민조합의 간부를 중심으로 이엽사 측에 소작료 인상에 항의하면서 시작됐다.

일본인 관리인이 소작료 인하를 거부하자, 농민들도 소작료 납부를 거부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서수 주재소의 일본경찰은 농민조합장 정태성을 검거했고, 지도자의 검거에 분노한 소작농 500여명은 임피와 서수주재소를 습격해 검거된 조합장을 구출했다

소작농들이 구한 농민 조합장 간부들은 군산경찰서의 일본 경찰에 의해 다시 검거됐고, 모두 재판에 회부됐다. 옥구농민항쟁은 소수의 지도자에 의해서가 아니라 소작농이 자발적으로 일본인 경찰에게 직접 맞서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데 의미가 있다.

또한 박물관에는 기증자 전시실을 별도로 운영하고 있는데 현재 역사유물이 457점을 군산시민들로부터 기증받아 전시 중이다.

 

▲ 근대생활전시관에는 당시의 생활상을 체험해 볼 수 있도록 구성돼 있다. ⓒ시사오늘

군산시민 생활을 체험하다

3층에는 일제강점기 군산시민들의 저항의 역사와 당시 군산 시민들의 생활상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공간으로 구성돼 있다.

먼저 당시 군산시민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근대생활전시관에는 인력거가 놓여져 있는데, 이곳은 관람객이 직접 체험 수 있도록 당시 의복인 흰저고리와 검정치마가 구비돼 있어 이를 입고 인력거에 낮아 사진을 찍을 수도 있다.

미곡수탈을 관리했던 ‘군산미곡취인소’, 검정고무신을 신어볼 수 있는 ‘경성고무 형제고무신방’, 당시 술을 만들었던 주조소를 재현한 ‘조선주조주식회사’도 있다. 조선주조주식회사에서는 술을 찌고 난 지게미 냄새를 직접 맞아 볼 수 있는 술지게미 향기체험이 특히 인기가 많다.

우리 곡물 지키는 항쟁의 불길 타올랐던 저항의 도시

수탈과 저항의 공간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가슴이 찡해짐을 느낀다. 당시 군산시민들이 우리의 곡물을 지키려는 눈물겨운 현장들이 파노라마처럼 그려져 있다.

군산은 1899년 5월1일 개항 이후 일제침략과 수탈의 거점 도시였다. 1934년 한 해에만 200만석의 쌀이 일본으로 실려 나가는 수탈의 항구였다. 군산 시민들은 호남 최초의 3.1만세 운동으로 저항하는 등 일제의 만행에 굴하지 않고 수많은 노동자와 농민항쟁의 불길이 타올랐던 저항의 도시였다.

개항 후 군산을 몰려오는 일본을 비롯한 열강의 침탈에 대응하기 위해 개항장의 조선 상인들은 옥구군산항만단을 결성했다. 이 단체를 매개로 해 계몽단체인 대한협회의 군사지부가 설립돼 돼 등 계몽운동이 활발히 전개됐다. 객주들이 모여 만든 군산항객주상회사는 국채보상운동을 함께하며 대한제국의 제정독립을 위해 노력했다.

군산의 계몽운동은 여러 교육기관의 설립을 이끌어 냈는데, 옥구군산항만단의 후원을 받은 금호학교가 대표적이다. 1909년12월, 금호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이 일진회의 한일합방 청원서에 반대하는 성명을 낸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금호학교는 일제의 식민정책에 반대하는 대표적인 민족교육기관으로 성장했다.

금호학교가 배출한 인물로는 인촌 김성수와 고하 송진우, 일제강점기의 대표적인 사회운동인 김철수 등이 있다

호남 최초의 3·1만세운동 전개

군산에서의 3·1운동은 당시 궁멀(구암동)에 있던 영명학교의 교사와 학생들로부터 시작됐다. 영명학교 졸업생으로 세브란스 의학전문 학생이었던 김병수가 2월28일 독립선언서 200장을 몰래 영명학교 교사인 박연세 등에게 전달했고, 이를 바탕으로 3500장을 인쇄해 3월6일 성애 장터에서 만세를 부르기로 계획했다. 그러나 이 계획을 일본 경찰이 알아차리자 하루 앞당긴 3월5일 군산경찰서 앞에서 만세를 부르기 시작했다.

3월5일에 시작된 만세운동은 5월까지 총 28회 진행됐으며, 참가인원은 5만1500명에 이르렀다. 이는 군산의 조선인 1명이 최소 4번의 만세 시위에 참가한 것과 같은 수치다. 당시 사망 53명, 부상 72명, 투옥 195명의 희생이 나오는 등 전북지역에서 가장 많은 만세 시위와 희생을 치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지 올해로 97주년을 맞았다. 억압과 수탈에 맨몸으로 저항했던 일제강점기는 우리나라의 뼈아픈 역사다. 우리는 과거의 잘못된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역사를 배운다. 신채호 선생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했다.

3·1절인 3월1일은 공휴일이다. 가족 또는 친구, 연인들과 함께 수탈과 저항의 현장인 군산근대역사박물관을 찾아보는 것도 역사공부의 일환이 될 수 있다.

 

 

담당업무 : 산업2부를 맡고 있습니다.
좌우명 : 借刀殺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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